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가 곧 플로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차이가 된다.
혼과 몸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를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을 몸의 형상Form으로 인식하면서 혼을 몸의 구석구석에 뻗혀 있는 신경조직처럼 간주한 반면 플로티누스는 혼이 몸의 형상이라면 지성적인 행위가 불가능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반대했다.
이와 달리 스토익주의는 혼이 물질이라고 주장했는데 플로티누스는 혼의 조화로 볼 때 이는 불가능하다고 스토익주의에 반대했다.
그는 혼이 창조되지 않으면 몸이 존재할 수 없으며 혼이 존재하지 않으면 물질은 사라진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미학에 적용해서 말한다면,
조각가가 이순신동상을 제작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먼저 가진 후 그 아이디어가 이순신장군이라는 형상 또는 부피로 착안되어 조각가로 하여금 청동으로 이순신의 형상을 시각적으로 제작하게 만드는 것이고, 이는 조각가의 지성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미학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소위 말하는 플라토닉 러브이니 플라토닉 미학이니 하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을 실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것의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 혹은 개념을 실재로 인식하를 걸 말한다.
플로티누스에게는 혼은 물질도 아니고 형상도 아닌 본질이었으며 본질은 영원했다.
예술가가 아직 청동이라는 물질로 작업하기 전의 주제의 동기로 이순신장군의 형상 혹은 부피를 먼저 착안할 때 그렇게 제작하려는 아이디어가 영원하기 때문에 그런 착안도 영원하다든 것이 플로티누스의 주장이었다.
지성의 세계에 속한 혼이 어떻게 몸에 부착될 수 있는냐 하는 의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욕망appetite이었다.
혼은 본질essence의 내적 실재를 사유하여 가능한한 그와 같은 세계를 창조하기를 바라는데 마치 이순신장군을 조각의 형상으로 구상한 조각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청동으로 떠서 직접 보고 싶어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으며, 작곡가가 자신이 구상한 음악을 작곡하여 오케스트라를 통해 스스로 듣고 싶어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화가가 자화자찬하고 싶은 심정과도 같다 하겠다.
이런 것은 플로티누스의 말대로 혼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