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로마의 지배로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폼페이우스는 성소의 지성소에까지 침입하여 유대인들을 경악시켰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좌실로서,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나라를 위하여 야훼께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것 외에는 어느 누구의 접근도 금지된 곳이다.
폼페이우스의 군사들이 제사장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무력으로 침입한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한 신성모독이었다.
그로부터 15년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하여 이집트로 도망친 폼페이우스가 해안에서 암살당하자 유대인들은 그가 신성을 모독한 죄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흡족해 했다.


로마의 점령을 받으면서 대제사장에 복직한 히르카누스 2세는 야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두매아 사람 안티파터(Antipater)의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다.
안티파터는 히르카누스 2세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자신의 야망을 점차 키워나가더니, 서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로마의 힘을 빌려 유대를 장악하려고 했다.


히르카누스 2세는 명목상으로는 대제사장 겸 왕이었지만, 이웃 나라와 사마리아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박탈당했다.
한편 안티파터는 카이사르가 B.C. 48-47년 겨울 알렉산드리아 궁전을 포위했을 때 군대를 지원하여 카이사르를 도와주었고, 그 결과 유대를 다스리는 총독에 임명되어 면세 받는 로마의 시민이란 영광을 안았다.
유대의 실권을 장악한 안티파터는 폼페이우스가 파괴했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카이사르가 B.C. 44년에 살해되자 안티파터는 몹시 불안해하면서 언젠가 권력자로 등장할 동방의 세력자들을 지지하기 시작했지만 이듬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같은 해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안토니우스(Antonius), 레피투스가 통치하는 삼두정치가 수립되었다.
유대 왕국은 안토니우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안티파터의 두 아들 파사엘과 헤롯은 안토니우스에 의해서 유대의 공동 분봉왕으로 임명되었다.
분봉왕이란 형식상으로는 왕이지만 실제로는 로마의 통치를 받는 영주와도 같은 지위였다.


B.C. 40년 이란 고원에 위치한 파르티아(Parthia)가 유대를 침공하여 분봉왕 파사엘을 처형하고 하스모니아 가문의 안티고누스(Antigonus)를 제사장 겸 왕에 임명했다.
또 다른 분봉왕 헤롯은 로마로 도망쳐 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헤롯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승인받은 후 B.C. 37년 10월경 로마 군대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석 달 동안의 포위 끝에 함락시킴으로써 왕좌를 되찾았다.
안티고누스는 쇠사슬에 묶여 안디옥에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호송되었고 헤롯의 청원에 따라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유대 역사에서 하스모니아 왕조는 사라지고 33년에 걸친 헤롯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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