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분봉왕 아켈라오, 빌립, 안디바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헤롯 대왕은 질병에 시달리다가 B.C. 4년 3월에 임종을 맞았다.
그는 유서에 안디바, 아켈라오, 빌립(Philip) 세 아들로 하여금 유대 왕국을 통치하도록 했다.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Peraea)를 다스리고, 아켈라오는 사마리아와 이두매아를 포함한 유대 지방을 다스리며, 이들의 이복형제 빌립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받은 갈릴리 호수 동쪽과 동북쪽에 있는 영토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헤롯 대왕의 유언은 아우구스투스의 인준을 받아야 했으므로 세 사람은 로마로 갔다.
그 사이에 팔레스타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갈릴리 사람 유다(Judas)가 기도한 반란이었다.
유다의 아버지 히스기야(Hezekiah)는 40년 전 헤롯 대왕에 의해 사형당한 사람이었다.
유다는 세포리스에 있는 궁전을 급습하여 무기고를 장악했으나 시리아의 사절 바루스(Varus)가 2개의 군단을 끌고 와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러나 유다의 추종세력은 갈릴리에서 제로테라는 지하당을 조직하고 반란의 기회를 다시 엿보았는데 제로테 당원 가운데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유대의 여러 대표단으로부터 의견을 듣고 나서 헤롯 대왕의 유언을 대체로 인준해주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세 아들에게 분봉왕(client king)이란 칭호를 쓰도록 했다.
안디바와 빌립은 각기 42년과 37년간 재임했지만 아켈라오의 유대 지배는 너무 강압적이었음이 증명되어 재임 9년 만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면직당해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켈라오의 압제 때문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킬까봐 염려했던 것이다.
아켈라오가 다스리던 유대 지방에는 향후 60년 동안 군단병력이 아닌 지원부대를 주둔시켜 사절보다 낮은 기사계급 출신 총독(procurator)이 통치하도록 했다.


디베료(Tiberius)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안디바)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 【누가복음서 3:1】


아켈라오는 아버지 헤롯 대왕의 행정수완은 닮지 못하고 결점만을 이어받았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건축가가 되고 싶어 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파손된 부분을 수리했으며, B.C. 4년에 일어난 유대인 반란으로 파괴되었던 여리고의 궁전을 복구했다.
또한 성 북쪽에 있는 종려 숲의 관수를 위해서 새로 수로를 만들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아켈라이스(Archelais)라는 새 거주지역을 신설하기도 했다.
그가 아내로 맞은 글라피라(Glaphyra)는 예전에 아켈라오의 이복형제 알렉산드로스의 아내였다.
알렉산드로스가 B.C. 7년에 사망한 후 글라피라는 마우레타니아(Mauretania)의 왕 유바(Juba)와 결혼했다가 다시 아켈라오와 결혼했다.
사망한 형제의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은 유대법에 저촉되었는데 사망한 형제에게 자식이 없을 때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글라피라는 알렉산드로스의 자식을 낳은 바 있으므로 이 결혼은 유대인들의 반감을 살만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투스가 아켈라오를 축출한 것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빌립은 요단 동쪽 상류지역에 있는 파네이온(Paneion)을 수도로 정하고 재정비하여 확장했다.
그는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곳을 ‘카이사르의 영역’이란 뜻의 ‘가이사랴(Caesarea)’라고 이름 붙였다.
사람들은 그곳을 지중해변에 있는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빌립의 가이사랴(Philip’s Caesarea)’ 즉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다.
빌립은 요단 강물이 갈릴리 호수로 들어가는 지점 동쪽의 어부촌 벳세다(Bethsaida)에 있는 성을 별장으로 재건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Julia)의 이름을 따 율리아스(Julias)라고 명명했는데 이 역시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빌립의 통치영역에는 주로 이방인들이 거주했다.
그래서 그는 아켈라오나 안디바와는 달리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상하게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요세푸스는 빌립은 중용을 택한 관대한 통치자로서 분봉왕들 가운데 가장 온순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외출할 때 재판석을 항상 휴대하고 다니면서 자신에게 위임된 소송사건들을 즉석에서 판결하여 사람들로부터 재판이 지체되었다는 불평을 들은 적이 없었다.
빌립은 질녀인 살로메(Salome)와 결혼했는데 살로메는 빌립의 형제인 헤롯 빌립(Herod Philip)이 헤로디아(Herodias)에게서 낳은 딸이었다.
헤롯 가계의 삼촌과 질녀 사이의 수많은 결혼은 인척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빌립과 살로메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빌립이 34년에 율리아스 별장에서 죽자 그의 분봉국은 시리아 사절의 관할이 되었다.


빌립이 죽자 남은 분봉왕은 안디바뿐이었다.
예수의 고향 갈릴리와 베레아를 통치한 안디바는 아버지 헤롯 대왕으로부터 행정수완을 배웠으므로 40년 이상 분봉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자신의 통치지역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나 어떠한 심각한 사태도 발생하지 못하도록 사전 방지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아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정치가였다.
B.C. 6년 유대를 휩쓴 소란이 있었지만 갈릴리와 베레아까지는 파급되지 않았다.
안디바는 분봉왕이었지만 그의 부하들은 그를 왕이라고 불렀다.
마가는 그를 헤롯왕이라고 불렀는데 아버지 헤롯 대왕과 구별해야 한다.


안디바는 헬레니즘 문화의 장려자이자 위대한 건설가였다.
그의 대표적인 사업은 22년에 갈릴리 호수 서해안에 건립한 디베랴(Tiberias) 도성이다.
그는 로마의 환심을 사려고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도성은 공동묘지 위에 건립되었으므로 갈릴리 사람들은 도성을 부정하게 여겼지만 그곳은 곧 랍비들이 학문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재임 초기에 나바테아(Nabataea) 왕 아레타스 4세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20년 후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았다.
헤로디아는 이복형 아리스토불루스의 딸로서 헤롯 빌립은 질녀와 결혼했던 것이다.
그는 한때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적도 있지만 이제 일개 서민에 불과했다.
로마로 여행하는 도중 안디바는 헤롯 빌립과 함께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때 헤로디아에게 반해 그녀에게 청혼하였고 헤로디아는 안디바가 왕후를 쫓아내는 조건으로 청혼을 받아들였다.
세례자 요한은 두 사람의 결혼을 비난했고 결국 요한은 안디바에 의해 감금되었다.
헤로디아는 딸 살로메를 시켜서 안디바의 생일날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오게 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면 간음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서 10:11-12】


유대법에는 이혼이 금지되어 있지만 로마법에서는 가능했다.
헤로디아는 모든 헤롯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이혼과 재혼은 그들에겐 합법적인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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