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크가 전한 스파르타 사회
 

  플루타크가 전한 스파르타 사회

플라톤은 초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Renaissance 이후 사람들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플루타크Plutarch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인물로 인식된다.
플루타크의 영향은 1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진보주의자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을 발견한 청교도들에게도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간접적이지만 독일인의 사고에 크게 작용해 근래에까지 이르렀다.
플루타크는 스파르타에 법을 제공한 리쿠르구스Lycurgus에 관해 기록하면서 여러 나라의 정치체제를 연구하기 위해 여행을 많이 했으며 크레테Crete의 법이 "매우 직접적이고 가혹하다"고 좋아했다.
그는 아이오니아Ionia 법은 "사치스럽고 공허하다"고 싫어했다.
그는 이집트에서 군인을 시민과 분류하는 것이 유효함을 깨달았으며 이런 방법을 스파르타에 실행했고 시민들을 위한 고상한 공화국Commonwealth을 건설했다.
플루타크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구별이 없도록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했으며 돈을 금이나 은으로 만드는 것을 금했으며 쇠로 돈을 만들도록 했다.
사치스럽고 무익한 과학을 추방했는데 경제적으로 그런 데 심취할 여유가 없었으며 외부와의 교역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돈이 값어치 없는 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나라 상인들은 교역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시민들은 함께 식사하면서 동일한 음식을 먹게 했다.
소녀들을 벌거벗겨 스포츠, 놀이, 그리고 춤을 추게 했던 것은 플라톤이 말한 고상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청년들로 하여금 결혼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남자들은 늙어서 젊은 여인을 가져야지 하는 병든 생각을 하지 않으며 젊은 남자는 젊은 여인으로부터 아이를 가졌다.
그는 말했다.
"정직한 남자는 법적으로 다른 남자의 아내를 사랑할 수 있으며 ... 그녀의 남편에게 자기가 여인과 동침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간청할 수 있으며, 잠깐 간통하고 싶은 생각에서 또볼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어리석은 질투란 없으며, "리쿠르구스는 자녀들이 어떤 개인의 소유가 되는 걸 싫어했고 자녀들은 모든 시민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이유로 그는 모든 사내들이 자식을 가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가장 정직한 사내들만이 자식을 갖게 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플루타크는 이런 원리를 농부들이 자신들의 가축에 적용시켰다고 적었다.
자식이 태어나면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부족의 원로들에게 데려가 그들의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원로들은 아이가 건강하면 아버지에게 돌려주지만 그러하지 못하면 아이를 물구덩이에 빠뜨려 죽였다.
아이가 7살이 되면 집을 떠나 학교에 입학하고 주로 배우는 것은 복종하는 것, 고통을 이겨내는 것,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대부분 그들은 벌거벗고 지내며 12살이 되면 코트를 입지 않고 더럽고 추한 생활을 하면서 일 년에 몇 번 허락받은 날에 목욕을 하게 된다.
그들은 지푸라기 위에서 잠을 자며 겨울에는 지푸라기에 엉겅퀴thistle(스코트랜드의 국화)를 섞는다.
그들은 훔치는 방법을 배우는데 훔치기 위한 도둑질이 아니라 훔치다가 적발되면 벌을 받는데 어리석기 때문에 받는 벌인 것이다.
동성연애(사내와 사내 혹은 여자와 여자 사이)는 스파르타에서 보통 있는 일이며 청년기의 교육에서 동성연애를 가르치기도 한다.
사내 동성연애자의 칭찬과 벌은 같은 동성연애자에게도 적용된다.
플루타크가 전한 바에 의하면 한 소년이 싸우다가 다쳐서 소리를 내어 울면 소년이 겁장이이기 때문에 소년의 동성연애 상대자에게 벌을 주었다고 한다.
스파르타에서 시민들은 교역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여행이 허락되지 않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출입도 마찬가지의 경우에만 허락했는데 외부의 관습이 스파르타의 미덕을 헤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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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경험의 마찰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에게는 따로 예술론이 없었지만 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Je pense, donc je suis(라틴어: cogito ergo sum)”4)라고 하는 자아에 대한 성찰은 신고전 미학에 크게 이바지했다.
본질적으로 대수학과 기하학에 기인한 그의 인식론적 방법론과 귀결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고찰에 이바지했다.
데카르트의 인식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요소들은 이성과 자연에 관한 여러 의미의 개념들에서 혼용되어 나타났다.
