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샨 왕조는 3대 왕 카니슈카의 재위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대승불교의 근원적인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던 모든 사람, 승려로부터 보통의 불자까지 모두 아우르는 열성적인 불교신도들의 이 같은 행보가 대승불교를 발전시켰다. 다양한 붓다와 보살들에 대한 개념이 정립된 것도 수확이었다. 특히 보살은 중생의 지위고하나 선악을 불문하고 모두를 구제하고자 하는 동정과 연민의 화신이었다. 깨달음과 열반의 세계가 눈앞에 있는 데도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이 구원받기 전에는 붓다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도 있었다.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측면이 이처럼 두드러졌던 탓에 대승불교의 추종자들은 이타적인 자기 종파의 보살과 이기적인 소승불교승려들을 대별하기도 했다. 소승불교의 승려들은 사찰에 은둔한 채 자신들 일신의 깨우침만을 얻으려고 고군분투한다는 것이다.
쿠샨 왕조는 3대 왕 카니슈카의 재위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차례로 왕위를 이어받은 그의 두 아들 바시슈카와 후비슈카는 왕국의 전성기를 유지하는 일에서는 시원찮은 성과를 보였다. 후비슈카는 34년이라는 긴 재위기에 별다른 업적을 내놓지 못했지만 종교에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힌두교의 부흥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이로 인해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던 굽타 왕조에서 불교는 인도 북부지역에서만 약간의 세를 유지할 정도로 위축되었다. 카니슈카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니슈카의 손자 바수데바는 힌두교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그의 이름이 크리슈나를 부르는 여러 명칭들 가운데 하나를 딴 것이라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왕조 초기에 주조된 동전과 달리 그의 재위기에 제작된 쿠샨 왕조의 동전에는 다른 종교의 신이 단 한 명도 새겨져 있지 않다. 역설적인 사실은 쿠샨 왕조 말기에 불교가 쇠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시기에 인도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불교건축물들이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데칸 고원을 지배했던 한 독립국의 군주는 무려 25개나 되는 석굴사원을 건축했다. 이 석굴
사원들은 와그호라Waghora 강 물줄기가 굽으면서 생겨난 말발굽 모양의 계곡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특히 데칸 고원 북서쪽에 자리 잡은 아잔타 석굴은 유명하다. 현재 인도 서부의 아우랑가바드 북동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잔타 석굴 내부는 붓다의 생애를 표현한 조각과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른 붓다의 모습, 새・ 동물・사람 등으로 환생한 붓다의 전생 등 표현의 소재도 매우 다양하다.
아우랑가바드와 가까운 마하라슈트라 주 엘로라Ellora 마을에도 석굴이 건립되었다. 아잔타 석굴에 맞서기 위해 힌두교도들이 건립한 석굴사원이었다. 78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석굴사원은 매우 아름답다. 힌두교도들이 산등성이를 타고 나란히 놓인 두 협곡 사이에 놓여 있는 거대한 한 덩어리의 암석을 조각하여 사원을 만들었다. 전체가 하나의 암석으로 이뤄진 이 사원은 시바 신에게 헌정되었다. 불교의 세를 물리친 힌두교의 위용이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하게 하는 유적이다. 먼 남쪽의 힌두교를 신봉하는 한 왕국에서도 힌두교사원이 건립되었으며, 시바의 공적을 기리는 이야기를 돌에 새기기도 했다.
오늘날 첸나이Chennai 남쪽의 마말라푸람Mamallapuram 해안에는 팔라바의 왕 마헨드라바르만 1세가 갠지스 강의 흐름을 기리고자 세운 석상이 있다. 전능한 강에서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는 시바의 엉킨 머리카락을 통해 천국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성수로, 이 성수가 망자들의 업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마헨드라바르만은 610년 금욕주의를 표방한 힌두 시인 아파르스바민의 영향으로 자이나교에서 시바를 모시는 힌두교로 개종했다. 오늘날 마말라푸람(마하발리푸람Mahabalipuram이라고도 함)에는 이때 만들어진 일곱 개의 탑과 화강암으로 만든 동물 조각, 거대한 바위를 잘라 만든 사원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팔라바 왕조와 그들의 뒤를 이은 촐라 왕조의 문화는 중세시대에 저 멀리 캄보디아・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320년 굽타 왕조가 정권을 잡은 후 대략 550년까지 인도 북부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찬드라굽타 1세의 뒤를 이은 굽타 왕조의 2대 왕 사무드라굽타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쿠샨 왕조 시절에 난립했던 주변 소국들을 정복했고, 제국의 영토를 인더스 강 상류까지 확장시켰다. 그 후 아소카 집권기 이후 시대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의 위업을 달성했다. 굽타 왕조는 일부러 마우리아 왕조를 모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많은 면에서 마우리아 왕조와 유사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는 굽타 왕조가 열성적으로 힌두교를 신봉했다는 점이다. 남방원정에서 개선하는 도중 사무드라굽타는 “모든 바다 너머”까지 뻗어나간 자신의 권세를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장엄
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저 멀리 스리랑카까지 위세를 떨친 사무드라굽타의 위대함을 알리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방식은 없었다.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 의식은 제를 올리는 이가 가축과 가축이 자라난 땅의 주인임을 확인시켜 주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권을 손에 쥔 지 얼마 되지 않아 권력기반이 약한 통치자는 자신을 명실상부한 제국의 주인으로 바로 세우길 원했고, 그럴 때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종마로 제를 올리곤 했다. 이 아름다운 동물은 원하는 곳 어디라도 갈 수 있는 빠른 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언제나 한 무리의 전사들이 종마를 따라다녔지만, 자신을 생포하고자 하는 놈은 언제라도 이 빠른 다리를 이용해 따돌릴 수 있었다. 사무드라굽타가 제에 올리기로 한 말은 1년간의 2-18 엘로라에서 발견된 시바의 아내 두르가(전쟁의 여신) 여신상. 데비 여신과 종종 동일시되는 두르가 여신이 물소 형상을 한 악마 마히샤를 죽이고 있다. 엘로라 석굴은 모두 34개로 2Km에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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