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서정홍 지음, 최수연 사진 / 보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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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64

 


착한 사람 손길 닿는 풀빛
―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서정홍 글
 보리 펴냄, 2012.7.16.

 


  풀을 뜯어서 먹으면 손에서 풀내음이 납니다. 과자를 집어서 먹으면 손에서 과자내음이 납니다. 풀을 뜯는 손에는 풀물이 들고, 과자를 집는 손에는 기름기 돋습니다. 냇물에 손을 담그면 싱그러운 물빛이 온몸으로 스며듭니다. 자동차 넘치는 찻길에 서면 자동차 배기가스가 온몸에 스며듭니다. 숲속에서 하늘바라기를 하면 파란 바람이 몸속으로 살살 젖어듭니다. 아파트에서 승강기를 타고 내리면 기계 울리는 소리와 형광등 불빛이 온몸으로 젖어듭니다.


.. 상순이네 집 앞에 / 노란 산수유꽃 피고 / 슬기네 집 옆에 / 하얀 목련꽃 피고 / 산이네 집 낮은 언덕에 / 연분홍 진달래꽃 피고 ..  (봄이 오면)


  삶자리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삶자리를 어디에 두면서 무엇을 하려는가에 따라 넋이 달라집니다. 삶자리를 다스리는 매무새와 몸짓에 따라 말이 달라집니다.


  도시사람은 도시말 쓸 테고, 시골사람은 시골말 쓸 테지요. 도시에서 살더라도 푸른 넋 돌보려 한다면 푸른말 쓸 테고, 시골에서 살더라도 푸른 넋과 동떨어지거나 등지면 푸른말 모르거나 잊을 테지요.


  군부대에서 군인은 전쟁말을 씁니다. 군부대는 전쟁을 하도록 가르치거나 길들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전쟁훈련을 시키고 전쟁무기를 다루도록 이끕니다. 언제나 전쟁말을 쓰고 전쟁만 생각하니, 참말 전쟁이 터질 뿐 아니라, 군부대에서 나오더라도 자꾸 전쟁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대학입시만 다룹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꿈과 사랑을 들려주지 못합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대학입시 문제풀이에 얽매일 뿐, 아이들이 서로 꿈과 사랑으로 엮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 비탈진 산밭에 심어 둔 / 두릅과 고사리는 / 한데 어울려 / 한마을을 이루며 산다 ..  (한데 어울려)


  공장에서 일하면 공장말 써요. 국회에서 일하면 국회말 쓸 테고, 신문기자가 되면 신문말 쓰겠지요. 들에서 일하면 들말을 쓰고, 바다에서 일하면 바다말 씁니다. 삶터에 따라 말이 차근차근 거듭납니다. 아름답게 거듭날 수 있고, 안 아름답게 뒷걸음할 수 있습니다. 사랑어린 말을 할 수 있고, 사랑하고는 멀찌감치 떨어진 말을 할 수 있어요.


  말에는 삶이 드러납니다. 말 한 마디에 넋이 묻어납니다. 즐거이 말하며 이야기꽃 피우는 사람은 즐거운 삶입니다. 기쁘게 말하며 웃음꽃 피우는 사람은 기쁜 삶입니다.


  누군가는 슬픈 삶이고, 누군가는 아픈 삶입니다. 누군가는 고단한 삶이며, 누군가는 어려운 삶입니다. 말 한 마디에 삶이 나타나요. 말빛은 언제나 삶빛이에요. 말빛은 마음빛이요, 말빛은 언제나 사랑빛입니다.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들을 보셔요. 늘 아름답고 맑게 말꽃 피웁니다. 사랑을 모르거나 사랑을 짓밟거나 사랑을 따돌리는 사람들을 보셔요. 늘 어둡고 퀴퀴한 말내음 번집니다.


.. 백 년 만에 // 가장 춥다는 겨울 아침 // 사람만 추운 게 아니더라. // 참새들도 추운 게다 ..  (겨울 아침)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갈 때에 즐겁게 웃고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는지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삶을 물려줄 노릇이에요. 아이는 어른한테서 삶을 물려받을 노릇이에요. 어른들이 날마다 누리는 삶이 아이들한테 날마다 물려주는 삶이 돼요. 아이들이 날마다 마주하는 삶이 아이들 스스로 날마다 물려받는 삶 될 테지요.


  즐거움도 슬픔도 맞아들여요. 기쁨도 괴로움도 맞아들이겠지요. 꿈과 사랑뿐 아니라, 미움과 다툼까지 맞아들일 수 있어요. 웃음을 늘 마주하는 아이들이라면 웃음을 맞아들일 테고, 눈물을 으레 마주해야 하는 아이들이라면 눈물을 맞아들이고 말아요.


  먹는 대로 몸이 되듯, 맞이하는 삶대로 사랑이 돼요. 보는 대로 눈길이 되듯, 마주하는 삶대로 꿈을 키워요. 입시지옥을 아이들한테 물려주면 아이들은 꿈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입시지옥 뒤에는 취업지옥을 아이들한테 건네주면 아이들은 사랑을 키울 만하겠습니까.


