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진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내적 요소가 작품이다.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1881~1965)를 만난 후 칸딘스키는 더욱 추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보링거가 <추상과 감정이입 Abstraktion und Finf&uuml;hlung>(1908)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를 만났다.
[추상과 감정이입]은 하인리히 뵐플린에게 제출한 그의 학위 논문으로 그는 훗날 이 논문을 쓰게 된 동기로 “미적 가치 기준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정초함에 있어서 그 시대 전체 경향과 더불어 주어진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나 자신의 개인적 성향과 예기치 않게 마주치게” 되었음을 꼽았다.
보링거는 미술사에서 명백히 구분될 수 있는 두 가지 경향이 지각되는데, 하나는 추상에 경도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감정이입 혹은 자연주의적인 자연 묘사에 경도된 것이라고 했다.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전환되고 있던 1900년대의 경향이 그의 논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추상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화의 징조로 본 저자와 <추상과 감정이입>에 관해 대화하면서 칸딘스키는 보링거가 추상을 인간과 세계와의 단절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양자 사이의 조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을 알고 그가 새로운 회화의 정신적 선두자라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점은 <추상과 감정이입>이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전개된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의 취지와 일치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많은 미술사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다.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활동 무대인 뮌헨의 미술적 풍토에서 성장한 보링거는 표현에 대한 화가들의 문제에 정통했다.
그는 1909년 분리파 예술가들에 반대하는 글을 썼는데, 그들이 당시의 혁명적인 미술에 대한 칸딘스키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링거는 “순수한 추상은 복잡하고 어렴풋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휴식을 주는 유일한 가능성”으로까지 보았으며, 복잡한 이미지의 세계가 “필연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기하적 추상”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이는 바로 칸딘스키가 열망하던 추상이었다.


1910년경 칸딘스키가 무르나우에서 쓴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Uuml;ber das Geistige in der Kunst>가 1911년 12월에 출간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추상 미술의 원리를 독창적으로 체계화했다.
이 책은 20세기 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자신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라고 말했다.
재현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미술의 표현적 구성적 측면을 무엇보다도 강조하면서 이를 논리적으로 주장했다.
본질적으로 표현적인 면을 ‘내적 의미’ 혹은 ‘내적 공명’이라고 칭했으며 미술작품의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를 구분했다.
그리고 이 요소들의 결합, 즉 미학적 구성을 통해서만 ‘정신적 울림’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물리적인 인상은 단지 정신적 울림을 향한 단계로서만 중요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예술가는 전달해야 할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 형태를 다루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형태를 통해 내적 표현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순수 미술로서의 회화 Painting as Pure Art>(1913)에서도 미술작품이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로 구성됨을 지적한 후 내적 요소는 예술가의 감정이라고 했다.
이 감정은 감상자의 영혼 안에 동일한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영혼이 육체와 결부되어 있는 한 영혼은 대부분 느낌만을 매개로 진동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느낌은 비물질적인 것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예술가와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관람자 사이의 징검다리라고 했다.
예술가의 영혼에 진동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영혼의 진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내적 요소가 작품의 내용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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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미학적 원리를 따른다.


