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 (2)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아상블라주Assemblage와 정크 아트Junk art

아상블라주란 명칭은 1961년 뉴욕 모마에서 개최한 ‘아상블라주’ 전시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150여 명의 아티스트들이 참가한 전시회에 종합적 입체주의를 비롯하여 미래주의, 다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제작한 콜라주와 작은 구성작품, 뒤샹의 레디메이드, 코넬의 상자 구성작품, 드 쿠닝, 머더웰, 라우셴버그 등이 제작한 콜라주, 알베르토 부리의 거친 삼베를 부착한 회화, 네벨슨, 탱글리, 스탕키에비치, 장 크로티의 조형물, 세자르의 압축된 자동차 집적물, 키엔홀츠의 타블로 작품 등 다양한 양식과 화파를 폭넓게 보여주는 오브제들이 전시되었다.
아상블라주라는 명칭이 이처럼 폭넓게 확대 해석되고, 공통된 특징이 거의 없는 별개의 다양한 오브제 작품들에 적용되자 상대적으로 명칭의 유용성은 감소했다.

아상블라주와 정크 아트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데, 정크 아티스트들은 종종 산업쓰레기들을 조립하여 표현적 구성물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블라주는 표현적 목적을 위해 비미술의 재료를 조각적 구성물 안에 모으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들을 위한 용어이므로 팝 아트, 표현주의 미술, 정크 아트, 혹은 펑크 아트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으며,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실적일 수도 있다.

정크 아트는 전통 재료를 무시하고 쓸모없는 재료, 폐품, 도시의 폐기물 등으로 구성된 미술로서, 미국에서 이 운동의 기원은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1925~)의 ‘콤바인 combines’ 회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50년대 중반 캔버스에 천조각과 누더기, 찢긴 사진, 기타 버려진 사물들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티스트와 미술 자체의 극단적인 가치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라우셴버그는 이런 혼란스러운 작품을 한동안 제작했다.
그가 오브제를 작품의 구성요소로 사용한 이유는 추상표현주의에서까지 계속 유지되어 온 환영적 공간을 파괴하고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미술의 인상을 바꾸어놓기 위해 삶을 미술 속으로 끌어들였다.
신문지, 인쇄된 복제물, 낙서, 전구, 박제된 새와 동물, 의자, 문, 창문, 침대, 베개, 가방, 군화, 괘종시계, 걸레, 자동차바퀴, 스프링 등 삶의 도구들을 작품에 혼용했는데, 존 케이지John Cage(1912~92) 영향이었다.
케이지의 기본 사상은 이미지의 범람으로 관람자의 정신을 분산시켜 명상적 분위기를 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크 아트에서 체임벌린과 디 수베로의 작품은 유명한데, 두 사람 모두 산업재료를 사용한 영국의 입체주의 조각가 앤터니 카로의 영향을 받았다.
카로의 조형물은 모든 부분이 조형물 자체로 보이는 것으로 채색된 형태들의 공간적 관계 속에 내재된 것 외에는 어느 형태나 의미도 배제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위트가 있고 우아하며 미니멀 조각보다는 덜 엄격하다.
이런 지적, 미적 기반이 카로를 추종한 조각가들이 발견해낸 것이다.
미국 조각가 존 체임벌린John Chamberlain(1927~)은 자동차의 몸체를 일그러뜨려 추상 아상블라주 조형물을 제작하여 유명해졌다.
일그러진 자동차 몸체는 얼어붙은 동력주의를 보여주었다.
체임벌린의 조형물은 회화에서 드 쿠닝의 충돌하는 붓질 같았으며 불안정하면서도 순간적인 정연함을 통해 에너지를 분출했다.
이런 재료를 사용한 의도는 사회적 논평보다는 완성된 작품의 형식적 특성과 관련되지만, 재료의 출처가 작품에 남아 있어 전체적 인상에 영향을 준다.

미국 조각가 마크 디 수베로Mark di Suvero(1933~)는 쇠막대기, 자동차 타이어, 쇠 끈, 의자, 그리고 건축재료 등과 쓰레기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들을 혼용하여 커다란 규모로 환경 아상블라주를 제작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웅대한 에너지와 조형주의의 공학적 원리를 반기하적 균형으로 나타냈다.


