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5)




바디 아트Body art

사람의 몸을 재료로 이용하는 바디 아트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신체를 사용한다.
처음 몇몇 작품의 경우 이벤트나 퍼포먼스 아트에 가까웠고 1950년대 말부터 여러 해프닝 속에 바디 아트의 일종이랄 수 있는 것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바디 아트는 독립적 장르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개념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바디 아트는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노선을 취하지는 않았다.
바디 아트 작품은 아티스트의 감정이나 개인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후기 회화적 추상이나 미니멀 아트만큼 비개성적이다.
윌러비 샤프가 말한 대로 바디 아트는 대체로 신체에 관한 진술이다.
“그것은 자전적인 예술이라기보다 신체의 사용과 관련된 예술이다.”


몇몇 바디 아티스트들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일부 미니멀 아티스트와 팝 아티스트들이 추구한 일상의 진부함을 계승하여 신체의 평범한 기능을 찍은 사진이나 영화를 미술작품으로 제시하고 있다.
브루스 멕레인은 이 분야의 전문가로 그의 <미소>(1969)는 아티스트가 미소 짓는 과정을 찍은 석장의 사진을 수직으로 배열한 것이다.
다재다능한 비토 아콘치Vito Acconci(1940~)는 매우 격한 작품을 발표하곤 했는데, <들이마시기>(1969)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숨을 참는 것이었다.


때때로 바디 아트 작품은 개인적으로 만들어져 사진이나 영화를 통해 전달된다.
작품 제작과정은 일반에게 공개되기도 하며, 길버트Gilbert Proesch(1943~)와 조지George Passmore(1942~)처럼 사전에 안무를 하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대체로 관람자의 참여는 배제된다.


신체를 학대하는 아티스트들도 종종 있었다.
파리에서 지나 팡은 면도날로 자신의 신체를 베었으며 <식사>(1971)에서는 저민 고기 1근을 먹은 뒤 토했다.
윌리엄 웨그먼은 <11개의 이쑤시개 표정>(1970)에서 11개의 이쑤시개를 자신의 잇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레리 스미스는 자신의 팔에 6인치 길이의 상처를 내 <선 Line>이란 제목으로 소개했다.
아콘치는 <문지르기>에서 레스토랑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자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계속 문질러 피부가 까지는 과정을 5분마다 사진에 담았다.
또 <손과 입>에서는 구역질이 날 때까지 자신의 손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1938~)은 자신의 몸을 롱아일랜드 해변의 햇볕에 노출시켜 햇볕에 그을리기 전과 후의 모습을 컬러사진에 담았다.
일부 아티스트들은 손발이 불구가 되거나 팔 다리가 절단될 때까지 자해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이 지닌 철학은 분명하지 않다.


후기 회화적 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된 새로운 후기 회화적 추상 경향의 뛰어난 대표자들은 공통적으로 표현적인 붓자국, 특징적인 화면 질감과 같은 회화적 특질을 거부하고 액션페인팅의 자발적, 충동적 방법을 이성적으로 계획하고 명료하게 규정하여 변화가 없는 색채의 영역으로 대체했다.
촉감이나 기타 착각을 일으키는 특질은 제거하고 미술 재료의 실재성을 강조하면서 일체의 부수적인 연상효과를 배제함으로써 순수 시각적 색채 미술을 목표로 했다.


색면 회화Color Field는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이 직접 스며들게 하는 것으로 1951년에 잭슨 폴록이 시작했고, 이를 헬렌 프랭컨탤러Helen Frankenthaler(1928~)가 받아들였다.
단색 회화를 지칭하는 색면 회화에서는 특히 색채의 농도와 채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색면 회화에서 색채는 형상과 드로잉으로부터 해방되어 고유한 실재, 순수하게 시각적인 실재성을 획득한다.
회화적 이미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색채는 독립적이고 현실과 무관하며 비촉각적인 실재성을 지니게 된다.
종종 거대한 규모로 제작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내며 시각 영역을 점유하고 크기의 효과를 창출한다.


하드에지 회화Hard Edge Painting는 평론가 쥘 랑스네르가 1958년에 ‘기하학적 추상’이란 기존의 낡은 명칭을 대신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명칭으로 로렌스 앨러웨이가 1966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체계적 회화’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명칭의 채택 의도를 밝혔다.
그는 1959~60년경부터 단순한 형태와 풍부한 색채의 매끄러운 표면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추상 흐름을 과거의 기하학적 추상과 차별화하여 부르기 위해 하드에지란 용어를 이미 사용한 바 있다.
하드에지 회화라는 명칭은 다소 서술적이며 모호하지만 색면 회화와 차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드에지 회화는 윤곽선이 분명한 넓은 색면으로 이루어지며 자연발생적이고 충동적으로 제작되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와는 달리 미리 정해진 계획에 의해 그려진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추상표현주의가 실패한 이래 미술을 역사적 사명으로 계속해서 이끌어갈 유일한 방법은 그가 1964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붙인 명칭인 후기 회화적 추상이었다.
카탈로그에 실린 글에서 그는 추상표현주의가 자신이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퇴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헬렌 프랭컨탤러,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 Bernstein(1912~62), 그리고 케니스 놀런드Kenneth Noland(1924~)를 미술 발전의 투사들로 보았다.
그리고 그의 제자 존스 홉킨스대학 교수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1939~)는 「세 명의 미국 화가들」이란 중요한 논문에서 이 영웅들의 집단을 확대해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1936~)와 줄스 올리츠키Jules Olitski(1922~)를 포함시켰으며, 그린버그 역시 두 사람을 칭찬하고 미술의 큰 희망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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