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는 색과 평면적 구조로 구성하는 추상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의 창작에 원천적인 영감을 준 것이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의 오르피즘Orphism이다.
오르피즘이란 명칭은 1912~13년에 발표한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붙인 명칭으로 시인은 오르피즘은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 이해하고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 Les Peintres cubistes>(1913)에서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예술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나타낸 미술이라고 했다.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했으며 이런 점이 클레와 마케와 같은 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들로네는 색채를 점차 형태에서 분리시켜 주제가 없는 회화를 창조했는데 완전추상이었다.
클레는 들로네의 작품에 매료되어 1912년 파리에 갔을 때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창문>을 보고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감탄했다.
클레는 들로네를 가리켜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라고 적으며 들로네의 논문 <빛에 관하여 On Light>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들로네는 1906년 신인상주의와 외젠 슈브뢸의 색채 이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후 계속 중심 모티프가 될 색채 이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쇠라의 점묘주의로부터 파생된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연결을 탐구했다.
색채의 체계적 사용을 통해 과학적으로 색채를 물질화시켰으므로 쇠라의 작품은 비구상은 아니더라도 방식만큼은 추상적이었다.
그는 거의 수학적 구조를 통해 색채를 물리적으로 다루면서 조형적 조화를 꾀했다.
들로네는 <자서전>(1924)에서 적었다.
"회화는 자체의 수단과 법칙을 가져야 한다.
아폴리네르가 기술한 대로 ‘빛의 열매’인 색은 화가의 물질적 수단이며 언어인 것이다.
결국 화가는 물질적 요소들의 도움으로 작업하게 되고 모든 요소는 의지에 의해 전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양의 조절이 가능한 색채는 화면에 분배된다.
화면은 작업을 통해 유일한 참조가 되며 비판과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색채 또한 색채들끼리 또 다른 척도를 자아낸다."
클레는 색과 평면적 구조로 구성하는 추상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영향이며 <꽃 침대>(1913)가 그 예이다.
미묘한 색조의 변화가 리드미컬한 효과를 낸다. 들로네와 만남은 선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온 클레로 하여금 색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색채 형태 회화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파리의 모더니즘에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파리의 모더니즘은 국제적으로 가장 수준 높은 미술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빛이 합리적인 방법으로 형상을 만든다는 것을 안 클레는 색채와 명암이 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고, 색채를 검은색과 흰색 사이의 숱한 농담의 위계로 보고 색조를 무게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명암의 증감을 통해 무게를 조절하여 화면의 통일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910년 이전에 쓴 일기에서 색에 관한 세심한 관찰과 명암의 증감을 다루는 현명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화가가 될 능력이 없다고 자탄한 것을 보면 색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고 또한 많은 실험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발견한 색채는 그의 화면 구성에 변화를 일으켰고 칸딘스키의 자유롭고 즉흥적인 창작은 들로네의 색채 대비와 더불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들로네의 영향은 1914년 초에 그린 그림들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무제>가 그 예이다.
색면을 격자 모양으로 배열하는 구성이 그에게 창작의 자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색면의 격자 모양을 입체주의자들인 피카소와 브라크 그리고 오르피스트 들로네가 사용했는데, 그들은 공간과 오브제를 부순 후 회화적 목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런 양식을 사용한 것이지만 클레는 시각적 대상인 오브제를 부수고 재구성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평편한 구성을 위해 사용한 것이 다르다.
평편한 정사각형 색면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이 시기에 몇몇 유럽 화가들이 구사하고 있었다.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가 1913~14년에 평편한 절대주의Suprematism 추상화를 제작했다.
유럽에서 구성주의가 발생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절대주의를 추구하는 이유를 말레비치는 저서 <비대상 세계 The Non-Objective World>(1959)에서 자연의 외양을 재현하고 이상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순수한 예술적 감정이나 비대상적 감수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현실과 유사한 것, 이상화된 이미지가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추상화는 순수 예술적 감정을 위한 것으로 작가의 감정이나 태도를 배격하려는 것이다.
말레비치가 추구한 미학은 칸딘스키와 클레의 색면 구성에도 적용된다.
다만 클레는 이를 회화의 한 가능성으로만 간주했을 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