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압제에 저항하여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B.C. 190년은 오리엔트에 새로운 지배자의 등장을 예고하는 해였다.
로마 군대가 마그네시아(Magnesia) 전투에서 시리아 군대를 섬멸한 사건은 역사의 무대에서 헬레니즘 3왕국(시리아, 마케도니아, 이집트)의 퇴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로마의 등장을 구약성서에서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보아라, 페르시아에 또 세 왕이 일어날 것이며, 그 뒤에 넷째는 다른 누구보다 큰 재물을 모을 것이다.
그가 재물을 모으고 권세를 쥐게 되면, 모든 사람을 격동시켜서 그리스를 칠 것이다. 【다니엘서 11:2】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는 소아시아를 손에 넣었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가 메넬라우스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도 전쟁배상금이 필요해서였다.
잇따라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전쟁을 시작해 B.C. 168년 여름 피드나 전투를 끝으로 마케도니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로마는 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로마 군대에 패한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에 침입해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는 성벽을 허물고 성전에 쌓아둔 보물을 약탈하여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막대한 군비가 필요했던 그는 대제사장직을 돈으로 사려는 부유한 유대인의 제안을 듣고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탐냈던 것이다.
그는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성소를 돼지피로 더럽혔으며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다.
유대교에서 돼지고기는 금하는 음식이었다. 게다가 성전에 제우스 제단을 세우고 성전법을 폐지했으며 종교의식들을 행할 수 없도록 금지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압제에 저항하여 투쟁을 전개했고 하스모니아(Hasmonaea) 가문의 제사장 맛다디아(Mattathias)와 그의 다섯 아들이 앞장을 섰다.
이들은 사비를 들여 군대를 조직하고 날이 어두워지면 게릴라전을 벌였다.
셋째 아들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aeus)가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전개한 이 반란을 마카베 전쟁이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의 저항은 실효를 거두어 B.C. 164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시리아를 쫓아내고 성전법과 종교의식법을 회복하게 되었다.


같은 해 안티오쿠스 4세는 원정 중 사망하였고 맛다디아의 아들들은 유대의 독립을 위해 계속해서 시리아와 전쟁을 계속했다.
B.C. 142년 다섯 형제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시몬(Siman)이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이후 유대가 독립국가가 된 것은 거의 800년 만이었다.
유대의 독립국가 시대는 이때부터 로마의 속국이 되기까지 100년도 되지 못했다.


시몬은 기드온이나 삼손처럼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친구와 적 앞에서 위대하게 설 것을” 주장하고 인간의 용감성을 칭찬한 지도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지 않고 농부들로 하여금 결연히 일어나서 싸울 것을 요구했다.
시몬이 앞장서서 유대의 독립을 쟁취한 데 유대인들은 감격하였고, 민중회의는 시몬이 국가의 통치자일 뿐 아니라 “신뢰할 만한 선지자가 나타날 때까지 영원토록 대제사장”이 되라고 포고했다(이와 같은 내용은 유대교의 경전 마카비 1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로 대제사장은 하스모니아 가문에서 선출되었다.


시몬이 피살되고 그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는 아버지를 닮아 호전적이었다.
그는 이두매아(Idumaea), 사마리아(Samaria), 갈릴리(Galilee)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히르카누스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와 알렉산더 안네우스(Alexander Jannaeus) 역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영토 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유대 왕국은 북으로는 레바논까지, 남으로는 헤브론을 넘어서 그 사이와 요단 동편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신정국가에 편입시켰는데, 거의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국가만한 나라를 이루게 되었다.


정복에만 관심이 있었던 안네우스의 끝없는 야욕은 여러 차례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였으며 국력이 소모되고 국내 인사들의 존경과 호의를 잃게 되었다.
안네우스가 B.C. 76년에 사망하자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Salome Alexandra)가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큰 아들 히르카누스 2세는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작은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군대 통수권자가 되었다.
9년 동안 집권했던 살로메는 행정력이 탁월하여 유대인들은 그때를 황금시대로 기억하고 있다.


