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9일 째. 레몬을 직접 갈아 만든 레모네이드와 물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은지, 그러니까 아무 것도, 껌 조차도 씹어 보지 않은지 9일째다. 엉클어져 있는 일상을 정리해야 할 때, 방향성 없이 질주하는 내 자신을 정지시켜야 할 때, 새로운 시작이 필요할 때, 난 항상 다이어트를 해 왔다. 작년 4월, 한참 힘들었을 때, 울고 불고 콧물을 흘리다가 결심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자! 그리고는 5~6월 60일간 매일 저녁, 소금조차 뿌리지 않은 퍽퍽한 닭 가슴살 샐러드를 먹었다. 그 결과, 근육 손실 없이 5kg를 감량했고 여름 내내 과감한 노출 패션을 즐겼다. 그리고 이제 다시.... 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더 비장하게 단식을! 지난 몇 개월간 정말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텼는지 모르게 바빴다. 누가 전화를 해서 천천히 말하면 화가 날 정도였다. 회사에, 학교에, 책 관련 라디오 출연에 강의 준비에... 기말고사 끝나자마자 유럽으로 2주간 출장을 갔는데 그 기간이 절정이었다. 마지막 시험 한 과목을 남겨 둔 일요일, 늦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무서웠다. 출장 준비, 시험 공부... 해야 할 일들이 머리를 빙빙 돌았다. 아무 것도 안하고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 울음을 터뜨렸다. 애처럼 펑펑 울었다. 방학을 하고, 라디오 패널을 그만 두고, 유럽 바이어들이 다 휴가를 가면서 이제야 여유가 생겼다. 그 동안 살이 많이 쪘다. 10시에 수업 끝나고 술을 자주 마셨다.(학교에서는 술자리를 3교시라고 부른다.) 밤 늦게 숙제를 하거나 원고를 쓰다가 캔맥주를 하나씩 마셨다. (왜 공사장 인부 아저씨들이 소주를 마시고 일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일찍 들어와서 쉬어야 하는데 그럴 때는 회식이 있거나 바이어와 저녁을 먹거나 밀린 약속들이 있었다.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 크리스피 크림 같은 단 음식들이 땡겼다. 시험 공부할 때는 초콜릿을 비타민처럼 먹었다. 그러니 살이 찔 수 밖에! 몸은 정직하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번에 단식을 하는 게 단지 살을 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헝클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니까 약속을 안 하게 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동안 방치된, 4달이나 개점 휴업하고 있는 홈페이지도 돌보고, 무엇보다도 그 동안 지친 위와 간, 그리고 매일 헉헉거렸던, 동동거렸던 내 마음을 쉬게 하고 싶다. 그 동안 숨차게 달려온 내 자신에게 말하고 싶다. 수고했어요!
휴가 둘째 날. 어제, 오늘 세 꼭지를 더 써서 55% 달성. 아직 가야할 길이 멀지만 그래도 반 넘게 썼다. 원래 책을 쓸 때 다른 저자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마...꼭지 수를 채운 다음에 1st draft를 출판사에 넘기겠지?) 난 3꼭지, 6꼭지씩 쓰는 대로 출판사 담당자에게 계속 보냈다. 물론 오늘 쓴 3꼭지도! 친애하는 기획자 L은 찔끔찔끔 원고를 보내면 귀찮을 만도 한데 원고를 보낼 때 마다 커멘트도 해주고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최고의 필자"라고 부르며! Yes24 웹진 <채널예스>에 실린 김주하 아나운서 인터뷰를 보면 김주하는 뉴스데스크를 진행한지 1년쯤 됐을 때부터 수많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아 왔다고 한다. 책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잘 나가는 여자 김주하를 포장지로 할 수 있으면 어떤 책이든 괜찮다는 제안도 있었단다. 안 봐도 비디오다. 나도 메이저급 출판사들 몇 군데에서 제안을 받았는데 "여대생이 닮고 싶은 여성" 1위라는 뉴스데스크 진행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러브콜을 받았을까? 나랑 계약을 한 출판사는 덩치 면에서 메이저급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내가 찾던 기획자를 만났다. 