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대왕의 유대 왕국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B.C. 37년부터 B.C. 4년까지 유대 왕국을 통치한 헤롯을 아들 헤롯 안디바와 구분하기 위해 보통 헤롯 대왕이라 부른다.
헤롯 대왕은 첫 번째 아내 도리스를 버리고 하스모니아 가문의 마리암을 왕후로 앉혔지만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지는 못했다.
유대인들은 헤롯 대왕을 훌륭한 왕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이두매아 출신의 벼락출세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롯 대왕은 유대인에게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이상 로마의 이익과 유대의 국익이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재임 첫 몇 년 동안 헤롯 대왕은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를 견제하느라 애썼는데 그녀가 유대에 탐욕스런 눈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제로 유대의 일부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여리고와 그 부근을 통치하고 있었다.


히르카누스 2세는 살아 있었지만 귀가 잘려 성직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으므로 대제사장직에 복직하지 못했다.
하스모니아 가문에서 차기 대제사장직을 계승할 만한 사람은 왕후 마리암의 남동생인 열일곱 살 난 아리스토불루스 3세뿐이었다.
헤롯 대왕은 장모의 고집대로 B.C. 36년에 소년을 대제사장에 임명했으나 몇 개월 후 아리스토불루스가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리고 성에서 큰 잔치가 열렸을 때 동료들은 아리스토불루스가 질식해 죽기까지 함께 잠수놀이를 했다고 한다.
장모는 헤롯 대왕에게 혐의를 두고 감히 대제사장을 살해했다고 격분했다.
그녀는 친구 클레오파트라에게 하소연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설득하여 살인자를 잡기 위해 조사를 하도록 했다.
안토니우스는 헤롯 대왕을 소환했지만 그의 무죄를 선언하면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어떤 왕의 행동에 너무 깊게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고조되던 긴장은 B.C. 31년 악티움(Actium)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쳐 자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제 옥타비아누스가 명실상부한 로마 제국의 주인이 된 것이다.
누가복음서에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옥타비아누스이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 1월에 초대 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고 자신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칭했다.
로마의 속국들은 그의 심복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헤롯 대왕을 소환하여 그가 행정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유대의 왕으로 남아 로마에 충성을 다하도록 허락했다.
헤롯 대왕은 옥타비아누스로부터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했던 여리고와 그 주변 지역을 되돌려 받았으며 지중해 연안과 요르단 양쪽에 있는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그의 관할이 되었다.
헤롯 대왕의 통치영역이 아주 넓어진 것이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의 모임인 중의회 제도를 인정하여 종교문제는 그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근거하여 이미지 우상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법을 존중하여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로마 군기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헤롯 대왕은 아우구스투스뿐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사위인 마르쿠스 아그리파(Marcus Agrippa)의 호의를 받았다.
헤롯은 로마가 예맨에 원정할 때 5천 명의 원정군을 파견하는 등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이 로마의 동맹왕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역사에 나타난 헤롯 대왕은 위대한 건축가였다.
그는 예루살렘 서북쪽 바리스의 하스모니안 성곽을 재건한 후 친구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붙였다.
또한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방어할 목적으로 사해의 서남쪽 산 위에 마사다 성곽을 건립했으며, 사해의 동쪽 마키루스, 예루살렘 근처에 헤로디온, 나바테아 경계에 또 다른 헤로디온 그리고 여리고 근처 알렉산드리온에 성곽을 건축했다.
성곽 안티파트리스(Antipatris)와 파사엘리스(Phasaelis)는 그의 가족의 이름을 따 명명한 것이며 아그리피온(Agripeion) 또는 아그리피아스(Agrippias)라고 알려진 성곽은 아우구스투스의 사위 아그리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사마리아에 복구한 세바스테와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Caesarea)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 명명한 것이었다.
그가 인공항구를 갖춘 가이사랴(전에는 스트라토의 탑이라고 불리었다)를 건설하는 데는 무려 12년이나 걸려 B.C. 10년에야 완공되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데도 앞장서 B.C. 19년 초 1000명의 레위인들을 건축가로 훈련시켜 성지의 바깥뜰을 확장하고 가로수를 심어 아름답게 꾸몄다.
재임 첫 10년 동안 성전 주변에 화려한 대문을 만들고 건축물들을 세워 성전의 장엄함을 전세계에 자랑했다.
성전 미화작업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로마에 의해 파괴되기 7년 전인 63년까지 지속되었다.


헤롯 대왕이 성전을 화려하게 재건했음에도 유대인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은 과중한 세금을 부과시킨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가 유대 밖에서 이방인을 위한 신전들을 건축했기 때문이었다.
헤롯 대왕은 위대한 건축가였을 뿐 종교에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 문 위에 세워진 커다란 금독수리를 우상으로 여겨 그것을 끌어내렸을 때 헤롯은 그들을 포악한 방법으로 처벌했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헤롯은 신하들을 엄하게 감시했으며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현할 모든 가능성을 박탈했다.
그는 시민들의 모든 모임을 금했고 사방에 첩자를 심어놓았다.
가벼운 잘못도 엄하게 벌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히르카니아 요새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어디에나 사람들의 만남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끔 왕은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 밤에 평복을 하고 사람들이 모인 데 가곤 했다.
신하들 대부분은 실제로 즐겨서 또는 두려워서 그의 명령에 따랐다.
그렇지만 강한 저항을 하거나 신하들과 같이하지 않는 자는 사정없이 제거되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을 대적할 수 없는 군인, 정치가이자 또 목표물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수이며, 능숙한 운동선수이자 용감한 기사, 열정적인 사냥꾼이라고 칭찬했다.


헤롯 대왕은 광적인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B.C. 29년에 왕후 마리암을 처형했으며, 마리암이 낳은 두 아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알렉산드로스(Alexamdros)를 후계자로 지목해 로마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가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B.C. 7년에 처형했다.
역모설은 헤롯 대왕의 첫 아내 도리스가 낳은 아들 안티파터(Antipater)의 계략이었던 것 같다.
마리암의 아들들이 제거되자 안티파터는 왕위 상속자가 되었으나 얼마 후 헤롯 대왕으로부터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고 왕자 신분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헤롯 대왕이 B.C. 23년에 결혼한 대제사장 시몬 뵈투스(Simon Bo몋hus)의 딸 마리암 사이에 낳은 아들 헤롯이 후계자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B.C. 5년에는 이 아들마저 헤롯 대왕의 총애를 잃어 헤롯 대왕은 마리암과 이혼하고 장인 시몬 뵈투스를 대제사장직에서 쫓아냈다.
이제 사마리아 출신의 첩 말다크가 낳은 막내아들 안디바(Antipas)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말다크가 낳은 큰아들 아켈라오(Archelaus)도 있었지만 그는 아켈라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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