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금강산에 들어가다

 

노우老牛(늙은 소)

 

瘦骨稜稜滿禿毛 傍隨老馬兩分槽수골릉릉만독모 방수노마양분조; 파리한 뼈는 앙상하고 털마저 빠졌는데 늙은 말 따라서 마구간을 함께 쓰네.

役車荒野前功遠 牧竪靑山舊夢高역거황야전공원 목수청산구몽고; 거친 들판에서 짐수레 끌던 옛 공은 멀어지고 목동 따라 푸른 들에서 놀던 그 시절 꿈같아라.

健 耦常疎閑臥圃 苦鞭長閱倦登皐건우상소한와포 고편장열권등고; 힘차게 끌던 쟁기도 텃밭에 한가히 놓였는데 채찍 맞으며 언덕길 오르던 그 시절 괴로웠었지.

可憐明月深深夜 回憶平生謾積勞가련명월심심야 회억평생만적노가련해라 밝은 달밤은 깊어만 가는데 한평생 부질없이 쌓인 고생을 돌이켜보네.

 

세월의 무상함은 인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늙은 소를 보고서도 세월이 앗아간 전날의 혈기 넘쳤던 때를 생각할 수 있다.

 

송병松餠(송편)

 

手裡廻廻成鳥卵 指頭個個合蚌脣수리회회성조란 지두개개합방순; 손에 넣고 뱅뱅 돌리면 새알이 만들어지고 손가락 끝으로 낱낱이 파서 조개 같은 입술을 맞추네.

金盤削立峰千疊 玉箸懸燈月半輪금반삭립봉천첩 옥저현등월반륜; 금쟁반에 천봉우리를 첩첩이 쌓아 올리고 등불을 매달고 옥젖가락으로 반달 같은 송편을 집어 먹네.

 

새알을 만들고 조개 같은 입술을 맞추고 반달 같은 송편을 먹는 묘사에서 시인의 관찰력과 재치를 볼 수 있다.

 

백구시白鷗時(갈매기)

 

沙白鷗白兩白白 不辨白沙與白鷗사백구백양백백 불변백사여백구; 모래도 희고 갈매기도 희니 모래와 갈매기를 분간할 수 없구나.

漁歌一聲忽飛去 然後沙沙復鷗鷗어가일성홀비거 연후사사부구구; 어부가漁夫歌 한 곡조에 홀연히 날아오르니 그제야 모래는 모래, 갈매기는 갈매기로 구별되누나.

 

입금강入金剛(금강산에 들어가다)

 

緣靑碧路入雲中 樓使能詩客住笻연청벽로입운중 누사능시객주공; 푸른 길 따라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누각이 시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네.

龍造化含飛雪瀑 劒精神削揷天峰용조화함비설폭 검정신삭삽천봉; 눈발 흩날리며 걸린 폭포는 용의 조화가 분명하고 하늘 찌르며 솟은 봉우리는 칼로 신통하게 깎았네.

仙禽白幾千年鶴 澗樹靑三百丈松선금백기수년학 간수청삼백장송; 속세 떠난 흰 학은 몇 천 년이나 살았는지 시냇가 푸른 소나무도 삼백 길이나 되어 보이네.

僧不知吾春睡腦 忽無心打日邊鐘승부지오춘수뇌 홀무심타일변종; 스님은 내가 봄잠 즐기는 것도 알지 못하고 무심하게 낮종을 치고 있구나.

 

봄날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주위에 펼쳐진 경치의 아름다움을 읊었다.

 

답승금강산시答僧金剛山詩(스님에게 금강산 시를 답하다)

 

百尺丹岩桂樹下 柴門久不向人開백척단암계수하 시문구불향인개; 백 척 붉은 바위 계수나무 아래 암자가 있어 사립문 굳게 닫고 열어 본지 오래건만

今朝忽遇詩仙過 喚鶴看庵乞句來 -금조홀우시선과 환학간암걸구래 -; 오늘 아침 우연히 시선께서 지나는 것을 보고 학 불러 암자를 보이게 하고 시 한 수를 청하오. - 스님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凝촉촉첨첨괴괴기 인선신불공감응; 우뚝우뚝 뾰족뾰족 기기괴괴한 가운데 인선人仙과 신불神佛이 함께 엉겼소.

