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만끽


요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시간을 횡재했는데도 그것을 어디에 써야 좋을지 몰라 망설여지는 기분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9월생인데 자신의 생일을 가을이라고 했습니다. 가을은 과연 축복과 결실의 계절이란 생각이 듭니다. 축복은 마당에 있는 물든 감나무의 잎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시선을 멀리하면 산이 붉게 물든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결실 또한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감에서 그리고 시선을 멀리하면 황금빛 들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금년에는 과거보다는 더 가을을 타는 느낌이라서,
지지난 주말에는 전등사에 갔습니다.
가기 전에 검색을 하니 381년 소수림왕 11년에 아도가 창건했고, 고려 충렬왕(1274-1308)의 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옥등을 시주한 데서 전등사란 명칭이 비롯했다고 나왔습니다. 실은 과거에 간 적이 없었던 절이라 검색을 통해 매우 들뜬 마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날 축제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건 절이 아니라 시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절 입구에는 고구마와 강화도 토산물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고, 중이 경을 읽는 소리를 확성기로 크게 틀어놓아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경 읽는 소리는 바람을 타고 겨우 흘러나와야 멋있는 것인데 확성기로 시끄러울 정도이면 전시적일 뿐입니다. 그리고 명부전이야 천장에 명패를 주렁주렁 달아 사자의 저승길을 편히 해주려고 기복신앙으로 뒤덮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대웅전에서 조차 명패를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것은 꼴불견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절에 가기 전에 문인들과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모든 종교는 우리 고유의 샤머니즘과 융화되어 기복신앙으로 나타난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도 그렇고. 암튼 우리나라에서의 종교는 복을 비는 곳입니다. 물론 돈을 갖다 바친 후에 그에 상응하는 복을 기원하는 것이지요. 사자의 혼이 중들의 염불로 좋은 곳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웃기는 일이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49제를 통해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매우 웃기지도 않는 일입니다. 명부전은 원래 인도의 불교에는 없는 것인데 중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입니다. 샤머니즘의 뿌리가 내리기 쉬운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대웅전은 참으로 마음에 드는 말입니다. 부처를 큰 영웅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타당해보입니다.
지난 주말에는 법주사에 갔습니다. 신라시대에 의신義信이 인도에 가서 경전을 얻어 귀국한 후 나귀에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553년, 진흥왕 14년에 이 절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법法이 안주할 수 있는 탈속脫俗의 절이라 하여 법주사란 명칭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선덕왕 대에 중수했는데, 현존하는 석물들이 그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법주사는 기대에 부응할 정도로 인상이 매우 좋았습니다. 매우 큰 절이고 주변의 산들이 붉게 물들어 더욱 흡족했습니다. 쌍사자석등이 특히 훌륭했고, 석련지석등, 마애여래의상 등 석물들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불국사에서도 느낀 바이지만, 신라시대의 절에 가면 여전히 꿈과 이상이 있고, 종교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조선시대에 손본 절들치고 아름다운 절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고려 때만 해도 삼국시대에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문화가 퇴보했지만, 그런대로 봐줄만 하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정말이지 퇴보가 극심합니다.
암튼 가을을 만끽한 주말이 두어 번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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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예술과 저급예술 그리고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


