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다음의 글은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기고한 것입니다.
칸딘스키 vs 클레
동시대를 살면서 우정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 위대한 두 인물을 우리는 한 쌍으로 기억하는데,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와 파울 클레(1879-1940)도 하나의 예이다.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두 사람의 업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칸딘스키는 인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래 최초로 완전추상에 도달한 화가이며, 클레는 음악에 비해 한참 뒤져있던 회화를 음악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성과를 이룩한 화가이다.
이런 엄청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화가는 미술사를 통 털어서 그리 많지 않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00년 10월 뮌헨에서였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법학도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칸딘스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뮌헨으로 와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데생 화가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 들어갔을 때 클레가 그곳에서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클레가 화가가 되기 위해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 들어갔을 때는 21살로 34살의 칸딘스키와 친구가 되기에는 칸딘스키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클레가 칸딘스키와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1911년 늦가을부터였다.
그 후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정을 나누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최초로 추상화를 그린 칸딘스키
칸딘스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의 작품을 보고서부터였다.
그것은 모네가 건초더미를 화면에 크게 그린 것으로 건초더미는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분절된 색채의 형상으로 형태만이 건초더미인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그 작품을 보고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재현이 아니더라도 색채와 형태만으로도 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었다.
그에 의해서 자연의 사물들은 눈에 덮이듯 색채 속으로 감춰지게 되었으며 그의 독특한 교향악적 역동적 색채는 그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그가 사물을 유추할 만한 근거를 완전히 없애고 다만 색채 덩이로만 그린 소위 말하는 완전추상화를 그리기 한 해 전인 1909년에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보면 그가 자연의 형태들을 어떻게 추상화하려고 했는지 그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뮌헨 근교 무르나우의 풍경들을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들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우선 풍경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소화하기 위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연의 색이 아닌 색 자체가 지닌 상징성을 이용하여 역동성과 리듬을 부여했음을 본다.
달리 말하면 풍경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 색채를 사용하여 자연의 역동성과 리듬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들은 추상 그리고 표현주의 모두로 분류할 수 있다.
실재하는 모습을 단순화했기 때문에 추상인 것이고, 실재하는 색을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색으로 자신의 느낌을 나타냈기 때문에 표현주의가 되는 것이다.
칸딘스키의 ‘인상’ 연작 중 <인상 3-콘서트>를 예로 들면, 그는 인상을 “외부 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으로 규정했다.
이 작품은 그가 쇤베르크의 콘서트에 다녀온 뒤 그린 것으로 그가 말하는 인상은 시각적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 인상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특히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형태와 색을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소리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노란색과 검은색이 두드러지도록 흰색으로 보완했다.
그는 청각적 인상과 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검은색을 칠한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를 상징한 것이며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 앉아 있는 청중이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양편의 흰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가장 인상을 주는 요소는 노란색으로 상징되는 쇤베르크의 소리가 홀을 가득 매운 것이다.
<인상 3-콘서트>는 회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공감각을 표현한 것으로 공감각은 20세기 초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칸딘스키는 색과 각 악기의 소리를 연관시키면서도 회화와 음악에는 자체의 특정한 자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림을 잘라 재구성한 클레
회화와 음악의 불가분의 관계는 클레의 대부분 작품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클레는 음악의 요람에서 성장했는데, 증조부는 오르간 연주자였고, 아버지는 대학에서 음악과 성악을 가르쳤으며, 어머니는 성악 교육을 받은 음악교사였다.
7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클레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고민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훗날 그는 “음악에서 이미 18세기 말에 실행된 것이 미술에서는 고작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면서 자신이 미술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클레의 작품에는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되어 있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게 회화는 단지 자연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와 동일한 입장이었다.
칸딘스키는 40살이 되어서야 자신의 회화를 발견하기 시작했고, 클레는 35살 때 친구와 함께 튀니지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회화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늦게 재능을 나타냈다.
<생제르맹의 정원, 튀니지 근처 유럽의 식민지>를 보면 풍경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소화하기 위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연의 색이 아닌 색 자체가 지닌 상징성을 이용하여 역동성과 리듬을 부여했음을 본다.
