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6)



키치Kitsch
키치는 한마디로 전위예술의 정반대인 후방예술을 말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1939년 『파티잰 리뷰 Partisan Review』지에 기고한 논문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에서 키치를 아방가르드의 정반대인 ‘모방의 모방’, 혹은 대중예술로 보았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소비문화가 만연하자 예술도 대중의 상품이 되었다.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에 굶주린 대중, 혹은 감상적 자기 향락을 좋아하는 대중을 위한 것으로 키치는 순수 문화의 질이 낮고 인습적인 시뮬라크라simulacra(가상 실재)를 그대로 소재로 이용한다.

키치의 선구자 중 한 사람 한스 라이만은 일찍이 1924년에 감미로운 것과 악마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에로티시즘의 묘사와 관련하여 “정욕이, 그러니까 목적이 그림에 거짓을 불어넣고, 이 거짓이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고 했다.
에로티시즘은 결국 누드를 묘사하고 즐기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에 굶주린 대중이 도덕적 정념과 에로틱한 욕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원하는 데서 키치의 양면성을 찾을 수 있다.
키치는 독일어로 ‘값싸게 하다’, ‘감상적으로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비롯한 것으로 ‘천박한 쓰레기’를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키치 대신 ‘싸구려 예술 Schlock art’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슐럭schlock은 결점이 있는 가짜, 싸구려의 조잡한 물건이란 뜻의 유태인의 이디시어에서 유래했다.

19세기 말의 인기 있는 회화는 하렘 장면이나 노예시장 장면이었다.
노예시장에서는 하렘의 백인 여자노예, 즉 오달리스크를 진열하여 매매했다.
이런 모티프는 여인을 누드로 묘사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며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말하자면 값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그림을 요구했으므로 화가들이 그들을 위해 그리게 된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에서나 볼 수 있는 경박하고 음란한 성격이 악마적으로 유혹하는 요부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를 지오 H. 에드워즈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깨끗한 피부에 빨간 머리를 한 미녀가 북극곰 두 마리 사이에 있는 그림이다.
그녀가 앉아 있는지 허공에 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미숙한 작품이다.
미숙함은 그녀의 양팔의 길이가 다르고, 다리의 길이가 실재보다 긴 데서도 나타난다.
화가는 원근법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드를 그리는 데만 관심을 두고 신비한 에로티시즘은 고려하지 않았다.

고대 건물이나 폐허는 감상적인 작품의 모티프로 적당하다.
폐허는 낭만주의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모티프였는데, 신비스러운 것, 과거의 이야기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폐허는 키치적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어 하는 수요를 충족시킨다.
폐허는 고대의 아름다운 것의 잔해인데, 사람들은 폐허 자체를 고대의 아름다움으로 바라본다.
부자 중에 폐허를 지어서 풍경을 미화시키고 부지를 더욱 흥미로운 장소로 만든 사람도 있다.
철학자 귄터 안더스는 이런 감정을 “열광적인 비애”라고 일컫는다.
열광적인 비애가 사람들로 하여금 산업적 폐기물을 아름다운 재료로 바라보게 만들며, 새것인데도 낡아 보이는 건물을 짓고, 일부러 허물어져가는 감상적인 분위를 불러일으키는 건물을 짓게 한다.
화가들은 폐허의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폐허풍경을 묘사하면서 그림에 아름다움의 기능을 제공한다.
한스 차츠카의 작품에는 폐허의 아늑한 분위기와 함께 묘령의 미인이 환상의 나래를 펼치는 모습이 있다.
들장미가 치부를 가리는 무화과 잎 역할을 하면서, 화가가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은 면을 장식한다.
음울한 폐허와 창백한 소녀 사이의 강렬한 명암대조가 작품에 감상적 요소가 된다.
그림은 보기에 따라서 폐허가 두드러지거나 소녀가 두드러진다.
장미와 머리카락이 서로 얽혀있고, 어스레한 벽은 잠든 소녀 및 무성한 장미와 결합되어 작품이 신비롭게 보인다.

종교적 이미지에 키치가 도입되면 신앙심이 감상으로 바뀌게 된다.
루르드 수녀원의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의 환상을 토대로 곱슬머리에 불그스레한 입술, 육감적 표정으로 그려진 <자비로운 그리스도>는 감동적 순간의 진지하고 깊은 감정을 진부하고 감상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이 그림은 그 앞에 있는 교황의 사진과 함께 2003년 10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즉위 25주년 기념식에서 발표되었다.
신, 성모 마리아, 예수 등을 플라스틱 이미지로 침대 탁자의 장식품으로 만들면 키치가 된다.
성물업자가 대량생산한 성화들에서는 깊은 종교적 감정이 진부하고 공허한 상투적인 표현으로 바뀐다.