두 주에 걸쳐 관훈클럽에서 강의하면서 ‘고급예술과 저급예술 그리고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언론인들이라서 강의를 소화하는 능력이 일반인들을 위한 강의에 비해 현저하게 높았습니다.
예술이 반드시 고급이어야 하는가? 하고 물으면, 답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팝아트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즉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예술이 고급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19세기 중반 이후 예술은 소수를 위한, 즉 지성인들을 위한 예술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 특히 존 케이지의 영향 하에, 삶과 예술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팽배했고, 삶이란 폭넓은 대중의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예술의 주제를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중이 관심을 갖는 데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예술은 매우 친근하게 대중에게 다가갔지만, 질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고급예술이 저급예술로 그 격이 떨어진 것입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예술이 고급이다 저급이다 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취향과 미에 대한 판단에 따라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 시대 사람들의 취향과 미에 대한 판단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릅니다.
동시대를 살고 있더라도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배경이 다르므로, 동양이라도 각 나라 혹은 민족의 문화적 배경이 다르므로 그 사람들의 취향과 미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문화적 배경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구가 하나의 생활권이 되면서 문화적 배경은 다양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존중되고 있습니다.
문화적 배경 때문에 창작을 가려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이 취향과 미에 대한 판단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관훈클럽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다음의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클래식음악을 전혀 듣지 않고, 오페라나 뮤직컬, 재즈 등 다양한 음악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태진아와 송대관의 노래만 나오면 신이 나서 따라 부른다면, 그 사람은 음악에 대한 나쁜 취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음식의 종류가 다양한데, 짜장면과 짬뽕만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음식에 대한 나쁜 취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취향과 관련해서 집단취향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많으면 집단취향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나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미에 대해서 좋은 판단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서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이 취향과 미에 대한 판단에 의해 이뤄진다고 했는데, 집단취향이 나쁘면 그 사회의 예술은 저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취향을 갖기 위해서는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다양한 것들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나 음식에 대해 좀 더 알고 좀 더 경험한 후에 어떤 것이 좋다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취향과 미에 대한 판단은 어차피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느 것을 선택하여 취향에 적합하다거나 좋다고 판단한다면, 그 사회의 예술은 고급화됩니다.

오늘날의 예술에서의 문제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입니다.
대중성을 띠어야 하지만, 질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술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대중성 속에 일반 사람들의 취향과 미에 대한 판단이 근거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혹은 평균적인 사람들의 취향이 나아져야 또는 미에 대한 판단이 질적으로 향상되어야 예술가가 거기에 걸맞는 예술작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급예술이 성행하는 나라의 사람들의 취향은 고급입니다.
반대로 저급예술이 성행하는 나라의 사람들의 취향은 저급입니다.

예술의 고급화는 관람자의 취향이 먼저 고급화되는 데서 이뤄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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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어제 대전에 소재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갔습니다.
기차에 탑승하기 전에 담배 한 대를 피우는 건 습관입니다.
노숙자 한 사람이 다가와 “형님, 담배 하나 주십시오” 한다.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는 “동료에게 줄 것도 하나 주십시오” 한다.
“안 돼!” 하고 말했다.
“알았습니다” 하고 저만치 간다.
기차를 타러 가면서 내가 왜 안 된다고 말했을까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제 주제에 동료의 것까지 챙기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호두과자를 먹고 있었다면 그에게 그의 동료의 것도 주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평소에 유해음식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걸 그의 동료에게까지 준다는 게 싫었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꼭 한 시간 만에 대전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국립문화재연구소로 가자고 하니,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주소를 말하니 기사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이놈의 내비게이션이 빨리 작동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하고 말한다.
그쯤 유모가 있는 사람이라면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아 대전 특산 음식물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없다면서 대전시가 근래에 삼계탕과 칼국수를 대전의 특산 음식물로 지정했다고 말한다.
그게 대전 특산물이 되겠느냐고 물으니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시장이 그렇게 정했다고 말한다.
대전이 특색 없는 도시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온천에 관해 물었다.
지난번 유성온천장에 묵었는데, 호텔마다 다 온천수를 사용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자신이 과거에 목욕탕을 한 경험이 있어 잘 안다면서 온천수를 100% 사용하는 데는 한 곳도 없고, 정부에서 관리하는 곳에서는 70%의 온천수를 사용한다고 한다.
보통 온천수를 탱크에 받아 수돗물과 섞어 사용하는데, 온천수를 30%만 사용하는 곳도 많다고 한다.
물을 미끄럽게 만드는 곳도 있는데, 소금을 섞기 때문이라며 그런 곳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온양온천도 마찬가지라며 정부에서 온천수의 사용을 법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많이 사용할 경우 부과세를 더 내야 하므로 물을 많이 섞는다고 말한다.
몇몇 곳은 온천수를 60%까지 사용한다면서 그런 온천장을 말해주었다.
기사를 통해 온천에 대한 지식이 생겼다.

