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삼천당제약 사외보 기고한 것입니다.



워홀, 현대미술의 심장을 겨누다


초기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워홀의 부모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1928년 워홀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 안드레이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소재한 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어머니 줄리아는 얇은 깡통을 가위로 잘라 꽃 모양으로 만들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25센트에 팔았다.
대공황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워홀은 가난한 이민자 가족으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 하에 돈에 대한 집착이 그의 작업습관과 미학에 두드러졌으며, 그의 예술이 도덕적으로 절충되고 퇴폐한 것이었다는 비평을 이끌어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 그 이상으로 워홀은 돈에 대한 욕심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작업과정과 주제 선택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워홀은 여덟 살 때인 1938년 가을에 무도병 증세를 나타냈는데, 류머티즘에 관련하여 일어나는 추체외로계 질환의 하나로 그 보행이 마치 댄스를 하는 것 같아 세인트 비투스의 댄스St. Vitus' Dance로 불리기도 한다.
무도병으로 학교를 장기 결석한 그는 부엌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에서 한 달 동안 어머니의 간호를 받았다.
이 병의 증세에는 피부부스럼과 조절할 수 없는 흔들림이 포함되었고, 흔들림에 대한 느낌과 피부병학적 외관의 손상은 미래에 반향을 일으켜 성숙한 미술품에서 그는 이런 체험을 굴절시켰으며, 회화, 영화, 그리고 퍼포먼스에서 증상이 반향하게 했다.
그가 유명해졌을 무렵인 1960년대 초반에 피부부스럼은 사라졌으나 청춘기와 초기 성인기에서 얼굴에 흔적을 남겼으며, 온 생애에 걸쳐 나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워홀은 1949년 6월에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대를 졸업한 뒤 뉴욕으로 이주했다.
대학을 마칠 무렵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으므로 1953년에 처음 가발을 구입했는데 스물다섯 살 때였다.
1973년 이후 그에게 담낭수술이 요구되었지만 병원을 두려워했으므로 수술을 미루었다.
결국 1987년 2월 20일 금요일 오십팔 세에 뉴욕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가발을 쓰고 있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환자가 유명한 예술가라는 걸 모르는 간호사는 아드레날린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동요로 인한 심장박동의 정지로 환자가 괴로워하는 걸 알았다.
그녀는 다른 직원을 불렀으며 그들이 그를 소생시키려고 한 시간을 소비한 뒤 워홀은 6시 31분에 사망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장례식은 1987년 2월 26일 피츠버그에서 거행되었고 세례자 성 요한 비잔틴 묘지 부모 옆에 묻혔다.
워홀의 절친한 친구들 중 하나가 열린 무덤에 향수병(에스티 로더)과 워홀이 창간한 『인터뷰』지 한 권을 던졌다.
위령제는 뉴욕시의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4월 만우절 날에 열렸으며 한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Magic Flute>를 연주했다.


워홀의 소장품에 대한 경매가 1988년 4월 23일부터 5월 3일까지 소더비에서 열렸고 $25,333,368이 걷혔다.
생애에 그를 무시한 모마가 1989년에 그의 회고전을 열었다.
앤디 워홀 박물관은 1994년에 개관했다.



디자이너로서의 워홀

워홀이 어떻게 화가가 되었을까? 그가 하나의 응답을 엮어냈다.

“아홉 살 때 내게 세인트 비투스의 댄스가 생겼다. 메이벨린의 광고를 보고 헤디 라머(오스트리아의 여배우)를 그렸다. 잘 그려지지 않아 그걸 버렸다. 나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화가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워홀은 1960년대 초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건 만화와 광고였다.
어린 시절의 영웅주의 인물이나 자신이 즐겨 먹고 마시던 상품을 선택했는데, 그것들은 뽀빠이, 낸시, 딕 트레이시(워홀 67), 배트맨, 슈퍼맨, 코카콜라(워홀 86),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각 등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했다.
따라서 그를 화가보다는 디자이너로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사람들은 일견에 워홀의 작품이 반복에 근거함을 볼 수 있을 터인데 그가 반복을 전문화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평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2년 8월에 야구선수들을 시작으로 영화배우들 트로이 도나휴와 워렌 비티를 다음으로 그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8월 5일 마릴린 먼로(워홀 87)가 치명적으로 약을 과량 복용하여 죽자 바로 다음날 그녀의 초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마릴린과 리즈의 초상화가 큰 명성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오브제들이나 개체들은 미술품 내에서의 반복되고 그리고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생산한다.