상황 미술Situation art
상황 미술은 관람자를 단순한 외부 관찰자에 머무르지 않게 하나의 사건, 혹은 상황 속으로 개입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프닝과 그 목적이 같다.
팝 아티스트들의 작품에 결여되어 있는 휴머니즘의 가치를 신봉한 조지 시걸George Segal(1924~2000)은 석고로 인물상을 실물에서 떠낸 뒤 실물과 똑같이 제작한 것을 상황으로 설치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인물상은 사실적으로 나타났으나, 유령처럼 보이는 인물상의 흰색이 사실주의의 환영을 없앴다.
1950년대 말 조형물로 관심을 옮겨 철사 그물과 올이 굵은 삼베 위에 석고를 바르는 실험적 작업을 했으며, 작품의 특징은 하나의 인물상, 혹은 군상으로 특정한 상황 속에 놓인다.
그가 제작한 실제 크기의 고독한 익명의 석고 인물들은 진부한 일상에서 따온 몇몇 실재 사물들이 있는 상황 속에 자리 잡는다.
판에 박힌 제스처 속에 고정되어 버린 유령 같은 인물들은 몰개성적 사회 속에서 영혼이 없는 육체들이다.
그의 인물상과 군상은 금세기의 어떤 아티스트의 작품보다 실존주의 철학의 중심 주제인 현대인의 정신적 고립과 소외감을 잘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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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 (3)




펑크 아트Punk art

펑크 아트는 1960년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아티스트 그룹이 시작한 것으로 천박하고 기분 나쁜 주제를 의도적으로 불쾌하게 다룬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시크 아트Sick art로도 불린다. 불쾌감을 유발하고자 하는 욕구와 병적 자기 현시욕을 다다, 팝 아트와 결합시킨 것이다.
펑크 아트의 특징은 감정이 배제된 비인간적인 순수성에 반발해 혼합물, 병적인 것, 싸구려, 기이한 것, 모조품, 사악한 것,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성적인 점을 선호하는 것이다.
펑크와 ‘냄새나는’, 혹은 ‘더러운’이란 뜻의 펑키라는 용어는 재즈 용어에서 온 것으로 모순되고 이상야릇한 것에 대한 집착을 암시한다.


에드워드 키엔홀츠Edward Kienholz(1927~94)는 1950년대 말부터 회화를 그만두고 오브제를 가지고 작업하기 시작했으며, 오브제들이 비싸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더라도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냈다.
1961년에 매음굴의 장면을 <록시의 집 Roxy's>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첫 펑크 아트 작품을 ‘잡동사니’라고 했다.
이 작품은 라스베가스의 매음굴을 사실적으로 복원한 것이며, 제목은 ‘수지맞는 일이 머릿속에서 활개 칠 때’라는 어린이들이 술래잡기에서 부르는 노래구절에서 따왔다.
평범한 장식의 침실 패러디에서 라디오는 멋없는 음악을 뱉어내고 거울은 성교를 준비하는 한 쌍의 사실적 이미지를 반영한다.
남자와 여자의 머리가 이불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미국 민속의 일면을 취해 부패하고 심리적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미국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키엔홀츠에 의해서 펑크 아트는 팝 아트가 지향하던 바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도덕적 분개의 차원에 이르게 되었다.
키엔홀츠는 생활의 기이하고 하찮은 단편을 이용하며, 실제 오브제로 구성되는 환경 속에 인간의 육체, 혹은 시체를 설치하여 혐오스럽고 소름끼칠 정도로 섬뜩한 상황을 만들었다.
살인, 섹스, 출산, 죽음, 부패와 같은 잔혹한 이미지는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를 막기도 한다.


비디오 아트Video art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창출하는 비디오 아트는 반문화, 특히 1960년대 초 일부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의 작업 중에 생겨난 해악적 상업 TV에 반대하는 경향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프랭크 포퍼Frank Popper는 비디오 아트를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
둘째, 퍼포먼스를 영구적 형태로 만들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
셋째, 비디오를 사용해 지배체제에 의해 억압받기 쉬운 이미지와 정보들을 배포하는 것으로 이를 포퍼는 ‘게릴라 비디오’라 칭했다.
넷째, 비디오카메라와 모니터를 조각적 설치에 이용하는 것,
다섯째, 비디오를 현장 퍼포먼스에 즉흥적으로 사용하는 것,
마지막으로 비디오를 주로 컴퓨터와 함께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보적인 기술적 선언을 하는 것이다.


