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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쿄의 메가네에에서 볼 수 있는 세밀한 경관 묘사는 우키요에에 영향을 끼쳐 1770년대와 1780년대에 우타가와 도요하루歌川豊春(1735~1814)의 우키에에 계승되었다.
서양화의 원근법을 도입한 풍경 판화 우키에에 탁월한 도요하루는 시대의 취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안에이安永에서 간세이寬政기에 걸쳐 명성을 얻었다.
일본의 초기 풍경화가 대부분 노조키 카라쿠리(이중희 174, 124)를 통해 감상하는 메가네에였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1770년대부터 1800년대 까지 서양의 양식을 자의적으로 받아들인 화풍이 성행했는데 에도양풍화江戶洋風畵로 아키타 난화와 시바 고칸의 양풍화는 언급할 만하다.
오늘날 동경인 에도에서 북쪽으로 560km 떨어진 아키타 번秋田藩의 영주 사타케 쇼잔佐竹曙山과 그의 신하 오타노 나오타케小田野直武(1749~80)가 중심이 되어 그린 서양식 회화를 아키타 난화秋田蘭畵라고 한다.
아키타 번은 악화된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1773년에 당대의 물산학자 히라가 겐나이를 에도로부터 초빙했으며 겐나이는 아키타 번의 지성支城인 가쿠타데에서 그곳의 무사 오타노 나오타케의 뛰어난 그림 솜씨를 보고 그를 에도로 오게 해서 서양화를 배우게 했다.
나오타케가 처음 그린 것은 1774년 8월에 간행된 <해체신서解體新書>를 위한 삽화였다.
서양 의학서에 있는 동판화로 된 인체해부 그림을 모사하는 것으로 서양인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곧 서양 양식을 익히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음영에 의한 엄격한 사실주의를 익힐 수 있었다.
아키타 번의 영주 사타케 쇼잔은 영지와 에도를 격년제로 근무하는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에 의해 나오타케가 타계한 1780년 이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에도에서 근무하면서 아키나 난화의 창시자 나오타케로부터 서양 양식을 배웠다.
아키나 난화는 자주적 서양화풍의 그림이라는 것 외에도 자체의 화론에 입각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사타케 쇼잔이 1778년 9월에 발간한 『쇼잔사생첩曙山寫生帖』에 ‘화법강령’과 ‘화도이해’라는 소제목으로 아키나 난화 화론이 수록되어 있다.
그들은 서양화를 유용성의 명분으로 받아들였으며 박물학 도감과 같은 사실묘사가 절실한 분야에 필요하다고 타당성을 주장했다.
쇼잔은 사생도뿐만 아니라 서양화풍의 그림도 그렸다.
쇼잔은 ‘화법강령’에서 동양화의 근간과 같은 필법을 부정했다.
첫째, “필법을 주로 할 경우 실용을 잃어버린다”고 하면서 “세필로써 형상을 그리고 채색하여 비로소 묵의 흔적을 없앤다”고 했다.
필법을 부정하는 반면 세필의 묘사와 채색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둘째, 여백 대신에 실공간을 도입한 것으로 동양화에서 여백은 암시적 의미를 지니며 여운을 담은 표현공간의 역할을 하지만, 쇼잔은 여백을 비현실적 공간으로 인식했으므로 화면 전체가 하늘이나 구름 등 현실적인 실공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도이해’에서는 서양화법을 논했다.
첫째, 음영법으로 사물의 그림자가 태양의 반대편에 생긴다는 것이다.
음영은 사물의 실체인식이 아니라 광원에 의한 일시적인 무형의 현상이지만 쇼잔은 현재 바라보는 상태가 사물을 파악하는 기준임을 주장했다.
둘째, 원근법으로 멀고 가까움의 차이에 따른 크기와 농담의 변화, 지평선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함을 역설했다.
특기할 것은 서양화론이 서양의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양화론에서 그 개념을 빌어온 것이란 점이다.
나오타케가 서양 양식으로 풍경화를 그린 것이 에도의 서민 출신 화가 시바 고칸司馬江漢(1747~1818)을 자극했다.
고칸은 히라가 겐나이의 소개로 나오타케를 만나 그로부터 직접 서양화법을 배웠다.
그는 일찍이 1770년경 우키에에서 니시키에라고 불린 다색 판화 기법의 개발에 성공한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1725?~70)의 화풍에 투시원근법을 적용했다.
하루노부는 1765년에 다색 판화 기법을 개발하여 우키요에에 획기적인 발전을 꾀했다.
고칸은 우키요에풍의 미인화에도 음영화법을 적용하여 새로운 화풍을 개발하기도 했다.
고칸은 원근법을 적용하여 일본의 풍경을 그리면서 낮은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사용하여 현실 공간을 광대한 공간으로 느낄 수 있게 표현했다.
그는 수평선 부근을 밝게 처리하거나 경물이 사라지는 소실점에 산이나 연기 등을 구성시켰다.
그리고 화면 전체에 명암이 나타나게 했는데 그의 작품은 더러 이국풍의 풍경으로 나타났다.
그의 1783년작 <삼위경도三幇景圖>와 1786년작 <영국교도兩國橋圖>에는 실경보다 넓게 펼쳐진 공간과 투명하게 맑은 대기가 느껴진다.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을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이 시기에 그대로 옮길 수 있게 해준 기계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고칸이 말한 사진경寫眞鏡이 그것으로 초기 카메라Camera Opuscule이다.
그는 사진경에 관해 적었다.
“산수는 그 땅을 밟는 것과 같이 그리는 법으로서 사진경이라고 하는 도구이다.
이것을 가지고 만물을 옮겨 그린다.
때문에 일찍이 대상을 보지 않고 그리는 법이 없다.
동양화와 같이 무명의 산수를 그리는 일은 없다.”
에도양풍화는 1787년 막부의 총리격인 로쥬老中에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1758~1829)가 부임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다노부는 간세개혁寬政改革을 단행하여 막부체제를 위협하는 상업 자본의 만연을 억제하고 귀농과 농업생산 증대에 힘썼다.
그는 간세이학寬政異學의 금禁이란 정책으로 양학洋學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했다.
양풍화도 기반이 점차 약화되었으며 양풍화가 개발한 풍경 묘사는 에도 시대 말기의 우키에로 흡수되었다.
그렇지만 현실의 자연공간을 객관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원근법과 명암법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점과 세밀하게 묘사하는 서양화의 영향은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1866~1924)가 인상주의 양식을 소개할 때가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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