키치는 복제를 통해 늘어난다.
광고 및 디자인에 나타나는 유명 미술작품이 그런 경우다.
라파엘로의 <시스틴의 마돈나>에 나오는 천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대표적이다.
1994년 이탈리아의 리치오네에서 열린 ‘예술과 담배’ 전시회에 F. 스피넬리는 천사들이 흡연하는 장면을 소개하면서 “흡연은 정말 유행이 지났는가?” 하고 물었다.
<최후의 만찬>을 100% 순면으로 만들면 키치가 된다.
사람들은 트럼프카드에서 <모나리자>를 보고 놀랄 것이다.

복제를 통한 키치의 생산은 앤디 워홀에 의해서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워홀은 1963년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전시회에 대응하여 이 유명한 작품을 서른 번이나 복제하면서 ‘기술복제시대의 미술작품’을 양산했다.
그가 실크스크린 인쇄방식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키치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으로 각광받았다.
그의 복제화는 원화와의 관계에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미술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한 당시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했다.
워홀은 “서른 개가 하나보다 낫다”라고 했지만, 보수적 비평가들은 “공허하고 초점을 잃은 그의 작품은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의식의 증거”라고 비판했다.
문제는 복제를 하게 되면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는가 하는 것이다.
미술사학자 게르노트 뵈메는 라스코 동굴화와 같이 보호를 위해 더 이상 전시될 수 없는 작품의 복제화에서 원화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음을 예로 들어 복제에서도 원화가 지닌 예술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면서 복제를 통해 통속화된 지 이미 오래이므로 워홀이 서른 번 복제했다고 해서 비난할 일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복제가 용인되자 만화, 광고, 낭만을 특징으로 하는 키치아트가 등장했다.
팝아트가 통속적인 회화세계를 다루고 원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는 데서 더 나아간 것이 키치아트이다.
제프 쿤스는 워홀이 멈춘 데서 출발하여 원화를 남용하지 않고 자신을 주제로 삼았다.
그는 ‘천국에서 만든 Made in Heaven’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일로나가 위에서>이다.
쿤스는 아내인 이탈리아 포르노 배우 치치올리나와 함께 자극적인 체위로 포즈를 취한 장면을 공개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장면이다.
예술에서의 엘리트주의를 철저히 배척한 쿤스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만을 제작한다.
<진부함의 도래>는 어린 천사가 목에 리본을 두른 분홍색 암퇘지를 예술로 끌어들이는 장면이다.
쿤스는 진부한 것, 즉 키치를 예술로 끌어들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하지만 내 마음에 들어” 하는 반응을 유도한다.

나쁜 취향으로 여겨졌던 키치를 애용하는 것이 키치아트이다.
유머와 아이러니가 키치아트의 생명이다.
그만큼 대중이 키치를 사랑하고 애호하기 때문에 이런 예술이 생겨난 것이다.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좋은 취향이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사람들이 키치를 진지한 미적 현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촌티패션, 찢어진 청바지, 배꼽티, 복고열풍을 통해서 값싼 재료로 모조한 옷들은 키치에 속한다.
음악에서의 웅얼거림, 무의미한 소리가 키치에 속한다.
사람들은 본래 금지되었던 것, 감동적인 것,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알게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내재한 키치적 성향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쁜 취향을 즐기던 사람이 떳떳해지고 그런 사람들이 일체감을 갖게 한 것이 키치아트의 성공이다.

키치는 경제상황이 나쁜 시기에 더 융성한다.
키치는 예술인 체 위장하기 때문에 키치를 키치로 식별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
도자기로 만든 섬세한 작은 인형 대부분이 키치이다.
키치는 예술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약간 아름답게 만들고 현실의 스트레스를 누그러뜨리려고 한다.
키치는 산업적 대중문화의 일부이다.
거의 차이가 없는 모티프를 늘 되풀이해서 그린 그림이 키치이다.
그런 그림이 과거에 이발소에 주로 걸려 있었으므로 ‘이발소 그림’이란 말이 생겼는데, 키치를 말한다.
요즘 중국 화가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대량으로 제작하는 원화의 서툰 복제화가 키치이다.
키치는 저렴하기 때문에 장식용으로 널리 애용된다.
상아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성모상, 석고로 만든 그리스도상, 주물로 만든 성물들이 키치이다.
성모상의 볼에 흐르는 눈물은 키치의 특징이다.
거기에 조개를 붙이고 반짝이는 값싼 플라스틱 꽃을 장식하면 최악의 키치가 된다.
그러나 루브르 박물관에서 파는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 복제품은 키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미술품으로 귀히 여긴다.
키치이지만 아름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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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숫자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만 이름이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숫자다.
어디를 가든 주민등록 번호를 묻든가, 구좌번호를 묻던가, 등록번호를 묻는다.
그런 데 가서 이름을 말하면 웃기게 된다.
그곳 사람들은 우리의 이름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
번호를 대라고 한다.
그 번호에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자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신용불량자인지 아닌지, 전과가 있는지 없는지, 거래가 어떤지, 언제 등록했는지 등을 알고자 한다.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주민등록 번호로 바꾸겠다고 법원에 신청했는데, 거절당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름보다는 번호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앞으로 뉴스도 번호로 바뀌어야 한다.
예를 들면,
845번이 모는 버스가 중앙차선을 넘어온 727번의 택시를 피하려다 가로등을 들이받아 버스에 탔던 779번과 943번이 크게 다치고, 628번과 19번은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또는
224번이 930번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930번의 아들인 388번을 부정입학시켰다.

