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에서 발췌
말 탄 남자
1799년 11월 14일 서른 살의 나폴레옹은 성공적인 쿠데타로 뤽상부르 궁에서 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제1통령의 임기는 10년이었고, 제2통령, 제3통령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의 자문에 불과했고 봉급도 제1통령의 3분의 1에 불과한 15만 프랑이었다.
프랑스는 새로 들어선 통령정부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으며 5년 전부터 빈번하게 발생한 쿠데타와 정치적 혼란이 다소 안정되었다.
하지만 재정부족을 비롯한 프랑스의 갖가지 어려움은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프랑스는 정치적 파열, 경제적 탈진, 사회적 분열, 정신적 피폐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1799년 겨울 군대를 개편하고 이탈리아 원정길에 오를 준비를 했다.
이탈리아 피에몬테에서 잔여 병력을 이끌고 있는 프랑스의 마세나 장군이 두 배나 되는 병력 10만을 거느린 71살의 늙은 오스트리아 장군 멜라스에게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지원을 해야 했다.
그는 운송용 노새에 대포를 싣고 1800년 5월 14일 생-베르나르 샛길을 따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이 2차 이탈리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자크-루이 다비드는 그의 초상을 기념비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싶어 포즈를 취해줄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거절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면서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 그리스의 예술가 아펠레스에게 포즈를 취해주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다비드는 할 수 없이 나폴레옹이 마렝고에서 사용한 부츠, 뿔모양으로 생긴 모자, 장식이 달린 유니폼, 칼 등을 아들 또는 제자 프랑수아 제라르로 하여금 사용하게 해 나폴레옹을 대신한 모습으로 그렸다.
1774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스승을 따라 로마로 가서 프랑스 지부 아카데미에서 유학하면서 다비드는 고대 예술에 탐닉했고, 개빈 해밀턴을 포함한 새로운 고전 부흥의 선구자들과 교류했다.
그가 공감했던 미학상의 견해는 독일인 화가 멩스가 먼저 주장한 것이었다.
멩스는 빙켈만의 친구이며 그로부터 이론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작품에 적용했다.
멩스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과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다비드는 1783년 왕립미술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780년대에 루이 15세와 로코코 시대의 경박함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반발이 거세지자, 다비드의 위치는 확고해졌다.
색채보다 선묘를 더 중시하는 당시의 조류와는 타협하지 않았고, 표현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거부했다.
다비드는 왕립아카데미를 대신하는 새로운 기관을 창설하는 데 적극 참여했다.
그는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이후 투옥되었다가 혁명에 대해 서로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로 이혼했던 전부인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
석방되고 나서 그린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는 그에게 명성과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 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사회적, 예술적으로 다시 지배적인 지위를 누렸다.
다비드는 사나운 말 위에 침착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라는 나폴레옹의 주문으로 승리를 찬양하는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를 그리면서 왼편 하단 바위에 나폴레옹의 이름과 함께 한니발과 샤를마뉴의 이름을 적어넣었는데 두 사람은 나폴레옹에 앞서 험준한 알프스를 넘은 정복자들이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왕(768~814년 재위)으로 ‘유럽의 아버지 왕’으로 서유럽 대부분을 통일했다.
나폴레옹이 좋아한 그림은 자신의 모습이 주제로 그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미술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을 알고 기꺼이 미술품에 많은 돈을 지불했다.
그에 의해서 프랑스 회화는 정치적 성격이 짙어지게 되었으며 집정부(1799~1804)와 나폴레옹에 의해 예술가들은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묘사한 것처럼 거창하게 알프스를 넘지 않았다.
부하들이 이미 알프스를 넘은 며칠 후 말이 아닌 노새를 타고 협소한 길을 따라 넘었다.
훗날 폴 들라로세가 그린 그림이 실제에 가깝다.
들라로세는 1845년에 <퐁텐블로 궁전에서 퇴임하는 나폴레옹>을 그린 경험으로 나폴레옹의 인물 묘사에 자신이 생겼고, 1847년 <알프스를 넘는 샤를 마뉴>에 이어 1848년에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를 그렸다.
다비드는 20년 전 로마에 체류할 때 폴란드의 귀족 스타니슬라스 포톡키 백작으로부터 초상화를 주문받아 말 탄 모습으로 그를 그린 적이 있었다.
다비드는 바로크의 유명한 초상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의 <말 탄 사보이의 왕자 토마스>를 참조하여 거의 같은 스케일로 그렸다.
루벤스를 예외로 하면 반 다이크는 17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이다.
열 살 때부터 회화를 수학한 그는 19세에 화가들의 연합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620년에 런던으로 가서 수개월 동안 제임스 1세의 후원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다음해 이탈리아로 가서 162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그는 1628~32년까지 안트베르펜에서 지냈고 1632년 영국으로 가서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 거주했다.
다비드는 포톡키의 초상을 밝고 생기 있는 색을 사용하여 그렸는데 이런 요소들은 과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들로 그의 양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과거에 그린 초상화들에서는 가장 밝은 부분이 흩어진 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대각선 명암의 효과로 포톡키의 왼쪽이 밝게 드러났으며 말 다리의 어두운 부분은 극적인 장면으로 보인다.
다비드는 자신의 이름과 제작연대를 하단 왼편 가장자리 달마티안 개의 목걸이에 적어넣었다.
폴란드의 고귀한 귀족 출신의 백작 포톡키는 아내가 가져온 신부지참금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다.
학자이기도 한 그는 빙켈만의 저서를 번역했으며 그의 별명은 ‘폴란드의 빙켈만’이었다.
로마에서 다비드의 양식에 변화가 생긴 것은 무엇보다도 로코코 양식을 완전히 버리고 좀더 극적이면서 사실적인 묘사에 충실한 데 있으며, 대가들의 구성과 기교를 두루 관찰하면서 전통을 따르려고 한 것도 요인이었다.
다비드가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를 그릴 때 마드리드 궁전에 벨라스케스의 <말 탄 올리바레스의 백작>이 장식되어 있었다.
야외를 배경으로 하늘을 넓게 화면을 차지한 점에서 그리고 오른편에서 약간 비스듬히 바라본 구성은 반 다이크보다는 벨라스케스의 구성이 더욱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와 유사하다.
벨라스케스는 반 다이크보다 먼저 이런 구성의 그림을 그렸다.
다비드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참조했다는 기록이 없지만 두 작품의 유사성이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개운하지 않다.
벨라스케스는 1622년에 마드리드를 잠시 방문했고 이듬해 재상 올리바레스 백작의 초대를 받아 다시 수도로 가서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여생을 마드리드에서 보냈다.
궁정화가로서의 그의 임무는 모르 반 다스호르스트와 코에요로부터 비롯된 에스파냐 궁정 초상화의 경직되고 의례적인 양식의 전통에 인간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모델들에게 좀더 자연스런 포즈를 취하게 하고 장신구를 생략하여 인물에게 생명력과 개성을 부여했다.
왕실 컬렉션에 있던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의 작품은 티치아노의 작품을 훨씬 뛰어넘어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