기사의 다음 이야기는 마음을 어지럽혔다.
자신의 하반신은 마비된 상태이고 오줌만 겨우 눌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운전을 하느냐고 물으니 집에만 있기 답답해서 손으로 운전한다고 말한다.
기사의 말인즉,
자신이 큰 규모의 목욕탕을 논산과 대전에 각각 열고 사업이 잘 되었는데, 아내와 큰아들이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의 보증을 섰다가 두 곳 다 날아갔다는 것이다.
법정관리가 6개월인데, 자신이 그 사실을 안 건 6개월 하루 뒤였다고 한다.
손쓸 시간도 없이 하루아침에 재산을 날렸다고 한다.
2004년의 일인데, 너무 분해서 신경성으로 서울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었고,
결국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성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의사도 병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자다가도 누군가가 불방망이로 자신의 허리를 쑤시는 듯한 환상에 빠지고, 한 번은 아내를 죽이려고 목을 졸라 아내가 중환자실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대목에 이르러선 “이거 택시를 잘못 탔구나” 하고 생각했다.
기사와 승객이 가볍게 나눌 수 있는 대화로서는 섬뜩했다.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청한 노숙자에게도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라고 하면 뜻밖의 이야기가 술술 나올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품고 산다.
나에게도 아무한테나 말할 수 없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값싼 동정심을 받게 되면 더 부아가 치밀 것 같아 말하지 않고 꼭꼭 숨겨놓은 이야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꼭꼭 숨겨놓게 된다.
값싼 동정심과 맞바꾸기에는 너무 애절한 이야기라서 스트레스로 남기게 된다.

어쩜 택시기사는 섬뜩한 이야기이지만, 자신의 아내를 목 졸라 죽이려고 했다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해서 그는 고통의 통로를 벗어난 것 같았다.
스트레스는 말로 쏟아내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도착하자 따뜻한 공기가 뺨을 스치는데, 기사의 이야기 때문인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강실장이 맛있는 차, 백설기, 포도주, 고량주 등으로 대접해주어 담소하느라 우울한 이야기는 이내 사라졌다.
미식가인 강실장이 데려간 곳에서 굴국밥과 굴부추전을 먹으니 일품이었다.
대전의 특산물로 삼계탕과 칼국수 대신에 굴국밥과 굴부추전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침 책상 앞에 앉으니 그 택시기사의 이야기가 다시 생각난다.
아내의 목을 졸랐다는 인생,
하반신이 마비된 인생,
분노를 삭이며 살아가야 하는 그 인생이 여간 딱하지 않다.
세상에는 딱한 이야기가 아주 많은 것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야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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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작품세계

(강의내용)