또한 워홀은 재난을 실크스크린으로 뜨기 시작했다.
1962년 6월 4일 『뉴욕 미러 New York Mirror』지의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 129 Die in Jet>(워홀 80)이란 주요 제목이 있는 표지를 대참사의 이미지로 디자인했다.
죽음의 주제를 확대하여 이듬해에 자동차 전복사고, 자살 현장사진, 사형수를 살해하는 전기의자 등을 제작했다.
그림 그리기보다는 실크스크린 뜨기가 빠르고 쉬웠다.
실크스크린 뜨기가 실재를 묘사하는 사진의 주장에 대한 효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실크스크린 뜨기가 시각적 이해력의 역사적 새로운 다양성을 요구했다.
워홀은 어떤 주제들이 복제하기에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는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흑백 이미지를 어떤 놀라움을 주는 색들이 필히 꾸며주고, 혹은 불쾌하게 해준다는, 그리고 파란색, 혹은 빨간색, 혹은 은색이 그것들을 응시하는 자아를 입증하고 승인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인습타파의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반복되는 이미지들의 어리석은 리듬이 받아들인 진실을 이화시킬 수 있다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장해물과 결함을 눌러 터뜨리는 방법, 즉 이미지가 선명치 않게 되거나 충분히 적용되지 않는, 혹은 한 이미지가 또 다른 것의 명료함에 돌발적으로 겹치고 망치게 하는 순간 어디에 스크린이 미끄러져 들어가거나, 혹은 물감으로 막히게 자리를 잡아주는 걸 알고 있었다.



사업가로서의 워홀

워홀의 작업 시기를 1950년대와 1960년대 둘로 구분할 수 있다.
레코드와 책 표지 그리고 광고는 돈을 위해서이고 팝 그림과 영화는 훌륭한 예술가라는 불멸의 명성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런 구분은 단순하지 않은데 그가 팝 시기인 1960년대에 상업적 작업을 비밀에 붙여 계속했기 때문이며, 1968년 이후 그가 “비지니스 아트”라고 명명한 위임받은 프로젝트들을 돈을 위해 노골적으로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홀은 초상화를 스크린으로 떠서 많은 돈을 벌었다.
한 점에 5천 달러를 받았다.
그는 한 해에 50점에서 100점을 위임받아 제작했으며, 많은 초상화들이 개인적으로 소장되었고 그것들이 시리즈로 전시된 적은 없었다.
초상화들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리즈, 마릴린, 혹은 재키의 이미지들로 표현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많은 초상화가 유명한 개인들일지라도 더 많은 것들은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즉 부유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람의 딸, 아들, 아내, 남편을 묘사한 것들이다.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은 노동집약적인 것으로 순식간에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약 50개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은 뒤 그것들 가운데 이상적인 이미지를 선택해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때로는 그가 오래 전에 폐기한 표현주의적인 예술적인 체하는 패러디로 손으로 색을 칠해 과장된 몸짓에 보탰지만 회화적 표현을 압도하는 있는 그대로의 초상을 늘 모색했다.


워홀의 초상화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위임받아 제작한 것들이 아닌 1972년에 시작한 모택동의 이미지들이다.
그는 1974년에 모택동 벽지 위에 모택동을 걸었다.(워홀 165, 166)
모택동들의 흔적을 좇아 1976년에는 소련의 국기를 상징하는 망치와 낫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워홀은 철물상에서 구입한 실제 망치와 낫이 있는 사진으로부터 이미지를 만들었다.(워홀 168)
그는 또한 지미 카터(워홀 167)와 믹 재거, 그리고 뉴욕시의 술집과 부두로부터 흑인과 라틴 화려한 의상의 여왕들도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보석과 포도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그는 두개골을 실크스크린(워홀 169)으로 떴고 자화상을 실크스크린으로 떴다.