작품의 성격과 중요성을 감안하거나 저술을 통한 이론과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때 칸딘스키는 20세기 전반기의 비재현적 추상 미술의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는 사물의 특징을 재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며 실제 모습에 상관하지 않은 채 물감이 지닌 본래의 표현적 속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둔 선구자였다.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색채의 감정적 연상 작용에 민감했으며 그 공감적 효과를 심도 있게 발전시켰다.
자신을 깊이 감동시킨 색채를 회화로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논리적 사고가 아닌 갑자기 떠오르는 일종의 직관을 통해 미술과 자연은 각각의 원리와 목적이 다른 분리된 두 세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근거로 미술의 자율성에 관한 믿음, 즉 미술작품은 외적 세계와의 어떤 유사성이 아니라 본래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지속되거나 존재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칸딘스키가 1925년에 그린 <노랑 빨강 파랑>은 불균형한 두 개의 무게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푸른색은 대기로서 푸른 하늘의 가벼움을 표현한 것이며 노랑과 빨강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형태들로 배치되었다.
이런 형태와 색채의 교감에 대해 그는 7월 중순 최종적으로 정리한 <점 선 면: 회화의 기초적 요소들의 분석 Punkt und Linie zu Flache: Beitrag zur Analyse der malerischen Elemente>에서 상세하게 서술했다.
1914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이 책에서 그는 ‘순수한’ 예술가는 ‘내적이며 본질적인’ 느낌만을 표현해야 하며 피상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사고를 가진 예술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좀더 정제된 감정”을 표현하게 되며, “오직 미술만이 지닐 수 있고 미술만이 적절한 표현수단으로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본질”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고 했다.
이런 독특한 표현방식이 모든 시대의 미술을 통합할 수 있는 공통요소를 구축한다고 보았다.
예술가는 완전히 표현적인 구성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다루는 도구를 잘 알아야 한다는 신념을 근거로 점, 선, 면 등과 같은 회화적 요소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그는 새로운 유형의 회화 공간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더 이상 회화의 면으로 제한된 전통 원근법 공간에 기초하지 않으며 사방이 무제한적이고 심원한 우주 공간 속의 우주인처럼 관람자를 회화로 끌어들이는 완전한 공간이다.
그는 재현적 표현을 버리고 기하적 원근법을 없애며 색채와 형태의 한층 심오한 감각적 특성을 명확하게 다룸으로써 자신의 회화 공간을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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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주의Constructivism




구성주의는 많은 현대 미술 용어와 마찬가지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용어의 사용도 일원화되어 있지 않다.
구성주의와 구성주의적Constructive이라는 용어는 1900년대와 1910년대에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이지 않으며 치밀하게 구성된 미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성주의로 분류된 작품이 모두 현재에 구성주의로 일컬어지는 범주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에는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며,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났다.
현재는 후자를 국제적 구성주의 또는 유럽 구성주의라고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한다.


러시아 구성주의가 매우 구체적인 명칭인 반면 유럽 구성주의는 의미가 모호하며 점차 비재현적, 또는 비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광범위한 화파와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동일한 명칭 때문에 두 운동은 근본적으로 하나인 이론의 두 가지 갈래인 것처럼 논의되었으며 이로 인해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티븐 맨은 1974년 구성주의 관련 자료 모음집인 『구성주의 전통 The Tradition of Constructivism』에서 러시아 화가, 조각가, 그래픽 디자이너 엘 리시츠키El Lissitzky(1890~1941)가 구성주의와 ‘새로운 인간 New Man’을 동일시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적었다.


“구성주의에 대해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은 구성주의가 인간의 감정과 외부 세계 사이의 수동적으로 부여된 조화를 배격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구성주의는 인간을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세계 속에서 스스로 질서를 창조하는 자로 보며, 예술가는 이런 질서의 유형을 결정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주요 유럽 구성주의 화파 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을 수용한 화파는 전혀 없다.
오히려 유럽 구성주의의 목적과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선언문을 통해 ‘순수 미술’이라고 비판한 종류의 것이었다.


유럽 구성주의는 전통 미술의 근본적 토대를 무분별하게 공격한 다다이즘, 그리고 무의식적인 창조와 자동주의라는 초현실주의 강령에서 지침을 찾은 충동적이고 직관적인 구성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다.
구성주의는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와는 달리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미적 원리와 일치하는 의식적이고 신중한 구성을 지지했다.
유럽 구성주의 예술가 단체의 최초의 공식 선언은 1922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국제 진보예술가대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1883~1931), 리시츠키와 한스 리히터Hans Richter(1888~1976)는 국제 구성주의 분파의 이름으로 연합 시위를 벌였다.
1920년대에는 공식적인 조직은 형성되지 않았지만 구성주의 원리를 문학, 건축, 영화에 확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많은 구성주의 예술가들이 2차세계대전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에 정착했다.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나움 가보Naum Gabo(1890~1977), 나움 가보의 형 러시아계 프랑스 조각가 앙투안 페브스네르Antoine Pevsner(1886~1962), 항가리계 미국 화가이며 조각가 라슬로 모흘리-나기Laszlo Moholy-Nagy(1895~1946), 독일 건축가로 바우하우스의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 네덜란드 화가 피트 몬드리안 등이 영국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데임 바바라 헵워스Dame Barbara Hepworth(1903~75), 벤 니컬슨Ben Nicholson(1894~1982), 헨리 무어Henry Moore(1898~1986), 비평가 허버트 리드Sir Herbert Read(1893~1968)와 교류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1950년대까지 영국에서는 독자적인 구성주의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7년 가보는 벤 니컬슨, 젊은 건축가 J. L. 마틴과 공동으로 ‘구성주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은 자료 모음집인 『서클』을 편집했다.
가보는 여기에 ‘미술에 있어서의 구성주의적 이념’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가보는 ‘구성주의적 이념’을 확장시켜 이를 과학, 예술 또는 기타 영역에서의 ‘뛰어난 창의력’과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입체주의가 자연주의적 미술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입체주의 이후 미술계에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자연주의적 미술을 복원시킬 토대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적었다.


