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환생: 환생과 무아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실은 실제로 무아이며, 분리될 수 없고, 무상하며 계속 변화하는 ‘저것’이다. ‘저것’은 본질적으로 명칭을 붙일 수가 없으며 알 수도 없다. 불교 신자들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저것’에 이름을 붙이려 하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저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안다는 망상에 빠질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것’이 우리의 것이고 우리에게 ‘저것’이 있으며 다른 단어와 개념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것’을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유대 신앙은 이런 통찰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유대인은 ‘저것’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하느님의 참된 이름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로 된 유명한 네 자음 문자다(YHWH 또는 YHVH). 이 이름은 너무나 성스러워 신앙심이 깊은 많은 유대인들은 이 문자를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이 네 자음 문자를 소리 내 말하는 대신 단순히 아도나이Adonai(주主)나하셈Hashem(네 자음 문자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야훼의 네 자음 문자는 보통 영어로도 완전히 쓰이지 않으며 ‘저것’을 말할 때 근본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실제로 알 수 없다. 결국 침묵을 지키고, 마음을 챙기고, 숨을 쉬고, 미소짓는 편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불교의 사후세계는 영어로 ‘환생’보다는 ‘부활’에 가깝다. 환생을 의미하는 단어 Reincarnation은 문자 그대로는 ‘육체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무아의 통찰에 비추어 볼 때, 갔다가 돌아온다는 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리가 분리된 자아가 아니라 ‘저것’의 보이지 않는 발현이라면 도대체 어디로 갈 수 있으며 도대체 어떻게 돌아온단 말인가? 게다가 ‘당신’이라는 존재는 또 무엇인가? 영어로 Rebirth는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나다’라는 점에서 환생보다는 조금 나아보이지만 우리의 존재를 떠나고 돌아오는 일종의 분리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여전히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환생과 무아
우리는 분리되고, 소외되고, 길을 잃은,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생명체나 사물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일부가 아니다. 우리는 결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보통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아 있는 존재인 우리는 일반적으로 살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물과 무기질 몇 킬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실체는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은 변형과 변화의 과정, 즉 어떤 유형이 있는 에너지의 흐름이다.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하는 건 실제로 우주의 그 밖의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실체라면 무엇이 환생하고 부활한단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환생에 대해 숙고해보면, 쉽게 말해서 우리가 과거에 클레오파트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바흐나 베토벤이었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 수백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묘한 에너지 유형이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넘어가고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는 전생의 기억까지 넘어가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에너지 유형을 보통 우리라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우리’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의 생각으로 할 수 있는 멋진 게임 중 하나는 ‘만약에’라고 가정하고 사실에 반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예일대학에 들어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예일대의 비밀 조직 ‘해골과 뼈’에 들어가 조지 부시와 존 케리와 어울려 다녔다면 나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을까? 어떤 기회가 있었을까? 또는 운동 신경이 뛰어나게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완벽하고 다정다감한 부모를 만났더라면? 또는 리버풀에서 존, 폴, 조지, 링고와 막역한 친구로 지냈더라면, 그리고 그들이 내게 비틀즈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면 어땠을까?” 등을 말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흥미로운 질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의 뛰어난 뇌가 이런 정신적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예일대학에 입학했다면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만든 것 중 하나는 우리가 했던 경험이지 다른 경험이 아니다. 우리가 좀 더 탄탄한 체격이었다면 어땠을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몸과 의식은 하나다. 다른 몸이었다면 의식도 달라졌을 것이다. 탄탄한 몸이었다면 우리의 체험과 의식도 바꿔놓았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닐 것이다.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가 되었더라도 그것 역시 우리를 바꾸어놓았을 것이므로 우리가 아닌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한때 다른 시간이나 장소에 살던 다른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돌아와 현재 시간과 환경에서 이 몸으로 삶을 살고 있다면 이는 무슨 의미일까? 특정 유전자를 갖고 특정 경험을 하면서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 몸으로서 존재함이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모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마도 지금쯤이면, 우리 머리는 핑핑 돌아 어지러울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어지러움 속에서 사후에 일어날 일은 모른다고 말한 노선사에 대한 존경심이 들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자신이 집착했던 개념을 조금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붓다는 항상 현실을 똑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개념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다.
환생을 초 두 자루에 빗대어 설명한 이야기가 있다. 내게 불 켜진 초가 하나 있고 그것으로 다른 초에 불을 붙이고는 꺼버린다고 하자. 그러면 두 번째 초의 불꽃은 첫 번째 초의 불꽃과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우리의 생각은 어떤가? 사람들은 흔히 같은 불꽃이나 다른 불꽃 둘 중의 하나로 재빨리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두 가지 모두 사실이거나 또는 두 가지 모두 아니라고도 답할 수 있다. 같은 불꽃인가? 답은 그렇다. 어느 정도는 그렇다. 두 번째 불꽃은 첫 번째 불꽃의 연속인 셈이므로 넓은 의미에서 같은 불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불꽃인가? 역시 답은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두 번째 초의 불꽃은 첫 번째 초와는 다른 밀랍과 심지에서 다른 산소를 태워 생겨났다. 예리한 칼날 같은 불교의 이론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진술이 모두 타당해 보인다. 그것은 이전과 같은 불꽃이다. 그것은 다른 불꽃이다. 그것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불꽃이다. 또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불꽃이다. 그렇다면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지닌 생명 에너지의 불꽃이 다른 생명으로 옮겨간다면 우리는 동일한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