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는 주로 듣기만 했다

 

 

1937년 7월 7일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일본군이 군사행동을 도발함으로써 시작된 중일전쟁中日戰爭은 일본 정부가 선전포고도 없이 총공격을 개시하여 북경, 천진에 이어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30만 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살육(남경대학살사건)하고, 무한武漢, 광동廣東, 산서山西에 이르는 주요 도시들 대부분을 점령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일본인은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 부릅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 즉 살광殺光, 소광燒光, 창광傖光이라는 잔학행위로 1천2백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을 학살했으며, 왕조명汪兆銘 등 친일정치인을 내세워 남경에 괴뢰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항일의지로 저항,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 제국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으며,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전운이 감돌던 시기인 1937년 5월 초에 모씨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향후 입장에 관한 지시를 듣기 위해 대보산大寶山 송태松苔로 안창호를 방문했습니다. 수양동우회가 총 검거당한 것이 중일전쟁보다 한 달 앞선 6월 7일이었으므로 그 해 3, 4월부터 일본 경찰이 수양동우회를 건드리는 징조를 보였습니다. 그 징조를 이광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첫째, 모씨에게 문학 회장이 되기를 청한 것. 둘째, 김윤경金允經에게 심전개발心田開發 강연을 청한 것 등이었다. 이 두 가지는 물론 가 거절되었다. 이 거절이 수양동우회의 비협력 태도를 표시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위기일발의 때에 모씨가 안창호를 방문했던 것입니다. 안창호는 “소화불량으로 안색이 매우 초췌했으나 미완성의 정원을 혼자 고르고 있었다. 때마침 녹음에 꾀꼬리, 기타 새들이 울었다. 도산은 모씨의 미나 미지로의 정책, 수양동우회의 사정, 기타 시사에 대한 보고를 듣고 아무 말 없이 다만 모씨를 하루 더 하루 더 하고 만류할 뿐이었다. 이는 도산이 생각하는 표다.”

모씨가 송태에 1주일 동안 묵는 동안에 평양과 그 밖의 곳에서 6, 7명의 동지들이 안창호를 찾아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사업의 장래에 관해 논의했으나, 안창호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주로 듣기만 했습니다. 그는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안창호는 찾아온 몇 동지들과 함께 송태 앞 고개턱 잔디 위에 앉아서 밤경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날의 하늘은 실로 장관이었습니다. 이광수는 소설처럼 그날의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금성과 상현上弦달과 목성이 간격을 맞추어 한 줄에 빗기고 스콜피온의 가운데 별이 불덩이와 같이 빛났다. 화성도 붉은 빛을 발하면서 뒤를 따랐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었는지 모르거니와, 세상에 큰일이 생길 것 같다는 화제가 나왔다. 미나 미지로의 강압 정책에 조선 민심이 동요된다는 말도 났다. 밤이 이슥하도록 말들을 하였으나 도산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튿날 안창호는 모씨에게 자기가 5월 20일경에 상경할 터이니 이사회를 원만히 모이도록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사회 소집에 관하여 난관이 생겼다. 그것은 집회허가에 관하여 종로서에서, 첫째, 소집통지서를 일본문으로 쓸 것, 둘째, 집회의 용어를 일본말로 할 것을 조건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양동우회 이사장은 일본말에 능통치 못한 이사가 있는 것을 이유로 한국어 사용을 허락하기를 요구하였으나, “너희 회 이사들이면 영어까지도 능통한 사람들이 아니냐” 하고 성을 내었다. 이에 이사회 소집을 단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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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병성망막증diabetic retinopathy이 무엇입니까?

 

 

당뇨병이란 우리 몸에 당분을 분해시키는 인슐린 효소의 부족 혹은 작용이상으로 나타나는 전신적 질환입니다. 당뇨병에 걸리면 혈액 속의 당분이 높아지게 됩니다. 혈중 당분 수치가 올라가면 피로감, 갈증, 다량의 음식물 섭취, 소변량의 증가, 가려움증 및 이유없는 체중 감소 등의 증상을 보입니다. 이런 당분 대사장애로 인하여 당뇨병은 우리 몸의 여러 중요한 장기에 변화를 초래합니다. 오랜 기간 고혈당 상태가 유지되면 신체에서 여러 합병증이 발생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망막병증(실명할 수 있음), 신기능장애(신기능 저하로 심할 경우 투석이 필요함), 신경병증(저림, 통증)이고,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이 높아지게 됩니다.