“대상 세계의 외관을 재현하지 않는 미술이라는 것은 예전에는 결코 생각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입체주의 이후 미술의 회생은 매우 힘들었다.
구성주의 이념은 선, 색채, 형태와 같은 시각예술 요소는 외부 세계와 무관한 독자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한다.
즉 이러한 요소들의 생명과 활동은 이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조절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이는 단어와 숫자처럼 공리적인 이유 때문에 관습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즉각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법칙이 드러나면서 미술의 영역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그 동안 간과되었던 인간의 충동과 감정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요소들은 문학이나 시 등으로도 가능한 이미지의 연상을 위해 잘못 사용되어 왔다.”


가보의 주장은 구성주의의 의미를 확대시켜 표현적 추상을 비롯한 모든 비재현적인 추상 미술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는 칸딘스키의 생각과 유사하며 일반적으로 정서적 표현이 배제된 것으로 여겨지는 구성주의보다는 표현적 추상에 적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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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문화협회




1939년에 결성된 미술문화협회의 중심인물은 일본에 초현실주의를 유행시킨 후쿠자와 이치로였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문’이 일본에 유입된 것은 1925년 문학에 의해서였으며 1930년을 전후로 초현실주의 작품이 이과전에서 하나둘씩 소개되었다.
후쿠자와 이치로福澤一郞가 1931년 파리에서 귀국하면서 조르조 데 키리코, 막스 에른스트 등의 영향이 나타난 초현실주의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이 이념이 유행했다.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1888~1978)


