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와 헤라클리투스 사이의 시노파네스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리투스 사이에 덜 중요한 현인이지만 시노파네스Xenophanes가 있다.
그 역시 아이오니아Ionia 사람으로 이탈리아 남쪽에서 주로 살았다.
그는 우주가 먼지earth와 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는 피타고라스가 혼이 영원하다는 주장을 비웃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어느날 피타고라스가 길을 가다가 개를 함부러 대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만 해라, 개를 때리지 말라! 내가 개의 소리를 들으니 친구의 혼인줄을 알겠다.'"
시노파네스는 이성주의자로서 이런 식의 피타고라스의 신비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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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리투스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영어로는 발은이 헤라클라이터스)는 기원전 500년에 활동했다.
에페소스Ephesus의 귀족이라는 것만 전해올 뿐이다.
그도 신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 속에 있다고 믿었으며 우주의 기본 원소로 불을 꼽았다.
그는 모든 것은 어떤 다른 것의 사망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말했다.
"유한한 것들은 영원한 것들이며 영원한 것들은 유한한 것들이고 살아 있는 것들은 다른 것들의 주음이며 주음은 다른 것들의 생명이다."

세상은 조화로운데 이 조화는 상대적인 것들이 어울려 이루는 조화라고 했다.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은 하나에서 왔고 하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왔으며 많은 것은 하나뿐인 신에 비해 덜 실재적이다."

그는 또 말했다.
"전쟁은 말물의 어버이이고 전쟁이 신들과 인간들을 만들었으며 노예와 자유로운 사람들을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투쟁이 정의이며 만물은 투쟁을 통해 생겨나고 또 사라진다."

그는 혼은 불가 물로 되었고 불은 고상한 것인데 비해 물은 형편없는 것이라고 했다.
혼에 불이 많이 있으면 드라이dry하고 "드라이 혹은 가장 지혜롭고 최고이다."
그는 혼은 수증기가 되기를 좋아한다고 했으며 죽으면 혼은 물로 변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해서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바카스를 신봉하는 바키Bacchie로 불리웠지만 비판없이 바카스 종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비판할 것은 비판했다.

그의 형이상학을 다은과 같은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같으며, 신들과 인간들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늘 살아 있으며 또 살아 있을 영원한 불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그는 또 말했다.
"불이 먼저 바다를 만들었고 바다의 절반이 땅이 되었으며 절반은 회오리바람whirlwind이다."

그는 운동이란 상대적인 것들의 투쟁이며 이를 조화라 한다고 했다.
조화는 투쟁 가운데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서 일원론주의가 발견되는데 그는 "하나가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모든 것이 하나에서 비롯했다"고 했다.
그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하나라면서 신에게는 밤과 낮이 하나이고 겨울과 여름이 하나이며 전쟁과 평화가 하나라고 했다.
상대적인 것들이 대적하지 않으면 조화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대적하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투쟁이 곧 정의인데 "Strife is justice"라고 했다.

일원론주의가 그로 하여금 유일신을 믿게 했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에게는 지혜가 없지만 신에게는 지혜가 있고 인간은 신에 비하면 어린아이와 같다.
가장 지혜로운 인간은 신에 비하면 원숭이와 같고 잘생긴 원숭이는 인간에 비하면 못생겼다."

그에게 신은 우주적 정의의 구현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고 했는데 다음의 말은 유명하다.
"너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왜냐면 물은 늘 흐르기 때문이다."

그는 태양은 늘 새롭다는 말로 끊임없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플라톤 이전의 사상들과 같이 그의 어록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논쟁하는 가운데 인용했으므로 전해온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그가 "어느 것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생성한다"고 한 것으로 믿었다.
여기서 '생성한다 Becoming'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생성론은 현대 물리학자들의 이론과 평행을 이루어 고대 그리스 현인의 사상이 얼마나 설득력있었는지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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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로  
 

버리Bury는 저서 <그리스의 역사 History of Greece>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 혹은 마일터스Miletus에서 온 어떤 사람이 스파르타의 어느 고을을 방문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울타리가 없고 잘난척하는 사람들이 없는 고을에 놀라워하게 될 것이며 스파르타인들이 매우 용감하며 단순하고 지식이나 물질에 의해 부패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플라톤은 정치철학과 관련해서 스파르타를 매우 이상적인 국가로 찬양했다.
그리스인들에게 스파르타의 건물들은 아주 단순하며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도리아인Dorian의 도시에는 도리안식 사원이 있고 건물들이 매우 고상하게 보일 테지만 거주하는 데는 편치 않다."