살로메가 B.C. 67년에 사망하면서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두 아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작은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형을 누르고 대제사장 겸 왕의 자리에 올랐다.
B.C. 64년 시리아 정복에 전력하던 로마의 폼페이우스(Pompeius) 장군이 내분 수습을 구실로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유대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63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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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로마의 지배로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폼페이우스는 성소의 지성소에까지 침입하여 유대인들을 경악시켰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좌실로서,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나라를 위하여 야훼께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것 외에는 어느 누구의 접근도 금지된 곳이다.
폼페이우스의 군사들이 제사장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무력으로 침입한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한 신성모독이었다.
그로부터 15년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하여 이집트로 도망친 폼페이우스가 해안에서 암살당하자 유대인들은 그가 신성을 모독한 죄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흡족해 했다.


로마의 점령을 받으면서 대제사장에 복직한 히르카누스 2세는 야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두매아 사람 안티파터(Antipater)의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다.
안티파터는 히르카누스 2세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자신의 야망을 점차 키워나가더니, 서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로마의 힘을 빌려 유대를 장악하려고 했다.


히르카누스 2세는 명목상으로는 대제사장 겸 왕이었지만, 이웃 나라와 사마리아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박탈당했다.
한편 안티파터는 카이사르가 B.C. 48-47년 겨울 알렉산드리아 궁전을 포위했을 때 군대를 지원하여 카이사르를 도와주었고, 그 결과 유대를 다스리는 총독에 임명되어 면세 받는 로마의 시민이란 영광을 안았다.
유대의 실권을 장악한 안티파터는 폼페이우스가 파괴했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카이사르가 B.C. 44년에 살해되자 안티파터는 몹시 불안해하면서 언젠가 권력자로 등장할 동방의 세력자들을 지지하기 시작했지만 이듬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같은 해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안토니우스(Antonius), 레피투스가 통치하는 삼두정치가 수립되었다.
유대 왕국은 안토니우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안티파터의 두 아들 파사엘과 헤롯은 안토니우스에 의해서 유대의 공동 분봉왕으로 임명되었다.
분봉왕이란 형식상으로는 왕이지만 실제로는 로마의 통치를 받는 영주와도 같은 지위였다.


B.C. 40년 이란 고원에 위치한 파르티아(Parthia)가 유대를 침공하여 분봉왕 파사엘을 처형하고 하스모니아 가문의 안티고누스(Antigonus)를 제사장 겸 왕에 임명했다.
또 다른 분봉왕 헤롯은 로마로 도망쳐 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헤롯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승인받은 후 B.C. 37년 10월경 로마 군대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석 달 동안의 포위 끝에 함락시킴으로써 왕좌를 되찾았다.
안티고누스는 쇠사슬에 묶여 안디옥에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호송되었고 헤롯의 청원에 따라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유대 역사에서 하스모니아 왕조는 사라지고 33년에 걸친 헤롯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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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대왕의 유대 왕국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B.C. 37년부터 B.C. 4년까지 유대 왕국을 통치한 헤롯을 아들 헤롯 안디바와 구분하기 위해 보통 헤롯 대왕이라 부른다.
헤롯 대왕은 첫 번째 아내 도리스를 버리고 하스모니아 가문의 마리암을 왕후로 앉혔지만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지는 못했다.
유대인들은 헤롯 대왕을 훌륭한 왕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이두매아 출신의 벼락출세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롯 대왕은 유대인에게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이상 로마의 이익과 유대의 국익이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재임 첫 몇 년 동안 헤롯 대왕은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를 견제하느라 애썼는데 그녀가 유대에 탐욕스런 눈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제로 유대의 일부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여리고와 그 부근을 통치하고 있었다.