눈에서는 백내장, 당뇨병성망막증diabetic retinopathy(망막혈관의 변화) 및 신생 혈관성 녹내장 등을 초래하여 심각한 시력장애를 유발합니다. 당뇨병성망막증의 발생과 진행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는 당뇨병의 유병기간, 혈당 조절 정도, 고혈압, 임신, 신장질환, 고지혈증hyperlipidemia 등이 있습니다. 고지혈증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지방성분 물질이 혈액 내에 존재하면서 혈관벽에 쌓여 염증을 일으키고 그 결과 심혈관계질환을 일으키는 상태를 말합니다. 최근에는 비정상적인 혈액 내 지질 상태를 이상지질혈증dyslipidemia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당뇨병성망막증은 크게 두 단계로 분류할 수 있는데 먼저 비증식성 당뇨망막증NPDR은 비교적 덜 진행된 상태의 망막증입니다. 비증식성 당뇨망막증은 망막혈관의 누출과 폐쇄에 의한 구조적 변화가 망막 내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경우로 미세혈관류, 망막출혈, 경성삼출물, 황반부종DME(Diabetic Macular Edema) 등이 관찰됩니다. 이 시기에는 보통 시력이 심하게 저하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더 진행하면 망막의 앞 표면과 유리체에도 변화가 생겨 망막 내에서 발생한 신생혈관이 시신경유두표면이나 망막표면에서 내경계막을 뚫고 유리체강 내로 진행하여 증식성 당뇨망막증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신생혈관은 정상적인 혈관벽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쉽게 파열되어 유리체 출혈을 일으키며, 유리체 내의 반흔 조직들이 망막을 잡아당겨서 망막이 떨어지게 됩니다. 또한 홍채에도 신생혈관이 생겨 녹내장이 합병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심한 시력장애와 실명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진단 및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기 발견입니다. 병의 초기에는 특별한 증상을 못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당뇨병 환자의 40%에서 경도의 당뇨병성 망막증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력장애가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초기 단계를 지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뇨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정기적으로 안과 검진을 받아야 병의 진행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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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민주화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요구되는 세 번째 주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각각의 태도다.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을 기화로 이슬람세계를 민주화하려는, 미국 선교 당국의 노력 탓에 이슬람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 후, 미국은 민주주의를 장려한다는 미명하에 사담의 숙적이자 유력한 이슬람주의 야당과 손을 잡아야 했다. 따라서 제도적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의 차이는 미국의 대외정책과 관계가 깊었다. 오바마 정부는 이를 “온건파 무슬림” 과 익명의 “테러리스트” 의 차이로 규정해 전자와의 비즈니스를
정당화했고 고위 관료에 온건파 무슬림을 대거 앉혔다. 알다시피, 부시 행정부 당시 지하디스트는 “테러와의 전쟁” 에서 적으로 규정되었으나, 오바마 정부는 무슬림과의 화친정책을 비롯하여, 그들을 “급진파” 와 구별하기 위해서 이슬람주의와 지하디스트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부시와 오바마 행정부는 정책은 각기 달랐으나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제도적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는 권력을 쟁취하는 수단이 다를 뿐, 비전과 세계관을 비롯하여 샤리아에 기초한 국가를 건설한다는 궁극적인 목표와 관련된 정부 현안을 두고는 견해가 일치했다. 그렇다면 마음에 품고 있는 질서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양립할 수 있을까? 그 답변을 2장과 4장에서 분명히 제시해두었으므로 지금은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와, 이슬람교와 민주주의의 양립 가능성 두 가
