김광우의 <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자크 루이 다비드가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릴 때만 해도
 

다비드는 37살 때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렸는데, 신고전주의 회화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힌다.
아마 1640년 피에르 코르네유가 쓴 <호라티우스 가족>을 읽었거나 이 가족에 관한 연극을 보고 아이디어를 구한 것 같은데, 이 작품은 당시 발레로도 공연되는 등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호라티우스 삼형제를 삼각구도로 묘사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영웅들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했다.
삼형제는 말없이 결연한 자세를 취하고 여인들은 슬퍼하면서도 소리내어 울지 않는데, 이는 결의에 찬 감정을 나타낸 것으로 빙켈만은 이런 감정의 억제를 예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성격으로 꼽았다.

맹세는 방에서 이루어졌지만 다비드는 텅빈 방에 불필요한 가구들을 두지 않음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이 딴 곳을 향하지 못하게 했다.
드로잉에는 있었던 계단이나 불필요한 인물들을 제거함으로써 구상을 더욱 간결하게 했다.

그는 작은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한 장면처럼 넓은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형상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릴리프 조각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공간구성 방식을 터득하였다.


다비드가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그릴 때만 해도 프랑스 대혁명(1789~93)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지만, 1790년대 초에는 이 작품이 새로 집권한 프랑스 공화당에 충성하는 제스처로 해석되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비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혁명이 일어난 이후 정치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정치 선전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비드는 1780년대에 이미 영웅주의와 조국에 충성을 표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1783년에 그린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도 그런 내용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헥토르(그리스의 장군 아킬레우스에 의해 죽은 트로이의 왕자)의 아내 안드로마케가 비탄에 젖어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위대한 영웅 헥토르의 고결한 시신이 침상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구성했다.
침상 아래에 검과 투구를 그려넣어 관람자로 하여금 전쟁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는 푸생과 개빈 해밀턴이 그린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들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한 장면을 그린 이 작품으로 다비드는 더욱 더 유명해졌고 왕립미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다비드는 정치와 인연을 맺으면서 부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며 프랑스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주는 권력도 탐하게 되었다.
역사화를 그려서 명성을 얻은 후 그리스 역사에서 좀더 엄격한 주제를 선택하여 그렸는데 그것이 <소크라테의 죽음>이다.
마치 푸생이 그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이 작품에는 놀랍게도 빛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그의 기교가 두드러진다.
이런 기교는 카라바조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성공하자 왕은 두 번째 작품을 의뢰했으며 그는 자신이 선택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릭토르들>을 그렸다.
최초의 집정관인 브루투스는 자신의 두 아들이 로마제국에 반하는 음모를 꾸민 사실을 알고 두 아들을 사형시킨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릭토르(집정관을 따라다니며 죄인을 잡던 관리)들이 집정관으로 하여금 장사지낼 수 있도록 시신들을 가져왔다.
브루투스는 아버지로서의 역할 이전에 집정관으로서 공화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우선적인 가치라는 교훈을 주는 이 작품을 1790년대 햑명적 이상주의자들이 환호하며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극장을 자신들의 회의장으로 사용하면서 단두대로 목을 치는 사형제도를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반혁명적인 인사들을 처형했으며 루이 16세와 왕후도 처형했다.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 공화국은 대의회장의 연단에 혁명의 과정에서 죽어간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다비드의 그림 두 점을 걸어놓았다.

두 사람 모두 1793년에 반대파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다.
다비드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루이 16세를 처형하던 날 밤 대의회 의원이었던 미셀 르 펠레티에가 왕의 호위대에 속한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로부터 6개월 후에는 과격한 사상을 가진 장-폴 마라도 광신적인 반혁명파 여인 샬로트 코르데이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마라는 목욕하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마라가 이런 모습으로 살해된 상황은 품위가 있거나 웅장한 그림이 되기 어렵지만 다비드는 실제 현장을 세밀히 살펴본 후 순교자와도 같은 죽음을 맞이한 영웅의 모습으로 마라를 묘사해냈다.
다비는 <마라의 죽음>에서 영웅주의와 미덕의 이상을 표현했다.
다비드는 마라를 알고 있었고 그를 좋아했다.
그는 마라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사상가들에 견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린 소크라테스와도 비교할 만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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