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눈인데 얼마나 놀라운 눈인가!"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마네와 모네의 이름은 비슷해서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된다.
어떤 작품은 마네의 것인지 모네의 것인지 혼돈스러울 때도 있다.
마네는 인물을 주로 그린 화가지만 그가 그린 풍경화를 보면 모네의 것과 유사한 데가 있고,
모네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지만 모네가 그린 인물화를 보면 마네의 것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우정을 나눴으므로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832년에 태어난 마네는 1840년에 태어난 모네보다 여덟 살이 많지만 동시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마네는 한 스승 아래서 6년 동안 수학하면서 모델에 대한 드로잉을 충분히 익혔고 루브르 뮤지엄을 포함해서 여러 곳의 뮤지엄에서 대가들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대가들의 화풍을 익혔다.
작품을 팔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유산이 많아 당대의 많은 화가들에 비하면 좋은 조건 아래서 작업할 수 있었다.
마네가 많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연구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할스, 틴토레토, 필립피노 립피, 브루위, 안드레아 델 사르토, 기를란다이오, 파르미지아니노, 고야 등의 화풍들이 베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신지식인에 해당되는데 자신이 익힌 많은 대가들의 주제와 화풍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또 다른 류의 화풍을 창조해냈다.
마네는 의도적 구성이나 생략으로 화가 자신만의 느낌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으며, 따라서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고, 모델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 예로 아내 수잔을 그린 11점의 인물화는 모두 걸작이 못 되었지만 빅토린 뫼랑을 모델로 한 10점은 대부분 걸작이 되었다.
인물화와 달리 그의 풍경화는 당대 풍경화 화가들의 것들에 비하면 특기할 만하지 못하다.
그의 풍경화 일부는 모네를 의식하고 그의 화풍을 흉내냈지만 졸작으로 나타났다.
다만 그가 타계하기 얼마 전에 그린 풍경화는 시적이며 그만의 미적 관점으로 나타났다.
마네와 달리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모네는 아버지의 경제적 도움이 전혀 없는 가운데 화가의 길을 걸었다.
따라서 그는 고향에서 부댕에게서 잠시 수학한 것을 제외하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다.
파리에서 무료로 모델을 그릴 수 있는 화실에서 잠시 모델을 그린 것 외에는 인물화와 드로잉에 대한 수학은 하지 못했다.
부댕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모네에게 화실은 건물 안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었다.
그는 산으로 들로 나가서 자신이 직접 바라본 장면들을 그렸다.
그는 대가들의 화풍을 연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눈과 느낌만을 신뢰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는 다만 모네가 있을 뿐이다.
작품을 팔아야만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동료 화가 바지유가 보불전쟁 때 전선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그를 경제적으로 도왔으며 그후에는 마네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도와주었다.
마네와 모네와 어울린 폴 세잔은 모네를 가리켜서 "그는 눈인데 얼마나 놀라운 눈인가!"라고 했듯이 모네가 자연을 바라보는 눈은 보통 화가들의 것들과는 달랐다.
모네는 아주 독특한 눈을 갖고 빛이 일기의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사방으로 분산되는 것을 마음 속으로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마네를 일컬어 '인상주의 화가들의 왕'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지만 정작 그 영예를 받아야 할 사람은 모네이다.
여덟 차례에 걸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룹전에 마네는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이 선호하는 모델이자 동생 외젠느와 결혼한 하가 베르테 모리소에게 그들의 그룹전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했다.
모리소는 마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룹전에 참여했다.
마네는 일찍이 파리 화단에서 유명해져 인상주의 운동의 선구자라는 영예를 얻었지만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마네는 국전을 통해 그리고 낙선전을 통해 파리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훌륭한 화실을 갖고 있었으며, 또 나이도 많아 카페에 가면 모두들 그의 주위로 몰렸다.
그는 주로 카페 게르부아에 자주 갔는데 그곳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단골 카페로 바지유, 팡탱-라투르,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등이 자주 갔으며, 드가는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어쩌다 갔지만 그들 모두 마네를 그룹의 리더로 생각했다.
이들 그룹은 마네의 화실이 있는 바티뇰 가의 이름을 따서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알려졌다.
바티뇰 그룹의 화가들이 인상주의 운동을 전개했고 마네가 그룹의 리더였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자연스럽게 마네를 인상주의의 왕으로 취급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