자연을 좇는 것과 이성의 규칙을 좇는 것이 판단력비판에서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예술가에게 귀감이 되었다.
데카르트로부터 추상화된 이성적·지성적인 관점이 라이프니츠, 볼프, 바움가르텐의 미학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덜 추상화된 경험적·감성적 경향의 베이컨, 로크, 샤프츠베리, 흄의 미학에 대조가 되었다.
16세기에 미술품을 만들고 판단하는 데 대한 규칙은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사람들과 고전주의 작가들에 의해 성립되었다.
미학에서의 새로운 이성주의가 예술이 객관적이고, 본질적이며, 이상적인 자연의 모방이라는 그런 이론과 같은 기본 자명한 이치로부터 연역에 의해 기초가 되게 해서 그들의 규칙들을 선험적인 것으로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son(1709-84)은 1765년 『셰익스피어 서문 Preface to Shakespeare』에서 “일반 자연의 정확한 재현들이” 미술의 끝이라고 지적했고, 6년 전에는 화가를 “개별적인 것이 아닌 종species을 측정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여호수아 레이놀드스 경Sir Joshua Reynolds(1723-92)은 1778년 『논문들 Discourses』에 화가는 “자연을 개요 안에서 고찰할 것을 충고하고, 자신의 모습들 하나하나에서 종의 성격들을 나타낸다”고 적었다.
이듬해 그가 발표한 『게으름뱅이 Idler』는 그로 하여금 『모던 화가들 Modern Painters』을 출간하게 했는데 책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의 흐름은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구성하고 … 모든 식물과 마찬가지로 모든 동물의 종자들은 다양한 선들이 중심에서 종결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경향이 생기게 하는 자연을 향한 고정되거나 결정적인 형태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또는 한 중심으로부터 다른 방향들로 흔들거리는 진자들에 비교할 만하다.
그리고 오직 하나만이 그 외의 점을 경유해서 지나갈지라도 그것들 모두가 그 중심을 가로지르듯 완전미는 종종 기형보다는 자연에 의해 생산된다.”4-1)
레이놀드스는 하나의 종one species이 다른 종에 비해 객관적으로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같은 종의 것들에서 미는 모든 다양한 형상들의 매체 또는 중심”4-2)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확실히 각 종의 중심적 혹은 평균적 형상이 자연의 목적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레이놀드스와 존슨 두 사람은 미술을 자연의 본질을 적합하게 모방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예술에 적용한 규칙들은 이성과 경험 사이에서 문제를 야기시켰다. 코네일Corneille은 1660년에 출간한 『논문들』에서 드라마의 구성에서 공간과 시간 그리고 행위의 관측되는 통일성의 요구는 인정하지만 자신은 그것들에 노예가 되지 않고 드라마의 효과 혹은 관객들의 즐거움을 위해 종종 규칙들을 깨거나 수정했다고 고백했다.
적합한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규칙을 따를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일종의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회의였다.
드라마가 기능이나 종결을 가졌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규칙들이 있어야 하지만 그 규칙들은 단지 그럴 듯하며 부분적으로는 경험에 근거해야 할 것이라는 사고가 생겼다.
이성과 경험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예술은 이성보다는 오히려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음악에서 이성과 경험의 충돌은 병행되는 5도 음정들의 기피와 같은 절대적인 규칙들에서와 같이 하모니와 협화음에서 발생했다.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화음을 위한 수학적 기초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받아들일 만한 화음인지는 귀가 판단할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음악이 관객의 입장에서 판단의 대상이라는 것이며 이는 다른 예술에도 해당하는 문제였다.
이런 상반된 주장에 화해적인 이론이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1646-1716)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는 『자연과 고상함의 원리들 Principles of Nature and of Grace』에서 모든 감각들과 마찬가지로 음조들을 그 밖의 개체들의 지각들과 더불어 미리 정해 놓은 하모니에서 매순간마다 사소한 지각들의 무한한 경향의 혼돈된 뒤범벅으로 보았다.
느낌의 형태 속에 이성이 있다고 믿은 그는 현을 듣는 데서 영혼은 무의식적으로 장단을 세며 단순할 때 협화음을 만드는 수학적 비율을 비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합리적인 사고는 한동안 이성과 경험의 문제를 잠재울 수 있었지만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커지면서 이성에 대한 반발이 다시금 거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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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