지만 짚어볼까 한다. 이슬람교가 정치적 윤리의 원천으로서 종교개혁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세계에서 잘 조직된 야당을 구성하고 있다. 가자지구와 이라크에서와 같이, 선거가 치러지면 대개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정권을 쥐게 마련이다. 예컨대, 가자지구에서 2006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압승했고, 이듬해 6월에도 결과가 같았다. 그 후 하마스를 탈당한 이들은 재판을 거치지 않은 채 옥고를 치르고 있으며, 설령 차기 선거가 실시된들 그것이 공명정대하리라는 보장이 없는 실정이다.
제도적 이슬람주의자들은 근대화 자체도 그렇지만 민주주의도 둘로 쪼개어, 선거정책 등의 근대식 수단과 절차는 수용하나 문화적 근대화라는 가치관은 배격한다. 선거 메커니즘의 일환으로 투표함을 받아들이는 건 민주주의를 수단적인 절차로 믿는다는 방증인데, 정작 민주적 다원주의나 권력분립 등, 민주주의의 주요 사상에는 공감할 줄 모른다. 또한 정치철학과 민주주의의 시민 문화는 서방세계의 전유물로 보고 이슬람교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이런데도 민주화가 성공할 수 있을까?
겉으로 보이는 절차를 차치하고도 이슬람주의자들이 민주적 절차에 집착하는 데는 의문이 든다. 당사자가 폭력을 버리고 민주주의라는 핵심 가치관과 절차에 동의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제도적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의 차이는 전자가 폭력을 포기하고 민간체제의 규율을 엄격히 준수할 때에만 성립된다. 하지만 지금은 소위 “온건파” 라는 이슬람주의 조직도 강경한 민병대를 거느린 채 투표게임을 즐기고 있으니 그 차이는 별 의미가 없을 만큼 흐릿해진 실정이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라크 이슬람 최고평의회SIIC: Supreme Islamic Iraqi Council 및 마흐디운동은 모두 국회에서 정당노릇을 하고 있으나 민병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즉 투표를 실시하고 원로를 국회로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해체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 민병조직을 이용하여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 어찌 투표함과 총알의 결합이 민주주의와 손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는 민병대를 갖추지 않은 이슬람주의 조직은 터키의 AKP뿐이다. 하지만— 2008년 7월, 터키 헌법재판소에서— 검찰은 AKP가 자국을 “점진적으로 이슬람국가” 로 만들고 있다는 혐의를 주장했다. 마침내, 법정은 당에 유죄를 판결했으나 국가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해체를 명령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2010년 들어 AKP는 헌법재판소와 사법당국을 당리에 유리하게 재편하기 위해 헌법 개정초안을 작성했다.37 즉 종교색을 띠지 않는 터키를 이슬람화하려는 당의 움직임이 좀 더 분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AKP의 이슬람주의38는 다양한 측면에서 예외적인 사례라서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이슬람교 조직체도 정치에 참여해야 민주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의 주요 근거가 되므로 논의할 가치가 있다. 민주주의는 투표함이나 투표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민주적인 정치 문화라는 가치가 우선 확립되어야만 한다. 터키가 심심찮게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법절차를 무시한 채 정적을 구속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AKP가 민주정치에 헌신한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는 근거는 아주 많다. 그것이 바로 제도적 이슬람주의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지금은 이슬람주의 정당이 종교와 무관한 공화국에 적응한다기보다는 그 반대라야 옳을 것이다. AKP가 집권한 이후 한때 이슬람세계에서 종교와는 무관한 민주정치의 모범이 되었던 케말리스트 공화국이 종교적 정체성을 찾고 서양 문화를 탈피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울러 AKP가 집권한 터키가 이란과 하마스 및 헤즈볼라와 가까워지고 있으니 서방세계와는 점차 멀어지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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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지와 사랑)