다만 칸딘스키의 작품과는 달리 우리가 감성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가 수채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감의 고유성이 느낌을 다르게 표현해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가 감성의 전달을 위해 다른 매체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추상의 선구자들인 들로네, 말레비치, 몬드리안의 예를 보더라도 기하학적 구성이 추상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알 수 있으며, 색의 배열은 필수이다.
회화에서의 역동성과 리듬이란 색 배열의 효과를 말한다.
색의 강렬함으로 역동성을 농도가 다른 유사한 색들의 병렬로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칸딘스키와 클레의 작품을 각 악기들이 연주하는 교향악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색과 색의 혼합이 공명한 소리를 낸다고 상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클레의 다음 단계는 구성이다.
문장에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듯이 배열을 달리함으로써 뉘앙스를 창출하는 것이다.
<수고양이의 영역>은 클레가 자신이 기르던 수고양이를 소재로 구성한 작품으로 위와 아래의 부분을 재구성함으로써 뉘앙스를 어떻게 창출했는지 알 수 있다.
클레는 그림을 세로로 잘라서 오른쪽과 왼쪽을 바꿔서 재구성하기도 했는데, 동일한 모티프의 작품을 구성만 달리해서도 시각적 변화가 일어남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튀니지 여행에서 받은 감동을 되새겨 그린 <사원 정원>은 그림을 삼등분하여 가운데 부분을 왼편에 구성한 작품이다.
계단을 올라 문을 통해 들어가면 여러 정원으로 갈 수 있는 장면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에 높은 담 밖으로 야자수가 보이고 둥근 지붕을 한 건물들이 여러 채 보인다.
그가 그림을 삼등분한 것은 건물들이 너무 대칭적이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바우하우스의 교사가 된 클레와 칸딘스키
칸딘스키와 클레의 우정은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교사로 재직하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바이마르에 세운 바우하우스Bauhaus는 ‘집을 짓다’라는 의미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킨 말이다.
그로피우스는 공예의 지위를 순수미술이 누린 것만큼 상승시키기 위해 이 학교를 설립했으며, 유명한 화가, 조각가, 공예가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모든 기술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협동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예술의 통합을 꾀했다.
클레는 1921년 1월 10일부터 실기를 담당한 마이스터들과 함께 미술교육을 이끌었다.
10년 동안 바우하우스에서 조형 분야의 기초 이론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선, 형태, 색채 등 회화적 기능과 효과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형태를 만드는 것을 건축의 기본 원리에 비유하여 건물이 건설되는 것과 같이 회화도 형태가 화면 속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세워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했다.
건축가와 마찬가지로 화가는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해야” 하며 마지막 단계에서 평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형태들을 주의 깊게 맞춰야 한다고 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제 색을 제자리에 칠하는 것이다”라고 한 클레의 말은 바우하우스의 격언이 되었다.
클레는 1922년 6월 바우하우스에 교사로 초빙되어온 칸딘스키와 함께 스테인드글라스와 벽화를 담당했다.
바우하우스에는 언제나 1백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14년의 역사 동안 전체 등록 학생은 약 1,250명이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되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이며, 디자인과 산업기술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차별했던 이전의 위계질서를 붕괴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바우하우스는 칸딘스키와 클레에 의해서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는 동안 제작한 작품은 아주 많은 수채화 외에도 유화만 3백 점에 이른다.
바우하우스에서 칸딘스키는 ‘알터 마이스터(노 선생)’로 불렸는데, 교사들 가운데 최고 연장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성이 따뜻하며, 그로피우스의 보좌역을 잘 해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에는 기하 형태가 더욱 많아졌는데, 1차 세계대전을 피해 러시아에 머물면서 러시아 구성주의 화가들에게 받은 영향이었다.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는 동안 클레는 종종 동물들을 캐리커처로 익살스럽게 묘사했으며,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에서나 볼 만한 만화 같은 그림들이었다.
그는 두 개의 상반된 화살표로 갈팡질팡하는 광대의 절망적인 모습을 상징하기도 했는데, 개인의 본능적 충동과 자아를 감시하는 무의식적 양심 사이의 갈등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또한 화살표를 성적 욕망과 공격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음악은 클레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그는 거의 매일 한 시간씩 음악을 연주했다.
