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네데스 
 

아테네가 기원전 156년 외교의 목적으로 세 사람의 철학자를 로마로 보낼 때 카르네데스도 선출되었다.
로마에서의 그의 강의는 유명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 몰려 왔다.
당시 로마의 젊은이들은 문명의 나라 그리스를 동경하면서 그리스인의 언행조차 닮으려고 할 때였다.
카르네데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강의한 후 그 이론들을 조목조목 반박함으로써 반대의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결론이 증명할 만하지 못함을 증명했다.

럿셀이 전한 바에 의하면 카르네데스는 소크라테스가 불의에 상처를 입은 것은 그것을 겪는 것보다 더욱 더 사악한 행위로 소크라테스는 불의의 하수인이라고 강의했으며 그는 위대한 국가는 이웃에 있는 국가들에 대해 불의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위대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호전적인 기질의 로마 젊은이들은 호전적인 그의 강의를 대단히 신뢰할 수 있었다.

배가 난파했을 때 사람들은 나약한 자들을 희생물로 삼아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여인과 아이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가 적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한 후 달아나는 중에 가령 말horse이 없다고 가정하고 그때 부상당한 동료가 말을 타고 가는 걸 우리가 보았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가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동료를 말에서 끌어낸 후 그 말을 타고 달아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의 논리는 플라톤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경악시켰지만 현대 감각을 가진 로마의 젊은이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카르네데스의 강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늙은이 카토Cato로서 고집이 셌고 성격이 대쪽같았으며 융통성이라고는 바늘구멍만큼도 없었다.
카토는 로마가 야만적인 방법으로 이웃나라를 친다고 비난한 적도 있었다.
그는 평생 단순한 생활을 했으며 아침에 일찍 일어났고 힘에 겨운 노동을 했으며 조잡한 싸구려 음식을 먹었고 비싼 가운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여러분은 마포에 사는 돈많은 황부자를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
카토가 바로 그 노랭이 황부자 같았으며, 이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질대로 그는 정직했고, 약탈하거나 뇌물을 주는 법이 없었다.
카토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미덕을 로마인에게 가르치려고 했으며 사악한 자들을 추격하고 기소하는 것이 정직한 사람들이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다.

럿셀의 <서양 철학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카토가 마닐리우스인 한 사람을 상원으로부터 추방했는데 단지 대낮에 딸이 있는 데도 아내와 매우 열정적인 키스를 했기 때문이었다."

럿셀이 저서에 기술한 바에 의하면 카토는 권좌에 있을 때 사치와 향연을 없앴고 자신의 아내로 하여금 자녀들에게만 젖을 먹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들에게도 먹이게 해 노예들로 하여금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그는 늙은 노예들에게 일을 시키는 데 가책을 받지 않으려고 팔았고 노예들은 잠을 자든지 일을 해야 했는데 늙은이 등살에 노예들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노예들끼리 싸우도록 조작했으며 "노예들이 서로 우정을 나누는 것을 참고 보지 못했다고 한다.

카토와 카르네데스와 상이한 점은 그는 실패했으며 로마인들은 카르네데스의 이론을 이론을 받아들였다.
카르네데스의 뒤를 이어 아카데미의 책임자가 된 클리토마쿠스Clitomachus는 강의하기를 좋아한 선임자와는 달리 저술하기를 좋아해 4백여 권이 넘는 책을 썼고 그의 이론은 카르네데스의 것과 유사했지만 좀더 유용했다.
의심하기를 좋아한 두 사람은 신성, 마술, 그리고 점성학에 반박했는데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을 지지했다.
두 사람은 체계적 논리들을 활률의 정도에 따라 정립하면서 우리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지만 한 이론이 다른 이론에 비해 좀더 진실에 유사하다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저서는 현존하지 않고 그의 몇 마디만 인용으로 전해 오는데 그것들로 그의 이론을 정립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고고학자들은 기와 몇 조각과 대들보의 일부분만 발견해도 그것들로 당대의 건물을 그려낼 수 있지만 철학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클리토마쿠스의 사망과 함께 아카데미의 회의주의 경향은 중단되었으며 아카데미의 이론은 서양철학사에 한 세기를 수놓았는데 다음에 살펴볼 스토익 학파의 이론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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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되는 견해를 모두 수용하는 회의주의자 
 

