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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관한 작은 이야기
김동식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2002년 11월, 난 무식하고도 용감하게 회사를 그만 뒀다.
'쉬고 싶다'는 너무나 단순하고 대책 없는 이유로.
그 땐...너무 지쳤었다.
무슨 뾰족한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쉬고 싶었다.
주위에서 미쳤다고 하면서 말렸다.
그 때...난 30살이었다.
" 30살 여자가 아무 대책 없이, 번듯한 회사를 그만둔다구?
노처녀 백조가 되겠단 말이야? 미쳤어!!! "
주위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난 회사를 그만 뒀다.
그리고 LA에 있는 천사표 이모네 집으로 날아갔다.
커다란 트렁크 가득 읽고 싶었던 책들을 채우고 훨훨~
미국에 가고 싶었던 게 아니고,
그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집에 있다간 부모님한테 들볶여 죽을 것 같았다.
그건....도피였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시체처럼 잤다.
자고, 자고, 또 자고....정말 원 없이 잤다.
하루는 자다 깨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천사표 이모가 말했다.
" 수선아! 넌 하고 싶은 일이 뭐니? "
난 잠에서 덜깬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난 글을 쓰고 싶어. "
그 때, 이모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 그래? 그럼 평론을 쓰면 되겠구나."
예상치 못한 이모의 엉뚱하고도 쌩뚱맞은 말. 평론???
이모는 나의 황당한 표정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 파란만장한 체험이 많아야 소설을 쓰지.
넌 그냥 곱게 자라서 좋은 대학 나오고, 회사 다니고...
뭐 소설 쓸만한 재료가 없쟎아.
그러니까 글쟁이가 된다면 평론가가 되는게 낫지 않겠어? "
그 때, 난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 이모, 그럼 이모는 내가 평론 쓰면 읽을꺼야???
파란만장한 인생 안 살아도 소설 쓸 수 있어."
그러면서 김영하 얘기도 하고,
소설은 '상상력'으로 쓰는거라는 둥 이 얘기 저 얘기하며 떠들었다.
난 '문학 평론'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가끔 시집을 읽으면 시집 뒤에는 짧은 시의 100배 분량은 되는 평론이 달려 있다.
뭘 그렇게 분해를 하는지...읽다 보면 짜증이 나곤 했다.
평론은 일반 대중에게 격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평론가들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했다.
평론가가 겸임으로 교수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먹고 살까?...하는 걱정까지 했다.
<소설에 관한 작은 이야기>는 평론가 김동식이 포스코 신문에 연재했던 글들을 엮은 거다. 평론도 아니고, 리뷰도 아니고, 독서일기도 아니고, 말 그대로 소설에 관한 '작은 이야기'다.
포스코 신문은 일주일에 한번씩 나오는 사보다.
그러니까 <소설에 관한 작은 이야기>는 포스코 직원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권씩 소설을 소개했던 글들을 묶어서 낸 책이다.
글들은 '대화체'로 되어 있다.
"~데요.", "~구요" , "~입니다."
'편지체'로 된 글들도 있다.
정말 쉽게 쓰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편지체로 된 글들은 너무 어색해서 안타깝기 조차 했다.
이 글들은 '일반 대중'을 향한 최초의 글쓰기였다고 한다.
문학에 대한 공부를 해왔을 따름이지, 일반 대중을 상대로 문학작품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하는지 배운 적도 고민해본 적도 없었음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평론가로서의 고민이 느껴진다.
'일반 대중'을 향한 글쓰기, 도대체 어떤 눈높이로, 어떻게 소통해야 하나?
소통의 방법으로 '대화체', '편지글 형식'을 생각했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글 53편을 읽으며 놀란건,
쉽게 쓰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면서도 평론가로서의 입장을 놓지 않았다는 거다.
이 글들을 꾸준히 읽은 독자라면 '문학개론' 수준 이상의 지식을 얻었을 것 같다.
각 글들의 연재 날짜가 명시되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편지체에서 대화체로 전환됐고, 연재 횟수가 거듭되면서 글들이 안정감을 찾은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포스코는 참 훌륭한 기업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보에 정기적으로 "문학"을 소개하는 회사는 정말이지 드물다.
책 소개를 하는 회사는 많다.
하나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공병호 아저씨 책이나 <마시멜로 이야기>, <블루 오션>, < 펄떡 뛰는 물고기처럼> 이런 책들을 소개하며, '그러니까 열심히 일하란 말이야!' 강력한 메시지를 날린다.
문학평론가를 찾아 기고를 부탁하고, "문학수첩"이란 연재란을 만든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업의 단기적인 "생산성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기에.
사실 회사원들의 독서는 빈약하고 가난하기 짝이 없다.
소설 '나부랭이'를 읽는 사람은 정말이지 찾기 힘들다.
회사원들의 생활은 그만큼 각박하고 '드라이' 하다.
포스코 신문과 같은 훌륭한 사보는 여러 기업들에서 벤치마킹되어야 할 것 같다.
'일반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한, 글쓰기의 지평을 넓힌 평론가 김동식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최근 한국소설의 판매량 급감에 따른 한국소설의 위기는 문학을 일반대중에게서 유리시키는 평론가들의 의사 같은 글쓰기(영언지 라틴언지 알 수 없는 글씨로 갈기는 의사들처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현란한 글쓰기)에도 일부 책임이 있지 않을까...생각한다.
멋진 포스코 신문과 일반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평론가의 새로운 글쓰기에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