오늘 사우나-불가마에 갔다.
구두를 넣고 88번의 번호를 뽑아 카운터에 그 번호를 주니 새로운 번호 327번을 준다. 옷을 넣는 장의 번호이다.
사우나를 마치고 카운터에서 먹을 것을 주문하니 식당에서 133번 하고 부른다.
내가 주문한 바지락된장찌게가 다 되었으니 가져가라는 것이다.
327번의 팔찌를 찬 나는 나의 133번 찌게를 가져와 먹었다.
327번늘 돌려주고 88번을 받아 신발장을 열고 내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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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뺨을 때린 택시기사


며칠 전 강남에서 영화 관계자들로부터 저녁식사 대접을 받았다.
까만 벤츠 500을 타본 건 처음이다.
역시 나의 소나타보다 승차감이 훨씬 좋았다.
술도 한 잔 했고 해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택시를 타면 기사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 버릇이다.
집에 안녕히 가기 위해서는 기사의 상태를 파악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가다 기사가 뭐라고 혼잣말을 하길래 통화를 하는 중인가 해서 살피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혹시 정신나간 놈의 차를 타고 가는 것 아닌가 해서 그 놈을 유심히 살폈다.
강북 하이웨이에 들어서고 얼마 안 되어 그 놈이 자신의 뺨을 철석 때린다.
깜짝 놀랐다.
이거 사고나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 놈이 창문을 열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고 찬바람을 쏘더니 창문을 닫는다.
그 놈의 성질을 모르니 공연히 왜 그러느냐고 묻다가 무슨 소리를 할지 몰라 가만히 동태를 살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 놈이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리며 깜빡 존 것이다.
그제서야 그 놈의 증세가 무엇인지 파악되었다.
안전히 귀가하기 위해 나는 그 놈에게 말을 걸었다.
"졸린 모양인데, 창문을 열고 운전하세요."
"창문을 열면 추워요."
"나는 괜찮으니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우세요."
"괜찮습니다."
아니 그 놈이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놈이 졸지 않도록 이런저런 말을 계속해서 시켰다.
"피곤한 모양이지요?"
"지난 3일 동안 잔 잠을 다 합해도 10시간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이런 놈이 있나!
"그래가지고 어떻게 운전합니까?"
"괜찮습니다."
그 놈이 괜찮다고만 말한다!
그 놈이 말했다.
"아까 9시에 잠이 들었는데, 누가 깨워서 두 시간만에 일어났어요."
"날 내려주고 집으로 가서 잠을 자도록 하세요."
"집이 멀어서 갈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 놈하고 대화가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는다.
"출구가 곧 나올 터이니 오른쪽으로 가세요?"
"나가는 곳이 어딘지 압니다."
그러고보니 출구가 나오려면 아직은 멀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다.
그러나 그 놈이 출구를 지나칠 것만 같아 미리 말해둔 것이다.
다행히도 그 놈이 출구로 나왔다.
이제 그 놈이 다른 차를 받아도 내가 다칠 것 같지는 않아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그 차를 오래 타고 있는 것도 마음이 안 편하고, 조금 걷다 집으로 가려고 집에서 멀찌감치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휴, 집에 무사히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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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The Great Couples 3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에드바르트 뭉크를 이해하기 전에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앙리 마티스(1869-1954)는 『화가의 노트』(1908)에서 말했다.
“나는 자연을 비굴하게 모사할 생각이 없다. 자연을 해석하여 그것을 회화의 정신에 복종시켜야 한다.”
이 말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회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마티스는 “회화는 결국 표현이다”라고 주장했다.
‘표현’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20세기 초에 들어서면 회화는 표현적이어야 한다는 공감이 이루어지게 된다.
로제 비시에르(1888-1964)는 “나의 회화는 나의 인생의 이미지이며, 나의 약점까지도 포함한 나 자신의 모두를 비추는 거울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회화는 결국 표현이다”라는 마티스의 말에 대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표현’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티스이지만 표현주의 그림을 마티스에 앞서 그린 사람은 뭉크이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1853-90), 폴 고갱(1848-1903), 제임스 앙소르(1860-1949) 등과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칭송받고 있다.