경이로운 회의주의에 매료된 사람은 티몬보다 나이가 조금 어린 아르케실라우스Arcesilaus였으며 그는 늙은이로 기원전 240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융통성이 있었던 학자로 어떤 의미에서 회의주의를 가르쳤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가 우리에게 가르친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알면서도 모른다고 내숭을 떤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사람들은 종말로 그가 모른다고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더구나 많은 그의 논쟁이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지식에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플라톤의 저서 <파르메니데스> 후반의 경우 그는 앞 뒤 없는 전차와도 같은 논증을 한참 하다가 궁여지책으로 양편의 상반되는 견해 모두를 수용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우리나라 정승 횡희의 에피소드가 있다.
정승은 재판에서 원고의 말을 듣더니 그가 옳다고 말했다.
이튿날 피고가 와서 변명하자 그가 옳다고 말했다.
이를 보다 못해 아내가 두 사람 중 하나만 옳아야지 어떻게 두 사람 모두 옳을 수가 있겠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랬더니 황희는 아내에게 "당신 말도 옳소"라고 말했다.

플라톤의 상반되는 양편의 견해 수용은 회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젊은이들이 아르케실라우스의 가르침에 감동한 까닭은 자신들의 불완전한 지식에 회의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르케실라우스는 어떠한 논제들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제자들이 제시하는 어떠한 논제들에 대해서도 타당성 있는 이유를 들어 논박할 줄 알았다.
그는 어떤 때는 두 개의 모순되는 명제들을 갖고 논쟁하는 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두 개의 명제를 설득력있는 방법으로 진전시킬 줄 알았다.
그는 요즘 유능하다는 변호사와도 같았는데 마음만 먹으면 죄인도 무죄하다고 논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배울 것이 별로 없었고 다만 그의 영리함과 진리에 대한 무관심만을 배울 수 있었다.
아르케실라우스의 영향이 컸으므로 아카데미는 약 2백 년 동안 회의주의에 빠지고 말았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제자 카르네데스Carneades(기원전 180~110)가 아카데미의 책임자가 된 후로는 더욱 더 회의주의가 아카데미에 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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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가 곧 플로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차이가 된다.
혼과 몸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를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을 몸의 형상Form으로 인식하면서 혼을 몸의 구석구석에 뻗혀 있는 신경조직처럼 간주한 반면 플로티누스는 혼이 몸의 형상이라면 지성적인 행위가 불가능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반대했다.

이와 달리 스토익주의는 혼이 물질이라고 주장했는데 플로티누스는 혼의 조화로 볼 때 이는 불가능하다고 스토익주의에 반대했다.
그는 혼이 창조되지 않으면 몸이 존재할 수 없으며 혼이 존재하지 않으면 물질은 사라진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미학에 적용해서 말한다면,
조각가가 이순신동상을 제작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먼저 가진 후 그 아이디어가 이순신장군이라는 형상 또는 부피로 착안되어 조각가로 하여금 청동으로 이순신의 형상을 시각적으로 제작하게 만드는 것이고, 이는 조각가의 지성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미학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소위 말하는 플라토닉 러브이니 플라토닉 미학이니 하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을 실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것의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 혹은 개념을 실재로 인식하를 걸 말한다.
플로티누스에게는 혼은 물질도 아니고 형상도 아닌 본질이었으며 본질은 영원했다.
예술가가 아직 청동이라는 물질로 작업하기 전의 주제의 동기로 이순신장군의 형상 혹은 부피를 먼저 착안할 때 그렇게 제작하려는 아이디어가 영원하기 때문에 그런 착안도 영원하다든 것이 플로티누스의 주장이었다.

지성의 세계에 속한 혼이 어떻게 몸에 부착될 수 있는냐 하는 의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욕망appetite이었다.
혼은 본질essence의 내적 실재를 사유하여 가능한한 그와 같은 세계를 창조하기를 바라는데 마치 이순신장군을 조각의 형상으로 구상한 조각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청동으로 떠서 직접 보고 싶어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으며, 작곡가가 자신이 구상한 음악을 작곡하여 오케스트라를 통해 스스로 듣고 싶어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화가가 자화자찬하고 싶은 심정과도 같다 하겠다.
이런 것은 플로티누스의 말대로 혼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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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누스와 영지주의 
 

플로티누스가 영지주의를 반대한 두 가지 이론은 혼에 관한 것으로 그는 혼이 태양과 달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만물을 만들었다면서 혼을 지성적인 신성의 소산으로 보았다.
혼이 물질세계를 창조할 때 지성적인 신성에 관한 기억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선했으며 우리의 감관이 사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영지주의를 반대한 것은 영지주의자들은 신성은 태양, 달, 그리고 별들과 관련이 없으며 그것들은 악의 정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람의 혼만이 오직 선할 뿐이라고 믿었다.