1906년 결혼한 후에는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함께 집에서 꾸준히 연주했으며, 친구들의 모임에서 그리고 바우하우스에서 종종 연주했다.
그가 좋아한 작곡가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이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회화에서 종종 모티프로 나타났다.
칸딘스키와 클레 모두 음악의 자율성을 자신들의 추상화에 적용했다.
도판
칸딘스키 사진
클레 사진
칸딘스키 50 칸딘스키, <무르나우 자연 습작 1>, 1909, 두꺼운 종이에 유채, 31.5-44.7cm.
칸딘스키 51 칸딘스키, <무르나우 자연 습작 3>, 1909, 두꺼운 종이에 유채, 32.9-44.6cm.
칸딘스키 181 칸딘스키, <무제(최초의 추상 수채화)>, 1910, 종이에 연필, 수채, 잉크, 49.6-64.8cm. 작품에 칸딘스키가 제작년도를 1910년으로 적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1913년 이전에 이런 완전추상을 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1910년에 그린 것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은 그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완전추상에 도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칸딘스키 5 칸딘스키, <인상 3-콘서트>, 1911, No. 116, 캔버스에 유채, 77.5-100cm.
칸딘스키 86 클레, <고통당하는 피아노 연주자-풍자: 모던 음악에 대한 캐리커처>, 1909
칸딘스키 197 클레, <생제르맹의 정원, 튀니지 근처 유럽의 식민지>, 1914, 수채화, 21.6-27.3cm.
칸딘스키 224 클레, <수고양이의 영역>, 1919/49, 수채, 과슈, 유채, 아래 그림은 8.8-14.3cm이고, 위 그림은 12.4-14cm이다. 49란 1919년에 49번째로 그렸다는 뜻이다.
칸딘스키 225 클레, <수고양이의 영역>, 위아래 그림을 재구성함.
칸딘스키 10, 클레, <사원 정원>, 1920/185, 과슈, 검정 잉크, 18.4-26.7cm.
칸딘스키 11, 클레, <사원 정원>, 1920/185, 원래 그림의 중앙부분을 왼편에 붙인 것이다.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기고한 것입니다.
칸딘스키 vs 클레
동시대를 살면서 우정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 위대한 두 인물을 우리는 한 쌍으로 기억하는데,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와 파울 클레(1879-1940)도 하나의 예이다.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두 사람의 업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칸딘스키는 인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래 최초로 완전추상에 도달한 화가이며, 클레는 음악에 비해 한참 뒤져있던 회화를 음악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성과를 이룩한 화가이다.
이런 엄청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화가는 미술사를 통 털어서 그리 많지 않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00년 10월 뮌헨에서였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법학도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칸딘스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뮌헨으로 와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데생 화가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 들어갔을 때 클레가 그곳에서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클레가 화가가 되기 위해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 들어갔을 때는 21살로 34살의 칸딘스키와 친구가 되기에는 칸딘스키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클레가 칸딘스키와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1911년 늦가을부터였다.
그 후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정을 나누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최초로 추상화를 그린 칸딘스키
칸딘스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의 작품을 보고서부터였다.
그것은 모네가 건초더미를 화면에 크게 그린 것으로 건초더미는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분절된 색채의 형상으로 형태만이 건초더미인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그 작품을 보고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재현이 아니더라도 색채와 형태만으로도 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었다.
그에 의해서 자연의 사물들은 눈에 덮이듯 색채 속으로 감춰지게 되었으며 그의 독특한 교향악적 역동적 색채는 그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그가 사물을 유추할 만한 근거를 완전히 없애고 다만 색채 덩이로만 그린 소위 말하는 완전추상화를 그리기 한 해 전인 1909년에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보면 그가 자연의 형태들을 어떻게 추상화하려고 했는지 그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뮌헨 근교 무르나우의 풍경들을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들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우선 풍경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소화하기 위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연의 색이 아닌 색 자체가 지닌 상징성을 이용하여 역동성과 리듬을 부여했음을 본다.
달리 말하면 풍경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 색채를 사용하여 자연의 역동성과 리듬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들은 추상 그리고 표현주의 모두로 분류할 수 있다.