모든 그리스 도시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는데 스파르타에서는 한 세기 동안 별로 달라진 게 없었으며 다만 다섯 명의 민선장관들의 권력이 법에 의해 증가되었을 뿐이다.
스파르타인들은 전쟁에서 곧잘 승리했으며 테르모필애Thermopylae(기원전 480년) 전쟁은 계곡에서 벌어졌는데 그리스인은 스파르타 군대를 그곳에서 몰살시키려고 했으나 스파르타 정예군인들은 정면전쟁을 피하고 언덕으로 올라 양편에서 그리스인들을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스파르타 군인들이 죽고 두 사람이 겨우 병으로 실명에 이르렀고 한 사람은 노예들을 이끌고 계속 싸우다가 죽었으며 나머지 한 사람 아리스토데무스Aristodemus는 자신이 너무 병중이었으므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파르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그와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 아리스토데무스'라고 부르면 놀렸다.
일 년 후 그는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플라태아Plataea 전쟁에 출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고 그 전쟁은 스파르타에 승리를 안겨다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스파르타인의 기질을 알 수 있다.
스파르타는 강한 나라였는데 기원전 371년 리욱트라Leuctra 전쟁에서 테반인들Thebans에게 패한 후 더이상 위대한 나라가 못되었다.

스파르트의 정체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왕이 둘 있었는데 다른 두 집안 출신이다.
두 왕들 중 한 왕은 전쟁기간 중에 명령권을 갖게 되지만 평화로울 때는 왕들의 권한이 제한되었다.
왕들은 원로원Council of Elders의 멤버가 되고 왕들을 포함해서 원로원은 30명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제외한 28명의 나이는 60살이 넘어야 하며 귀족 출신으로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종신직이다.
원로원은 형사범들을 재판하고 의회에 제출되는 안건을 먼저 심사한다.
의회Assembly의 구성원들은 시민이고 그들의 역할은 단지 yes 혹은 no라고 투표하는 것이 전부이다.
즉,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를 결정지을 뿐이다.
하지만 의회에서 제정을 인준했더라도 원로원에서 그 법령을 선포해야만 실행된다.

스파르타에는 두 왕, 원로원, 의회 말고도 한 기구가 더 있는데 다섯 명의 민선장관들ephors이다.
이들 다섯 명은 시민이 선출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출방법이 매우 어린아이들 같았다고 적고 있다.
버리Bury의 저서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적은 이유가 스파르타인들이 제비뽑기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스파르타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시민들 모두가 지배계급이었고 이들의 권력은 왕의 권력과 평행을 유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 모두가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그런 정도의 수준이었다.

왕들은 매달 헌법을 준수할 것을 맹세했으며 다섯 명의 민선장관들은 왕들이 맹세한 대로 헌법을 지키는 한에 있어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즉, 스파르타는 법치주의 국가였다.
전쟁에 한 왕이 출전할 경우 두 명의 민선장관이 따라가서 왕이 제대로 헌법을 준수하는지 감시했다.
민선장관들은 최고의 민사재판권을 가지지만 왕에 대해서는 형사재판권을 가졌다.

스파르타의 헌법은 기원전 885년에 리쿠르구스Lycurgus가 제정하여 선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신비적인 존재로 본래는 신이었다.
그의 이름의 의미는 '이리를 쫒는 자 Wolf-repeller'이며 아르카디아Arcadia 사람이다.
스파르타가 국제무대에 부상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러기 전만 해도 스파르타는 여느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시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했으며 기원전 7세기 혹은 더 늦게 전쟁에 승리하는 것에 목숨을 걸면서부터는 문화에 등을 돌렸다.
더러 학자들은 현대판 스파르타로 나치를 꼽는다.
나치가 승리했다면 스파르타와 같은 국가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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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배심원들 중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제자들의 아버지, 형제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부패하게 했다고 증언한 사람은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관습대로 자녀들이 법정에 와서 울면서 아버지를 변론하여 배심원의 동정을 사는 행위를 거부했다.
그는 그런 행위는 고소를 당한 사람과 아테네 모두를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배심원들을 납득시키는 것이 자신의 일이지 그들의 호의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플라톤을 포함하여 몇몇 사람이 벌금으로 제시했던 30 미나에minae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후 소크라테스에게 최후의 증언의 기회가 주어졌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비난하지만 나는 기꺼이 너희들에게 예언하는데 나는 죽을 지경에 있고,
망자들은 예언적 힘을 부여받게 된다.
나는 예언하는데 누가 나의 살해범들이며
내가 사망하고 곧 너희들이 내게 부과한 것보다 더 큰 벌이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꿈이 없는 잠으로 단지 좋은 것이거나 다른 세계로 날아가는 것이라면서 말했다.
"만약 사람이 죽어서 오르페우스Orpheus와 무사에우스Musaeus 그리고 헤시오드Hesiod와 호메루스Homer와 대화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러길 바라지 않겠느냐?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죽고 또 죽겠다."
소크라테스는 저세상에서 불의하게 사망한 자들과 대화할 것이며 계속해서 지식을 찾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죽어야 할 시각이 도래했으며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며 나는 죽고 너희들은 산다.
어느 것이 나은 것인지는 오로지 신만이 알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불멸하다는 걸 믿었으며 저세상이 있음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플라톤의 저서 <패도 Phaedo>에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설이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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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Scepticism는 피르로Pyrrho에 의해서 
 