화가가 관람자를 감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든다 작품 속에 구현된 감정이나 느낌에 의해 표현성을 띠게 된다는 생각이 19세기 말 다수의 화가들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구현의 의미와 방식에 대해서는 화가들마다 달랐다.
뭉크에게 있어 구현의 의미는 그가 26살 때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나는 숨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사람, 즉 살아 있는 사람을 그릴 것이다. 사람들은 이 직업의 신성함을 이해할 것이며 교회에서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구현의 방식은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모티프를 강렬하게 다룸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동일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뭉크는 일찍부터 사회적 행동과 도덕 및 미술에 대해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자유분방한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그런 환경이 그로 하여금 인습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회화의 가장 중요한 점은 성의 문제와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인간 조건에 대한 그의 회화적 표현은 관람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강렬한 힘을 갖고 있다.
이런 호소력이 그를 노르웨이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초기 현대 회화의 발전의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가 독일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회화는 자연히 독일 표현주의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뭉크처럼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착한 화가는 드물 것이다.
그가 외부세계보다 내면세계에 집착하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경험과 불안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잃었으며 자신도 병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죽음의 가정으로 기억하고 그런 불행을 극복할 수 없었음을 고백했다.
끊임없이 죽음을 의식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의식이 그대로 회화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뭉크의 회화는 한마디로 ‘혼의 고백’이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혹은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을 고백의 형상들로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현대인의 불안이다.
뭉크의 작품에는 정신적 동요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물론 더 나아가 기억의 형태까지도 변화시키는 요소가 있다.
뭉크의 회화는 전통을 무시한 새로운 양식의 회화이며 표현이 매우 강렬해서 회화가 결국 표현임을 충분히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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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다음의 글은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기고한 것입니다.



칸딘스키 vs 클레




동시대를 살면서 우정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 위대한 두 인물을 우리는 한 쌍으로 기억하는데,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와 파울 클레(1879-1940)도 하나의 예이다.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두 사람의 업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칸딘스키는 인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래 최초로 완전추상에 도달한 화가이며, 클레는 음악에 비해 한참 뒤져있던 회화를 음악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성과를 이룩한 화가이다.
이런 엄청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화가는 미술사를 통 털어서 그리 많지 않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00년 10월 뮌헨에서였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법학도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칸딘스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뮌헨으로 와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데생 화가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 들어갔을 때 클레가 그곳에서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클레가 화가가 되기 위해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 들어갔을 때는 21살로 34살의 칸딘스키와 친구가 되기에는 칸딘스키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클레가 칸딘스키와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1911년 늦가을부터였다.
그 후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정을 나누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최초로 추상화를 그린 칸딘스키

칸딘스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의 작품을 보고서부터였다.
그것은 모네가 건초더미를 화면에 크게 그린 것으로 건초더미는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분절된 색채의 형상으로 형태만이 건초더미인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그 작품을 보고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재현이 아니더라도 색채와 형태만으로도 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었다.
그에 의해서 자연의 사물들은 눈에 덮이듯 색채 속으로 감춰지게 되었으며 그의 독특한 교향악적 역동적 색채는 그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그가 사물을 유추할 만한 근거를 완전히 없애고 다만 색채 덩이로만 그린 소위 말하는 완전추상화를 그리기 한 해 전인 1909년에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보면 그가 자연의 형태들을 어떻게 추상화하려고 했는지 그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뮌헨 근교 무르나우의 풍경들을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들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우선 풍경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소화하기 위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연의 색이 아닌 색 자체가 지닌 상징성을 이용하여 역동성과 리듬을 부여했음을 본다.
달리 말하면 풍경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 색채를 사용하여 자연의 역동성과 리듬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들은 추상 그리고 표현주의 모두로 분류할 수 있다.
실재하는 모습을 단순화했기 때문에 추상인 것이고, 실재하는 색을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색으로 자신의 느낌을 나타냈기 때문에 표현주의가 되는 것이다.