영화제작자로서의 워홀

1965년 5월 그의 꽃그림들이 파리의 전시회에서 소개될 때 워홀은 회화에서 은퇴하고 영화제작에 온전히 헌신할 것임을 선언했다.
16mm 볼렉스 카메라를 구입한 뒤 그의 최초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의 영화는 음란성으로 주목을 받았다.(워홀 150)
F.B.I.는 음란성을 탐색하기 위해 요원을 보내 워홀의 영화를 관찰하도록 지시했다.
요원은 본부에 보고했다.


“워홀의 영화에 출연한 모든 남자는 동성애자들로 보입니다. ...
많은 장면이 대마초, 혹은 마약을 복용하거나 술을 마신 뒤에 연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
카우보이들이 여인의 집으로 몰려가 여인의 옷을 벗기고 성적으로 희롱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여인의 음부가 관람자가 볼 수 있도록 드러납니다.
사내와 여인의 행위가 매우 교묘하게 나타나는데 카메라가 행위 전부를 노출시키는 건 아닙니다.”


워홀은 포르노의 방법들에서 일반적으로 예술적 경제를 위한 패러다임을 보았다.
그가 1960년대 말에 영화제작을 근본적으로 중단했을지라도 남은 생애에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으며, 그의 영화들은 미국 예술사에서 그의 캔버스들만큼이나 중요했다.
그가 영화보급을 중단한 건 1972년이었다.
그의 영화는 한 세대 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현재 그것들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영화제작자로서의 성취가 수프와 명사들의 화가로서의 워홀에 대한 제한된 관념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미술의 종말을 고지한 철학자로서의 워홀

워홀은 철학자였다. 명백한 자아의식이나 억제 없이 그는 끊임없이 생산했다.
예술이 용이하기를 바랐고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더 많이 만들 수 있으며 더 신속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더욱 접근하기 쉬우며, 대중적이고, 그리고 숨김없는 행동의 영역이 되는 구조물을 만드는 걸 용이하게 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워홀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오류다.
그는 그 자신의 사례, 제스처와 희극적 행동, 영웅적 삶을 남겼다.


1964년 봄에 워홀은 그의 가장 대담한 조각들을 선보였는데, 그것들은 나무상자에 실크스크린을 부착한 것으로 식품점 상자들 브릴로 패드, 하인즈 케첩, 캠벨의 토마토주스, 켈로그의 얇은 옥수수 조각, 그리고 그 밖의 생산품들을 닮게 한 것들이었다.(워홀 123)
그의 만화속의 영웅들과 같이 그 상자들은 거대한 크기, 가장 큰 것이라는 남자다움을 풍자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것들은 단지 상자들에 불과하며 기성품을 복제한 것이다.
그에 의해서 미술품과 미술품이 아닌 것이 우리의 눈으로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미술이 실재의 모방이라는 서양의 오래된 관념이 그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이는 서양미술의 종말을 고지하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워홀은 1966년 4월 일련의 은색 구름들을 선보임으로써 미술의 종말을 논리적인 결론으로까지 밀고 나갔다.
헬륨으로 팽창한, 공중에 떠도는 폴리에스테르 필름 베게들. 그는 레오 카스텔리 화랑의 전시장 한 곳을 은색 구름들로 채웠고, 인접한 전시장에는 벽지를 발랐다.
노란색 배경에 동일한 핑크색 암소를 반복한 실크스크린 벽지를 발랐다.(워홀 143, 144)


금년은 워홀이 타계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서양미술계는 그에 의해서 종말론에 휩싸였다.
그는 모든 양식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양식으로 우열을 가렸지만 오늘날 양식은 미술품을 제작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고 그 자체 질적 요소를 결여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복제도 창작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술품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만 마련되면 무엇이라도 미술품이 될 수 있다.
또한 워홀은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예술가가 되기 위한 특별한 훈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 중심에 앤디 워홀이 있다.