실재하는 모습을 단순화했기 때문에 추상인 것이고, 실재하는 색을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색으로 자신의 느낌을 나타냈기 때문에 표현주의가 되는 것이다.
칸딘스키의 ‘인상’ 연작 중 <인상 3-콘서트>를 예로 들면, 그는 인상을 “외부 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으로 규정했다.
이 작품은 그가 쇤베르크의 콘서트에 다녀온 뒤 그린 것으로 그가 말하는 인상은 시각적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 인상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특히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형태와 색을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소리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노란색과 검은색이 두드러지도록 흰색으로 보완했다.
그는 청각적 인상과 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검은색을 칠한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를 상징한 것이며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 앉아 있는 청중이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양편의 흰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가장 인상을 주는 요소는 노란색으로 상징되는 쇤베르크의 소리가 홀을 가득 매운 것이다.
<인상 3-콘서트>는 회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공감각을 표현한 것으로 공감각은 20세기 초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칸딘스키는 색과 각 악기의 소리를 연관시키면서도 회화와 음악에는 자체의 특정한 자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림을 잘라 재구성한 클레
회화와 음악의 불가분의 관계는 클레의 대부분 작품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클레는 음악의 요람에서 성장했는데, 증조부는 오르간 연주자였고, 아버지는 대학에서 음악과 성악을 가르쳤으며, 어머니는 성악 교육을 받은 음악교사였다.
7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클레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고민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훗날 그는 “음악에서 이미 18세기 말에 실행된 것이 미술에서는 고작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면서 자신이 미술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클레의 작품에는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되어 있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게 회화는 단지 자연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와 동일한 입장이었다.
칸딘스키는 40살이 되어서야 자신의 회화를 발견하기 시작했고, 클레는 35살 때 친구와 함께 튀니지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회화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늦게 재능을 나타냈다.
<생제르맹의 정원, 튀니지 근처 유럽의 식민지>를 보면 풍경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소화하기 위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연의 색이 아닌 색 자체가 지닌 상징성을 이용하여 역동성과 리듬을 부여했음을 본다.
다만 칸딘스키의 작품과는 달리 우리가 감성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가 수채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감의 고유성이 느낌을 다르게 표현해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가 감성의 전달을 위해 다른 매체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추상의 선구자들인 들로네, 말레비치, 몬드리안의 예를 보더라도 기하학적 구성이 추상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알 수 있으며, 색의 배열은 필수이다.
회화에서의 역동성과 리듬이란 색 배열의 효과를 말한다.
색의 강렬함으로 역동성을 농도가 다른 유사한 색들의 병렬로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칸딘스키와 클레의 작품을 각 악기들이 연주하는 교향악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색과 색의 혼합이 공명한 소리를 낸다고 상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클레의 다음 단계는 구성이다.
문장에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듯이 배열을 달리함으로써 뉘앙스를 창출하는 것이다.
<수고양이의 영역>은 클레가 자신이 기르던 수고양이를 소재로 구성한 작품으로 위와 아래의 부분을 재구성함으로써 뉘앙스를 어떻게 창출했는지 알 수 있다.
클레는 그림을 세로로 잘라서 오른쪽과 왼쪽을 바꿔서 재구성하기도 했는데, 동일한 모티프의 작품을 구성만 달리해서도 시각적 변화가 일어남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튀니지 여행에서 받은 감동을 되새겨 그린 <사원 정원>은 그림을 삼등분하여 가운데 부분을 왼편에 구성한 작품이다.
계단을 올라 문을 통해 들어가면 여러 정원으로 갈 수 있는 장면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에 높은 담 밖으로 야자수가 보이고 둥근 지붕을 한 건물들이 여러 채 보인다.
그가 그림을 삼등분한 것은 건물들이 너무 대칭적이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바우하우스의 교사가 된 클레와 칸딘스키
칸딘스키와 클레의 우정은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교사로 재직하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바이마르에 세운 바우하우스Bauhaus는 ‘집을 짓다’라는 의미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킨 말이다.
그로피우스는 공예의 지위를 순수미술이 누린 것만큼 상승시키기 위해 이 학교를 설립했으며, 유명한 화가, 조각가, 공예가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모든 기술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협동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예술의 통합을 꾀했다.