그리스 볼로 태생의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는 형이상학적 회화의 창시자이다.
1906~09년 뮌헨에 머무는 동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에 흥미를 가졌고, 1909`~10년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수수께끼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들은 움직임이 없는 빈 공간, 비논리적인 그림자, 예기치 못한 원근법으로 인해 설명할 수 없이 이상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사물의 일반적 관계를 무력화하고, 새롭고 신비로운 관계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일상적인 사물 뒤에 있는 숨겨져 있는 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형이상학적 통찰력’에 대한 정교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키리코는 사물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정서적 의미를 없애기 위해 1914년부터 인간의 모습 대신 재봉용 마네킹을 그렸으며, 그 외에도 조상, 석고 두상, 고무장갑 등을 그렸다.
또 사물의 병치와 회화 공간의 형식적 특성을 이용하여 불안한 분위기를 창출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초현실주의의 한 특징을 예견했다.
비록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 기법을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키리코 작품에서 보이는 반쯤은 꿈같고 반쯤은 병리학적인 효과를 지닌 신비스러움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목표로 한 정서적인 효과와 유사했다.
또한 초현실주의 운동은 “미술 작품에는 상식과 논리가 들어올 자리가 없으며 훌륭한 작품은 꿈이나 어린이의 정신 상태와 매우 가깝다”는 키리코의 믿음과 전적으로 일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그림은 더욱 철저한 묘사와 엄격한 기법을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의미는 결여되어 있었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독일계 프랑스 화가 막스 에른스트는 1908~14년 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해지만 회화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정신질환자의 그림에 매료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19년 쾰른의 다다 그룹을 이끌었으며 ‘다다막스’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또한 콜라주와 포토몽타주 기법을 초현실주의에 접목시켰다.
1922년 파리에 정착하여 이런 기법들을 퍼뜨렸으며 1924년 초현실주의 운동의 형성에 참여했다.
에른스트의 작품은 종잡을 수 없고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며 항상 실험적이었다.
전성기에 제작한 작품들은 초현실주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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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할 수 있다.”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이 책은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약 500년에 걸친 프랑스 미술을 다루는 것이므로 프랑스 역사를 함께 서술해야 하는 방대한 작업이 되었다.
역사란 한마디로 이야기이다.
하지만 누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느냐에 따라서 이야기의 틀이 달라지고 그 내용의 본질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보통 권력과 부를 가진 궁정으로부터 시작된 미술사는, 왕족과 귀족의 선택이나 정치적 행동에 따라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정치적인 요인, 나라의 위상을 세우려는 의도, 또한 인접 국가들과의 문화경쟁이 크게 작용한다.
따라서 이야기는 수직적 구조로 단순하게 전개될 수 없고, 큰 틀 속에서 가지 많은 나무처럼 횡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내용은 고딕 건축 이후 침체해 있던 프랑스 미술이 프랑수아 1세의 예술적 부흥에서 시작하여 지속적인 왕정 정책의 후원을 받아 쿠르베에 이르기까지, 즉 독자적인 회화를 창조해낼 때까지의 역사적 과정이다.
프랑수아 1세가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프랑스로 초청하고 늙은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에 뼈를 묻은 것은 이탈리아의 영향 하에 프랑스 미술이 재건했다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프랑스 왕정은 정치적으로 프랑스 미술을 앙양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하는 재정적 뒷받침을 했다.
특히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공헌은 눈부셨으며,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에 침공과 미술품 약탈을 통해 발생한 이웃나라 스페인의 영향도 매우 컸다.


서양 미술사를 하나의 큰 틀로 볼 때, 앞서 문명이 발달했던 이집트·고대 그리스·로마의 양식들이 끊임없는 모방을 통해 변형을 거듭해왔음을 볼 수 있다.
마네의 누드화의 뿌리는 티치아노에 닿아 있고, 티치아노의 양식은 조르조네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조르조네의 누드는 고대 비너스의 변형이다.
이런 식으로 모방에 모방이 거듭되어왔다.
따라서 미술사 공부는 최초의 양식이 누구의 혹은 어느 시대의 것이며, 그런 양식이 모방을 통해 어떻게 변형되었으며 시대적으로 어떻게 달리 해석되었는가 하는 것을 밝혀내고 이해하는 것이다.
필자는 프랑스 미술을 예로 하여 미술사의 형성과정을 말하고자 했다.
왕족의 취향과 정치적 변수에 의해 미술의 토양이 만들어졌고, 그 토양에서 모방이 가능해졌으며, 모방을 통해 자신의 창조성을 발견하고 만들어나가는 데서 프랑스는 미술의 선진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 대로 모방은 창조를 위한 자아수련이다.
그 당시는 모방이 아니고서는 기초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이 특별히 따로 없었던 시대로서 뮤지엄이 곧 미술교실이었던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였던 대로 프랑스의 루브르 뮤지엄은 과거에 궁전이었고 또한 궁전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곳이었으므로, 그곳에 걸린 작품들은 소수의 왕족과 귀족의 취향에 따라 선별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궁정의 취향이 일반 대중의 취향이 될 수밖에 없었고, 초기의 모방은 매우 한정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예술가들이 유럽의 나라들을 쉽게 여행하게 되면서 궁정의 취향보다는 일반 대중의 취향이 더욱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그런 다양성에서 독자적인 양식들이 창조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수세기가 걸렸다. 인터넷으로 모든 자료를 실어 나르는 오늘날에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모방이 가능하고 따라서 창조도 빠르게 이루어지지만 말을 타고 다니던 시대에는 말의 속도만큼 더딜 수밖에 없었다.
르네상스로부터 19세기 중반까지에는 모든 것이 오래 걸렸으며 정치적 후원 없이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점들이 이 책을 쓰는 동기가 되었다. 미술문화의 발전이 요구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프랑스의 정치와 미술사는 예술부흥을 위한 정치적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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