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 커피와 다방의 사회사, 인사 갈마들 총서 1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오두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서점에 꽂혀 있는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라는 책 제목 보다
저자가 강준만 혼자가 아니라 "공저"라는데 호기심이 발동했다.

강준만이랑 책을 같이 쓴 낯선 이름, 오두진은 누굴까?

궁금한 마음에 책 날개를 펼쳐 저자 소개를 봤다.
놀랍게도 오두진은 강준만의 제자였다. 그것도 학부생!

오두진_한국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는 1년 6개월 동안 커피의 세계에 빠져 살았다. 흔치 않은 자료를 구하기 위한 저자의 집요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탄생한 이 책은, 일상의 중심에 있지만 잊혀졌던 '커피와 '다방'의 역사를 복원해 한국인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저자는 앞으로도 커피의 사회사와 관련해 연구를 계속할 계획을 갖고 있다.
2005년 현재 전북대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이다.


오...강준만은 "쿨한" 교수군. 학부생과 공저를 하다니!
다른 꼰대들은 자기들의 레벨(?)에 맞는 유명한 교수들하고만
공저를 하려 할텐데! (그래서... 그들은 책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런데....또 머리말을 읽다 보니 긴가민가 했다.

이 책의 대부분의 자료 수집과 초고는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오두진의 몫이었으며,
강준만은 그 초고를 요리하는 역할을 맡았다.(p 8)


이 책은 강준만의 다른 저서들과 같이
신문/잡지 등 정기간행물 인용이 텍스트의 대부분이라 각주(脚註)가 많고,
각주에 무슨 신문 몇 월 며칠자라는 걸 일일이 밝힌
‘메타 서술'(서술에 대한 서술)로 작성되었다.

즉, 관련 사료/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여 배치하는 것이
강준만씩 글쓰기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학부생 오두진이 자료 수집에 초고까지 썼으면
오두진이 단독 저자가 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그러니까..."오두진 지음, 강준만 감수"가 맞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또....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학부생 오두진이 단독저자였다면 책이 팔렸을까?
텍스트가 아무리 좋아도 알려지지 않은 저자,
그것도 학부생이 쓴 책이
출판계와 독자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
강준만이 공동 저자가 됨으로써 책이 알려질 수 있지 않았을까?

본문을 읽기도 전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
막상 읽어보니? 훌륭하도다!

'커피'와 '다방'으로 읽는 한국의 근대사.
고종에서 맥심, 티켓다방, 스타벅스까지!

특히 61년 군사정권의 "커피 금지령"을 읽으면서는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오면서도
이런 몰상식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제도가
아직까지도 비상 사태마다 터져 나오고 있음에 씁쓸했다.

조흥만 치안국장은 '어제 다방 업자들을 불러 양담배를 팔지 않고 피우는 것도 삼가고 있는 이 때 막대한 외화를 소비하고 있는 커피를 팔지 말고 생강차나 기타로 대체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권장한 적이 있다.'라고 밝혔다.(p97)

"외화 수지 흑자"라는 대의 명분으로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바꾸라고 명령하는 정부!

공무원들 다방 출입 금지,
특정 외래품 판매금지를 통한 커피 수입 제한,
이래도 안되니까,
오히려 밀수, 미군 PX 물품 유출 등 역작용만 발생하니까
차라리 세금을 걷자!며 국내에서 커피를 생산할 수 있게
동서식품을 "커피 수입 대체 산업체"로 지정하여
커피 시장 점유율 99%를 차지하게 한 정부!

아.....블랙 코미디!
쑈는 계속 되어야 한다지만,
정부의 블랙 코미디는 왜 아직도 계속되는 걸까?

책을 다 읽고나서 생각을 정리했다.
강준만은 좋은 교수다!
학부생이 이런 책을 쓸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하고
글쓰기의 방식을 지도한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는 훌륭한 교수다...
라고 생각한다.

