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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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시골 의사>라는 단편을 읽었다. 내가 이 작품을 잊지 않는 까닭은 카프카를 소개할 때마다 <시골 의사>라는 단편은 꼭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카프카의 성격, 그것도 수동적 성격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카프카로 인해서 바뀐 생각과 태도는 초등학생 대상 강의에서 나타났다. 교실에서 가장 말 안 하는 아이, 말을 하기 힘들어하는 아이, 주변은 인식하면서 조금이라도 안전하지 않으면 입을 닫는 아이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까닭은 카프카 때문이다. 말하지 않은 입이야말로 대단한 말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시골 의사>도 카프카 인물의 수동적인 특성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카프카의 주요 인물들은 카프카처럼 당하기만 한다. 그러면서 꾹 참으며 따라가고 기록한다.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폭력성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격렬한 저항을 하면 그것이 상쇄돼 버리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단편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단편전집은 늘 손에 잡히는 곳에 있다. 


시골 의사는 위급한 환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발을 동동 구른다. 강한 눈보라가 모든 공간들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하녀 로자는 말을 구하기 위해서 동네를 헤맸다. 기적처럼 마차를 얻어왔지만 마부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카프카의 앞에서 로자를 겁탈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시골 의사가 맞닥뜨린 첫 번째 당황스러운 사건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처음부터 타겟이 로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암시적으로 나타난 문장들을 해석한다면 마을은 모두 한통속이다. 로자를 겁탈하기 위해서 온마을이 시골 의사를 속인 것이다. 위급한 환자의 알림으로부터 시작해서 기적적으로 나타난 마차, 그리고 어린 환자의 집에서 목격한 기이한 장면들은 '로자'를 차지하고 싶은 마부의 탐욕으로 해석하면 모든 것이 연결된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아래 구절


방안 공기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다. 내버려둔 부뚜막에서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나는 창문을 열어제칠 것이다. 그러나 우선 나는 환자를 본다. 마르고, 열은 없다. 몸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 초점 없는 공허한 눈, 윗저고리도 입지 않은 채 그 소년은 새털 이불 밑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나의 목에 매달려 내 귀에 속삭인다. "의사 선생님, 저를 죽게 내버려 두세요."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부모는 몸을 숙인 채 말없이 서서 나의 판단을 기다린다. 누이는 나의 손가방을 위해 의자를 가져왔다. 나는 가방을 열고 의료기들을 뒤진다. 그 소년은 침대에서 손을 뻗쳐 계속 나를 더듬으며, 나에게 자신의 부탁을 상기시키려고 한다. 


소년은 어쩌면 온마을이 공모한 범죄의 미끼가 된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골 의사>는 암시적인 상징으로 가득하다. '시골 의사'는 비열한 도시에 사는 유일한 양심적 인물 또는 지성을 상징한다. 아무도 그의 지성과 양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존중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 아플 때 써먹는 의료 도구일 뿐이다. '하녀 로자'는 양심과 지성을 돕는 사람으로서 비극의 희생양이다. 그는 의무적으로 또는 양심적인 이유로 팔을 걷어붙이고 돕지만 헛수고가 되거나 본인도 위험해진다. 두 사람은 공동운명체로서 난파선 위에서 함께 물에 잠기는 중이다. 마부는 시골 의사를 완전히 장악한 빌런이다. 시골 의사가 개미라면 마부는 개미 지옥이다. 마부는 시골 의사가 의사로서의 사명을 지킬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시골 의사가 두 눈 뜨고 있는 상황에서 버젓이 로자를 겁탈하려 한다. 시골 의사의 무력감은 마부로 인해서 극대화된다. 마부 같은 캐릭터는 현실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나의 천적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뇌리에서 지나간다. '마부'는 먹이사슬의 정점을 이루는 최상위 포식자다. 카프카의 작품목록에 <시골 의사>가 들어가는 이유는 카프카 월드의 약도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 저를 죽게 내버려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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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인형 미운오리 그림동화 2
라리사 튤 지음, 레베카 그린 그림, 서현정 옮김 / 미운오리새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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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서울 갔다가 발견한 그림책의 여운이 무척 깊어서 글로 맺히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만의 서울 구경인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그림책 구경을 했다. 그때 문득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그림책 코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볼 수 없는 건 아니었던 카프카 관련 그림책이다. 《카프카와 인형》은 카프카의 말년을 다루고 있어서 귀한 자료다. 카프카가 1924년에 사망했고 인형을 잃어버린 소녀를 만난 일은 1923년 카프카의 마지막 가을이었다. 이 일은 카프카의 연인 도라 디아만트의 글에 적혀 있다. 도라에 따르면 인형을 잃어버린 어린 소녀를 위해서 몇 주 동안이나 인형 편지 배달부 역할을 하면서 작품을 쓸 때만큼이나 정성을 들여 편지를 썼다고 한다. 