히르카누스 2세는 살아 있었지만 귀가 잘려 성직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으므로 대제사장직에 복직하지 못했다.
하스모니아 가문에서 차기 대제사장직을 계승할 만한 사람은 왕후 마리암의 남동생인 열일곱 살 난 아리스토불루스 3세뿐이었다.
헤롯 대왕은 장모의 고집대로 B.C. 36년에 소년을 대제사장에 임명했으나 몇 개월 후 아리스토불루스가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리고 성에서 큰 잔치가 열렸을 때 동료들은 아리스토불루스가 질식해 죽기까지 함께 잠수놀이를 했다고 한다.
장모는 헤롯 대왕에게 혐의를 두고 감히 대제사장을 살해했다고 격분했다.
그녀는 친구 클레오파트라에게 하소연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설득하여 살인자를 잡기 위해 조사를 하도록 했다.
안토니우스는 헤롯 대왕을 소환했지만 그의 무죄를 선언하면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어떤 왕의 행동에 너무 깊게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고조되던 긴장은 B.C. 31년 악티움(Actium)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쳐 자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제 옥타비아누스가 명실상부한 로마 제국의 주인이 된 것이다.
누가복음서에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옥타비아누스이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 1월에 초대 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고 자신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칭했다.
로마의 속국들은 그의 심복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헤롯 대왕을 소환하여 그가 행정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유대의 왕으로 남아 로마에 충성을 다하도록 허락했다.
헤롯 대왕은 옥타비아누스로부터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했던 여리고와 그 주변 지역을 되돌려 받았으며 지중해 연안과 요르단 양쪽에 있는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그의 관할이 되었다.
헤롯 대왕의 통치영역이 아주 넓어진 것이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의 모임인 중의회 제도를 인정하여 종교문제는 그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근거하여 이미지 우상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법을 존중하여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로마 군기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헤롯 대왕은 아우구스투스뿐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사위인 마르쿠스 아그리파(Marcus Agrippa)의 호의를 받았다.
헤롯은 로마가 예맨에 원정할 때 5천 명의 원정군을 파견하는 등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이 로마의 동맹왕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역사에 나타난 헤롯 대왕은 위대한 건축가였다.
그는 예루살렘 서북쪽 바리스의 하스모니안 성곽을 재건한 후 친구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붙였다.
또한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방어할 목적으로 사해의 서남쪽 산 위에 마사다 성곽을 건립했으며, 사해의 동쪽 마키루스, 예루살렘 근처에 헤로디온, 나바테아 경계에 또 다른 헤로디온 그리고 여리고 근처 알렉산드리온에 성곽을 건축했다.
성곽 안티파트리스(Antipatris)와 파사엘리스(Phasaelis)는 그의 가족의 이름을 따 명명한 것이며 아그리피온(Agripeion) 또는 아그리피아스(Agrippias)라고 알려진 성곽은 아우구스투스의 사위 아그리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사마리아에 복구한 세바스테와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Caesarea)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 명명한 것이었다.
그가 인공항구를 갖춘 가이사랴(전에는 스트라토의 탑이라고 불리었다)를 건설하는 데는 무려 12년이나 걸려 B.C. 10년에야 완공되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데도 앞장서 B.C. 19년 초 1000명의 레위인들을 건축가로 훈련시켜 성지의 바깥뜰을 확장하고 가로수를 심어 아름답게 꾸몄다.
재임 첫 10년 동안 성전 주변에 화려한 대문을 만들고 건축물들을 세워 성전의 장엄함을 전세계에 자랑했다.
성전 미화작업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로마에 의해 파괴되기 7년 전인 63년까지 지속되었다.


헤롯 대왕이 성전을 화려하게 재건했음에도 유대인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은 과중한 세금을 부과시킨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가 유대 밖에서 이방인을 위한 신전들을 건축했기 때문이었다.
헤롯 대왕은 위대한 건축가였을 뿐 종교에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 문 위에 세워진 커다란 금독수리를 우상으로 여겨 그것을 끌어내렸을 때 헤롯은 그들을 포악한 방법으로 처벌했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헤롯은 신하들을 엄하게 감시했으며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현할 모든 가능성을 박탈했다.
그는 시민들의 모든 모임을 금했고 사방에 첩자를 심어놓았다.
가벼운 잘못도 엄하게 벌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히르카니아 요새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어디에나 사람들의 만남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끔 왕은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 밤에 평복을 하고 사람들이 모인 데 가곤 했다.
신하들 대부분은 실제로 즐겨서 또는 두려워서 그의 명령에 따랐다.
그렇지만 강한 저항을 하거나 신하들과 같이하지 않는 자는 사정없이 제거되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을 대적할 수 없는 군인, 정치가이자 또 목표물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수이며, 능숙한 운동선수이자 용감한 기사, 열정적인 사냥꾼이라고 칭찬했다.