平生詩爲金剛惜 詩到金剛不敢詩 -평생시위금강석 시도금강불감시 -; 평생 금강산 위해 시를 아껴 왔지만 금강산에 이르고 보니 감히 시를 지을 수가 없소. -삿갓

 

한 승려의 청으로 금강산을 읊으려 하나 너무나 장엄하고 기이한 산세에 압도되어 시를 짓지 못하겠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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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은 편지에 적었다

 

 

 

 

 

 

 

카를 융은 편지에 적었다.

 

 

친구에게,
리비도에 대한 문제는 시간을 두고 보기로 하세. 나는 자네의 변화가 어떤 속성인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고 그 동기 역시 전혀 알 수가 없네. 나에게 편견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 사정을 더 자세히 듣고 나면 자네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 우리가 서로의 의견에 즉각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학문적인 차이가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네. 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근본적인 의견 차가 있었다는 점이 떠오르는군.

 

 

프로이트 교수님께,
저의 변화는 변덕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문제입니다. 교수님을 존경하는 저의 마음도 저를 말릴 수는 없습니다 … 물론 저는 은인이신 교수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객관적으로 판단해주시고 노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실질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는 제대로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신분석학 운동을 위해 랑크Rank, 슈테켈Stekel, 아들러Adler 등이 한 일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저는 콤플렉스로 가득 찬 바보 취급 당하는 걸 거부하는 것 외에는 저항할 길이 없음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융 드림

 

융 박사에게,
나는 이 (리비도) 논문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네 … 지금 나는 자네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제 기능을 다한 콤플렉스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신비주의 수수께끼를 푼 것으로 보이네.
자네와 부인에게 안부를 전하며,
여전히 변치 않은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무례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교수님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제 기능을 다한 콤플렉스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신비주의 수수께끼를 푼 것으로 보인다”라고 쓰신 글은 저의 글을 크게 과소평가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친애하는 교수님,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하지만 그 문장은 교수님이 저를 폄하함으로써 저의 연구를 이해하려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수님은 저의 시각을 일종의 정점인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 이것은 산의 가장 아래 지점일 뿐입니다. 그러한 시각은 수년간 우리에게 자명하게 보였던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솔직한 저의 표현에 사과드립니다. 저는 때때로 신경증의 잣대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이해받고 싶은 순수한 인간적 욕망 때문에 괴롭습니다.
융 드림

 

융 박사에게,
객관적인 발언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버릇은 (퇴행적인) 인간의 특성일 뿐만 아니라 빈 사람 특유의 단점이라네. 그런 주장은 자네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네. 하지만 화를 내지 않고도 (자네가) 다음과 같은 실언을 고려할 만큼“ 객관적”인가? “심지어 아들러의 무리도 저를 당신과 한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제가 진심으로 몇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교수님이 환자를 다루는 기법을 제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 교수님은 도처를 다니시면서 주변의 모든 증후성 행동의 냄새를 맡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자신의 과오를 부끄러워하며 이를 인정하는 아들과 딸들로 만들어버리시지요. 그사이 교수님은 아버지로서 최고의 자리에 멋지게 남게 되고요 … 친애하는 교수님, 저에게 증후성 행동이 있다는 교수님의 지속적인 주장을 저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행동은 교수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시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행여나 부정을 탈까 하여 언급하고 싶지도 않지만 저는 절대로 신경증을 앓고 있지 않습니다! 제 행동을 스스로 분석한 결과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입니다. 환자가 자기분석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잘 아실 겁니다. 교수님이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추종자들의 아버지 역할을 멈춘 후 추종자들의 약점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대신 가끔씩 자신을 돌아보신다면, 저도 제 태도를 고치고 교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저의 죄를 단번에 뿌리 뽑겠습니다. 이 같은 기이한 우정의 징표에 분명히 노하시겠지만 이 방법이 교수님에게 이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융 드림
1913년 3월 1일

 