초기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워홀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1928년 워홀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 안드레이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소재한 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어머니 줄리아는 얇은 깡통을 가위로 잘라 꽃 모양으로 만들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25센트에 팔았다.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워홀은 가난한 이민자 가족으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 하에 돈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업습관과 미학에 두드러졌으며, 그의 예술이 도덕적으로 절충되고 퇴폐한 것이었다는 비평을 이끌어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 그 이상으로 워홀은 돈에 대한 욕심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업과정과 주제 선택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워홀은 여덟 살 때인 1938년 가을에 무도병 증세를 나타냈는데, 류머티즘에 관련하여 일어나는 추체외로계 질환의 하나로 그 보행이 마치 댄스를 하는 것 같아 세인트 비투스의 댄스St. Vitus' Dance로 불리기도 한다. 무도병으로 학교를 장기 결석한 그는 부엌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에서 한 달 동안 어머니의 간호를 받았다. 이 병의 증세에는 피부부스럼과 조절할 수 없는 흔들림이 포함되었고, 흔들림에 대한 느낌과 피부병학적 외관의 손상은 미래에 반향을 일으켜 성숙한 미술품에서 그는 이런 체험을 굴절시켰으며, 회화, 영화, 그리고 퍼포먼스에서 증상이 반향하게 했다. 그가 유명해졌을 무렵인 1960년대 초반에 피부부스럼은 사라졌으나 청춘기와 초기 성인기에서 얼굴에 흔적을 남겼으며, 온 생애에 걸쳐 나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워홀은 1949년 6월에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대를 졸업한 뒤 뉴욕으로 이주했다. 대학을 마칠 무렵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으므로 1953년에 처음 가발을 구입했는데 스물다섯 살 때였다. 1973년 이후 그에게 담낭수술이 요구되었지만 병원을 두려워했으므로 수술을 미루었다. 결국 1987년 2월 20일 금요일 오십팔 세에 뉴욕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가발을 쓰고 있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환자가 유명한 예술가라는 걸 모르는 간호사는 아드레날린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동요로 인한 심장박동의 정지로 환자가 괴로워하는 걸 알았다. 그녀는 다른 직원을 불렀으며 그들이 그를 소생시키려고 한 시간을 소비한 뒤 워홀은 6시 31분에 사망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장례식은 1987년 2월 26일 피츠버그에서 거행되었고 세례자 성 요한 비잔틴 묘지 부모 옆에 묻혔다. 워홀의 절친한 친구들 중 하나가 열린 무덤에 향수병(에스티 로더)과 워홀이 창간한 『인터뷰』 한 권을 던졌다. 위령제는 뉴욕시의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4월 만우절 날에 열렸으며 한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Magic Flute>를 연주했다.

워홀의 소장품에 대한 경매가 1988년 4월 23일부터 5월 3일까지 소더비에서 열렸고 $25,333,368이 걷혔다. 생애에 그를 무시한 모마가 1989년에 그의 회고전을 열었다. 앤디 워홀 박물관은 1994년에 개관했다.

디자이너로서의 워홀
워홀이 어떻게 화가가 되었을까? 그가 하나의 응답을 엮어냈다.
“아홉 살 때 내게 세인트 비투스의 댄스가 생겼다. 메이벨린의 광고를 보고 헤디 라머(오스트리아의 여배우)를 그렸다. 잘 그려지지 않아 그걸 버렸다. 나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화가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워홀은 1960년대 초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건 만화와 광고였다. 어린 시절의 영웅주의 인물이나 자신이 즐겨 먹고 마시던 상품을 선택했는데, 그것들은 뽀빠이, 낸시, 딕 트레이시(워홀 67), 배트맨, 슈퍼맨, 코카콜라(워홀 86),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각 등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다. 따라서 그를 화가보다는 디자이너로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사람들은 일견에 워홀의 작품이 반복에 근거함을 볼 수 있을 터인데 그가 반복을 전문화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평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2년 8월에 야구선수들을 시작으로 영화배우들 트로이 도나휴와 워렌 비티를 다음으로 그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8월 5일 마릴린 먼로(워홀 87)가 치명적으로 약을 과량 복용하여 죽자 바로 다음날 그녀의 초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마릴린과 리즈의 초상화가 큰 명성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오브제들이나 개체들은 미술품 내에서의 반복되고 그리고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생산한다.

