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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아주 오랫동안,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전기=위인전"인지 알았다.
어렸을 때 집집마다 세계 위인전 전집, 어린이 위인전 전집 이런 것들이 있었다.
물론 우리 집에도 있었다. 계몽사였나?
갈릴레오,슈바이쩌, 에디슨, 퀴리부인, 간디, 헬렌켈러, 나폴레옹, 나이팅게일....
어렸을 때 참 이런 질문들을 많이 들었었다.
"존경하는 사람은?"
"닮고 싶은 사람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묻는데 대답을 안할 수도 없고.... 참....
물론 다른 애들도 마찬 가지였다.
애들은 대답했다.
대답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그냥 그 순간 넘기려고....
"슈바이쩌요."
"헬렌켈러요."
어렸을 때 읽은 위인전은 어린이용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관념적"이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인물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묘사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그 인물들의 업적이 큰 글씨로 또박또박.....
그런데....왜 그렇게 어린 애들한테 위인전을 읽으라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다구치는건가?
비싼 위인전 전집을 사주신 부모님께는 미안하지만,
난 위인전에서 어떤 감동도 받지 못했다.
재미없다고 느꼈을 뿐....
보통의 [ Kiss&Tell ]은 평범한 사람의 전기다.
버스정류장에서 당근을 깨물어 먹고,
어쩔 수 없이 생계의 수단으로서 직장에 다니고,
스스로 허접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일(직장)에 대해 얘기하는걸 좋아하지 않으며,
문제가 많은(?) 부모를 가끔씩 사랑하고,
세 남매 중 첫째이며,
수영을 좋아하고, 우유를 좋아해서 바에서 까지 우유를 시켜 마시는
68년 1월생 영국 여자.이름은 이사벨.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전기는 왜 필요한가?
어렸을 때부터 "전기=위인전"이라는 너무 강한 고정관념에 갇힌 나머지,
전기가 "전기를 쓰는 이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세계 위인전집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했던 내게
전기라는 건 철저하게 관념적이고 계몽적인 것이었고,
전기 작가의 개별성이나 관심의 영역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전기를 "읽는다"가 아닌
"쓰기"를 위한 텍스트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왜 전기를 써 볼 필요가 있는가?
그건.....전기의 주인공을 "제대로", "실체적으로" 알기 위해서,이해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평생을 함께 해 온 가족들에 대해서,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 책, 이사벨의 전기는 정확하게 329페이지다.
나는 우리 아빠에 대해서, 엄마에 대해서, 두 동생들에 대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도대체 몇 페이지를 쓸 수 있을까?
이 책의 화자 "나"는
이사벨에 대한 전기를 쓰면서 끊임 없이 이사벨의 새로운 모습,
여러 가지 다면적인 모습들을 끊임없이 발견한다.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옷들을 계속 이것 저것 입어 보고,
화장을 고치고 또 고치며 시간을 끄는 이사벨을 기다리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여자들은 왜 그렇게 욕실에서 오래 있는지를 에덤 스미스적으로 보자.
왜 나는 화장을 하지 않는 사람이 화장을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이런 사람들은 관자놀이에 난 점 하나에 담긴 자의
우울한 심경에 대해서는 왜 일말의 가책도 느끼려고 하지 않는가?
치마를 입어본 적도 없는 한 남자가 옷장 안에 여섯 벌의 치마가 있는 한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p234)
그렇다.
한 사람의 실체를 안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여자친구가 약속시간에 늦는다고 짜증을 내는 남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여자친구가 어떤 "구체적인" 준비를 한다고 늦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남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자 형제가 있는 남자들은 여자가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
여자 형제가 많은 남자들은 여자가 화장하는 순서, 화장품 종류, 생리대 종류까지 다 알고 있는
남자들도 있지만...
위인전이라 불리는 전기에는 주인공의 "실체적"인 모습이 빠져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주인공이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어떤 습관이 있었는지, 예를 들어 코는 어떤 식으로 후볐는지,
머리를 어떻게 쓸어 올렸는지,
특이한 발음이나 자주 쓰는 단어는 어떤게 있었는지...
이사벨의 전기 329페이지를 읽으면서,
코를 후빌 때는 큰 덩어리를 빼기 좋아하는 이사벨의 습관,
우유를 좋아하고 가시 많은 생선을 싫어하는 이사벨의 기호들을 읽어 나가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무지함"을 느꼈다.
궁금한게 있다.
외국에도 세계 위인전 전집 30~50권이 잘 팔릴까?
한국에만 있는 특수한 현상일까?
전기가 어렸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의 권장(?)으로
억지로 읽어야 하는 수동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내가 타자를 제대로 알기 위한 열려 있는 텍스트일 수 있다는 깨달음.
아...정말 신선하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330페이지짜리 전기를 쓸 수 있을까?
아마....쓰면서 나의 무지함에 놀라 330번쯤 머리를 쿵쿵 찧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