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누드 여인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폴 고갱(1848~1903)은 반 고흐와 세잔과 더불어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조각가, 판화가이다. 아버지는 오를레앙 출신으로 기자였고 어머니는 페루 출신의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그림을 그리다가 1883년 본격적으로 회화에 전념하기 시작했으며 1886년 가족을 버리고 이후 5년 동안 브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에서 살았다. 그의 강한 개성과 미술에 대한 사상에 매료되어 그곳으로 모여든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고갱은 퐁타방에서 만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1887년 4월 파나마로 가서 파나마 운하를 개발하는 프랑스 회사에서 근무했지만 대량 해고바람에 해직되고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통나무 집에 거주하며 지냈다. 고갱은 열대의 빛나는 다양한 색과 공간 등에서 감동을 받았고 원주민을 모델로 회화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더 이상 인상주의자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는데, 태양이 작열하는 열대에서는 구태여 빛이 사물에 닿아 일으키는 작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색을 토막내어 칠하지 않아도 되었고, 원색들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빛과 색, 공간과 부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긴 것으로 이는 화가에게 매우 중요한 깨우침이었다. 그는 색을 평편하게 칠하면서 색들이 대조를 이루게 했으며 부드럽고 유연한 아라베스크 선으로 사물을 단순화해서 표현했다. 그러나 고갱과 라발은 말라리아와 이질, 그리고 간질환으로 심하게 앓았다. 두 사람은 1887년 11월 파리로 돌아왔다.

고갱은 처음으로 개인전을 부소&발라동 화랑에서 가졌는데 화랑의 회화부 책임자가 반 고흐의 동생 테오였다. 고갱은 브르타뉴와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작품과 도자기들을 개인전에 소개했다. 평론가 옥타브 미르보는 “기괴한 초목과 꽃, 엄숙한 형상들, 장엄한 석양이 있는 숲의 장면은 종교적 신비와 에덴동산을 닮은 성스러운 풍요를 안겨준다”고 평했다.

고갱은 인물을 장식한 단지를 많이 제작했다. 그는 북아프리카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누드로 장식하면서 향후 2년 내에 점토와 나무로도 제작할 계획이었다.(고흐 257) 그가 클레오파트라를 단지에 장식하게 된 것은 퓌비 드 샤반의 회고전을 관람하고 난 후였다. 이 회고전은 고갱이 파리로 돌아온 직후인 1887년 11월 11일,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개최되었는데 드 샤반은 당시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하나였다. 고갱은 특히 1872년작 <희망>(고흐 258)에 관심을 갖고 이 누드 여인을 피부가 검은 여왕으로 자신의 도자기에 삽입했다. 상징주의의 대가 드 샤반은 반자연주의적이며 시적인 장면을 주로 그렸으며 침묵이 흐르는 그의 작품은 이집트인의 회화와도 같았다. 고갱은 드 샤반의 모티프를 현대화하여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성적으로 호감을 주는 여인으로 재해석했다. 드 샤반은 봄의 풍경 속에 누드 여인을 삽입하여 자연의 재탄생을 시사했지만, 고갱은 가슴을 크게 하고 성에 굶주린 여인으로 변모시켰다. 전통적인 주제를 변모시키는 것은 그 밖의 장식에서도 볼 수 있으며 그의 주요 예술적 행위 중 하나가 되었다.

누드 여인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을 통해 나타났다. 타히티에서 고갱은 1896년 4월에 <왕후>(고흐 796, 797)를 그렸는데 독일의 대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르네상스 회화 <다이아나>(고흐 798)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 속의 동일한 여인을 <열대 풍경 속에 부채를 들고 비스듬히 누운 여인>(고흐 795)이란 제목으로 7년 전인 1889년 말 참나무에 릴리프로 제작한 적이 있다. <왕후>를 그린 후 파리에 있는 몽프레에게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벌거벗은 왕후는 풀의 카페트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고, 하녀 한 명은 과일을 따고 있으며, 큰 나무 근처에서는 두 남자 노인이 선악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네. 배경에 바닷가가 보이고 ... 격조 있게 울려 퍼지는 색을 이렇게 써본 적이 없네. 과일이 무르익었으며, 개는 경계를 펴고, 오른편의 두 마리 비둘기는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네.”