 
에로스의 역사를 혹은 기원을 알아본다.
이 말은 플라톤으로부터 네오플라톤주의자들은 물론 초대 기독교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때까지 널리 통용되었다.
에로스는 성적 열정으로부터 배움에 헌신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궁극적인 대상은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한 것들을 관조하는 장점이 창조의 미이며,
세상의 미를 느끼는 것이 세상을 에로스하는 것이고,
이는 곧 창조주를 사랑하는 행위이다.
이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확고해지기 전의 에로스의 의미를 그리스 고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호메로스가 에로스란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창조주를 지칭해서 이 말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일반 명사인 사랑, 욕망의 뜻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헤시오도스Hesiod(기원전 700년경)의 <신통기 Theogony>에는 에로스가 원시시대 세 신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며 나머지 두 신들은 혼돈과 대지이다.
에로스에게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신들의 계보에는 빠졌지만 그는 두 동료 불멸의 신들보다 훨씬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사지가 무력해졌으며 신들과 인간 모두의 이성에 무력해졌다.

헤시오도스가 언급한 에로스는 이성의 적인 권력에 자신을 부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은 소포클레스Sophocles(기원전 496-406년경)의 <안티고네 Antigone>에서 발견되는데 안티고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이유로 크레온Creon이 그녀가 오빠의 시신을 장사지낸 사실을 알렸을 때 들려오는 합창 속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에로스는 안티고네의 비극을 알린 신으로 등장한다.
에로스는 정복하기 어렵고, 파괴적이며, 바다와 들판의 거주자들 중 방랑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신들과 명이 짧은 인간은 에로스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그는 자신의 희생자들을 미치게 내몰고 정의를 악으로 전환시킨다.
이상이 그리스 신화에 나타난 에로스의 모습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이성애, 동성애,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사랑,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의 사랑, 우정, 조국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 이 모든 사랑의 형상들이 에로스 혹은 필리아philia(자애 혹은 화목의 뜻이다)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랑이 사람들을 하나의 굴레 안에 매이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사랑뿐 아니라 동물들과 우주의 모든 원소들도 이런 힘에 의해 하나가 되는데 그에게 사랑은 여신 필연Necessity이 창조한 것이다.
그는 유일한 참된 실재를 일자the One로 보고 이것이 무한하고 분할할 수 없는 까닭은 사랑이 작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파르메니데스와 동시대인으로 그보다는 약간 나이가 어린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기원전 5세기경)의 저작에는 사랑이 우주역사의 진로를 설명해주는 두 우주적 힘들 중 하나로 부상되는데 다른 하나는 투쟁(혹은 미움)이란 존재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일자가 되게 하는 사랑과 많은 것들로 분열시키는 투쟁 이 두 요소가 사물들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 외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자연을 조화와 분열의 힘들 사이 긴장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을 구형으로 보고 운동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에 의하면 황금시기에는 투쟁 혹은 미움이 밖에 있게 되고 사랑이 안방을 차지하지만 점차 미움이 침투됨에 따라 사랑은 쫓겨나고 드디어 최악의 상태에서 미움이 완전히 안방 안에 있게 되고 사랑은 구형 밖에 있게 된다고 보았다.
다음에는 왜 그런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에 의하면 반대의 운동이 시작되어 황금시기가 다시 도래한다.
그러나 영원히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같은 주기가 되풀이될 뿐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에로스를 평화와 조화를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사랑, 미의 여신)에게 귀속시켰는데 그에게 아프로디테는 에로스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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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토닉 러브의 기원과 의미