카프카는 우유와 감자를 들고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결핵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그에게 한 끼 식사는 각별했을 것이다. 그때 울고 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인형을 잃어버려서 울고 있었던 것. 카프카는 체념의 소설가답게 인형을 찾기보다는 인형을 잃어버린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을 인형 전문 배달부라고 소개하고 인형 숩시의 편지를 건네주겠다고 약속한다. 다만 지금은 점심을 먹어야 해서 내일 주겠다고. 이때부터 어린이의 동심을 살리기 위해서 인형 전문 우편배달부 카프카의 마지막 예술혼이 불타오른다.


소설을 쓰거나 소설가 지망생은 알겠지만 소설은 쓰는 것이 아니라 접수하는 것이다. 소설이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소설가는 한 가지 형식에 국한될 수 없다. 이 경우에는 인형을 잃어버려서 슬픔에 잠긴 한 명의 어린이 독자를 위한 맞춤형 소설을 접수한 셈이다. 독자에 따라서 카프카의 역할도 바뀐다. 카프카의 어린이 사랑은 단편 <국도의 아이들>에도 나왔다시피 어린이의 시선과 생각을 조용히 따라간다. 가오나시처럼 어린이 옆에 가만히 티 안 나게 서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카프카다.


카프카를 사랑하는 나의 입장에서 카프카의 생각을 "접수"해 본다면, 현대인들은 어떤 방향성을 잃었고 각개약진의 봉인에 갇혀 있기 때문에 개미귀신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개미 같다. 어쩌면 남아 있는 길은 시간의 길에서 어린이를 만나는 것이다. 그 어린이가 나의 어린이를 깨워줄 것이다.


어린이에 관한 카프카의 가장 감동적인 문장은 최근 발간된 《카프카의 아포리즘》에 적힌 이 단상이 아닐까 싶다. 이 문장이 내뿜는 알 수 없는 엄청난 위로의 정체를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카프카는 체코의 백석 같은 마음결을 가지고 있어서 더 정이 간다.


어른이 책상을 밀어서 아이가 카드로 만든 집이 무너지면, 아이는 화를 내지. ㄱ 러나 카드로 만든 집은 책상이 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집이 카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너진 거야. 


여행하기 딱 좋은 계절이지. 숩시는 또 편지를 쓸 거야. 모험을 하는 사람들은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좋아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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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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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1985년작(내년이 집필 40주년이라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었을 때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앨리스>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지만 하루키가 작품의 성채를 만들기 위해 문학 텍스트를 기둥으로 삼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어떤 기둥이 버티고 있을까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물론 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중심 기둥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앨리스>든 <성>이든 역시 또 다른 기둥들에 의지하기 때문에 결국은 파스칼의 말처럼 "나의 책이라고 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책이라고 해야 한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앨리스>는 '나는 누구인가?'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앨리스가 떠나는 이유는 '지루하기 때문'인데, 카프카 식으로 말하자면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카프카는 이곳을 떠나기는 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며 떠났던 집으로 돌아올 수도 없고 어딘가에서 소멸한다. 하루키는 카프카보다는 <앨리스>의 서사를 선택한다. 출발점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앨리스가 여행에서 만난 것은 지금까지 만져봤거나 먹어봤거나 읽어 봤던 경험 세계의 소재들이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을 여행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나를 구성하는 세계가 내면적이라는 점에서 앨리스와는 다르다. 앨리스와 접점을 찾는다면 '인연'이다. 렌터카 대리점에서 자신이 여자를 웃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 여자, 로큰롤 음악을 트는 택시 기사, 박사, 뚱뚱한 소녀, 참고문헌 사서는 비중에 상관 없이 무척 소중하며 최후의 순간에 "나"(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그들을 위해서 축복한다. "나"(세계의 끝) 역시 도서관 사서를 사랑하기 때문에 탈출을 포기한다