.. 아내가 말했습니다. // “여보, 나는 일 년도 안 된 / 작은 나무 앞에 서 있어도 / 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요.” ..  (아내는 언제나 한 수 위)


  왜 도시에서 회사원 되어야 할까요. 초·중·고등학교는 왜 아이들한테 도시에서 회사원 되어 돈만 잘 버는 길로 이끌기만 할까요.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교사인 어른들은 왜 아이들한테 흙을 누리고 풀을 즐기며 나무를 사랑하는 삶은 하나도 못 보여주거나 안 가르칠까요. 아이들이 모조리 운동선수나 연예인이나 가수가 될 수 있을까요. 아마 이렇게 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운동선수는 밥을 안 먹나요. 연예인은 옷을 안 입나요. 가수는 집이 없어도 되나요. 밥과 옷과 집은 돈이면 다 되는가요. 논을 일구는 사람 없으면, 밭을 돌보는 사람 없으면, 그래도 돈으로 얼마든지 밥과 옷과 집을 누릴 수 있나요.


  의사도 변호사도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밥을 먹어요. 이들이 아무리 뛰어난 의사요 변호사요 국회의원이요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밥을 안 먹으면 죽어요. 이들은 시골 흙지기 앞에서 아무것도 못해요. 시골 흙지기가 아무 일을 안 하면 다른 모든 도시 회사원과 공무원은 굶어서 죽어야 해요. 농협이 없어도 나라는 안 무너지지만, 시골 할매와 할배가 일을 안 하면 농협은 바로 무너지고 나라도 바로 사라져요. 스포츠와 증권과 은행이 없대서 나라가 무너질 일 없지만, 시골 흙지기가 없으면 바로 나라가 무너져요.


  석유가 넘친다는 나라를 봐요. 석유값보다 물값이 비싸요. 물값 못지않게 정갈한 밥 한 그릇 값이 몹시 비싸겠지요. 석유값은 아무것 아니지만, 나무그늘과 풀숲 값은 댈 수 없이 비싸겠지요.


.. 벌레 먹은 놈, 빛깔 퍼런 놈, / 도시 사람들 싫어하는 놈들 다 가려내고 / 상자에 담는다. / 아, 그러고 보니 저녁도 굶었다. /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웠는데 밤 열두 시다 ..  (유월)


  고속도로에 자가용 싱싱 달린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고속도로를 새로 낼 수 없습니다. 자동차는 앞으로 1/10 아니라 1/100, 아니 1/1000, 아니 1/10000, 아니 1/1000000쯤 줄어들리라 생각해요. 이 나라 이 땅에서 찻길을 모조리 걷어내고, 찻길 있던 자리에 밭을 일굴밖에 없으리라 생각해요. 골프장 모두 걷어치우고, 골프장 있던 자리에 능금밭 배밭 복숭아밭 일굴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발전소와 공장 있던 자리 모두 깔끔히 치우고, 그곳에 목화밭 뽕밭 마련할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자동차 없으면 걸어다니면 되고, 자전거 타면 되는데, 쌀이 없고 보리가 없으며 콩이 없으면 어찌 될까요. 솜과 실을 얻지 못하면, 열매와 푸성귀를 누리지 못하면, 우리 삶이 어찌 될까요.


  발전소와 공장은 없어도 되지만, 능금밭이랑 감밭은 있어야 해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는 없어도 되지만, 논은 있어야 해요. 공항도 골프장도 없어도 돼요. 배추밭 무밭 감자밭 고구마밭이 있어야 해요.


  있어야 할 땅이 있어야 삶이 삶답습니다. 있어야 할 사랑이 있어야 삶이 삶답지요. 있어야 할 숨결과 바람과 빛이 있어야 삶이 삶답게 흘러요.


.. 가난한 산골 마을 / 몸이 아파 사흘째 누워만 계시던 할아버지가 / 해 질 무렵에 스스로 일어나 /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고 / 감나무 아래 잠시 서 있기도 하고 / 장독대 앞에 앉아 키 작은 채송화도 바라보고 / 신발장 문도  살며시 열어 보고 / 집 안에 다시 들어와 / 옷장에 걸린 옷도 만져 보고 / 장롱 안에 있는 이불도 만져 보고 / 방마다 한 번씩 누워도 보고 / 걸상에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 방으로 들어가셨다 ..  (밤사이에)


  서정홍 님 시집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보리,2012)를 읽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틈틈이 시를 쓴다는 서정홍 님입니다. 밥 한 그릇 스스로 일구어 얻는 삶처럼 아름다우며 즐거운 삶이란 없다고 싯말로 노래합니다. 흙을 만지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즐거운가 하고 노래합니다.