 

 

 

 

명확하게 써라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까닭은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존 설

어떤 철학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명확하게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글이 애매하거나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면 그것은 해당 주제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증거일 수 있다. 장황하게 단어를 나열하거나 과장된 표현 뒤로 숨지 마라.

애매함은 무능력의 피난처다.
✚ 로버트 하인라인, 『낯선 땅 이방인Stranger in a Strange Land』

자리에 앉아 글을 쓸 때 원래 마음먹은 말만 쓰고 그 이상은 쓰지 않기로, 원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아주 간략한 낱말만 쓰고 되도록 낱말수를 줄이기로 엄숙하게 맹세하자.
✚ C. E. M. 조드, 「좋은 글과 나쁜 글How to Write and How to Write Badly」

수학이나 철학 관련 저술가가 어렴풋한 심오함을 과시할 때 그것은 헛소리일 뿐이라고 여기는 편이 낫다.
✚ A. N. 화이트헤드, 『수학 입문An Introduction to Mathematics』

글을 명확하게 쓸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그렇게 할 수 있다. 명확한 글쓰기에 꼭 필요한 여섯 가지 지침이 있다. 물론 이는 고정불변의 법칙이 아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 하지만 다음으로 살펴볼 오웰의 여섯 가지 지침은 명확한 의사표현을 위한 훌륭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 오웰의 6가지 지침
작가 조지 오웰은 에세이 「정치와 영어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1946)에서 명확한 글쓰기를 위한 여섯 가지 지침을 제시했다. 이 지침이 철학 관련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인쇄물에서 자주 접한 은유, 직유, 비유의 표현을 절대 쓰지 마라.
■ 짧은 단어로 충분한 곳에 긴 단어를 절대 쓰지 마라.
■ 단어를 줄일 수 있다면 최대한 줄여라.
■ 능동태를 쓸 수 있다면 수동태를 절대 쓰지 마라.
■ 일상적인 표현을 쓸 수 있다면 외래어, 과학용어, 전문용어를 절대 쓰지 마라.
■ 상스러운 표현을 쓰느니 차라리 이 다섯 가지 지침을 어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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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과 시 이용하기

 

 

나는 명상에서 낱말을 사용하는 것(보통 유도 명상법이라고 부른다)이 목발에 의지하는 것처럼 불완전한 방법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경Ānāpānasati』과 같은 경전을 공부하면서 붓다도 이러한 방법을 추천했음을 알게 되었다. 무아와 무상의 통찰이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려는 의도인 것처럼 고요함에 이르는 데 낱말을 사용할 수 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에는 혼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할 일을 주고 방향을 제시하여 산만한 마음을 모두 잡는 것이 현명할 때가 많다.
많은 종교에서 깊은 명상에 이르는 비결로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즉 ‘거룩한 독서’라는 수행법이 전해온다. 이 수행법은 무엇인가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생길 때까지 성경의 한 구절을 읽는 것이다. 그 구절은 ‘여호와는 나의 빛’처럼 시편(27:1)의 한 구절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이 마음을 끌었다면 그 부분이나 전체 구절을 생각하면서 마음속의 긍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 나의 빛, 빛’이라는 구절이 마음을 적시고 가득 채우게 한다.
불교에서는 시詩가 수행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게구偈句(gathas)라 부르는 짧은 시가 주의를 집중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단순히 시의 구절을 생각하면서 심호흡을 하는 방법이나 시의 한 구절에 숨을 들이마시고 다음 구절에 숨을 내쉬는 방법이 이용될 수 있다. 다음 게송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경Sutra on the Full Awareness of Breathing』(틱낫한 1996)에 있는 붓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나의 수련법과 통찰에 따라 수정해보았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몸을 의식한다.
몸을 편히 한다.
몸을 사랑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그대로 둔다.
현재의 순간에 행복하게 머무른다.
현재의 순간에 고요히 머무른다.
모든 것이 여기에 이미 있다.
부족함이 없다.
모든 것이 여기에 이미 있다.