도판

워홀 67 워홀, <딕 트레이시 Dick Tracy>, 1960, 캔버스에 아크릴, 114-201cm.
당시 인기 있는 만화가 체스터 굴드의 유명한 만화 주인공 딕 트레이시는 유능한 형사이고 옆에 있는 샘 케쳄은 딕 트레이시의 단짝이며 조수이다.
워홀은 딕 트레이시의 턱을 90도 각도로 묘사하고 조수의 턱은 둥글게 했다.
만화와 달리 자신이 바라지 않는 부분은 일부러 생략하거나 흐리게 했다.

워홀 86 워홀, <푸른 코카콜라 병 Green Coca-Cola Bottles>, 1962, 캔버스에 아크릴, 145-209cm.
112개의 코카콜라 병을 푸른색으로 가로세로로 반복하여 대량생산품의 기계적 이미지를 조형적인 요소로 삼았다.
동시에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달리 그렸다.

워홀 87 워홀,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62, 캔버스에 아크릴, 41-51cm.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먼로가 죽자 워홀은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초상화에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이 밖으로 삐져나오도록 했다.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칠했으며 붉은색은 입술 밖으로 번지게 했다.
바탕의 오렌지색과 어울리지 않게 눈 가장자리와 옷깃을 녹색으로 얼굴을 피부색으로 상대적인 색들을 사용했다.
눈 가장자리의 녹색은 실제 여배우의 화장보다 훨씬 컸다.
마릴린 사진이 수록된 1950년대의 책을 사서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실크스크린으로 뜬 작은 캔버스를 2개, 4개, 6개, 혹은 20개를 병렬하기도 했다.
<100개의 마릴린 초상>으로 불리는 <마릴린 접개>는 두 개의 캔버스로 제작되었으며, 한 캔버스에 50개의 마릴린 초상을 실크스크린하고 다른 캔버스에는 흑백으로 50개의 초상을 실크스크린했다.
캔버스에 먼저 색을 칠해놓고 색이 마르면 그 위에 마릴린의 얼굴을 실크스크린했는데 사진의 이미지가 흑백으로 인쇄되면서 바탕의 밝은 색과 어우러졌다.

워홀 80 워홀,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 129 Die in Jet>, 1962, 캔버스에 아크릴, 183-255cm.
파리 근처에서 프랑스의 보잉 707이 추락한 사건을 다룬 신문 표지기사이다.
워홀은 조수 헨리 젤드잘러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 작품을 제작했는데 젤드잘러는 이 신문을 보여주면서 “삶에 관해서는 충분하다.
이젠 죽음에 관해 다룰 필요가 있다”고 했다.

워홀 166 워홀, <모택동 Mao>, 1973,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잉크, 107-127cm.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과 정상회담을 갖자 워홀도 중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비록 실크스크린이지만 워홀은 아크릴이 젖었을 때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 터치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직접 손으로 그린 듯한 느낌을 주어 자신이 진지한 태도로 제작했다는 걸 구매자들이 알아주기를 바랐다.

워홀 165 사진: 파리의 갈리에라 미술관에서 열린 모택동 전시회 장면. 모택동의 초상으로 벽지를 만들어 붙이고 그 위에 모택동의 실크스크린 초상화를 걸었다.