회장 겸 박사님에게,
내가 추종자들을 환자처럼 대한다는 주장은 확실히 터무니없네. 나는 빈에서 정확히 그 반대의 이유로 비난받고 있으니 말이지 … 그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면 이 편지에 답장할 필요도 없네.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려워질 것이고 더욱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이 될 테니 말이지. 자신이 신경증을 앓고 있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우리 정신분석학자들의 관례이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정상이라고 계속 외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병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의심할 근거가 되지. 그래서 나는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제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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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윤리학은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버려둘까

 

 

 

 

 

 

 

 

칸트의 윤리학은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그림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독립적인 행위자로 대우받아야 하고 그가 지닌 의무와 독자성의 영역은 존중되어야 하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상호신뢰의 이상형이다. 이런 이상적인 인간관계가 가능한 건 인간이 이성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할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은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다고 신뢰받고 있기에, 강압적인 침해를 받지 않는 가운데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칸트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견해는 한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칸트의 견해에서 볼 때, 위에서 설명한 인간관계의 이상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칸트의 견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을 자율적 행위자로 존중할 것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성적 행위자를 존중한다는 것은 칸트의 윤리학에서 기본 신념의 하나다. 그런데 이성적 행위자가 나쁜 일을 하기로 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능력을 잃고 미친 짓을 한다면 더는 그를 존중할 의무가 없어진다. 그 행위자는 여전히 이성적으로 행위할 능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자율적 존재지만, 나쁜 행위를 하고 타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문제다. 그 사람이 타율에 따라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다고 가정해보자. 참견해서 말려야 할까? 칸트의 윤리학에 비추어볼 때 간섭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는 행위라면, 우리는 그 사람의 위협 앞에 무방비 상태로 마냥 팔짱을 끼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의 원칙은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칸트는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 벌주는 것을 허용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벌 받을 짓을 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건 정당하고 그것은 그 사람을 여전히 책임 있는 행위자로 보기 때문이다. 벌은 책임 있는 행위자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자율적 행위자가 다른 사람을 해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에게 벌을 줄 수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잘못에 합당한 벌은 그 잘못을 저지른 다음에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을 신뢰하고, 그들이 하려는 행위를 하게 두라고 가르친다. 일이 벌어진 다음이라야 벌주려고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칸트마저 당황해 마지않던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문 앞에 살인자가 와 있는 사례로, 이를 현대의 조건에 맞추어 수정한 것이다. 어떤 사내가 문 앞에 와서 나의 친구를 찾는다. 그는 비밀경찰일지 모르는데 친구를 죽일 참이다. 친구는 유대인으로 나의 집에 숨어 있다. 나는 친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친구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칸트는 나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할 것이다. 칸트가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존중하는 것이 나의 기본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는 문 앞의 사내까지 이상적인 인간관계의 그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 사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신뢰해야 하며, 그 사내를 위해 내가 결정을 내려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내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사내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요, 사내가 타당한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하는 것을 방해하는 셈이다. 보아하니 그 사내는 사람을 죽일 참이기에 사내가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그런데도 칸트는 살인자가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정할 수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사내가 마음을 바꾸도록 그와 논의할 수는 있지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공리주의자들과는 달리, 칸트는 단순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타인의 자율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칸트의 견해는 반직관적일 뿐 아니라 자기 모순으로 비치기도 한다. 칸트의 견해는 이성적 행위자를 중심에 놓고 있다. 칸트는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해서 인간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살인자의 자율을 존중하면, 똑같이 이성적 행위능력을 지닌 친구의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정말로 이성적 행위능력의 가치를 존중한다면 그것을 다만 존중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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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존중하는 길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한다고 해서, 어떤 방식으로건 인간의 선택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행태를 변경하기 위해 영향을 미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성적인 토의와 비이성적인 수단이다. 어떤 사람이 마음먹고 있는 바를 하지 않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할 적절한 이유를 제시한다면, 그를 하나의 이성적 행위자로 대하는 셈이다. 이성적 행위자만이 제시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행위자가 이해하리라는 기대에서 그런 이유를 제시하더라도, 그의 존엄성은 전혀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해 능력을 도외시하면서 부정직한 수단으로 그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나의 예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업 광고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생각해보자. 한 관점에 따르면, 광고는 소비자에게 제품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인바, 이런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소비자가 사고 싶어도 그 제품에 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으므로 사지 못할 것이다. 물론 광고자들은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제품을 내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실상을 조작하는 건 아니다.