1964년에 뉴욕에 정착한 백남준은 이듬해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가 뉴욕에서 판매되자마자 이를 구입하고 즉시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그 날 저녁 아티스트 클럽 카페 고고에서 선보였다.
케이지의 <조합 피아노>에서 감동을 받은 백남준은 TV 스크린 위에 자석을 놓아 방영되는 이미지를 일그러뜨렸다.
비디오 작업으로 전환한 후 백남준은 종종 첼리스트 샤롯 무어만과 공동으로 작업했다.
1965년에 소개한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제1번 Cello Sonata No. 1 for Adults Only>은 에로틱한 작품이다.
무어만은 <첼로 조곡 Suite for Cello>을 연주하면서 거의 누드가 될 때까지 연주와 옷 벗기를 교대로 계속했다.
같은 해 발표한 <생상스 테마의 변주곡 Variation on a Theme of Saint-Saens>에서 무어만은 좀 더 과격한 행위를 보여주었는데 생상스의 <백조>를 연주하다 말고 옆에 준비된 물탱크로 기어 올라가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내려와 젖은 몸으로 연주를 계속했다.
특히 무어만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만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다.


현학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좀 더 진지한 성격을 띤 빌 비올라Bill Viola(1951~)는 백남준을 이어 차세대의 가장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려졌다.
늘 첨단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지만 그의 작품은 명상적이고 종교적 경건함까지 느끼게 한다.
빛과 어둠, 움직임과 정지, 물질과 정신 등의 대립적인 요소와 이미지들이 상호 보완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작품은 고도의 촬영과 편집기술을 동원한 것으로 웅장한 소리와 함께 관람자를 그의 세계로 몰입시킨다.
그의 작품을 동양의 사상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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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4)




해프닝Happening

1960년대에 새로운 미술 형태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해프닝은 1959년 앨런 캐프로Allan Kaprow(1927~)가 창안해낸 것이다.
캐프로는 1959년 뉴욕의 루빈 화랑에서 열린 ‘여섯 부분으로 나뉜 18개의 해프닝 18 Happenings in 6 parts’이라는 자신의 전시회를 위해 만든 명칭이다.
이는 천재를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관람자, 혹은 참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려는 아티스트들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캐프로는 해프닝에서 참여자로서의 관람자는 오브제나 회화와 같으며 도구와 지침서는 캔버스의 천과 같다고 했다.
관람자는 사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적극적인 참여는 정신적인 수준에서 요구되었다.
캐프로는 해프닝의 가능성을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에서 발견했다.
캐프로는 해프닝을 궁극의 실존적 참여라는 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세로 보았다.


존 케이지는 예술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이론을 펼쳤는데 그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해프닝은 ‘자발적이며 줄거리가 없는 연극적 이벤트’로 일컬어져 왔다.
해프닝의 개념에는 화가들이 화랑과 미술관과 같은 엘리트 의식으로 뭉친 세계에서 탈피하여 거리나 시장으로 뛰쳐나와 한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 명칭은 요제프 보이즈가 벌인 많은 해프닝들과 같이 정치-사회적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시위나 기존의 도덕 체계에 충격을 가하기 위한 표현을 다루는 데 이용되었다.
다른 측면에서는 일상적인 삶과 평범한 과학기술을 기이하고 낯선 상황이나 사건으로 바꿔 연출하는 것을 해프닝의 특성으로 본다.


퍼포먼스 아트Performance art

해프닝과 관련 있지만 보다 철저하게 계획되며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 퍼포먼스 아트의 전통은 자신들의 작품이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익살스럽거나 도발적인 이벤트를 무대에 올린 미래주의자, 다다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1950년대에 관람자 앞에서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마티외나 1960년대 초 물감을 몸에 바른 누드모델들을 지휘한 이브 클랭의 작업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퍼포먼스 아트가 그 자체로서 미술의 한 범주로 인식되게 된 건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였다.
해프닝이 의도적으로 내건 것과는 달리 퍼포먼스는 관객과의 즉흥적 협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퍼포먼스는 ‘재연’, ‘구경거리’를 의미한다.
이벤트도 퍼포먼스의 한 형태이며, 신체적 출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다.