워홀 168 워홀, <정물 Still Life>, 1976, 캔버스에 실크스크린과 아크릴, 208-183cm.
워홀이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소련의 상징인 망치와 낫이 벽의 낙서처럼 보였으며, 그것들 역시 팝의 이미지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워홀 167 사진: 1977년 6월 14일 백악관에서 열린 리셉션에 초대받은 워홀이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초상화를 선사하고 있다.
워홀은 지미 카터의 초상화를 세 점 제작했으며 정당에서 1만 달러를 받고 정치가들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워홀 169 워홀, <두개골 Skull>, 1976, 캔버스에 실크스크린과 아크릴, 28-25cm.
워홀은 파리의 고물상에서 해골을 구입해 조수로 하여금 사진을 찍게 한 뒤 실크스크린으로 떴으며, 『인터뷰』지에서 두개골을 파시즘의 상징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워홀 150 워홀, <외로운 카우보이들 Lonesome Cowboys>, 1967, 영화의 한 장면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내용의 이 영화는 본래의 제목이 <라모나와 줄리앙>이었지만 <외로운 카우보이들>로 바꿨다.
가운데 비바가 라모나 역을 맡고, 오른편의 탐 홈퍼츠가 줄리앙 역을 맡았으며, 왼편의 테일러 메드가 라모나의 간호사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음란성으로 인해 F.B.I.의 조사를 받았고 TV에서는 이 영화를 ‘성범죄’로 단정했다.
워홀은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워홀 123 사진: 1964년 4월 21일 뉴욕 스테이블 화랑에서의 개인전 개막일.
워홀이 브릴로 상자 조각품들 사이에 서 있다. 화랑은 마치 식품창고와도 같았다.

워홀 143 사진: 1966년 4월 뉴욕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소개된 <은색 구름>이 둥둥 떠 있는 전시장 장면. 제작을 도운 조수 클루버는 <은색 구름>을 구입한 사람에게 향후 10년 동안 A.S.를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카스텔리는 조그만 수소통을 끼워 구름 한 점에 50달러에 팔았다.

워홀 144 워홀, <암소 벽지 Cow Wallpaper>, 1966, 종이에 실크스크린, 각각 76-112cm.
워홀은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은색 구름>과 함께 <암소 벽지>를 화랑 벽에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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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요제프 보이즈는 1965년 11월 26일 뒤셀도르프의 슈멜라 화랑에서 <어떻게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How to Explain Paintings to a Dead Hare>를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는 1974년 뉴욕에서 소개한 <늑대 Coyote>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관람자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화랑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밖에서 스크린을 통해 그의 연기를 관람할 수밖에 없었고, 더러는 창문을 통해 직접 본 사람도 있었다.
그는 머리에 꿀과 금색 잎사귀를 바르고,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다가는 벽에 걸린 칠판으로 가서 무엇인가를 쓰면서 아기처럼 가슴에 안은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에 관해 설명했다.
훗날 왜 산토끼에게 그림에 관해 설명했느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산토끼는 출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
내게 산토끼는 화신의 상징입니다.
산토끼는 사람만이 정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안으로 파고드는 것과 파서 건축하는 일입니다.
산토끼는 땅속에서 스스로를 구체화하며 이것이 중요합니다.
머리에 꿀을 바른 건 내가 생각을 갖고 명료하게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은 생각할 줄 알고, 꿀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지요.
꿀은 의심의 여지없는 생생한 물질이라서 이런 방법으로 나는 생각의 극적 본질에 다시 활력을 고취시켰던 것이랍니다.
사람의 생각은 생동하며, 비록 동일한 과정을 통해 죽음의 첨단까지 지적으로 만들지만 많은 것이 죽은 상태에 있으며, 정치학과 교육학 안에서 죽은 것과 다름없는 본질을 표현하고 있답니다.
금과 꿀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머리의 변형을 지적하며, 또 두뇌와 사고의 개념, 의식과 그림을 설명하는 데 필요로 하는 모든 수준의 것들을 지적합니다.
나는 뼈와 전자부품으로 만든 라디오를 펠트를 사용해 만든 걸상 아래에 설치했습니다.
나는 산토끼를 안은 채 이 그림에서 저 그림으로 옮겨가면서 절뚝거리는 걸음을 했는데 구두 바닥에 부착한 넓적한 자석 쇠붙이가 화랑의 돌바닥을 긁어 쇳소리가 나게 했습니다.”


쇳소리가 화랑을 진동했겠군요.