내가 원했던,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기획자는 내 작업을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메이저급 출판사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헤드헌터를 만난 것 같은 기분, 또는 오디션에 통과하고 고마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함께 작업하고 있는 출판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담당자 뿐 아니라 주간님까지 세 분이나 나오셔서 밤 늦게까지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셨다. 초등학교 반창회 같은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 때 술을 마시며 생각했다. 엮였구나! 그리고 얼마 후, 망설임 없이 계약했다. 책을 쓰면서 자기 검열을 많이 한다. 언젠가 우연히 알게 된 한 문학평론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염결성의 윤리를 갖고 계시는군요." (그 때 "염결성"이란 말을 처음 들어봤다. 술 먹다가 "지식의 환원은 윤리" 라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술자리의 윤리에는 약한 사람이었다.) 염결성의 윤리까지는 몰라도 어떤 강박 같은 건 갖고 있다. 최소한 펄프는 안 아까운 책을 쓰고 싶고, 돈 만 원이 안 아까운 책을 쓰고 싶고, 내 스스로에게 쩍 팔리지 않은 책을 쓰고 싶다. 그러다 보니 진도를 쫙쫙 뽑지 못하고 고민에 갇혀 있을 때가 많다. 2주 전에는 주말 내내 책상에 앉아서 한 줄은커녕 한 단어도 쓰지 못했다. 그럴 때 마다 L은 내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다른 저자들한테도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최고의 필자"라 부르며! 아까 바람도 쐴 겸 서점에 갔었다. 출간 소식을 못 들었었는데 <장정일의 독서일기 7>이 있기에 사 왔다. <공부 -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를 읽고 그렇게 실망을 했으면서도 또 다시 지갑을 여는 나는 장빠? 휴식 겸 잡문을 쓰며 기네스를 한 캔 마시고 있다. 캬~ 맛있다! 자 ~ 이제 다시 시작해 보자구! Go Go!
휴가 첫날. 월욜인데 회사를 가지 않으니 좋기도 하면서 살짝 어색하다. 아까 잠깐 밖에 나갔었는데 평일 낮에도 시내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어제 밤을 꼬박 샜다. 원고 4꼭지를 썼다. 4번째 꼭지를 쓰고 있을 때 날이 밝았다. 아...책 한권 쓴다고 정말 유난 떤다. 오피스텔까지 얻고... 책이 잘 팔려서 인세를 많이 받아야 할텐데! 어제 낮잠을 자기는 했지만 아직 밤을 샐 수 있는 체력이 있다는 게 기쁘다. 또...이렇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밤을 샐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는 게 좋다. How happy I am! 밤을 새면서 조덕배 9집을 듣고 또 들었다. 조덕배는 내가 중학교 때 너무나 좋아했던 가수다. <나의 옛날 이야기>를 듣고 필이 확~꽂혔다. 중학교 때 용돈을 모아 롯데호텔에서 했던 조덕배 콘서트까지 갔으니! 무척...특이하거나 또는 조숙한 애였던 것 같다. 오랜 공백 끝에 조덕배 9집이 나왔고, 나 또한 무척 오랜만에 CD를 샀다. <나의 옛날 이야기>,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여인> 등 리메이크된 곡들이 새롭다. 특히 조PD랑 정지선이 피처링을 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여인>은 듣고 또 들어도 좋다. 뽕짝 풍으로 바꾼 <말문이 막혀 버렸네>도 좋다. 어느새~ 벌써~ 조덕배가 49살이란다. 내 중학교 때 꿈이 조덕배랑 결혼하는 거였는데...음하하 휴가 첫날의 여유로운 오후. 시간아, 천천히 가라!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갑자기 황진이 시조가 생각난다. 이 소중한 시간이 헛되게 새어나가지 않게 짜투리 시간을 냉동실에 꽁꽁 얼려서 보관했다가 휴가가 끝나는 날에 해동해서 쓰고 싶다. 휴가 첫날의 단상.
아침부터 해가 진 지금까지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워밍업을 하고 있다. 왜 이렇게 글을 쓰기가 싫지? 아니...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작하기가 두렵다. 파일을 열고 일단 시작을 하면 어떻게든 쓸 수 있을텐데 여태까지 파일을 안 열고 있다. 이거 뭐... 시험 전날 방청소를 하거나 앨범 정리를 하는 애들처럼 해야할 일 앞에서 미적미적 딴청을 부리고 있다. 오피스텔에 TV도 없다. 낮잠을 자지도 않았다. 만화책을 보지도 않았고, 게임을 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줄, 한 단어는 커녕 아직 파일을 열지도 않았다. 왜 이러지? 하루 종~일 워밍업!