고갱의 누드 작품은 타히티 여인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유럽의 영향이 반영되었다. 비록 타히티 여인을 모델로 그렸지만 미개인의 누드로 한정하지 않고 유럽인의 감각으로 보는 객관적 개념의 에로스를 표현하려고 했다. 그가 유럽인의 시각에서 타히티 여인을 바라본 것은 배경에 나타난 선악과나무와 나무를 둥글게 감고 있는 뱀의 형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분명히 성서를 참조한 것이다. 고갱은 말했다. “타히티의 이브는 매우 섬세하며 자신의 순진무구함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눈 속에 깊이 숨어 있는 비밀은 불가사의함으로 남아 있다.” 고갱은 원죄를 암시하지 않은 채 열대의 이브를 묘사했다. 1896년 봄 고갱은 연속적으로 원주민 여인들 누드를 신비감에 싸인 모습을 그렸으며 여인들은 꿈속의 영상처럼 나타났다. 그에게는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색으로 충분했는데, 노란색, 붉은색, 파란색, 혹은 푸른색만 있으며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미개인 누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다. 의도적으로 침대 커버와 배경을 꽃으로 장식하여 누드의 아름다움을 더욱 드려내려고 한 작품이 <두 번 다시, 오 타히티>(고흐 811)이다. 이 작품은 잘못 그려진 캔버스를 재활해 사용한 것이다. 풍경화가 실패하자 물감이 두텁게 칠해진 윗부분을 잘라내고 캔버스를 다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므로 그가 의도적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기다란 캔버스가 되었다. 그는 여기에 맞게 침대에 길게 누운 누드를 그렸는데 1892년에 그린 <저승사자>(고흐 730)와 유사한 구성이지만 좀더 우수에 젖어 있고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상징주의 작품이다. 침대 위 누드 뒤로 누드를 바라보는 새가 한 마리 보인다. <저승사자>에서의 모델은 테하마나이지만 이 작품의 모델은 당시의 동거녀 파라후이다. 침대는 고갱이 상상해서 그린 것으로 짐작되며 두 작품 모두에서 침대 머리는 둥근 형태이다. 빛이 대각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비치는 조명을 사용했으며 몸의 섬세한 명암을 묘사했다.

고갱은 1901년에 들어서서 연속적으로 꽃이나 과일이 있는 정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의 화상 볼라르가 이런 작품이 팔기 수월하니 많이 그리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볼라르는 꽃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라면 자신이 구입하겠다고 했으므로 고갱은 정물을 그리게 되었다. 그는 자연에 나가 그리지 않고 있다면서 타히티는 꽃의 땅이 아니라고 했다. 정원에 심은 몽프레가 보내준 씨앗들은 꽃으로 피어났고 그것들을 꺾어다가 자신이 원하는 정물을 그렸다. 1901년에 그린 해바라기 정물이 네 점 남아 있다. 해바라기 그림은 반 고흐가 1888~89년 아를에서 그린 것과 관련이 있다. 고갱은 반 고흐가 자신이 사용할 방을 위해 그린 해바라기를 가까이서 늘 보았을 뿐 아니라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는 모습을 그린 적도 있다. 그는 <해바라기와 퓌비 드 샤반의 <희망>>(고흐 845)을 그렸는데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에 배경으로 종종 사용했다.

고갱은 1898~99년에 목판화를 제작하기 위한 목판을 14점을 제작했다. 그는 1900년 1월 볼라르에게 적었다.
“다음 달 약 475점의 목판화를 보내려고 하는데 25장에서 30장을 찍은 후 각각의 목판을 없애려고 합니다. 절반 가량의 목판은 이미 두 번이나 사용한 것으로 나 같은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때 제작한 14점의 목판화는 <노아 노아>를 위해 1894~95년에 제작한 어두운 밤의 장면이나 남자와 여자의 공포를 묘사한 열 점의 목판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들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장면들이며 과거의 주제들을 인용한 것들이다. <망고를 든 (지친) 여인>(고흐 852)에 크라나흐의 <다이아나>를 변형시킨 <왕후>가 삽입되었음을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