또한 워홀은 재난을 실크스크린으로 뜨기 시작했다. 1962년 6월 4일 『뉴욕 미러 New York Mirror』의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 129 Die in Jet>(워홀 80)이란 주요 제목이 있는 표지를 대참사의 이미지로 디자인했다. 죽음의 주제를 확대하여 이듬해에 자동차 전복사고, 자살 현장사진, 사형수를 살해하는 전기의자 등을 제작했다. 그림 그리기보다는 실크스크린 뜨기가 빠르고 쉬웠다. 실크스크린 뜨기가 실재를 묘사하는 사진의 주장에 대한 효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실크스크린 뜨기가 시각적 이해력의 역사적 새로운 다양성을 요구했다. 워홀은 어떤 주제들이 복제하기에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는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흑백 이미지를 어떤 놀라움을 주는 색들이 필히 꾸며주고, 혹은 불쾌하게 해준다는, 그리고 파란색, 혹은 빨간색, 혹은 은색이 그것들을 응시하는 자아를 입증하고 승인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인습타파의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반복되는 이미지들의 어리석은 리듬이 받아들인 진실을 이화시킬 수 있다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장해물과 결함을 눌러 터뜨리는 방법, 즉 이미지가 선명치 않게 되거나 충분히 적용되지 않는, 혹은 한 이미지가 또 다른 것의 명료함에 돌발적으로 겹치고 망치게 하는 순간 어디에 스크린이 미끄러져 들어가거나, 혹은 물감으로 막히게 자리를 잡아주는 걸 알고 있었다.

사업가로서의 워홀
워홀의 작업 시기를 1950년대와 1960년대 둘로 구분할 수 있다. 레코드와 책 표지 그리고 광고는 돈을 위해서이고 팝 그림과 영화는 훌륭한 예술가라는 불멸의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런 구분은 단순하지 않은데 그가 팝 시기인 1960년대에 상업적 작업을 비밀에 붙여 계속했기 때문이며, 1968년 이후 그가 “비지니스 아트”라고 명명한 위임받은 프로젝트들을 돈을 위해 노골적으로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홀은 초상화를 스크린으로 떠서 많은 돈을 벌었다. 한 점에 5천 달러를 받았다. 그는 한 해에 50점에서 100점을 위임받아 제작했으며, 많은 초상화들이 개인적으로 소장되었고 그것들이 시리즈로 전시된 적은 없었다. 초상화들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리즈, 마릴린, 혹은 재키의 이미지들로 표현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많은 초상화가 유명한 개인들일지라도 더 많은 것들은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즉 부유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람의 딸, 아들, 아내, 남편을 묘사한 것들이다.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은 노동집약적인 것으로 순식간에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약 50개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은 뒤 그것들 가운데 이상적인 이미지를 선택해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때로는 그가 오래 전에 폐기한 표현주의적인 예술적인 체하는 패러디로 손으로 색을 칠해 과장된 몸짓에 보탰지만 회화적 표현을 압도하는 있는 그대로의 초상을 늘 모색했다.

워홀의 초상화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위임받아 제작한 것들이 아닌 1972년에 시작한 모택동의 이미지들이다. 그는 1974년에 모택동 벽지 위에 모택동을 걸었다.(워홀 165, 166) 모택동들의 흔적을 좇아 1976년에는 소련의 국기를 상징하는 망치와 낫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워홀은 철물상에서 구입한 실제 망치와 낫이 있는 사진으로부터 이미지를 만들었다.(워홀 168) 그는 또한 지미 카터(워홀 167)와 믹 재거, 그리고 뉴욕시의 술집과 부두로부터 흑인과 라틴 화려한 의상의 여왕들도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보석과 포도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그는 두개골을 실크스크린(워홀 169)으로 떴고 자화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영화제작자로서의 워홀
1965년 5월 그의 꽃그림들이 파리의 전시회에서 소개될 때 워홀은 회화에서 은퇴하고 영화제작에 온전히 헌신할 것임을 선언했다. 16mm 볼렉스 카메라를 구입한 뒤 그의 최초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의 영화는 음란성으로 주목을 받았다.(워홀 150) F.B.I.는 음란성을 탐색하기 위해 요원을 보내 워홀의 영화를 관찰하도록 지시했다. 요원은 본부에 보고했다.
“워홀의 영화에 출연한 모든 남자는 동성애자들로 보입니다. ... 많은 장면이 대마초, 혹은 마약을 복용하거나 술을 마신 뒤에 연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 카우보이들이 여인의 집으로 몰려가 여인의 옷을 벗기고 성적으로 희롱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여인의 음부가 관람자가 볼 수 있도록 드러납니다. 사내와 여인의 행위가 매우 교묘하게 나타나는데 카메라가 행위 전부를 노출시키는 건 아닙니다.”