커피와 다방의 사회사를 다룬 이 책이나
<화장실의 역사>,<돈가스의 탄생>,<아스피린의 역사> 이런 책들처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주제별 문화사를 다룬 책들이 더더욱 다양해 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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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7-03-04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의 리뷰는 늘 감상 자체보다 더 많은 생각이 담겨있어요. 책 한권을 읽으셔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하시는게 고스란히 느껴지거든요. 이번 리뷰도 상당히 똑똑해요. 멋져요, 수선님!

사마천 2007-03-04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선생에 그 제자... 이렇게 표현하면 좋겠더군요. 그 전에 한번 미디어 비평 가지고 책을 냈었죠. 학부생들 글 모아서. 내용은 별로 였는데... 하여간 이번 책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더군요. 강교수 단독책이라고 하기에는 약하지만 제자의 책으로는 칭찬해줄만한...

마태우스 2007-03-04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강준만 좋은 교수네요. 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인데.....

스파피필름 2007-03-04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책 재미나게 읽었었어요~ ^^
그러고 보니 수선님 말대로 강준만이 좋은 교수 네요.. ㅋㅋ

비로그인 2007-03-04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교수 맞네요. 그만큼 그의 책을 보기는 해야 할텐데.

kleinsusun 2007-03-04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지금 저...춤추고 있어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ㅋㅋㅋ

kleinsusun 2007-03-04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 네...오두진군의 차기작이 기대되요.^^

마태님, 마태님도 좋은 교수예요.^^

스파피필름님, 네...강준만 교수 같은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바람난책님, 네...좋은 교수 같아요.^^

2007-03-05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외로운 발바닥 2007-03-0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락방님의 댓글에 완전동감해요~!

stella.K 2007-03-05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정말 멋진 교수네요. 수선님 이렇게 쓰시니 정말 읽어보고 싶잖아요! 수선님이 미워요. 흐흑~!

2007-03-05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06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 우리시대의 지성 5-011 (구) 문지 스펙트럼 11
주경철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선물 받았다.
누구에게?
<로맨틱 홀리데이>를 보고 "교환은 생산이다." 라고 말한 남자.
Eric Clapton 콘서트 때, "Wonderful tonight"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인 남자.

"책 한권 줄까요?"
그는 술 마시다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말했다.

그러더니 점퍼 주머니에서 이 책을 꺼냈다. 불쑥.
(문지스펙트럼 시리즈는 포켓북 사이즈다.)

그가 읽던 책이라 군데군데 그가 친 밑줄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알았다.
책을 읽으며 먼저 읽은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을!

서점에 갈 때 마다 뜬금 없이 전화를 해서
"야, 뭐 읽을만한 책 없냐?" 묻는 친구가 있다.
얼마 전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을 때 이 책을 추천했다.

피렌의 「중세 유럽의 도시」, 포스탄의 「중세의 경제와 사회」,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맥네일의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합하우스의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크로스비의 「녹색 세계사」, 토드의 「유럽의 발견-인류학적 유럽사」등
12권의 중요 역사서들(한국어 미번역서 포함)을 요약한 이 책은
크게 세가지를 선물한다.
- 관심 영역의 확장
- 12권을 모두 읽은 것 같은 착각 또는 대리 만족
- 소개된 책들을 정독하고 싶은 강한 열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학부 수업용 프린트물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썼다고 한다.
※ 수업 한번 알차다! 요즘 대학 등록금 정말...살인적으로 비싸다.
값을 하려면 모든 강의가 이렇게 알토란 같아야 한다.
요즘 대학에는 제발.....열정도 사전학습도 없이 중얼중얼 하다 시간 채우고 나가는
늙은 꼰대들이 없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며 낄낄 거리며 웃기도 했고,
분노에 떨기도 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가장 인상에 남는 chapter는
<흰 설탕, 검은 비극 - 노예 무역의 잔혹사>.