헤롯 대왕은 광적인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B.C. 29년에 왕후 마리암을 처형했으며, 마리암이 낳은 두 아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알렉산드로스(Alexamdros)를 후계자로 지목해 로마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가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B.C. 7년에 처형했다.
역모설은 헤롯 대왕의 첫 아내 도리스가 낳은 아들 안티파터(Antipater)의 계략이었던 것 같다.
마리암의 아들들이 제거되자 안티파터는 왕위 상속자가 되었으나 얼마 후 헤롯 대왕으로부터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고 왕자 신분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헤롯 대왕이 B.C. 23년에 결혼한 대제사장 시몬 뵈투스(Simon Bo몋hus)의 딸 마리암 사이에 낳은 아들 헤롯이 후계자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B.C. 5년에는 이 아들마저 헤롯 대왕의 총애를 잃어 헤롯 대왕은 마리암과 이혼하고 장인 시몬 뵈투스를 대제사장직에서 쫓아냈다.
이제 사마리아 출신의 첩 말다크가 낳은 막내아들 안디바(Antipas)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말다크가 낳은 큰아들 아켈라오(Archelaus)도 있었지만 그는 아켈라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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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분봉왕 아켈라오, 빌립, 안디바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헤롯 대왕은 질병에 시달리다가 B.C. 4년 3월에 임종을 맞았다.
그는 유서에 안디바, 아켈라오, 빌립(Philip) 세 아들로 하여금 유대 왕국을 통치하도록 했다.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Peraea)를 다스리고, 아켈라오는 사마리아와 이두매아를 포함한 유대 지방을 다스리며, 이들의 이복형제 빌립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받은 갈릴리 호수 동쪽과 동북쪽에 있는 영토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헤롯 대왕의 유언은 아우구스투스의 인준을 받아야 했으므로 세 사람은 로마로 갔다.
그 사이에 팔레스타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갈릴리 사람 유다(Judas)가 기도한 반란이었다.
유다의 아버지 히스기야(Hezekiah)는 40년 전 헤롯 대왕에 의해 사형당한 사람이었다.
유다는 세포리스에 있는 궁전을 급습하여 무기고를 장악했으나 시리아의 사절 바루스(Varus)가 2개의 군단을 끌고 와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러나 유다의 추종세력은 갈릴리에서 제로테라는 지하당을 조직하고 반란의 기회를 다시 엿보았는데 제로테 당원 가운데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유대의 여러 대표단으로부터 의견을 듣고 나서 헤롯 대왕의 유언을 대체로 인준해주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세 아들에게 분봉왕(client king)이란 칭호를 쓰도록 했다.
안디바와 빌립은 각기 42년과 37년간 재임했지만 아켈라오의 유대 지배는 너무 강압적이었음이 증명되어 재임 9년 만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면직당해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켈라오의 압제 때문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킬까봐 염려했던 것이다.
아켈라오가 다스리던 유대 지방에는 향후 60년 동안 군단병력이 아닌 지원부대를 주둔시켜 사절보다 낮은 기사계급 출신 총독(procurator)이 통치하도록 했다.


디베료(Tiberius)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안디바)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 【누가복음서 3:1】