칸딘스키의 ‘인상’ 연작 중 <인상 3-콘서트>를 예로 들면, 그는 인상을 “외부 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으로 규정했다.
이 작품은 그가 쇤베르크의 콘서트에 다녀온 뒤 그린 것으로 그가 말하는 인상은 시각적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 인상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특히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형태와 색을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소리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노란색과 검은색이 두드러지도록 흰색으로 보완했다.
그는 청각적 인상과 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검은색을 칠한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를 상징한 것이며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 앉아 있는 청중이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양편의 흰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가장 인상을 주는 요소는 노란색으로 상징되는 쇤베르크의 소리가 홀을 가득 매운 것이다.
<인상 3-콘서트>는 회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공감각을 표현한 것으로 공감각은 20세기 초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칸딘스키는 색과 각 악기의 소리를 연관시키면서도 회화와 음악에는 자체의 특정한 자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림을 잘라 재구성한 클레

회화와 음악의 불가분의 관계는 클레의 대부분 작품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클레는 음악의 요람에서 성장했는데, 증조부는 오르간 연주자였고, 아버지는 대학에서 음악과 성악을 가르쳤으며, 어머니는 성악 교육을 받은 음악교사였다.
7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클레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고민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훗날 그는 “음악에서 이미 18세기 말에 실행된 것이 미술에서는 고작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면서 자신이 미술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클레의 작품에는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되어 있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게 회화는 단지 자연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와 동일한 입장이었다.


칸딘스키는 40살이 되어서야 자신의 회화를 발견하기 시작했고, 클레는 35살 때 친구와 함께 튀니지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회화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늦게 재능을 나타냈다.
<생제르맹의 정원, 튀니지 근처 유럽의 식민지>를 보면 풍경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소화하기 위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연의 색이 아닌 색 자체가 지닌 상징성을 이용하여 역동성과 리듬을 부여했음을 본다.
다만 칸딘스키의 작품과는 달리 우리가 감성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가 수채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감의 고유성이 느낌을 다르게 표현해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가 감성의 전달을 위해 다른 매체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추상의 선구자들인 들로네, 말레비치, 몬드리안의 예를 보더라도 기하학적 구성이 추상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알 수 있으며, 색의 배열은 필수이다.
회화에서의 역동성과 리듬이란 색 배열의 효과를 말한다.
색의 강렬함으로 역동성을 농도가 다른 유사한 색들의 병렬로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칸딘스키와 클레의 작품을 각 악기들이 연주하는 교향악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색과 색의 혼합이 공명한 소리를 낸다고 상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클레의 다음 단계는 구성이다.
문장에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듯이 배열을 달리함으로써 뉘앙스를 창출하는 것이다.
<수고양이의 영역>은 클레가 자신이 기르던 수고양이를 소재로 구성한 작품으로 위와 아래의 부분을 재구성함으로써 뉘앙스를 어떻게 창출했는지 알 수 있다.
클레는 그림을 세로로 잘라서 오른쪽과 왼쪽을 바꿔서 재구성하기도 했는데, 동일한 모티프의 작품을 구성만 달리해서도 시각적 변화가 일어남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튀니지 여행에서 받은 감동을 되새겨 그린 <사원 정원>은 그림을 삼등분하여 가운데 부분을 왼편에 구성한 작품이다.
계단을 올라 문을 통해 들어가면 여러 정원으로 갈 수 있는 장면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에 높은 담 밖으로 야자수가 보이고 둥근 지붕을 한 건물들이 여러 채 보인다.
그가 그림을 삼등분한 것은 건물들이 너무 대칭적이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바우하우스의 교사가 된 클레와 칸딘스키

칸딘스키와 클레의 우정은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교사로 재직하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바이마르에 세운 바우하우스Bauhaus는 ‘집을 짓다’라는 의미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킨 말이다.
그로피우스는 공예의 지위를 순수미술이 누린 것만큼 상승시키기 위해 이 학교를 설립했으며, 유명한 화가, 조각가, 공예가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모든 기술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협동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예술의 통합을 꾀했다.


클레는 1921년 1월 10일부터 실기를 담당한 마이스터들과 함께 미술교육을 이끌었다.
10년 동안 바우하우스에서 조형 분야의 기초 이론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선, 형태, 색채 등 회화적 기능과 효과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형태를 만드는 것을 건축의 기본 원리에 비유하여 건물이 건설되는 것과 같이 회화도 형태가 화면 속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세워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했다.
건축가와 마찬가지로 화가는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해야” 하며 마지막 단계에서 평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형태들을 주의 깊게 맞춰야 한다고 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제 색을 제자리에 칠하는 것이다”라고 한 클레의 말은 바우하우스의 격언이 되었다.
클레는 1922년 6월 바우하우스에 교사로 초빙되어온 칸딘스키와 함께 스테인드글라스와 벽화를 담당했다.