워홀은 포르노의 방법들에서 일반적으로 예술적 경제를 위한 패러다임을 보았다. 그가 1960년대 말에 영화제작을 근본적으로 중단했을지라도 남은 생애에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으며, 그의 영화들은 미국 예술사에서 그의 캔버스들만큼이나 중요했다. 그가 영화보급을 중단한 건 1972년이었다. 그의 영화는 한 세대 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현재 그것들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영화제작자로서의 성취가 수프와 명사들의 화가로서의 워홀에 대한 제한된 관념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미술의 종말을 고지한 철학자로서의 워홀
워홀은 철학자였다. 명백한 자아의식이나 억제 없이 그는 끊임없이 생산했다. 예술이 용이하기를 바랐고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더 많이 만들 수 있으며 더 신속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더욱 접근하기 쉬우며, 대중적이고, 그리고 숨김없는 행동의 영역이 되는 구조물을 만드는 걸 용이하게 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워홀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오류다. 그는 그 자신의 사례, 제스처와 희극적 행동, 영웅적 삶을 남겼다. 
 

1964년 봄에 워홀은 그의 가장 대담한 조각들을 선보였는데, 그것들은 나무상자에 실크스크린을 부착한 것으로 식품점 상자들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각, 그리고 그 밖의 생산품들을 닮게 한 것들이었다.(워홀 123) 그의 만화속의 영웅들과 같이 그 상자들은 거대한 크기, 가장 큰 것이라는 남자다움을 풍자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것들은 단지 상자들에 불과하며 기성품을 복제한 것이다. 그에 의해서 미술품과 미술품이 아닌 것이 우리의 눈으로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미술이 실재의 모방이라는 서양의 오래된 관념이 그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이는 서양미술의 종말을 고지하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워홀은 1966년 4월 일련의 은색 구름들을 선보임으로써 미술의 종말을 논리적인 결론으로까지 밀고 나갔다. 헬륨으로 팽창한, 공중에 떠도는 폴리에스테르 필름 베게들. 그는 레오 카스텔리 화랑의 전시장 한 곳을 은색 구름들로 채웠고, 인접한 전시장에는 벽지를 발랐다. 노란색 배경에 동일한 핑크색 암소를 반복한 실크스크린 벽지를 발랐다.(워홀 143, 144)

금년은 워홀이 타계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서양미술계는 그에 의해서 종말론에 휩싸였다. 그는 모든 양식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양식으로 우열을 가렸지만 오늘날 양식은 미술품을 제작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고 그 자체 질적 요소를 결여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복제도 창작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술품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만 마련되면 무엇이라도 미술품이 될 수 있다. 또한 워홀은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예술가가 되기 위한 특별한 훈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 중심에 앤디 워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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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다음은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컨템퍼러리 아트가 표류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초부터이다.