 
'플라토닉 러브 Platonic Eros'와 '소크라테스 러브 Socrates Eros'란 말을 만든 사람은 피치노Marsilius Ficinus(1433-99)였다.
그는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이 말을 사용했고 그 밖의 글에서도 사용했다.
'플라토닉 러브'란 플라톤에 의해 설명된 에로스를 의미하며 피치노는 신성한 사랑의 뜻으로 이 말을 사용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창조주에 대한 사랑의 준비로 보고 이것이 인간의 욕망 가운데 있는 참된 내용이며 또한 실재 목표로 인식했으며 이러는 중 신성한 선과 아름다움의 광휘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는 참된 사랑이나 우정은 늘 상호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두 사람의 참된 관계는 인간의 본질적인 것에서 발견되는 교감으로 창조주에 대한 각자의 본래 사랑에 기초한다.
따라서 두 친구 사이의 사랑이란 있을 수 없고 반드시 셋의 사랑인데 두 인간과 창조주의 사랑인 것이다.
이같은 플라토닉 러브는 16세기 이탈리아와 유럽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많은 서정시인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피치노가 말한 플라토닉 러브로 반영했으며 투스칸Tuscan의 시인들과 페트라르카F. Petrarch XII(1304-74)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로스의 개념은 17세기와 18세기에 와서 주로 심리적인 작용으로 인식되었으며 주로 소설과 시 그리고 격언에서 언급되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창조주에 대한 사랑은 문제가 없었지만 성적 사랑은 도덕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결혼 이전의 성적 사랑은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내친김에 에로스를 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한 플라톤에 관해 잠시 언급하려고 한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에 관해 장황하게 언급했는데 그에게 에로스는 미에 대한 사랑, 즉 이상적인 형상이었다.
플라톤은 철학적 훈련을 통해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상적인 것을 욕망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에게 미는 질료적 실재와 이상적 실재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성적 사랑 자체는 사랑의 형상들 중 가장 저급한 것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게 하는 것은 미로서의 이상적인 사랑의 씨앗이다.

사랑에 대한 개념은 르네상스 네오플라톤주의에 와서 다양하게 변했다.
이는 플라톤의 사유들을 총괄해 새로운 형식으로 가톨릭적 중세로 전달한 플로티누스Plotinus(203-270)에 의해서였다.
그는 사랑을 창조주, 마귀, 열정 세 가지 형상으로 분류한 후 창조주의 사랑을 천상의 아프로디테(에로스)와 지상의 아프로디테로 구분했다.
천상의 아프로디테는 이데아들의 사랑과 지성적 세계의 영혼에 대한 영감을 준다.
지상의 아프로디테는 결혼에 거하며 감관세계의 영혼이다.
마귀의 사랑은 개별적인 인간의 영혼으로 예증된다.
열정은 절도있는 사람에게 미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추한 물질계 안에 전적으로 거하는 자들에게는 성적 즐거움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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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nysus in a Boat

 
그리스의 도공들은 예술적으로 혹은 기술적으로 훈련을 받은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도자기에 사람의 모습들을 검정색으로 묘사했는데 기원전 540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직경 12인치되는 술잔에 그려진 '배를 탄 박카스 Dionysus in a Boat'를 보면 배와 박카스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를 검정색으로 묘사했으며 돛은 나무처럼 줄기로 하고 포도를 주렁주렁 매달아 박카스가 주신임을 나타냈다.
디오니소스Dionysus는 박카스의 또 다른 명칭이다.
철학자 니체가 디오니소스적 예술 어쩌구저쩌구 했는데 바로 박카스적 혹은 열광적 예술 어쩌구저쩌구란 뜻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니체는 아폴로적 예술 어쩌구저쩌구 했는데 아폴로는 태양의 신으로 조화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아폴로적 예술은 조화를 뜻하는 데 반해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반조화적 혹은 조화를 무시하고 열광을 나타내는 예술을 뜻한다.
박카스가 배를 탄 모습은 신화에서 가져온 주제로 호메루스에 의하면 박카스는 한때 해적들에게 유괴된 적이 있었고 그는 배 전체를 포도줄기로 채워 포도가 열리게 했으며 해적들은 공포에 질려 모두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그들은 고래가 되었다는 것이 신화가 전해주는 내용이다.
질그릇에 그려진 박카스가 탄 배 주변에 있는 고래들은 바로 해적들의 화신인 셈이다.
7마리의 고래와 7송이의 포도는 박카스의 항해에 행운을 비는 듯한 것들로 보이는데 7이란 숫자는 온전한 수를 상징한 것으로 성서에도 7은 온전수로 사용된다.
7이 온전수란 말은 7일 동안 기도했다고 할 때 꼭 일주일을 기도했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기간 동안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은 온전수의 마지막 수로 우리가 사용하는 10에 해당한다.
10 다음에 다시 11, 12 하고 사용하듯 7이 끝나면 다시 셈이 시작되는 것이다.
수의 개념에 이런 것도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40의 수가 있다.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를 헤맸다고 할 때 40일은 한 달 하고도 열흘이라기보다는 아주 오랫동안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모세가 광야를 40년 동안 헤맸다고 할 때 39년 하고도 1년을 더 헤맸다고 하기보다는 아주 아주 오랜 세월을 헤맸다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41년 혹은 49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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