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는 주로 듣기만 했다
1937년 7월 7일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일본군이 군사행동을 도발함으로써 시작된 중일전쟁中日戰爭은 일본 정부가 선전포고도 없이 총공격을 개시하여 북경, 천진에 이어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30만 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살육(남경대학살사건)하고, 무한武漢, 광동廣東, 산서山西에 이르는 주요 도시들 대부분을 점령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일본인은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 부릅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 즉 살광殺光, 소광燒光, 창광傖光이라는 잔학행위로 1천2백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을 학살했으며, 왕조명汪兆銘 등 친일정치인을 내세워 남경에 괴뢰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항일의지로 저항,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 제국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으며,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전운이 감돌던 시기인 1937년 5월 초에 모씨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향후 입장에 관한 지시를 듣기 위해 대보산大寶山 송태松苔로 안창호를 방문했습니다. 수양동우회가 총 검거당한 것이 중일전쟁보다 한 달 앞선 6월 7일이었으므로 그 해 3, 4월부터 일본 경찰이 수양동우회를 건드리는 징조를 보였습니다. 그 징조를 이광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첫째, 모씨에게 문학 회장이 되기를 청한 것. 둘째, 김윤경金允經에게 심전개발心田開發 강연을 청한 것 등이었다. 이 두 가지는 물론 가 거절되었다. 이 거절이 수양동우회의 비협력 태도를 표시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위기일발의 때에 모씨가 안창호를 방문했던 것입니다. 안창호는 “소화불량으로 안색이 매우 초췌했으나 미완성의 정원을 혼자 고르고 있었다. 때마침 녹음에 꾀꼬리, 기타 새들이 울었다. 도산은 모씨의 미나 미지로의 정책, 수양동우회의 사정, 기타 시사에 대한 보고를 듣고 아무 말 없이 다만 모씨를 하루 더 하루 더 하고 만류할 뿐이었다. 이는 도산이 생각하는 표다.”
모씨가 송태에 1주일 동안 묵는 동안에 평양과 그 밖의 곳에서 6, 7명의 동지들이 안창호를 찾아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사업의 장래에 관해 논의했으나, 안창호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주로 듣기만 했습니다. 그는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안창호는 찾아온 몇 동지들과 함께 송태 앞 고개턱 잔디 위에 앉아서 밤경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날의 하늘은 실로 장관이었습니다. 이광수는 소설처럼 그날의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금성과 상현上弦달과 목성이 간격을 맞추어 한 줄에 빗기고 스콜피온의 가운데 별이 불덩이와 같이 빛났다. 화성도 붉은 빛을 발하면서 뒤를 따랐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었는지 모르거니와, 세상에 큰일이 생길 것 같다는 화제가 나왔다. 미나 미지로의 강압 정책에 조선 민심이 동요된다는 말도 났다. 밤이 이슥하도록 말들을 하였으나 도산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튿날 안창호는 모씨에게 자기가 5월 20일경에 상경할 터이니 이사회를 원만히 모이도록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사회 소집에 관하여 난관이 생겼다. 그것은 집회허가에 관하여 종로서에서, 첫째, 소집통지서를 일본문으로 쓸 것, 둘째, 집회의 용어를 일본말로 할 것을 조건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양동우회 이사장은 일본말에 능통치 못한 이사가 있는 것을 이유로 한국어 사용을 허락하기를 요구하였으나, “너희 회 이사들이면 영어까지도 능통한 사람들이 아니냐” 하고 성을 내었다. 이에 이사회 소집을 단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