바우하우스에는 언제나 1백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14년의 역사 동안 전체 등록 학생은 약 1,250명이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되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이며, 디자인과 산업기술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차별했던 이전의 위계질서를 붕괴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바우하우스는 칸딘스키와 클레에 의해서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는 동안 제작한 작품은 아주 많은 수채화 외에도 유화만 3백 점에 이른다.
바우하우스에서 칸딘스키는 ‘알터 마이스터(노 선생)’로 불렸는데, 교사들 가운데 최고 연장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성이 따뜻하며, 그로피우스의 보좌역을 잘 해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에는 기하 형태가 더욱 많아졌는데, 1차 세계대전을 피해 러시아에 머물면서 러시아 구성주의 화가들에게 받은 영향이었다.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는 동안 클레는 종종 동물들을 캐리커처로 익살스럽게 묘사했으며,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에서나 볼 만한 만화 같은 그림들이었다.
그는 두 개의 상반된 화살표로 갈팡질팡하는 광대의 절망적인 모습을 상징하기도 했는데, 개인의 본능적 충동과 자아를 감시하는 무의식적 양심 사이의 갈등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또한 화살표를 성적 욕망과 공격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음악은 클레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그는 거의 매일 한 시간씩 음악을 연주했다.
1906년 결혼한 후에는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함께 집에서 꾸준히 연주했으며, 친구들의 모임에서 그리고 바우하우스에서 종종 연주했다.
그가 좋아한 작곡가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이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회화에서 종종 모티프로 나타났다.


칸딘스키와 클레 모두 음악의 자율성을 자신들의 추상화에 적용했다.



도판

칸딘스키 사진
클레 사진

칸딘스키 50 칸딘스키, <무르나우 자연 습작 1>, 1909, 두꺼운 종이에 유채, 31.5-44.7cm.
칸딘스키 51 칸딘스키, <무르나우 자연 습작 3>, 1909, 두꺼운 종이에 유채, 32.9-44.6cm.
칸딘스키 181 칸딘스키, <무제(최초의 추상 수채화)>, 1910, 종이에 연필, 수채, 잉크, 49.6-64.8cm. 작품에 칸딘스키가 제작년도를 1910년으로 적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1913년 이전에 이런 완전추상을 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1910년에 그린 것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은 그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완전추상에 도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칸딘스키 5 칸딘스키, <인상 3-콘서트>, 1911, No. 116, 캔버스에 유채, 77.5-100cm.
칸딘스키 86 클레, <고통당하는 피아노 연주자-풍자: 모던 음악에 대한 캐리커처>, 1909
칸딘스키 197 클레, <생제르맹의 정원, 튀니지 근처 유럽의 식민지>, 1914, 수채화, 21.6-27.3cm.
칸딘스키 224 클레, <수고양이의 영역>, 1919/49, 수채, 과슈, 유채, 아래 그림은 8.8-14.3cm이고, 위 그림은 12.4-14cm이다. 49란 1919년에 49번째로 그렸다는 뜻이다.
칸딘스키 225 클레, <수고양이의 영역>, 위아래 그림을 재구성함.
칸딘스키 10, 클레, <사원 정원>, 1920/185, 과슈, 검정 잉크, 18.4-26.7cm.
칸딘스키 11, 클레, <사원 정원>, 1920/185, 원래 그림의 중앙부분을 왼편에 붙인 것이다.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기고한 것입니다.



칸딘스키 vs 클레




동시대를 살면서 우정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 위대한 두 인물을 우리는 한 쌍으로 기억하는데,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와 파울 클레(1879-1940)도 하나의 예이다.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두 사람의 업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칸딘스키는 인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래 최초로 완전추상에 도달한 화가이며, 클레는 음악에 비해 한참 뒤져있던 회화를 음악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성과를 이룩한 화가이다.
이런 엄청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화가는 미술사를 통 털어서 그리 많지 않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00년 10월 뮌헨에서였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법학도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칸딘스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뮌헨으로 와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데생 화가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 들어갔을 때 클레가 그곳에서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클레가 화가가 되기 위해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 들어갔을 때는 21살로 34살의 칸딘스키와 친구가 되기에는 칸딘스키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클레가 칸딘스키와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1911년 늦가을부터였다.
그 후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정을 나누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최초로 추상화를 그린 칸딘스키