아티스트들이 자신들의 신분이 특정한 훈련을 통해 고유한 영역을 점하고 있는 전문가라는 인식을 부정했을 때, 혹은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 할 훈련이란 없음을 알고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부터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런 자의식은 1960년대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 초는 외적으로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있었는데,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고,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밥 딜런의 저항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은밀히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에 반발했으며 이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에 대한 반발이 미국과 영국에서 팝 아트를, 유럽에서 누보레알리슴을 생산했는데, 명칭만 다를 뿐 유사한 이런 운동의 배경은 해방이었다.
이 운동의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로서 그는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누상자인 브릴로 상자를 모사하여 1964년 봄에 화랑에서 선보였다.
실재와 외양에 있어 진부한 비누상자에 불과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미술품으로 바라보았으며, 이는 미술품이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입증했다.
해방과 관련하여 1964년에 괄목할 사건이 많이 발발했으며, 비틀즈가 에드 설리반 쇼를 통해 미국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미국 전역과 곧 이어 전 세계를 휩쓴 해방정신의 상징이자 촉매가 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미술품은 더 이상 실재의 그림자나 실재의 모방이 아니라 실재 자체라는 인식이 1960년대에 보편화되었고, 아티스트들은 더 이상 소수의 엘리트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진부한 매체들을 선호했다.
그리고 대중이 미술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복제를 통해 다량 생산했다.
그들은 모든 매체를 받아들였고, 버려진 산업폐기물과 쓰레기소각장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물질들로 작품을 제작했으며, 자신의 몸을 재료로 사용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배설물까지도 미술품의 재료로 사용했다.
우리가 현재 미술관과 화랑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작품 형식이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고도의 자의식 운동인 팝 아트와 누보레알리슴을 시작으로 1970년대 개념이 미술가들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해방의 무드가 다양한 장르들을 생산해냈는데, 아상블라주와 정크 아트, 펑크 아트, 설치, 키치, 시추에이션 아트, 비디오 아트, 해프닝, 퍼포먼스 아트, 바디 아트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성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컨템퍼러리 아트는 1960년대에 생산된 장르들의 혼재 현상에 불과하며, 수준에 있어 1960년대에 머물고 있다.
그 시대의 다양한 아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컨템퍼러리 아트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아울러서 질이 매우 저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념의 해체를 시도하는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띠지만 이 역시 1970년대의 개념미술에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브제와 개체들이 미술품 내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 생산하고, 반복과 복제가 의미의 대상, 혹은 기호를 소멸시킨다.
팝 아트의 전형인 키치 아티스트들은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에 굶주린 대중, 혹은 감상적 자기 향락을 좋아하는 대중을 위해 문화의 질이 낮고 인습적인 가상 실재를 그대로 소재로 이용하고 있다.
키치는 복제를 통해 늘어나고 있는데, 복제를 통한 키치의 생산은 워홀에 의해 이미 극단적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그는 1963년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전시회에 대응하여 이 유명한 작품을 서른 번이나 복제하면서 ‘기술복제시대의 미술작품’을 양산했다.
실크스크린 인쇄방식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키치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으로 각광받았다.
그의 복제화는 원화와의 관계에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미술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한 당시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했다.
워홀은 “서른 개가 하나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복제를 하게 되면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는가 하는 것인데, 라스코 동굴화의 복제화에서 사람들이 원화와 같은 체험을 하는 데서 복제에서도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입증되었다.
복제가 용인되자 만화, 광고, 낭만을 특징으로 하는 키치 아트가 등장했으며, 이는 팝 아트가 통속적인 회화세계를 다루고 원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는 데서 더 나간 것이다.
예술에서의 엘리트주의를 철저히 배척한 제프 쿤스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만을 제작한다.
<진부함의 도래>는 어린 천사가 목에 리본을 두른 분홍색 암퇘지를 예술로 끌어들이는 장면이다.
쿤스는 진부한 것, 즉 키치를 예술로 끌어들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하지만 내 마음에 들어” 하는 반응을 유도한다.
유머와 아이러니는 키치 아트의 생명이다.
그만큼 대중이 키치를 사랑하고 애호하기 때문에 이런 예술이 생겨난 것이다.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좋은 취향이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키치를 진지한 미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촌티패션, 찢어진 청바지, 배꼽티, 복고열풍을 통한 값싼 재료로 모조한 옷들이 키치에 속한다.
음악에서의 웅얼거림, 무의미한 소리가 키치에 속한다.
사람들은 본래 금지되었던 것, 감동적인 것,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알게 된 것이다.
키치 아트가 팝 아트의 변종으로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성행하는 미술은 1960년대 이미 생산된 장르들의 혼재에 불과하므로 컨템퍼러리 아트는 거의 반세기 동안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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