<세계의 끝> 주인공들과 <앨리스>의 주인공은 '1인칭'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앨리스는 1인칭 집착증 환자처럼 대화에서도 끼어들고, 인물들이 음모를 꾸밀 때 엉뚱하게 헛발질을 한다든가 갑자기 키가 커진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끼어들면서 거의 모든 이야기를 '앨리스 위주'로 가고자 한다. 반면 <세계의 끝> 주인공은 스스로가 '현관 매트'라고 할 정도로 동네북처럼 누군가에게 맞고 멱살 잡히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누군가 그를 흔들어 깨우고, 심지어 의지에 상관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린다. 폭력을 당하지만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루키가 주목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처해진 상황과 조건이 아닐까? 게임의 룰이 바뀌면 정의도 바뀐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게임의 룰이자 옛 사회의 정의였다. 지금은 이웃을 등쳐먹고 이용하고 짓밟고 착취하고 속이는 것이 권장된다. 이런 것을 잘할수록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하루키의 작품이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자본주의보다 더 근본적인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게임의 룰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저수지'는 어떻게 될까? 힘 약하고, 가난하고, 선량하고, 옛 게임의 룰과 정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폐허의 잔해물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끝에 버려지는 것이다. 그들이 바뀐 게임의 룰을 믿기 시작하면 전설속에 그나마 남아 있던 게임의 룰과 정의는 완전히 소멸한다.

목 자르기를 좋아하는 여왕의 자의적인 판단은 파이를 훔친 죄로 재판에 넘겨진 '잭'을 다루는 <이상한 앨리스>의 장이 <세계의 끝>에 등장하는 계산사의 '조직'과 기호사의 '공장'이 사실은 같은 주인의 오른팔과 왼팔일 뿐일 수 있다는 암시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다만 최종 빌런이 존재한다기보다는 그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강고한 실체를 이룬다는 점이 차이점일 것이다. 흰토끼가 허겁지겁 장갑과 부채를 챙기려고 한 까닭은 여왕에게 사형 선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정원사들이 흰 장미꽃에 빨간 페인트를 칠하는 이유 역시 사형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여왕의 사형 선고는 자의적 판단이지만 이미 시스템이 정착되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을 강제한다.

내가 <세계의 끝>에서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마치 '섹스 덕후' 같은 등장인물들의 지향점,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에 등장하는 섹스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박사는 주인공과 손녀(뚱뚱한 소녀)가 섹스를 했으면 하고, 뚱뚱한 소녀는 주인공과 섹스를 하고 싶어한다. 도서관 참고문헌 담당 사서는 밥 한 끼 얻어먹고 나서 섹스를 하는데, '나는 아무하고나 섹스하는 여자는 아니에요'라고 분명히 말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섹스'라는 손가락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이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나의 결론은 '통찰력은 사랑의 뿌리에서 자란 새싹'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을 좀더 추구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물을 수 있다. 나는 사랑이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세계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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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16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얼마만에 보는 정식 리뷰야? ㅋ
난 하루키와 담 쌓은지 오래다. 싫어진 것 보단 게으름이겠지.
잘 지내지?^^

승주나무 2024-06-16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데헷! 오랜만입니다. 올해 들어 하루키 처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완전 빠져 버렸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소설을 계속 쓰고 있는데, 하루키가 롤 모델이에요~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 조지 손더스의 쓰기를 위한 읽기 수업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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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설 응모 열풍이 불었다.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지만 주변 지인들에게 마구 떠벌리고 다니면서 계속 쓰고 있다. 한 지인이 읽어보라고 권한 책이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이다. 하지만 혹시니 하는 마음에 사두긴 했지만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첫 장을 읽고부터는 완전히 몰입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대한 이야기기 나를 때렸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끝까지 보존해야 하는데 내가 만든 에너지는 어딘가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실제 소설을 쓰며 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조지 손더스가 극소수 정예 작가만을 대상으로 개설한 대학원 수업을 지상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사정을 아는 입장에서 코멘트들이 날카롭게 내 어깨를, 등을, 옆구리를 쿠쿡 찔렀다.


어떤 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사물이 등장하고, 사소한 풍경이 지나가는 것은 모두 이유가 있다. 그 인과관계를 말끔하게 정돈해 놓은 것이 플롯이다. 플롯은 구체적일수록, 다듬을수록 위력을 발휘한다는 말 앞에는 좀 부끄러웠다. 나는 플롯의 뼈대를 만드는 데만 집착했을 뿐, 플롯을 가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체호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의 작품을 다시 만난 건 참 반가웠다. 작가가 어째서 러시아 단편소설을 사랑했는지 궁금했지만, 나에게는 이득이었다. 우리나라의 <용구삼촌> 같은 <단지 알료사>를 읽을 때는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버지가 단퍈소설의 주인공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걸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마치면 바로 아버지에 관한 단편소설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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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신화 - 원형을 살려내고 반듯하게 풀어내다
김순이 지음 / 여름언덕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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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용준 선생 제주도 신화 해석은 주로 남성 중심적이었는데, 김순이 선생의 해석을 통해서 비로소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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