칸딘스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의 작품을 보고서부터였다.
그것은 모네가 건초더미를 화면에 크게 그린 것으로 건초더미는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분절된 색채의 형상으로 형태만이 건초더미인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그 작품을 보고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재현이 아니더라도 색채와 형태만으로도 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었다.
그에 의해서 자연의 사물들은 눈에 덮이듯 색채 속으로 감춰지게 되었으며 그의 독특한 교향악적 역동적 색채는 그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그가 사물을 유추할 만한 근거를 완전히 없애고 다만 색채 덩이로만 그린 소위 말하는 완전추상화를 그리기 한 해 전인 1909년에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보면 그가 자연의 형태들을 어떻게 추상화하려고 했는지 그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뮌헨 근교 무르나우의 풍경들을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들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우선 풍경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소화하기 위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연의 색이 아닌 색 자체가 지닌 상징성을 이용하여 역동성과 리듬을 부여했음을 본다.
달리 말하면 풍경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 색채를 사용하여 자연의 역동성과 리듬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들은 추상 그리고 표현주의 모두로 분류할 수 있다.
실재하는 모습을 단순화했기 때문에 추상인 것이고, 실재하는 색을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색으로 자신의 느낌을 나타냈기 때문에 표현주의가 되는 것이다.


칸딘스키의 ‘인상’ 연작 중 <인상 3-콘서트>를 예로 들면, 그는 인상을 “외부 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으로 규정했다.
이 작품은 그가 쇤베르크의 콘서트에 다녀온 뒤 그린 것으로 그가 말하는 인상은 시각적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 인상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특히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형태와 색을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소리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노란색과 검은색이 두드러지도록 흰색으로 보완했다.
그는 청각적 인상과 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검은색을 칠한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를 상징한 것이며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 앉아 있는 청중이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양편의 흰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가장 인상을 주는 요소는 노란색으로 상징되는 쇤베르크의 소리가 홀을 가득 매운 것이다.
<인상 3-콘서트>는 회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공감각을 표현한 것으로 공감각은 20세기 초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칸딘스키는 색과 각 악기의 소리를 연관시키면서도 회화와 음악에는 자체의 특정한 자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림을 잘라 재구성한 클레

회화와 음악의 불가분의 관계는 클레의 대부분 작품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클레는 음악의 요람에서 성장했는데, 증조부는 오르간 연주자였고, 아버지는 대학에서 음악과 성악을 가르쳤으며, 어머니는 성악 교육을 받은 음악교사였다.
7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클레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고민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훗날 그는 “음악에서 이미 18세기 말에 실행된 것이 미술에서는 고작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면서 자신이 미술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클레의 작품에는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되어 있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게 회화는 단지 자연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와 동일한 입장이었다.


칸딘스키는 40살이 되어서야 자신의 회화를 발견하기 시작했고, 클레는 35살 때 친구와 함께 튀니지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회화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늦게 재능을 나타냈다.
<생제르맹의 정원, 튀니지 근처 유럽의 식민지>를 보면 풍경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소화하기 위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연의 색이 아닌 색 자체가 지닌 상징성을 이용하여 역동성과 리듬을 부여했음을 본다.
다만 칸딘스키의 작품과는 달리 우리가 감성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가 수채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감의 고유성이 느낌을 다르게 표현해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가 감성의 전달을 위해 다른 매체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추상의 선구자들인 들로네, 말레비치, 몬드리안의 예를 보더라도 기하학적 구성이 추상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알 수 있으며, 색의 배열은 필수이다.
회화에서의 역동성과 리듬이란 색 배열의 효과를 말한다.
색의 강렬함으로 역동성을 농도가 다른 유사한 색들의 병렬로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칸딘스키와 클레의 작품을 각 악기들이 연주하는 교향악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색과 색의 혼합이 공명한 소리를 낸다고 상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클레의 다음 단계는 구성이다.
문장에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듯이 배열을 달리함으로써 뉘앙스를 창출하는 것이다.
<수고양이의 영역>은 클레가 자신이 기르던 수고양이를 소재로 구성한 작품으로 위와 아래의 부분을 재구성함으로써 뉘앙스를 어떻게 창출했는지 알 수 있다.
클레는 그림을 세로로 잘라서 오른쪽과 왼쪽을 바꿔서 재구성하기도 했는데, 동일한 모티프의 작품을 구성만 달리해서도 시각적 변화가 일어남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튀니지 여행에서 받은 감동을 되새겨 그린 <사원 정원>은 그림을 삼등분하여 가운데 부분을 왼편에 구성한 작품이다.
계단을 올라 문을 통해 들어가면 여러 정원으로 갈 수 있는 장면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에 높은 담 밖으로 야자수가 보이고 둥근 지붕을 한 건물들이 여러 채 보인다.
그가 그림을 삼등분한 것은 건물들이 너무 대칭적이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바우하우스의 교사가 된 클레와 칸딘스키

칸딘스키와 클레의 우정은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교사로 재직하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바이마르에 세운 바우하우스Bauhaus는 ‘집을 짓다’라는 의미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킨 말이다.
그로피우스는 공예의 지위를 순수미술이 누린 것만큼 상승시키기 위해 이 학교를 설립했으며, 유명한 화가, 조각가, 공예가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모든 기술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협동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예술의 통합을 꾀했다.