아켈라오는 아버지 헤롯 대왕의 행정수완은 닮지 못하고 결점만을 이어받았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건축가가 되고 싶어 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파손된 부분을 수리했으며, B.C. 4년에 일어난 유대인 반란으로 파괴되었던 여리고의 궁전을 복구했다.
또한 성 북쪽에 있는 종려 숲의 관수를 위해서 새로 수로를 만들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아켈라이스(Archelais)라는 새 거주지역을 신설하기도 했다.
그가 아내로 맞은 글라피라(Glaphyra)는 예전에 아켈라오의 이복형제 알렉산드로스의 아내였다.
알렉산드로스가 B.C. 7년에 사망한 후 글라피라는 마우레타니아(Mauretania)의 왕 유바(Juba)와 결혼했다가 다시 아켈라오와 결혼했다.
사망한 형제의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은 유대법에 저촉되었는데 사망한 형제에게 자식이 없을 때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글라피라는 알렉산드로스의 자식을 낳은 바 있으므로 이 결혼은 유대인들의 반감을 살만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투스가 아켈라오를 축출한 것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빌립은 요단 동쪽 상류지역에 있는 파네이온(Paneion)을 수도로 정하고 재정비하여 확장했다.
그는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곳을 ‘카이사르의 영역’이란 뜻의 ‘가이사랴(Caesarea)’라고 이름 붙였다.
사람들은 그곳을 지중해변에 있는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빌립의 가이사랴(Philip’s Caesarea)’ 즉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다.
빌립은 요단 강물이 갈릴리 호수로 들어가는 지점 동쪽의 어부촌 벳세다(Bethsaida)에 있는 성을 별장으로 재건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Julia)의 이름을 따 율리아스(Julias)라고 명명했는데 이 역시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빌립의 통치영역에는 주로 이방인들이 거주했다.
그래서 그는 아켈라오나 안디바와는 달리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상하게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요세푸스는 빌립은 중용을 택한 관대한 통치자로서 분봉왕들 가운데 가장 온순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외출할 때 재판석을 항상 휴대하고 다니면서 자신에게 위임된 소송사건들을 즉석에서 판결하여 사람들로부터 재판이 지체되었다는 불평을 들은 적이 없었다.
빌립은 질녀인 살로메(Salome)와 결혼했는데 살로메는 빌립의 형제인 헤롯 빌립(Herod Philip)이 헤로디아(Herodias)에게서 낳은 딸이었다.
헤롯 가계의 삼촌과 질녀 사이의 수많은 결혼은 인척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빌립과 살로메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빌립이 34년에 율리아스 별장에서 죽자 그의 분봉국은 시리아 사절의 관할이 되었다.


빌립이 죽자 남은 분봉왕은 안디바뿐이었다.
예수의 고향 갈릴리와 베레아를 통치한 안디바는 아버지 헤롯 대왕으로부터 행정수완을 배웠으므로 40년 이상 분봉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자신의 통치지역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나 어떠한 심각한 사태도 발생하지 못하도록 사전 방지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아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정치가였다.
B.C. 6년 유대를 휩쓴 소란이 있었지만 갈릴리와 베레아까지는 파급되지 않았다.
안디바는 분봉왕이었지만 그의 부하들은 그를 왕이라고 불렀다.
마가는 그를 헤롯왕이라고 불렀는데 아버지 헤롯 대왕과 구별해야 한다.


안디바는 헬레니즘 문화의 장려자이자 위대한 건설가였다.
그의 대표적인 사업은 22년에 갈릴리 호수 서해안에 건립한 디베랴(Tiberias) 도성이다.
그는 로마의 환심을 사려고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도성은 공동묘지 위에 건립되었으므로 갈릴리 사람들은 도성을 부정하게 여겼지만 그곳은 곧 랍비들이 학문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재임 초기에 나바테아(Nabataea) 왕 아레타스 4세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20년 후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았다.
헤로디아는 이복형 아리스토불루스의 딸로서 헤롯 빌립은 질녀와 결혼했던 것이다.
그는 한때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적도 있지만 이제 일개 서민에 불과했다.
로마로 여행하는 도중 안디바는 헤롯 빌립과 함께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때 헤로디아에게 반해 그녀에게 청혼하였고 헤로디아는 안디바가 왕후를 쫓아내는 조건으로 청혼을 받아들였다.
세례자 요한은 두 사람의 결혼을 비난했고 결국 요한은 안디바에 의해 감금되었다.
헤로디아는 딸 살로메를 시켜서 안디바의 생일날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오게 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면 간음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서 10:11-12】


유대법에는 이혼이 금지되어 있지만 로마법에서는 가능했다.
헤로디아는 모든 헤롯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이혼과 재혼은 그들에겐 합법적인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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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온 세계가 호적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누가복음서 2:1-2】