런데 이러한 시각은 너무나 장밋빛 안개 속에서 광고활동을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견해에 따르면, 광고자들은 단순히 더 많은 제품들을 내다 팔기 위해 명백한 거짓말까지는 하지 않을지 몰라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품의 이미지를 행복한 가족, 벌거벗은 여성, 산악 풍경 등에 결부하여 매출을 늘릴 수 있다면, 설령 이것들이 제품 가치나 기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해도 그리할 것이다. 칸트의 견해를 엄격히 따르자면, 두 번째 견해는 조작적이어서 나쁜 방법이다. 타당하지 않은 이유를 내세워 어떤 제품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행태에 영향을 미치려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대하려면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는 데 대하여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고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정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 사례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대하려면 다음 두 가지 기본적인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와 기만이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모두 나쁜 까닭은 강압과 기만을 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을 강압과 기만을 실행하는 사람이 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할지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권을 소비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광고자가 바라는 대로 소비자가 선택하도록 상황을 뒤틀어놓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강압하거나 강요하는 경우, 예를 들어, 총부리를 머리에 들이대고 수표를 발행하라고 밀어붙이는 건 위협을 당하는 사람이 그 상황에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다. 누군가를 강압하는 행위는 그 사람에게 수표를 발행해달라고 요청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요청한다는 것은 요청받는 사람이 자신의 결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압한다고 해서 강압받는 사람이 반드시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즉 강압하는 사람은 강압 받는 사람에게 거부할 자유를 남겨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요구를 거부할 경우, 끔찍스러운 결과가 빚어질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기만의 경우에는 이 희미한 한 줄기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을 빼앗기 위해 다른 사람을 기만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지 결정할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는 셈이다. 기만당하는 사람이 실상을 제대로 안다면 선택하지 않을 행위를 자유로이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있으므로 선택하는 것이다. 기만당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믿기에 실상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칸트의 생각은 이 장의 처음에서 살펴본 두 가지 사례에서도 잘 들어맞는다. 두 사례에서 각 주인공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렸다고 불평한다. 첫 번째 사례, 경찰은 사람들을 한구석으로 몰아붙인다(사람들에게 한구석으로 가라고 요청하거나 왜 그들이 한구석으로 가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고서). 두 번째 사례,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부모가) 상대에게 생각해볼 여유조차 주지 않고 마치 자신이 상대의 결정을 대신해줄 위치에 있다는 듯 행위를 한다. 칸트는 다른 이의 일에 참견하여 당사자의 뜻과 관계없이, 그리고 당사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무력화하면서 결정을 대신하는 행위(극단의 예를 들자면, 노예화)가 왜 나쁜지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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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융은 근친상간과 신비주의 문제에 관해 논쟁을 펼쳤다

 

 

 

 

 

 

 

 

 

 

융은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리비도의 변용과 상징』 2부를 집필하면서 그는 무엇을 연구했을까? 리비도 개념과 근친상간의 금기에 대한 그의 이해는 프로이트와는 완전히 다른 노선이었다. 두 사람의 편지는 상승하는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다.
사랑의 원형인 오시리스와 이시스는 남매이자 부부였다. 오시리스(의지)는 동생 세트(어둠)에게 살해당해 몸이 여러 조각으로 절단되었다. 이시스(지혜)는 흩어진
시체 조각을 모아 그를 부활시켰다. 이집트 군주들은 신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해 남매의 결혼을 장려했다. 프로이트와 융은 근친상간과 신비주의 문제에 관해 논쟁을 펼쳤으며, 이는 결국 두 사람의 결별 원인이 되었다.