클레는 1921년 1월 10일부터 실기를 담당한 마이스터들과 함께 미술교육을 이끌었다.
10년 동안 바우하우스에서 조형 분야의 기초 이론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선, 형태, 색채 등 회화적 기능과 효과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형태를 만드는 것을 건축의 기본 원리에 비유하여 건물이 건설되는 것과 같이 회화도 형태가 화면 속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세워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했다.
건축가와 마찬가지로 화가는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해야” 하며 마지막 단계에서 평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형태들을 주의 깊게 맞춰야 한다고 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제 색을 제자리에 칠하는 것이다”라고 한 클레의 말은 바우하우스의 격언이 되었다.
클레는 1922년 6월 바우하우스에 교사로 초빙되어온 칸딘스키와 함께 스테인드글라스와 벽화를 담당했다.


바우하우스에는 언제나 1백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14년의 역사 동안 전체 등록 학생은 약 1,250명이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되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이며, 디자인과 산업기술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차별했던 이전의 위계질서를 붕괴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바우하우스는 칸딘스키와 클레에 의해서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는 동안 제작한 작품은 아주 많은 수채화 외에도 유화만 3백 점에 이른다.
바우하우스에서 칸딘스키는 ‘알터 마이스터(노 선생)’로 불렸는데, 교사들 가운데 최고 연장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성이 따뜻하며, 그로피우스의 보좌역을 잘 해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에는 기하 형태가 더욱 많아졌는데, 1차 세계대전을 피해 러시아에 머물면서 러시아 구성주의 화가들에게 받은 영향이었다.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는 동안 클레는 종종 동물들을 캐리커처로 익살스럽게 묘사했으며,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에서나 볼 만한 만화 같은 그림들이었다.
그는 두 개의 상반된 화살표로 갈팡질팡하는 광대의 절망적인 모습을 상징하기도 했는데, 개인의 본능적 충동과 자아를 감시하는 무의식적 양심 사이의 갈등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또한 화살표를 성적 욕망과 공격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음악은 클레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그는 거의 매일 한 시간씩 음악을 연주했다.
1906년 결혼한 후에는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함께 집에서 꾸준히 연주했으며, 친구들의 모임에서 그리고 바우하우스에서 종종 연주했다.
그가 좋아한 작곡가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이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회화에서 종종 모티프로 나타났다.


칸딘스키와 클레 모두 음악의 자율성을 자신들의 추상화에 적용했다.



도판

칸딘스키 사진
클레 사진

칸딘스키 50 칸딘스키, <무르나우 자연 습작 1>, 1909, 두꺼운 종이에 유채, 31.5-44.7cm.
칸딘스키 51 칸딘스키, <무르나우 자연 습작 3>, 1909, 두꺼운 종이에 유채, 32.9-44.6cm.
칸딘스키 181 칸딘스키, <무제(최초의 추상 수채화)>, 1910, 종이에 연필, 수채, 잉크, 49.6-64.8cm. 작품에 칸딘스키가 제작년도를 1910년으로 적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1913년 이전에 이런 완전추상을 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1910년에 그린 것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은 그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완전추상에 도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칸딘스키 5 칸딘스키, <인상 3-콘서트>, 1911, No. 116, 캔버스에 유채, 77.5-100cm.
칸딘스키 86 클레, <고통당하는 피아노 연주자-풍자: 모던 음악에 대한 캐리커처>, 1909
칸딘스키 197 클레, <생제르맹의 정원, 튀니지 근처 유럽의 식민지>, 1914, 수채화, 21.6-27.3cm.
칸딘스키 224 클레, <수고양이의 영역>, 1919/49, 수채, 과슈, 유채, 아래 그림은 8.8-14.3cm이고, 위 그림은 12.4-14cm이다. 49란 1919년에 49번째로 그렸다는 뜻이다.
칸딘스키 225 클레, <수고양이의 영역>, 위아래 그림을 재구성함.
칸딘스키 10, 클레, <사원 정원>, 1920/185, 과슈, 검정 잉크, 18.4-26.7cm.
칸딘스키 11, 클레, <사원 정원>, 1920/185, 원래 그림의 중앙부분을 왼편에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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