클레는 1921년 1월 10일부터 실기를 담당한 마이스터들과 함께 미술교육을 이끌었다.
10년 동안 바우하우스에서 조형 분야의 기초 이론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선, 형태, 색채 등 회화적 기능과 효과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형태를 만드는 것을 건축의 기본 원리에 비유하여 건물이 건설되는 것과 같이 회화도 형태가 화면 속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세워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했다.
건축가와 마찬가지로 화가는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해야” 하며 마지막 단계에서 평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형태들을 주의 깊게 맞춰야 한다고 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제 색을 제자리에 칠하는 것이다”라고 한 클레의 말은 바우하우스의 격언이 되었다.
클레는 1922년 6월 바우하우스에 교사로 초빙되어온 칸딘스키와 함께 스테인드글라스와 벽화를 담당했다.
바우하우스에는 언제나 1백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14년의 역사 동안 전체 등록 학생은 약 1,250명이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되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이며, 디자인과 산업기술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차별했던 이전의 위계질서를 붕괴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바우하우스는 칸딘스키와 클레에 의해서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는 동안 제작한 작품은 아주 많은 수채화 외에도 유화만 3백 점에 이른다.
바우하우스에서 칸딘스키는 ‘알터 마이스터(노 선생)’로 불렸는데, 교사들 가운데 최고 연장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성이 따뜻하며, 그로피우스의 보좌역을 잘 해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에는 기하 형태가 더욱 많아졌는데, 1차 세계대전을 피해 러시아에 머물면서 러시아 구성주의 화가들에게 받은 영향이었다.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는 동안 클레는 종종 동물들을 캐리커처로 익살스럽게 묘사했으며,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에서나 볼 만한 만화 같은 그림들이었다.
그는 두 개의 상반된 화살표로 갈팡질팡하는 광대의 절망적인 모습을 상징하기도 했는데, 개인의 본능적 충동과 자아를 감시하는 무의식적 양심 사이의 갈등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또한 화살표를 성적 욕망과 공격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음악은 클레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그는 거의 매일 한 시간씩 음악을 연주했다.
1906년 결혼한 후에는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함께 집에서 꾸준히 연주했으며, 친구들의 모임에서 그리고 바우하우스에서 종종 연주했다.
그가 좋아한 작곡가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이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회화에서 종종 모티프로 나타났다.
칸딘스키와 클레 모두 음악의 자율성을 자신들의 추상화에 적용했다.
도판
칸딘스키 사진
클레 사진
칸딘스키 50 칸딘스키, <무르나우 자연 습작 1>, 1909, 두꺼운 종이에 유채, 31.5-44.7cm.
칸딘스키 51 칸딘스키, <무르나우 자연 습작 3>, 1909, 두꺼운 종이에 유채, 32.9-44.6cm.
칸딘스키 181 칸딘스키, <무제(최초의 추상 수채화)>, 1910, 종이에 연필, 수채, 잉크, 49.6-64.8cm. 작품에 칸딘스키가 제작년도를 1910년으로 적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1913년 이전에 이런 완전추상을 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1910년에 그린 것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은 그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완전추상에 도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칸딘스키 5 칸딘스키, <인상 3-콘서트>, 1911, No. 116, 캔버스에 유채, 77.5-100cm.
칸딘스키 86 클레, <고통당하는 피아노 연주자-풍자: 모던 음악에 대한 캐리커처>, 1909
칸딘스키 197 클레, <생제르맹의 정원, 튀니지 근처 유럽의 식민지>, 1914, 수채화, 21.6-27.3cm.
칸딘스키 224 클레, <수고양이의 영역>, 1919/49, 수채, 과슈, 유채, 아래 그림은 8.8-14.3cm이고, 위 그림은 12.4-14cm이다. 49란 1919년에 49번째로 그렸다는 뜻이다.
칸딘스키 225 클레, <수고양이의 영역>, 위아래 그림을 재구성함.
칸딘스키 10, 클레, <사원 정원>, 1920/185, 과슈, 검정 잉크, 18.4-26.7cm.
칸딘스키 11, 클레, <사원 정원>, 1920/185, 원래 그림의 중앙부분을 왼편에 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