이 글을 써서 명상할 때 앞에 두어도 좋을 것이다. 각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라 이 시로 수행할 때에는 호흡에 집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들숨이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 날숨이 긴장과 근심을 내보내도록 하라. 호흡의 감각을 즐겨라. 숨을 들이마실 때에는 ‘들이쉰다’라고, 내쉴 때에는 ‘내쉰다’ 하고 속으로 말하라. 마음이 차분해지거나 이런 말이 거북해지면 그냥 조용히 심호흡에만 집중하라. 원하는 만큼 이 상태를 유지하고 또 나쁘지 않다면 명상 내내 이렇게 해도 좋다. 명상으로 우리가 어떤 경지에 도달하거나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게구의 어떤 부분을 사용해도 좋다.
몸을 의식하라 심호흡을 계속 의식하면서 그 의식을 몸 전체로 확대하라. 몸 전체가 느끼는 감각을 알아보고 이 순간 몸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라. 우리의 몸 어느 부분에서 고통이나 긴장이 느껴진다면 그 사실에 주목하라. 몸이 편안하다면 그냥 그 사실을 알아두어라. 호흡 한 번에 한 구절씩 속으로 읊다가 점차 호흡 두세 번에 한 번으로 줄이고 나중에는 그저 고요히 몸에만 주의를 기울여라. 주의가 산만해지면 구절을 다시 읊어라.
몸을 편히 하라 몸이 좀 편해지기 시작하면 이 구절을 사용해보라. 이 구절은 자기 암시나 자기 최면이 아니라 수행이다. 이는 우리가 몸을 편안히 해서 의식을 피해가려는 시도가 아니라 의식을 적극적으로 발휘하여 몸을 편안하게 만드는 걸 의미한다. 이미 생겨난 편안함의 씨앗에 물을 주는 일일 뿐이다. 이미 있는 편안함에 주의를 기울이면 편안함은 더 커지고 깊어진다. 그러면 낱말을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집중력이 떨어질 경우 이 구절을 다시 이용하라.
몸을 사랑하라 몸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 자체가 이미 일종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을 편하게 하면 몸에 대한 사랑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감정을 일으켜 몸으로 불러오라. 몸에 대한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그저 알아차리고 그대로 두어라. 그리고 다시 우주의 경이로운 발현이자 멋진 선물인 몸에 대한 사랑을 불러오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대로 두라 근심이 생기면 내려놓고 그것을 그대로 두려는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상기시켜라. 이는 근심과 다툼을 벌이거나 떨쳐버리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근심에 얽매이지 않고 그 본질을 의식 속에서 변화하는 하나의 에너지 유형으로 바라보면서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이 구절을 읊을 때 공양 그릇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붓다의 이미지,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열려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도움이 된다.
현재의 순간에 행복하게 거하라 걱정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도록 하고 이 순간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의 주변에 있는 좋은 것들만을 받아들여라.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구절을 단순화시킬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이 순간에 행복하게 거한다, 행복하게 거한다, 행복…….’ 편안해지면 우리가 이 구절을 사용할 필요 없이 조용히 명상하면 된다.
현재의 순간에 침착하게 거하라 이제 이미 현존하는 침착함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이 증가하도록 내버려둔다. 우리가 원한다면, 같은 종류의 다른 낱말들을 추가하여 사용할 수도 있는데, 예를 들면 ‘고요’, ‘조화’, ‘광휘’ 등을 사용할 수 있다. 동일한 종류의 추가하고 싶은 다른 글귀가 있다면 사용해도 좋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고요, 조화, 광휘 속에 거한다…….’
모든 것이 이미 여기에 있다 실재를 조각내어 인식하는 것이 지성의 본성이다. 영적 가르침의 실질적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나눌 수 없는 실재를 다른 관점들로 나누어야만 하고, 궁극의 것(法界)과 상대적인 것이나 역사적인 것(世界)을, 경이적인 것과 본체를 구별한다. “모든 것은 여기에 이미 있다”라는 표현은 상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다. 상대적인 차원에서 보면 부족한 것,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것, 우리가 손에 넣어야만 하는 것들이 많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 즉 천국이나 붓다의 정토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여기에 있으며 부족한 것이란 없다. 한 가지와 깊이 접촉하면 만물과 접촉하는 셈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궁극적인 차원에 닿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절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부족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생각과 다투지 마라. 이 시의 첫 구절부터 다시 시작해도 좋으며, 언제라도 이 구절로 다시 수행할 수 있다.


부족함이 없다 모든 것이 이미 여기에 있다. 이 구절은 완전함과 풍만함의 통찰을 표현한다.


● ● 누워서 명상하기
누워서 명상하면 무엇보다 편안하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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