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창비시선 162
양애경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대체 시집을 산게 몇년만인가?

2년 전? 3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샀던 시집은 정호승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였다. 내가 읽으려고 산게 아니고 울 이모 선물하려고....

난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책 넘기는 재미가 없어서?

내가 시를 좋아하지 않았던건,
나의 취향에 맞는 좋은 시집을 발견하지 못했기 떄문이 아닐까?

양애경의 시집을 몇년 전에 만났더라면,
내 책장에 시집이 몇십권은 있을 것 같다.

난 양애경이라는 시인을 알지 못했다.
얼마 전 <조울증에 기대어>라는 시를 우연히 읽기 전까지...

<조울증에 기대어>에 반한 나는,
당장 양애경 시집을 주문했다.

양애경 시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읽은건 "후기"였다.
1997년 5월에 쓴 글.
양애경의 후기를 읽으면서 어질어질했다.
혼란스럽기 조차 했다.
이거 내가 쓴 글 아닐까?
그만큼 절절히 공감했다.

아직도 그렇다.날마다 무언가와 싸우느라고 지쳐 있는 느낌인데 무엇과 싸웠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길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 (후기 첫 머리)

그렇다.어디서 그렇게 에너지를 흘리고 다니는지, 집에만 오면 뻗어버릴 만큼 피곤하다. 무언가와 싸우느라고 지친 느낌.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틴 느낌. 아멜리 노통의 <적의 화장법> 처럼 계속 싸우면서도 그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눈 앞에서 문이 쾅 닫히는 느낌을 오래도록 받아왔다.아직까지도 '여자는 안된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나 자신도 하마터면 믿을 뻔했다.제일 힘들었을 때,방에 와 불도 켜지 않고 쓰러졌다.바닥에 매달릴 수 있다는 것만이 위안이었다.(후기 중에서)

2004년, IT 강국 21세기의 한국.
아직도 '여자는 안된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

작년 봄, 내가 몇달간 백조생활을 할 때,
내 이력서가 돌아다녔는지 헤드헌터들한테 전화가 많이 왔었다.
내가 전화를 받으면, 잠시의 침묵 후....

"여자분이셨어요? 전 이력서 보고 남자분인지 알았는데...."
( 해외영업팀에 여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 저....죄송한데요, 그쪽 회사에서 남자를 원해서요.
담에 다른 포지션 있으면 연락드릴께요."

기가 막히다.
마음대로 전화하고, 마음대로 끊고...

헤드헌터들은 대부분 여자다.
그들은 남자를 뽑아달라는 업체의 사장이나 인사 담당자에게 왜 이렇게 말하지 못할까?
" 저희 회사 DB에 이 포지션에 제격인 여자들이 많거든요.
처음 부터 남자로 제한하시지 말고, 한 번 만나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손님은 왕이다.

나는 쉽게 상처받는다.하지만 인간에게는 육체의 치유력 못지 않게 신비스러운 정신의 치유력도 있는 것 같다.이제 좀 가벼워지고 싶다. (후기 끝머리)

제발....좀 가벼워 지고 싶다.
꼭 종아리에 커다란 모래주머니를 달고 마라톤을 뛰고 있는 것 같다. 가벼워 지고 싶다.

아뇨 내가 부러운 건 그들이 남자라는 사실인 거죠
세계의 주인이죠 여자들과 아이들의 주인이구요
고등학교밖에 못 나왔든 소위 MIT 박사이든 간에
그들은 '다른 건 다 훌륭하지만 여라자 안되겠군요'라는 말을 들을 필요는 없거든요.
그들이 그걸 알고나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 시 <일하는 여자 중에서>

"다른 건 다 훌륭하지만 여자라 안되겠군요"
들어 본 사람만이 안다.
어떤 회사에서는 쓰레기 분류를 하듯이 여자 이력서는 쏙쏙 골라내기도 한다. 생선뼈 발라 내듯이...

그렇군 나는 여자였군
생리 심한 날 하얀 변기 한쪽에
무겁게 내려앉는 피를 보며
그래 나는 여자였지
소용돌이치는 물이 검붉은 거품을 일으키며
그것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며
여전히 뚝뚝 피 흘리는
나는 좀 억울해진다.

- 시 <여자> 전문

시가 너무 강렬해서, 너무 솔직해서
기절할 것 같다.
진한 향수 한 병을 도서관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다 쏟은 기분이다.

양애경, 산문집을 하나 썼으면 좋겠다.
바닥에 매달려 위안을 받았던 시인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덧붙이는 말)
양애경의 훌륭한 시들과 후기 사이에 <사랑,그 부재의 공간에서 꿈꾸기>라는 해설이 있다. 제일 긴 시의 10배도 더 되는 긴 글이다. 그런데 이런걸 왜 쓸까? 시도 해설이 필요한가? 그것도 본질을 놓친 해설이?

즉,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내용으로부터 사회적 비판과 성찰에 이르기까지 그 촉수는 폭넓은 자장을 드리우고 있다.거기에는 페미니즘적인 관심이 있는가 하면 존재론적 에로티시즘이 포착되고 가족에 대한 애증이 피력되고 있는가 하면 문명비판적 요소도 동시에 포섭되고 있다.

우하하하하.
앞으로 웃고 싶으면 개그 콘서트 대신 이런 해설을 하나씩 읽어야 겠다.

페미니즘적인 관심?
페미니즘이란 어려운 말 쓸 것도 없다.
시인 양애경은 여자로서의 정체성과 삶의 무게, 좌절을 강렬하고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긴장감 있는 시로 표출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세상 보기" 이런 확실한 표현도 아니고,
"페미니즘적인 관심" 은 뭔지....

"존재론적 에로티시즘"이 뭔지도 궁금하다.

양애경의 시집에서 옥의 티는 바로 이 해설이다.
궁금하다.
양애경이 이 해설을 자신의 시집에 싣는걸 동의했는지,
아니면 창작과비평사에서 임의로 결정한 일인지...

수선이의 도서관


www.kleinsusun.com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4-11-27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고 조금 의외였어요.

수선님께 막연히 느꼈던 이미지가 흔들렸달까.

이 시집 제목이 좋아 읽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못 읽었어요.

댓글 남긴 줄 알았더니 착각이었나?^^

kleinsusun 2004-11-2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제게 막연히 느꼈던 이미지가 어떤걸까?궁금하네요.

제 자신 또한 제 정체성 확립이 깔끔하게 되지 않아서...

양애경 시집은 권하고 싶네요.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온 토요일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