노예무역이 잔혹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책에 실려 있는 노예들의 "중간 항해" 그림을 보고 경악했다.

아프리카에서 구입한 노예를 배에 싣고 대서양을 건너는
소위 '중간 항해 middle passage'는 처참한 비극이었다.
90톤급 배가 390명, 또는 100톤급 배가 414명을 실어나른 기록이 있다. 이 경우 각 노예들에게 할당된 공간은 대략 167cm*40cm여서 흑인들은 '책꽂이의 책들처럼' 실려갔다.
이들은 두 사람씩 서로 쇠사슬에 묶여 항해를 해야 했다.
한 사람의 오른쪽 다리, 오른쪽 팔이 다른 사람의 왼쪽 다리, 왼쪽 팔과 묶여 있어서 관 속에 누운 것보다도 더 비좁은 공간만 허락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전염병이 돌기라도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특히 배가 적도 무풍대에 들어서면 한 달 이상 배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는 수도 있었다.
자살 방지를 위해서 노예들을 쇠사슬로 묶어두었기 때문에 자신의 분뇨 속에서 몇 달 간 공포의 여행을 해야 했다.
(p204)

노예 상인들에게 흑인 노예들은 "상품"이었고,
농장 주인들에게 흑인 노예들은 "자산"이었다.
그 누구도 흑인 노예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783년 종Zong호 사건이 이를 입증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선상에 물이 부족하자 이 배의 선장은 132명의 노예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선장은 살인 혐의로 구속되는 대신, 보험 회사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자신의 행동은 배가 위험에 처했을 때
"상품"을 바다에 투기함으로써 배와 선원을 구하는
"해상 위험"의 경우에 해당한다는 사유로.
더 놀라운 것은....보험 회사는 이 경우가
'바다에 말(馬)을 던진 것과 똑같다.'고 보고
흑인 1인당 30파운드씩 계산해서 손해 보상금을 지불했다.

세상에.......이런 일이 있었다.
불과.....224년 전에!

이 책을 읽고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6권을 완독할 계획을 세웠다.
번역자가 주경철 교수라 번역에도 신뢰가 간다.

이런 좋은 책을 선물해준 그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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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5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겉보기에는 별로 재미없을거 같이 보이는데, 재밌나봅니다. 역사에는 다소 무관심한 저도 찜해놓겠습니다. 근데 그 남자분이랑 어떤 사이일까요 =333

kleinsusun 2007-02-25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이 책 정말 유익하고 잼 있어요. 강추!
어떤 사이냐구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ㅋㅋ

외로운 발바닥 2007-02-25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가 누군지 궁금해지네요. ^^
앞으로 맘 편하게 독서할 날이 얼마 없는 저에게는 여러 권을 읽은 듯한 대리만족을 주는 이 책이 참 유용할것 같네요. ^^ 보관함에 넣고 갑니다.

kleinsusun 2007-02-2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운 발바닥님, 곧 일을 시작하시나 봐요. 축하드려요!^^
네...이 책 강추!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니며 읽기도 좋답니다.

BRINY 2007-02-2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저도 이 비슷한 구성으로 보충교재를 만들어보고 싶네요. 3월용 보관함으로~~

2007-02-25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7-02-25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와.......기대기대! 보충교재 나오면 저도 한권 부탁드려욤.^^

사마천 2007-02-25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로델 책의 경우 아마 노력은 이 책의 100배가 들 것입니다. 한번에 사지는 마세요 저도 몇권이 고스란히 놓여서 일부만 읽고 남아 있습니다 흑흑 ^^;

kleinsusun 2007-02-25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사마천님, 한권만 먼저 사서 읽어볼께요.^^

다락방 2007-02-25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렇듯 좋은책을 선물하시고 게다가 감성까지 풍부한 그 남자분은 누구실까요? 호홋. 어쩐지 수선님의 서재가 앞으로 더 흥미진진해질것 같은데요. :)

