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크 라이프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열림원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예를 들어서 말이야, 미즈호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잖아, 그러면 뭐랄까, 내가 신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늘상 서로 붙어 있으면 집사람이 숨 막혀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난 침실로 들어와서 책을 읽는다고. 그러다 미즈호가 침실로 들어오면 너무 밝아 잠을 못 잘 거 같아서 다시 거실로 나가고.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야. 함께 있고 싶으니까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다니고 있는 거지."(p41)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 남자가 떠올랐다.
너무 생각이 많은 남자.
혈액형의 stereotype을 신봉하지는 않지만 그 남자는 A형이었다.
자기 혼자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회사에서 기획안을 쓸 때
"best case" 에서 "worst case" 까지를 나누어 수익성을 예측하는 것처럼
자기 혼자 별별 생각을 다 해서,
자기 딴에는 "배려"한다고 한 일인데
상대방에게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남자.
이런 남자는 정말 상당히...피곤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아....난 그냥 단순, 무식한 남자가 좋다!)
아내와 함께 있고 싶어서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닌다는
가즈히로의 아내 미즈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로 상대방을 너무 배려해서 좀처럼 얘길 꺼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야 하나.
있잖아, 배를 쫙 갈라서 속에 있는 걸 전부 드러내는 성격이라면 좋겠는데....
하긴, 서로 그런 성격이었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 (p64)
아....미즈호의 심정 절절히 이해한다. 공감 110%.
X레이라도 찍어 보고 싶은 마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배를 쫙 갈라보고 싶은 마음,
그냥 말을 해! 말을! 소리 치고 싶은 마음.
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인가? 블랙 코미디!
서로 상대방을 "너무" 배려하다 보니 별거를 하게 된 부부.
요시다 슈이치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파크 라이프>.
<파크 라이프>에는 굵직한 스토리 라인이 없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지 않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아니고,
그 흔한 반전도 하나 없어
스피디하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약간 지루할 수도 있겠다.
104 페이지 밖에 안되는 중편 치고 인물들도 많아서
듬성듬성 읽다 보면 이름이 헛갈릴 수도 있겠다.
(소설 속 애완 원숭이도 이름으로 불린다. 그의 이름은 라거펠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다 못해 신비하기까지한 요시다 슈이치의 "묘사"들은
이 소설을 다시 한번 읽고 싶게 만든다.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또렷한" 영상들이 책장을 넘기며 계속 펼쳐진다.
어찌 보면 산만한 것도 같지만
하나 하나 소품으로 봐도 매력적인 에피소드들은
지속적으로 중첩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며 강한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역시 상은 괜히 받는 게 아닌가 보다!)
" 아파트 옆집에는 젊은 여자가 살고 있는데 창가에서 전화하는 게 버릇인지 그 말소리가 내 아파트까지 들리는 경우가 많다. 아직 얼굴을 똑똑히 본 적은 없지만, 토요일 점심때가 되면 꼭 대여섯 명의 친구들에게 이제부터 어디 놀러가지 않겠느냐고 불러내는 전화를 돌린다. 기분 좋게 만날 약속을 따내는 날도 있지만 전화한 모든 친구들에게 거절당하고 갑자기 옆방에서 음악소리가 크게 들리는 날도 있다. 토요일 오후, 그녀에게 약속이 생기면 괜히 나까지 마음이 놓인다.
이 얘기를 긴토씨한테 하니까 "나도 자네랑 비슷해. 토요일만큼은 몸을 푹 쉬게 해주고 싶거든" 하고 웃었는데, 내 경우는 몸을 쉬게 하려고 그런다기보다 말을 쉬게 하려고 한다는 편이 정확할 듯싶다. 함께 있고 싶으니까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동한다는 가즈히로 씨는 아니지만, 나야말로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이유에서 토요일 하루만큼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서 말없이 보내고 싶다.(p81~82)
이런 소소하지만 마음을 툭툭 두드리는 작은 이야기들이 가득한 소설,
그 작은 이야기들이 자기들끼리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또렷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소설.
너무도....매력적이다.
내겐 너무 매력적인 요시다 슈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