퍼포먼스 아트는 새로운 형식 중에서 가장 파악하기 쉽다.
퍼포먼스 작품에서는 아티스트 현전의 즉시성이 보장되고, 아티스트와 관객 사이 대면의 직접성이 보장된다.
아티스트는 가능하면 폭발적인 전이를 성취하려고 노력한다.
퍼포먼스 아트를 여성 다수가 차지하는 건 페미니즘 전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이 되기도 하는데, 요제프 보이즈에게서 보듯 의식의 변화를 통해 행위자가 변화된 사회를 의도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 아트의 형태와 경향은 매우 다양한데, 빈 행위파는 사디즘과 마조히즘, 외설 취미에 탐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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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4)




해프닝Happening

1960년대에 새로운 미술 형태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해프닝은 1959년 앨런 캐프로Allan Kaprow(1927~)가 창안해낸 것이다.
캐프로는 1959년 뉴욕의 루빈 화랑에서 열린 ‘여섯 부분으로 나뉜 18개의 해프닝 18 Happenings in 6 parts’이라는 자신의 전시회를 위해 만든 명칭이다.
이는 천재를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관람자, 혹은 참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려는 아티스트들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캐프로는 해프닝에서 참여자로서의 관람자는 오브제나 회화와 같으며 도구와 지침서는 캔버스의 천과 같다고 했다.
관람자는 사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적극적인 참여는 정신적인 수준에서 요구되었다.
캐프로는 해프닝의 가능성을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에서 발견했다.
캐프로는 해프닝을 궁극의 실존적 참여라는 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세로 보았다.


존 케이지는 예술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이론을 펼쳤는데 그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해프닝은 ‘자발적이며 줄거리가 없는 연극적 이벤트’로 일컬어져 왔다.
해프닝의 개념에는 화가들이 화랑과 미술관과 같은 엘리트 의식으로 뭉친 세계에서 탈피하여 거리나 시장으로 뛰쳐나와 한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 명칭은 요제프 보이즈가 벌인 많은 해프닝들과 같이 정치-사회적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시위나 기존의 도덕 체계에 충격을 가하기 위한 표현을 다루는 데 이용되었다.
다른 측면에서는 일상적인 삶과 평범한 과학기술을 기이하고 낯선 상황이나 사건으로 바꿔 연출하는 것을 해프닝의 특성으로 본다.


퍼포먼스 아트Performance art

해프닝과 관련 있지만 보다 철저하게 계획되며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 퍼포먼스 아트의 전통은 자신들의 작품이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익살스럽거나 도발적인 이벤트를 무대에 올린 미래주의자, 다다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1950년대에 관람자 앞에서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마티외나 1960년대 초 물감을 몸에 바른 누드모델들을 지휘한 이브 클랭의 작업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퍼포먼스 아트가 그 자체로서 미술의 한 범주로 인식되게 된 건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였다.
해프닝이 의도적으로 내건 것과는 달리 퍼포먼스는 관객과의 즉흥적 협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퍼포먼스는 ‘재연’, ‘구경거리’를 의미한다.
이벤트도 퍼포먼스의 한 형태이며, 신체적 출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다.


퍼포먼스 아트는 새로운 형식 중에서 가장 파악하기 쉽다.
퍼포먼스 작품에서는 아티스트 현전의 즉시성이 보장되고, 아티스트와 관객 사이 대면의 직접성이 보장된다.
아티스트는 가능하면 폭발적인 전이를 성취하려고 노력한다.
퍼포먼스 아트를 여성 다수가 차지하는 건 페미니즘 전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이 되기도 하는데, 요제프 보이즈에게서 보듯 의식의 변화를 통해 행위자가 변화된 사회를 의도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 아트의 형태와 경향은 매우 다양한데, 빈 행위파는 사디즘과 마조히즘, 외설 취미에 탐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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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5)




바디 아트Body art

사람의 몸을 재료로 이용하는 바디 아트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신체를 사용한다.
처음 몇몇 작품의 경우 이벤트나 퍼포먼스 아트에 가까웠고 1950년대 말부터 여러 해프닝 속에 바디 아트의 일종이랄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바디 아트는 독립적 장르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개념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바디 아트는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노선을 취하지는 않았다.
바디 아트 작품은 아티스트의 감정이나 개인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후기 회화적 추상이나 미니멀 아트만큼 비개성적이다.
윌러비 샤프가 말한 대로 바디 아트는 대체로 신체에 관한 진술이다.
“그것은 자전적인 예술이라기보다 신체의 사용과 관련된 예술이다.”


몇몇 바디 아티스트들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일부 미니멀 아티스트와 팝 아티스트들이 추구한 일상의 진부함을 계승하여 신체의 평범한 기능을 찍은 사진이나 영화를 미술작품으로 제시하고 있다.
브루스 멕레인은 이 분야의 전문가로 그의 <미소>(1969)는 아티스트가 미소 짓는 과정을 찍은 석장의 사진을 수직으로 배열한 것이다.
다재다능한 비토 아콘치Vito Acconci(1940~)는 매우 격한 작품을 발표하곤 했는데, <들이마시기>(1969)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숨을 참는 것이었다.