플로티누스는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을 신과 같은 존재들로 인식하면서 인간에 비해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은 철학이라기보다 신앙 고백과도 같았고 지식이라기보다 의견에 가까워서 신학에 더욱 더 어울린다.
그의 견해는 <티마에우스 Timaeus>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며 오리게네스가 받아들였다.
마지막 종교철학자로서플로티누스는 모든 혼은 유한하고 결국 하양하여 그것들에 걸맞는 몸둥이와 결탁하게 되는데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적 욕망에 의해서라고 했다.
그의 이론에서 박카스 종교에서 비롯된 윤회설이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을 거쳐 그에게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혼이 몸을 떠나면 반드시 다른 몸과 결탁하게 되는데 죄에 대한 댓가로 우주의 정의가 징벌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사고는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에 의한 환생과 다름 없었다.
그는 가령 네가 어미를 살해했다면 너는 죽은 후 여인으로 환생하여 아들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라는 논리인데 윤리적인 면에서 덕을 요구하며 인과응보를 말하는 불교와 같은 이치이지만 그의 윤회와 윤리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불의 혹은 윤리적인 죄 그리고 부덕이 늘 반복된다면 현재 세상에 일어나는 사악한 일들은 전생의 연장으로 악이 승리하는 게임은 연장전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정의의 원래적인 고유한 의미와는 무관하고 마치 시지프의 신화처럼 인간은 신으로부터 끊임없는 노역과 벌을 운명처럼 받는 존재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업보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우리가 지금 환생하여 살고 있는 것이라면 전생의 일들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논리적으로 가능한데 근래 신학자들은 응답하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플로티누스는 우리가 기억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티벳의 중들도 기억할 수 있다는 데 전적으로 동감할 것이다.
플로티누스는 혼은 영원한 생을 동경하므로 기억력이 희미해지는 것이라면서 친구, 아내, 자식 등에 관해서는 망각하고 오로지 지성의 실제들만을 사유하며 개성은 망각한다고 주장했다.
결론으로 그는 혼이 나우스Nous와 하나가 되고 그것은 불멸하며 나우스와 혼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신과 나우스가 또한 둘이면서 하나이니까 이 세 가지 신, 나우스, 그리고 혼은 셋이면서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을 그가 제기한 것이며, 그의 심위일체론을 기독교가 환호하며 반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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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누스의 철학 
 

플로티누스에 관해서는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포피리Porphyry가 쓴 일대기를 통해 주로 알려졌는데 포피리는 셈족Semite(특히 유대인을 말함)으로 본명이 말추스Malchus였다.
포피리에 의하면 플로티누스는 이집트에서 태어났고 젊었을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했는데 그곳은 그리스 문화가 널리 알려진 도시였다.
그는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로부터 수학했으며 39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플로티누스는 황제 고디안Gordian 3세 때 페르시아인을 탐험하는 간첩 일에 가담했는데 그는 자신의 의도는 그 일보다는 동양의 종교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황제는 어렸고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그때가 244년이었다.
그는 종교에 관한 공부를 중단하고 로마에 안주한 후 가르치는 일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황제 갈리에누스Gallienus가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49살 이전까지 플로티누스는 아무것도 쓴 게 없지만 그후 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글은 포피리에 의해 편집되었다. 포피리는 플로티누스보다는 피타고라스의 이론에 더욱 더 심취했으므로 이런 그의 경향이 신플라톤주의를 좀더 미신적으로 나타나게 만들었으며 그가 플로티누스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을 대단히 존경했으므로 그를 기술할 때는 he가 아니라 He라고 하여 플라톤이 유일한 철학자였음을 시사했고 고대 철학자들을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자들이라고 기술했는데 그들 가운데 유물론자들은 배제되었다.

플로티누스의 형이상학은 삼위일체Holy Trinity로부터 시작된다.
신The One, 정신Nous(혹은 Spirit), 혼Soul 이 세 가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각각 다른 것들이다.
가톨릭 초기 신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오리게네스Origen는 플로티누스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그와 더불어 같은 스승으로부터 철학을 수학했다.
오리게네스는 신은 가장 우수하고 다음으로 정신이 우수하며 그 다음이 혼이라면서 플로티누스의 견해를 전적으로 따랐는데 그의 이론을 기독교인들은 이단시했다.
플로티누스는 신 혹은 선Good은 존재를 초월하는 존재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것에 관해 무엇이라고 설명하려고 하면 안되고 그것을 그저 그것이라고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영원한eternal이란 개념이었다.
그는 신을 모든 것이라고 해서도 안되는 까닭으로 신은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신은 모든 것을 통해 나타나지만 아무 곳에도 없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플로티누스의 신 혹은 선에 대한 개념은 노자의 도에 대한 개념과 같다.
도The Way를 도라고 말하면 더이상 도가 아니라는 노자의 말은 플로티누스에게도 해당된다.
플로티누스는 신을 정의할 수 없는 이유는 신이 우리가 정의할 수 있는 모든 술어들 그 이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신을 선이라고 말할 때 아름다움Beauty이 포함된다.
그가 가진 신에 대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에 대한 개념과 같았는데 신은 부동유동자Unmoved Mover를 의미했고 유일하다The One는 그의 개념은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침묵 안에서 더욱 진리였으며 노자의 도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플로티누스는 삼위일체 가운데 두 번째 정신을 나우스Nous라고 했는데 그리스어 나우스를 영어로 정신Spirit 혹은 마음Mind으로 번역하지만 로고스Logos(혹은 Word), 이성Reason, 절대의지Absolute Will 등등의 의미도 있으므로 그냥 나우스라고 사용하는 것이 보다 그가 말하는 개념에 가깝다.