릴케 현상 2007-02-27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행 상황이 심상치 않아요^^

바람돌이 2007-03-03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경철씨의 책은 예전에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한권 봤는데 좋았어요. 역사를 보는 관점을 아주 쉽게 잘 써놨더라구요. 근데 이런 책도 나왔네요. 님덕분에 좋은 책 한권을 더 안게 됐습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다 사놓고 엄두를 못내서 몇년째 제 책꽂이에서 먼지를 안고 있는 책입니다. ㅠ.ㅠ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박무영.김경미.조혜란 지음 / 돌베개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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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미는 책방 나들이다.
2주 전인가? 반쪽 영업을 하던 진솔문고가 완전히 문을 닫았다.
좋아하던 서점이었는데 아쉽다.

오프라인 서점에 들러 시간 가는줄 모르고 책구경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온라인 서점을 돌아 다니며 독자리뷰도 읽고 흘러 다니는 것도 좋아한다.

근무시간에 잠시 쉬고 싶을 때,
여유가 생겼을 때,
나를 제외한 우리팀 사람들은
인터넷 신문, 주식, 아파트 시세를 본다.
그런데 나는....
온라인 서점을 헤엄쳐 다니고 있다.

<조선의 여성들,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은 알라딘을 헤엄치다 만난 책이다.
예전 부터 한번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던 책인데,
마일리지까지 30% 주기에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이 책, 너무......재.미.있.다.

이 책은 16세기 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치열한 삶을 살다간 14명의 여성을 잊혀진 역사 속에서 불러온다.

신사임당,송덕봉,허난설헌,이옥봉,안동 장씨,
김호연재,임윤지당.김만덕,김삼의당,풍양 조씨,
강정일당,김금원,바우덕이,윤희순


현모양처의 대명사,
체 게바라가 면 티셔츠 모델로 추락하듯이
가구 브랜드 이름으로 전락한 신사임당.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천재 허난설헌.

이렇게 피상적인 이미지로 알려진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외에 눈에 익은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안동 장씨.
많이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안난다구?

97년, 이문열 아저씨가 허접한 소설 한 권으로 세상을 시끌시끌하게 했던 <선택>, 바로 그 <선택>의 주인공이다.
<선택>을 읽고 이문열 아저씨한테 말하고 싶었다.

" 아저씨!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신문에 쓰세요. 아저씨 그런거 좋아하쟎아요. 역사 속 인물까지 불러 와서 이런 소설 쓰시지 말구요!"

세 명의 저자 중 안동 장씨편을 쓴 조혜란.
글의 시작 부분에서 조혜란의 고민이 물씬 묻어난다.

혹여 죽은 자가 말이 없다고 하여 죽은 자의 목소리를 임의대로 빌려오고 싶어졌다면 더욱 조심할 일이다.죽어 말 못하는 존재를 빌려 누군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게 한다면 이는 죽은 자를 다시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정부인 안동 장씨의 삶에 대해 쓰려고 마음먹으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충실하게 반영해서 죽은 자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17세기라는 구체적 정황 속에서 살았던 한 여성으로서 안동 장씨가 밟았을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싶다.안동 장씨 부인은 일반인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어느 유명한 소설가가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작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거의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쏟아내면서 그녀의 이름은 인구에 회자되었다.
(p122)

이문열 같은 어마어마한 문화권력이 비틀어 놓은
안동 장씨의 삶의 궤적을 바로 펴는 일, 복원 시키는 일,
명예를 찾아 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이문열 아저씨! 하고 싶은 말은 그냥 신문에 쓰세요!)