때때로 바디 아트 작품은 개인적으로 만들어져 사진이나 영화를 통해 전달된다.
작품 제작과정은 일반에게 공개되기도 하며, 길버트Gilbert Proesch(1943~)와 조지George Passmore(1942~)처럼 사전에 안무를 하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대체로 관람자의 참여는 배제된다.


신체를 학대하는 아티스트들도 종종 있었다.
파리에서 지나 팡은 면도날로 자신의 신체를 베었으며 <식사>(1971)에서는 저민 고기 1근을 먹은 뒤 토했다.
윌리엄 웨그먼은 <11개의 이쑤시개 표정>(1970)에서 11개의 이쑤시개를 자신의 잇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레리 스미스는 자신의 팔에 6인치 길이의 상처를 내 <선 Line>이란 제목으로 소개했다.
아콘치는 <문지르기>에서 레스토랑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자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계속 문질러 피부가 까지는 과정을 5분마다 사진에 담았다.
또 <손과 입>에서는 구역질이 날 때까지 자신의 손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1938~)은 자신의 몸을 롱아일랜드 해변의 햇볕에 노출시켜 햇볕에 그을리기 전과 후의 모습을 컬러사진에 담았다.
일부 아티스트들은 손발이 불구가 되거나 팔 다리가 절단될 때까지 자해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이 지닌 철학은 분명하지 않다.


후기 회화적 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된 새로운 후기 회화적 추상 경향의 뛰어난 대표자들은 공통적으로 표현적인 붓자국, 특징적인 화면 질감과 같은 회화적 특질을 거부하고 액션페인팅의 자발적, 충동적 방법을 이성적으로 계획하고 명료하게 규정하여 변화가 없는 색채의 영역으로 대체했다.
촉감이나 기타 착각을 일으키는 특질은 제거하고 미술 재료의 실재성을 강조하면서 일체의 부수적인 연상효과를 배제함으로써 순수 시각적 색채 미술을 목표로 했다.


색면 회화Color Field는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이 직접 스며들게 하는 것으로 1951년에 잭슨 폴록이 시작했고, 이를 헬렌 프랭컨탤러Helen Frankenthaler(1928~)가 받아들였다.
단색 회화를 지칭하는 색면 회화에서는 특히 색채의 농도와 채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색면 회화에서 색채는 형상과 드로잉으로부터 해방되어 고유한 실재, 순수하게 시각적인 실재성을 획득한다.
회화적 이미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색채는 독립적이고 현실과 무관하며 비촉각적인 실재성을 지니게 된다.
종종 거대한 규모로 제작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내며 시각 영역을 점유하고 크기의 효과를 창출한다.


하드에지 회화Hard Edge Painting는 평론가 쥘 랑스네르가 1958년에 ‘기하학적 추상’이란 기존의 낡은 명칭을 대신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명칭으로 로렌스 앨러웨이가 1966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체계적 회화’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명칭의 채택 의도를 밝혔다.
그는 1959~60년경부터 단순한 형태와 풍부한 색채의 매끄러운 표면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추상 흐름을 과거의 기하학적 추상과 차별화하여 부르기 위해 하드에지란 용어를 이미 사용한 바 있다.
하드에지 회화라는 명칭은 다소 서술적이며 모호하지만 색면 회화와 차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드에지 회화는 윤곽선이 분명한 넓은 색면으로 이루어지며 자연발생적이고 충동적으로 제작되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와는 달리 미리 정해진 계획에 의해 그려진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추상표현주의가 실패한 이래 미술을 역사적 사명으로 계속해서 이끌어갈 유일한 방법은 그가 1964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붙인 명칭인 후기 회화적 추상이었다.
카탈로그에 실린 글에서 그는 추상표현주의가 자신이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퇴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헬렌 프랭컨탤러,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 Bernstein(1912~62), 그리고 케니스 놀런드Kenneth Noland(1924~)를 미술 발전의 투사들로 보았다.
그리고 그의 제자 존스 홉킨스대학 교수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1939~)는 「세 명의 미국 화가들」이란 중요한 논문에서 이 영웅들의 집단을 확대해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1936~)와 줄스 올리츠키Jules Olitski(1922~)를 포함시켰으며, 그린버그 역시 두 사람을 칭찬하고 미술의 큰 희망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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