회의주의Scepticism는 피르로Pyrrho에 의해서 처음으로 철학에 소개되었다.
피르로는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군인으로 인도의 인더스 유역에까지 원정을 간 적이 있었고 그런 경험이 그로 하여금 여행을 즐겨 하게 했다.
그는 여생을 고향 엘리스Elis에서 보내다가 기원전 275년에 타계했다.
그는 과거의 의심들을 집대성했을 뿐 새로운 의심을 보탠 것은 없다.

회의주의자들은 지각의 인식적 가치를 부인하면서 지성적 교리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으며 지식의 오류로부터 피할 수는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을 놓치는 손해도 함께 감수해야 했다.
피르로는 현명하게도 책을 쓰디 않았는데 그는 궤변가들sophists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와 조르지아스Gorgias의 감관의 인식이 모호함과 분명한 모순을 야기시킨다는 주장에 도덕적 그리고 논리적 회의주의를 보탰다.
그는 한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선행되어야 할 이성적 뒷받침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우선 순위가 없이 닥치는 대로 행위하는 것을 의미했다.

회의주의는 자연히 철학적 사고가 부족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들은 각 학파의 다양한 주장과 학파들 사이의 논쟁이 격렬함을 보고 그들이 모두 지식을 갖고 있는양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회의주의자들은 공부하는 평판 있는 사람들의 지혜로움과 자신들의 무지를 견주면서 게으른 자신들을 자위했다.

그럼 회의주의가 철학이 될 수 있겠느냐고 여러분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답은 그렇다.
철학이다.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나는 이것에 관해 이렇게 생각하고 저것에 관해서는 저렇게 생각하지만 자신은 없다"고 말할 것이며, 지성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나는 그것에 관해 모르는데 알기를 원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들은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고 말면 회의주의는 철학이 아니다.
그들은 지식의 불가능을 주장하지는 않으면서 철학자들의 이론에 설득력이 부족함을 증명하려고 했으므로 논리학을 발전시켜 철학에 참여한 것이다.

피르로의 제자 티몬Timon은 회의주의를 좀더 진전시켜 그리스인의 논리를 지성적으로 논쟁하면서 단지 연역법만을 받아들였으며 모든 연역법은 유크리드Euclid가 주장한 대로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일반적인 원리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티몬은 그와 같은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는 모든 논쟁은 무nothing로부터 끊임없이 고리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방법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 그의 이론을 많은 사람이 받아들였으므로 끝내는 중세에까지 두드러졌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뿌리를 자르고 말았다.
매사 의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티몬을 연구할 일이다.

티몬의 글은 사려져버렸으므로 남아 있는 두 개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고 럿셀은 저서 <서양 철학사>에 적고 있다.
"현상phenomenon은 항상 유효하다."
"나는 저 꿀이 달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고 나는 그것이 단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의심도 이쯤되면 병인데 당시에는 형편없는 논리적 형이상학이 판을 쳤으므로 티몬과 같은 회의주의자가 나타나서 철학적 미신을 청소한 것은 철학사에 소득이었다.
매사에 의심이 많은 주위 사람들 때문에 여러분이 좀더 진실해지려고 노력할 줄 아는데 그렇다면 여러분의 진실이란 회의주의자들의 덕택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회의주의자들은 티몬의 이론에 수정을 가하여 현상은 그저 일어나는 것으로 유효한 것도 유효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꿀이 단 것으로 나타난 것은 높은 확률이기는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안다.
그리고 태양이 어제도 그제도 동쪽에서 떠올랐다고 내일도 태양이 반드시 동쪽에서 떠올라야 하는 법은 없으므로 내일 태양이 떠오를 것인지에 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티몬은 그의 긴 인생 후반을 철학의 수도 아테네에서 보낸 후 기원전 235년에 타계했고 그의 사망과 더불어 피르로 학파는 종식되었지만 그의 이론은 조금 수정이 가해진 후 이상한 일이지만 플라톤이 건립한 대학 아카데미에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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