Hamburg의 bird eye view를 꼭 보라는, 바다가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모른다는 Jude님의 말에 Michael Tower에 올라 갔다. 사진 찍기에 바쁜 북적대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혼자 Hamburg Hafen(항구)을 홀린 듯 바라보며 서 있었다. 뭐랄까....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컨테이너를 가득 싣고 연기를 내 뿜으며 거대한 몸집을 움직이는 배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멀리 Hamburg까지 와서 서울을 그리워 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로 또 다시 떠나고 싶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욕망.내 마음은 항상 서성거린다. 베이스 캠프 없이. 언젠가 전생 맞추기 프로그램이 이메일로 돌아다닌 적이 있다. 한 문제씩 뜨는 객관식 문제들을 클릭, 클릭 하다보면 "당신의 전생은 OOOOOO" 라는 문장이 떴다. 주위 사람들은 맞는 거 같다!며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나도...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전생은... 선원이라나? 이 항구, 저 항구를 떠도는 뱃놈.그래서 이렇게 떠도나?Michael에서 나오니 바로 맞은 편에 헌책방이 하나 있었다.쓰~윽 문을 열고 들어갔다. Guten Tag! 주인은 잘못 들어온 거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 보며 인사했다. 책들을 쭈~욱 둘러 보다 갑자기 Georg Lukacs의 [Die Theorie des Romans]이 생각났다. 김윤식 선생님이 홀린 듯한,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던 책! 강의를 듣고 당장 사려고 amazon을 뒤졌으나 하도 옛날 책이라 절판된 지 오래였다. 매우 반듯해 보이며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은 50대 남자, 주인 아저씨한테 물으니 자기 가게에는 없는데 원한다면 찾아 줄 수 있다고 했다. 주인 아저씨랑 나는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아서 검색을 했다. 유럽에 있는 수많은 헌책방들의 재고를 검색하는 싸이트에서. 덴마크, 영국, 스위스, 독일의 여러 도시들의 헌책방에 1920년 초판이 있었다. "1920 Berlin"을 보는 순간 가슴이 마구 뛰었다. 무슨 대단한 장서가라도 되는 것처럼 초판을 갖고 싶은 욕심이 났다. 더럭. 가격이 Euro50~180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아저씨는 거의 100년이나 된 책이라 공부할 목적이면 상태가 좋지 않다고 그냥 1963년이나 1971년에 출판된 책을 사라고 했다. 그런 책들은 Euro20 정도면 살 수 있다고. 짧은 순간, 정말이지 극심한 갈등을 하다가 주인 아저씨의 충고대로 1971년에 출판된 hardcover를 선택했다. 아저씨는 영국 캠브리지에 있는 헌책방으로 책을 주문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책을 주문하고 나오려다가 갑자기 또 한권 생각나는 책이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있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헤르만 헤세 책들을 쭉 살펴 보더니 안타까운 표정으로 없다고 말했다. 아쉬운 대로 Suhrkamp 헤세 콜렉션 중 세 권을 집어 들었다. 아저씨는 계산을 하며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이 Hamburg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그런데 이런 책들을 왜 사냐고 했다. 난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고등학교 때 <데미안>을 읽고 독일어로 읽고 싶어서 독문학과에 갔다고.(그런데 대학 가서는 전혀 공부도 하지 않고, 책도 읽지 않았다는 말은 생략했다.)아저씨는 Wunderbar!(wonderful!) 탄성을 지르며 신기해 하더니, 문 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악수도 했다. 머쓱! 한 때, 문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가끔 그 열정들이 되살아나 꿈틀거리면 즐거울 때도 있지만, 괴롭기도 하다.이런 열정은... 편하게, 덤덤하게 살아가는 데 아~주 쥐약이니까! Hamburg의 주말은 너.무.도 평화롭다. 난 너무도 아름다운 햇살과 반짝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평화로움에 동참하려 나름 노력하지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맴돈다. 맴맴. 항상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질문. When will I accept where I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