플로티누스를 번역한 맥케나McKenna는 나우스를 지성적 원리Intellectual Principle라고 번역했는데 말이 길어서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특히 종교와 관련해서 설명하면 썩 어울리는 말이 못된다.
그러나 정신이란 말로는 의미가 부족하므로 지성적 정신이라고 하면 좀더 적절할 줄 아는데 전지전능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신의 정신이니 오죽 수준이 높겠는가!
피타고라스, 플라톤, 플로티누스 이 세 사람에게 수학, 이데아의 세계, 그리고 감각할 수 없는 모든 사고는 신성했으며 이런 것들은 나우스의 행위이거나 거의 그런 행위에 유사한 것들로 인식했다.
플라톤의 지성적인 요소가 요한복음서의 저자에게 영향을 주어 요한은 그리스어로 복음서를 쓰면서 하나님을 로고스(말씀)라는 말로 표기했다.
유의할 사항은 그는 나우스를 반드시 혼의 상급자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인데 이 점은 기막히게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드는 부분으로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적 이론정립에 아주 유용했다.

나우스는 신의 이미지인데 신(말씀)이 발하여 생긴 것이고 신 자체가 영상Vision을 가지는데 보이는 영상이 나우스로서 플라톤이 <공화국 Republic>에서 동굴이야기로 비유한 대로 설명한다면 태양 자체이면서 태양이 발하는 빛인데 태양과 빛은 동일한 것이며, 나우스는 빛으로 신이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보는 것이라 하겠다.
그는 부분들이 없는 존재를 그 자체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보는 사람Seer과 보는 것Seen은 하나가 된다고 했는데 이런 경우 자각이란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의 나우스는 그러니까 신의 자각을 의미하며, 그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망각할 때 오히려 신의 정신을 알 수 있다고 했고, 우리가 신의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혼이 가장 신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로티누스는 "신성한 지성 자체에는 위대한 것이 함유되어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나우스를 순수하게 하면 신에게 향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하고 모든 것을 질서있도록 한 신의 정신을 알게 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신의 정신을 가지게 되면 나우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신을 또한 볼 수 있다고 그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우리가 신성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의 영상을 표현하거나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나중에는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마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환희를 염두에 두고 주장한 것 같다.

그는 "그것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힘도 없지만 나중에 혼이 빛을 가진 후 그런 영상을 가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빛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며 신이다. ... 그는 빛을 운반하면서 오고, 빛은 그의 출현을 증명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느냐? 모든 것을 잘라버릴 때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혼은 대체적으로 나우스보다 열등한 편인데 그 이유는 혼의 양면성 때문이며 혼은 나우스처럼 되기를 의도하지만 외부세계를 직면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했다.
외부세계를 직면하는 혼은 하향하는 운동을 일으키는데 하향하면서 혼은 자체의 이미지를 산출하며 그 이미지는 자연과 감관의 세계라고 했다.
스토익주의는 자연을 신과 동등하게 여겼지만 플로티누스는 자연을 신에 비해 수준이 조금 낮은 것으로 인식하면서 자연은 혼이 나우스를 바라보는 것을 망각할 때 혼이 발산하는 이미지라고 했다.
이것은 감관의 세계를 악으로 생각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같은 견해이지만 그가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따랐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감관의 세계를 아름답고 축복받은 혼들의 주거지로 보았으며 단지 지성의 세계에 비해 덜 선한 것으로 인식했을 뿐이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이 우주와 우주의 창조자를 악이라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반박하면서도 영지주의자들의 교리 몇 가지는 수용했는데 물질에 대한 그들의 하찮은 생각은 플라톤의 사고와 일치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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