A.D. 6년 아켈라오가 파면당했을 때 시리아의 사절은 술피시우스 구레뇨(P. Sulpicius Quirinius)였다.
구레뇨는 아켈라오의 재산을 정리하고 로마 제국의 국고로 납부해야 할 조공 액수를 결정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해야 했다(누가는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서 예수를 낳았다고 기록했는데 호적등록은 A.D. 6년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B.C. 4년에 사망한 헤롯 대왕 재임시에 예수가 출생했다는 정설과는 10년 이상의 시차가 있다).
그 무렵 갈릴리 사람 유다가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폭동이 진압되고 인구조사가 끝나자 코포니우스(Coponius)가 유대의 첫 총독으로 취임했다.


코포니우스가 재임하던 어느 유월절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정이 지나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잠입하여 사람들의 뼈를 흩뜨려 성스러운 성전을 더럽힌 사건이 일어났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언자 에스겔이 본 마른 뼈들이 있는 골짜기를 풍자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코포니우스는 성전의 안전을 강화했다.


9년경 코포니우스의 후임으로 마르쿠스 암비비우스(Marcus Ambivius)가 총독에 취임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14년 8월 19일 사망하기까지 영지의 통치자들을 자주 바꾸는 정책을 썼다.
그와 달리 후계자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들을 관직에 오래 머물게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티베리우스에 의해 15년경 유대의 총독에 임명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는 11년간 재임하였다.
그 기간 동안 그라투스는 대제사장을 네 차례나 바꾸었는데 부를 축적하기 위한 그의 독특한 방법이었다.
그라투스가 임명한 마지막 대제사장은 안나스(Annas)의 사위인 요셉 가야바(Joseph Caiaphas)였다.
가야바는 예수를 체포하고 빌라도로 하여금 정치범으로 사형에 처하게 한 교활한 사람이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그라투스의 뒤를 이어 총독에 부임한 것은 26년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oho)에 의하면 빌라도는 “천성이 고집불통이며 고집과 잔인이 혼합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부임 초기에 밤을 이용하여 로마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특전을 짓밟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전임자들 중에는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 없었다.
날이 새자 분노한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저택을 에워쌌고 가이사랴까지 따라가서 초상들을 예루살렘 밖으로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
초상들을 치우지 않았다가는 전국적으로 소요가 번질 것을 알게 된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빌라도와 예루살렘 지도자들 사이에 또 한 차례의 충돌이 일어났는데 예루살렘 성의 급수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수로를 건설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남부 고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물을 운반해오는 수로의 건설은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베푼 호의였다.
성전은 수로를 필요로 했다.
성전에서 동물들을 도살하여 제사를 지낸 후 그 지역을 청소하기 위해서는 많은 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수로건설에 드는 비용을 성전의 보고에서 지불토록 했다.
성전 관리자들은 하나님께 바친 돈을 세속적인 사업에 사용하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맞섰지만 빌라도는 강제로 돈을 빼앗았다.
국내외에 거주하는 성년 유대인들이 희생 제사를 위해 매년 의무적으로 반 세겔(Shekel)을 헌납해온 금고를 턴 것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처사가 신성을 모독한 것이라며 시위를 벌였지만 빌라도는 무력을 사용하여 시위대를 강제해산시켰다.


예수의 생애는 이상과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시작되고 마쳤다.
고대 제국주의가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역사의 황혼녘에 예수의 생애가 있었다.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어둠이 막 깔리려고 할 즈음 예수가 계몽의 정화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예수의 활동은 별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미미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신학을 가진 신흥종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가 기존의 전통과 신앙에 불을 지른 방화범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를 처단하지 않는다면 유대교의 곳간에 쌓아둔 케케묵은 곡물들이 모두 타서 재가 될 것만 같았을 것이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역사의 황혼녘에서 더 이상의 사회정치적이고 종교적인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차라리 그를 죽이는 길을 택했다.
예수는 역사의 분기에서 그렇게 스러져갔고, 그의 죽음은 역사의 새 날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죽음을 부활시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초석으로 삼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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