 

프로이트 교수님,
근친상간의 문제에 대한 저의 의견에 교수님의 반대 의견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고 나니 염려가 됩니다. 객관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는 저는 근친상간 개념에 대한 저의 해석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기에,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힘겹고 치열하게 이 문제 전체를 고찰한 후반부를 교수님께서 읽고 나면 제가 경솔한 근거나 회귀적 편견을 바탕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 저는 근친상간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입증하려고 연구를 시작했지만 처음에 생각하던 것과 실제는 달랐습니다 … 논쟁이 될 만한 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함께 이견을 좁혀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당분간 저는 저의 길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스위스인들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아시지요.
융 드림

 

친구에게,
리비도에 대한 문제는 시간을 두고 보기로 하세. 나는 자네의 변화가 어떤 속성인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고 그 동기 역시 전혀 알 수가 없네. 나에게 편견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 사정을 더 자세히 듣고 나면 자네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 우리가 서로의 의견에 즉각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학문적인 차이가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네. 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근본적인 의견 차가 있었다는 점이 떠오르는군.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저의 변화는 변덕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문제입니다. 교수님을 존경하는 저의 마음도 저를 말릴 수는 없습니다 … 물론 저는 은인이신 교수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객관적으로 판단해주시고 노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실질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는 제대로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신분석학 운동을 위해 랑크Rank, 슈테켈Stekel, 아들러Adler 등이 한 일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저는 콤플렉스로 가득 찬 바보 취급 당하는 걸 거부하는 것 외에는 저항할 길이 없음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융 드림

 

 


융 박사에게,
나는 이 (리비도) 논문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네 … 지금 나는 자네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제 기능을 다한 콤플렉스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신비주의 수수께끼를 푼 것으로 보이네. 자네와 부인에게 안부를 전하며,
여전히 변치 않은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무례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교수님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제 기능을 다한 콤플렉스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신비주의 수수께끼를 푼 것으로 보인다”라고 쓰신 글은 저의 글을 크게 과소평가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친애하는 교수님,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하지만 그 문장은 교수님이 저를 폄하함으로써 저의 연구를 이해하려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수님은 저의 시각을 일종의 정점인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 이것은 산의 가장 아래 지점일 뿐입니다. 그러한 시각은 수년간 우리에게 자명하게 보였던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솔직한 저의 표현에 사과드립니다. 저는 때때로 신경증의 잣대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이해받고 싶은 순수한 인간적 욕망 때문에 괴롭습니다.
융 드림

 

 


융 박사에게,
객관적인 발언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버릇은 (퇴행적인) 인간의 특성일 뿐만 아니라 빈 사람 특유의 단점이라네. 그런 주장은 자네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네. 하지만 화를 내지 않고도 (자네가) 다음과 같은 실언을 고려할 만큼“ 객관적”인가? “심지어 아들러의 무리도 저를 당신과 한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제가 진심으로 몇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교수님이 환자를 다루는 기법을 제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 교수님은 도처를 다니시면서 주변의 모든 증후성 행동의 냄새를 맡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자신의 과오를 부끄러워하며 이를 인정하는 아들과 딸들로 만들어버리시지요. 그사이 교수님은 아버지로서 최고의 자리에 멋지게 남게 되고요 … 친애하는 교수님, 저에게 증후성 행동이 있다는 교수님의 지속적인 주장을 저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행동은 교수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시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행여나 부정을 탈까 하여 언급하고 싶지도 않지만 저는 절대로 신경증을 앓고 있지 않습니다! 제 행동을 스스로 분석한 결과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입니다. 환자가 자기분석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잘 아실 겁니다. 교수님이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추종자들의 아버지 역할을 멈춘 후 추종자들의 약점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대신 가끔씩 자신을 돌아보신다면, 저도 제 태도를 고치고 교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저의 죄를 단번에 뿌리 뽑겠습니다.
이 같은 기이한 우정의 징표에 분명히 노하시겠지만 이 방법이 교수님에게 이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융 드림

1913년 3월 1일

 

회장 겸 박사님에게,
내가 추종자들을 환자처럼 대한다는 주장은 확실히 터무니없네. 나는 빈에서 정확히 그 반대의 이유로 비난받고 있으니 말이지 … 그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면 이 편지에 답장할 필요도 없네.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려워질 것이고 더욱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이 될 테니 말이지. 자신이 신경증을 앓고 있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우리 정신분석학자들의 관례이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정상이라고 계속 외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병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의심할 근거가 되지. 그래서 나는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제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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