<조선의 여성들,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도 비범했던>을 쓴
세명의 저자들은, 잊혀졌거나 또는 왜곡된 이미지로 고정된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의 궤적을 꼼꼼히 쫓아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문열에 의해 엄하게 형상화된 안동 장씨.
조혜란이 복원한 안동 장씨는 아주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안동 장씨는 친정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친정 식구들을 데려와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안동 장씨는 이렇게 친정 식구들을 데려다 집을 지어주고 살 도리를 마련해주었으며,친정 조상들의 신주도 옮겨 모셔다가 봄가을로 정성스레 제사를 올렸다.그 뿐만 아니라 시집 장가 보내는 일도 때를 놓치지 않고 모두 챙겨주었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요즘에도 시집간 여성이 친정 새어머니와 더불어 동생 넷을 데려다가 함께 길러주고 가르치고 시집 장가 다 보내고 하는 일에 남편이나 시댁의 동의를 얻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그런데 장씨 부인은 이 일을 해냈다.한두 해에 끝날 일들이 아니었으니,분명한 의지와 주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p131)

우리가 "현모양처", "이율곡의 어머니"라고만 알고 있는
신사임당에 대해서도 마찬 가지다.
신사임당은 남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자신의 의사나 의지가 없이 남편만을 따르는
그런 순종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동계만록>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했다.

제가 죽은 뒤에도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우리에게는 이미 칠남매나 있습니다.그러니 또 무슨 자식을 더 두겠다고 <예기>에서 가르치는 것을 어기겠습니까?

.....(중략)

사임당이 어진 아내의 전형이라면, 그 어진 아내란 자신의 판단대로 말하고 행동할 줄 알고 필요하다면 때로는 남편에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 수도 있는 여성인 셈이다.
(p31)

또한 신사임당을 "이이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천재적인 "화가"로서의 신사임당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신사임당은 그녀 혼자만으로도 입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굳이 아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정서적 감응력이 풍부한,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현실적인 구도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전략적으로 추구할 줄 알았던,예민하면서도 다정다감했던,그림에 있어서 천재를 발휘했던 그녀를 그녀로 존재하게 하라.

조선 여성들의 삶의 실상을 밝히는 고전 여성문학을 공부하고,
이런 책을 써서 잊혀지고 왜곡된 먼저간 이들의 삶을 복원시키는 세명의 저자 박무영,김경미,조혜란에게 박수를 보낸다.

어제 이 책을 한 선배에게 선물했다.
그 선배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겠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만나길,
그래서 신사임당을 가구 이름이 아닌,
말 없는 현모양처가 아닌,
그저 이이의 어머니가 아닌,
한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낸 한 주체적인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길,
무엇 보다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나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신선한 시선의 역사 text에서 만나는 엄.청.난 즐거움을 누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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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4-12-1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솔문고가 문을 닫았군요. 점심시간때 가끔 가던곳인네. 아쉽네요.새로 생기지는 못할망정...

로드무비 2004-12-1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이문열 아저씨 ㅋㅋ

추천하고 갑니다.

책읽고 리뷰 쓰는 것이 휴식의 일환인 수선님.^^

kleinsusun 2004-12-1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고등학교 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이런거 읽으면서 이문열 아저씨 좋아했었거든요. 그래서 아직도 "아저씨"라는 호칭이...

야클님, 로드무비님 편안한 일요일 보내세요!


로즈마리 2004-12-20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읽어봐야 겠네요. ^^

kleinsusun 2004-12-20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안녕하세요!

님의 서재에 방금 다녀왔어요.

김영하의 <검은꽃> 리뷰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김영하 소설은 <검은꽃>빼고 다 읽었는데, <검은꽃>은 사둔지가 한참인데 읽는걸 자꾸 미루고 있어요. 왠지 실망할 것 같은 예감에...멕시코 이민사가 김영하의 소재로 넘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그런데 로즈마리님의 리뷰를 읽으니 두려움이 더 현실적으로 변하네요.ㅋㅋ 앞으로 자주 들릴께요! 좋은 한주 보내세요!

icaru 2004-12-22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엽고 깜찍한 리뷰예요~! 유쾌하게 읽고 갑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