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내 영화 코드가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쪽(액션이나 블록버스터류의) 보다는
이 세상의 다양한 삶과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정말 다채로운 감정과 뉘앙스들을
멋지게 풀어낼 줄 아는 영화들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았다.
물론 그렇다보니 혼자 영화관을 찾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고.
어제도 친구를 만나고 다음 약속에 시간이 떠서 혼자 시네큐브에서 본 대만영화.
나는 대만영화, 홍콩영화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대만과 홍콩영화들은 흔히 대륙영화라 칭해지는 중국본토 영화들과는 정서와 스타일이 완연히 다르다).
사춘기 시절 나의 아이돌이었던 주윤발과 장국영에서 비롯된 홍콩영화에 대한 관심은 대만영화로까지 이어졌는데, 나중에 머리가 커서 키노를 구독하면서 정성일의 허우 샤오시엔에 대한 열렬한 찬양에 어느새 나도 모르게 물들어버린 것도 같다.
그치만 <애정만세>나 <흔들리는 구름> 같은 차이밍량의 영화는 거의 보지 않았다. 딱 잘라말하면 그 사람의 영화언어와 세계관이 싫다.
평소 서울의 극장에서 한국 영화와 헐리우드 영화에 밀려 대만영화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가을마다 열리는 부산영화제에서는 그나마 괜찮은 대만영화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2005년 개막작이 허우 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였던 걸 보면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들도 어지간히 대만영화빠들인것 같다.
뭐, 부산영화제의 모토가 아시아영화들의 축제의 장이긴 하지만서도.
암튼, 이 <영원한 여름>도 작년 부산영화제 초청작이었다. 내가 내려간 주말에 상영일정이 잡혀있었는데, 워낙에 표 구하기가 힘들어 포기. 그리곤 기억에서 잊고 있다가 얼마전 씨네 21을 보고 개봉소식을 알게된 거지.
<영원한 여름>은 두 남자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둘 사이를 오가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미세한 결들이 잘 살아있는 꽤 완성도있는 청춘영화이면서 퀴어영화.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관금붕의 <란위>(브록백과 란위는 물론 두 남자의 관계에만 초점이 맞춰지지만)만큼 뜨겁게 심금을 울리지는 못하지만, 이안과 관금붕에 비해 아직은 덜 여믄 신예감독의 연출력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로 근사하게 감정의 결들을 직조해낸 실력은 눈여겨봐야할 듯.
주인공을 연기한 두 배우 장효전과 장예가의 이름도 기억해둬야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내 마음 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 건,
후덥지근하고 끈끈한 타이완의 대기가 아스라하게 녹아있는 장면들이었다.
이 못말리는 타이완홀릭을 어쩌면 좋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