.. 내 손으로 // 농사 지은 쌀로 // 정성껏 밥을 지어 // 천천히 씹어 먹으면 //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  (내가 가장 착해질 때)


  그런데, 시집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를 읽으면 논일과 밭일을 무척 고되게 하는 모습이 흐릅니다. 한창 바쁜 일철에는 숟가락 들 힘조차 다 쓴다고 하지만, 자칫 산업전사마냥 농업전사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가 마냥 허리 휘도록 일했을까 궁금합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가 마냥 허리 휘도록 일했다면, 왜 그토록 일해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가 이녁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어 ‘회사원 되는 공부’를 시켜야 하지 않았어도 마냥 허리 휘도록 일했을까 궁금합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 모두 이녁 아이들을 도시로만 보내어 회사원 되는 공부를 시키느라, 정작 시골에서는 아이들 모조리 떠나고, 예부터 이어온 시골 잔치와 두레 또한 몽땅 사라지며, 일노래 하나 없이 등허리만 휘고 만 셈 아닌가 궁금합니다.


.. 그걸 쭉 읽던 경비가 시집을 주민증 대신 맡겨 두고 들어가라 했다. 그날, 시집을 주민증 대신 경비실에 맡겨 놓고 동무를 면회하고 돌아왔다. 나는 가끔 가난한 시인의 시집을 주민증 대신 쓰게 해 준 그 사람이 그립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  (그리운 사람)


  서정홍 님도 노래를 부르며 흙을 만지기를 빌어요. 서정홍 님 스스로 논노래와 밭노래와 들노래와 숲노래와 마당노래와 잔치노래와 두레노래를 지을 수 있기를 빌어요. 스스로 즐겁게 만지는 흙인 만큼, 흙 한 줌 만지면서 얼마나 사랑스럽고 애틋하며 살가운 노래가 절로 샘솟는가 하는, 노래빛으로 싯말 엮을 수 있기를 빌어요.


.. 똑똑한 사람이 없으면 / 사람을 죽이는 / 무기를 만들지 못할 것이고 / 무기가 없으면 / 비참한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못난이 철학)


  예부터 임금이란 놈이 흙지기를 등치지 않을 적에는, 시골 흙지기 모두 퍽 자주 마을잔치 열었습니다. 시골에서 들일을 하면 으레 두레와 품앗이요, 두레와 품앗이로 일을 하면, 일은 일대로 바지런히 힘차게, 그리고 일을 쉬는 사이, 또 일을 마친 뒤, 흐드러지게 춤판 노래판 놀이판 잔치판 열었어요.


  우리 겨레 옛놀이를 헤아려 보셔요. 어느 고장 어느 마을을 보더라도 온통 잔치요 놀이였어요. 예부터 일은 놀이였고, 놀이는 일이었어요. 일하면서 노래하고 놀이하면서 일해요. 일노래와 놀이노래는 한결같이 흐르고, 아이들은 어버이와 어른 곁에서 일놀이와 노래춤을 함께 물려받았어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학교를 다닌 아이들이 도시에 있는 더 큰 학교에 가도록 교사들이 부추기면서, 더 큰 학교를 다닌다며 큰도시로 빠져나간 아이들이 두 번 다시 시골로 돌아오지 않으면서, 시골에 시골빛 스러지고 시골잔치와 시골노래 모두 자취를 감추어요.


.. 산밭에서 / 이랑을 갈다가 / 그 자리에 누웠습니다. // 나는 금세 / 이랑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  (하루)


  서정홍 님도, 서정홍 님 둘레 아이들도, 또 이 나라 모든 시골마을 아이들도, 이랑과 하나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도시에서 나고 자라며 도시에서 일하는 모든 어른들도, 이랑하고 하나되고, 풀이랑 하나되며, 꽃과 나무하고 하나되기를 빌어요. 냇물이랑 하나가 되고, 하늘이랑 하나가 되며, 무지개와 바다와 하나가 되기를 빕니다.


  사마귀와 베짱이하고도 하나가 되어요. 제비와 개구리와 뱀하고도 하나가 되어요. 나비와 벌과 두더쥐하고도 하나가 되어요. 고라니와 멧돼지와 삵하고도 하나가 되어요. 모두 한 목숨이요, 이웃이며 벗님입니다. 모두 푸른 숨결이며 맑은 사랑입니다. 착한 사람 손길 닿는 풀빛을 어깨동무하면서 누려요. 4346.12.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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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12-02 14:33   좋아요 0 | URL
제목이 참 좋은 시집입니다~^^
보관함에 고이 담아두어야겠어요~ ㅎㅎ

숲노래 2013-12-02 18:41   좋아요 0 | URL
밥 한 숟가락으로 모두 착한 사람 될 수 있어요~

페크pek0501 2013-12-02 14:44   좋아요 0 | URL
"풀을 뜯어서 먹으면 손에서 풀내음이 납니다. 과자를 집어서 먹으면 손에서 과자내음이 납니다"
- 와 닿는 문장입니다. 시 같아요. ^^

아름다운 시집을 찜합니다.

숲노래 2013-12-02 18:41   좋아요 0 | URL
모두들 아름다운 풀내음 누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