“나는 산토끼에게 무언으로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라디오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를 내며 파장을 내보냈기 때문에 쇳소리가 유일하게 화랑의 침묵을 깨뜨렸습니다.
이 장면이 아마 사람들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작용했을 줄 알아요.
이것은 사람들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설명하는 것에 대한 문제, 특히 예술과 창조적 작업에 관한 설명의 문제, 또는 신비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문제의 형상을 설명하는 문제를 아는 데 설명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무엇인가를 동물에게 설명하는 아이디어는 세계의 비밀에 관한 감각과 상상력을 일으키는 것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대로 죽은 동물조차도 사람의 고집스러운 이성적인 상황보다는 직관의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해한다’, 혹은 ‘납득한다’ 하는 말에 내재된 문제와 많은 표준들이 이성적 분석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이것은 이 같은 행위에 반응하는 것들의 뿌리가 되었으며, 왜 나의 기교가 특정한 지식이나, 대중 일부에 대한 특별한 반응대신 인간 힘의 영역 안에서 에너지의 극점을 찾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랍니다.
나는 창조적 영역의 복잡함이 밝게 드러나도록 시도했습니다.”


보이즈는 1966년 7월 7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위한 침투 동종, 가장 위대한 현대 작곡가는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아이입니다 Infiltration Homogen for Grand Piano, the Greatest Contemporary Composer is the Thalidomide Child>를 소개했다.
탈리도마이드는 수면제이다.
펠트로 씌운 그랜드 피아노는 현재 파리 퐁피두센터에 소장되어있다.
왜 피아노를 펠트로 씌웠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피아노 소리를 펠트 속에 가두기 위해서였어요.
우리가 알기로 피아노는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잠재력을 항상 가지고 있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경우 소리가 없는 것이 대신 가능한 일이며, 피아노의 운명은 침묵이 됩니다.
‘침투 동종’이라는 말은 펠트의 속성과 구조를 설명합니다.
펠트로 씌웠기 때문에 피아노는 소리를 걸러내는 능력과 더불어서 소리의 동종 저장이 되는 것이랍니다.
피아노는 사람의 운명과 한 쌍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 개의 적십자 마크를 피아노에 부착한 건 우리가 침묵하고 다음의 단계를 행동으로 취하지 않을 경우 긴급함과 진화 안에서 우리가 위협받게 된다는 걸 지적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이런 오브제는 토론을 위한 자극으로 이해해야지 미학의 물질로 받아들이면 곤란해요.”


작품의 기본적 테마가 선생의 작품에 의례 나타나는 집합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표현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선생의 말은 전쟁 중 부상당한 사실을 부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부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관점과 정신적 바탕을 강조하기 위해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부상은 회복과 치유로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고통은 개인의 능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상황과도 같은 것이며, 완전한 실존을 더욱 광범위하고 절대적인 영역으로 운반하는 것이기도 하답니다.”


보이즈는 1966년 10월 14일과 15일에 코펜하겐의 화랑 101에서 <유라시아, 시베리안 심포니 34악장 Eurasia, 34th Movement of the Siberian Symphony>을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는 복잡하게 구성되었지만 개념적으로 사고의 중요한 요소들이 동원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처음에 소개한 테마 ‘십자가의 분할 Division of the Cross’이 그렇다.


“난 무릎을 꿇은 채 마룻바닥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십자가를 칠판이 있는 곳을 향해 밀고 가다가는 일어서서 칠판에 십자가를 그리고는 반쯤 지운 뒤 아래에 유라시아 말을 적었습니다.
뭐라고 썼는지 지금 기억나지 않는데 직관으로 쓴 글이었어요.
나는 책략적으로 길고 가는 검정색 막대기에 묶은 다리와 귀가 뻣뻣해진 죽은 산토끼를 밀고 갔습니다.
산토끼를 가슴에 안고 칠판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산토끼 다리에 하얀 가루를 뿌렸으며, 온도계를 입에 넣었고, 튜브를 불어 넘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칠판 옆에 선 채 산토끼의 귀를 흔들면서 쇳조각을 부착한 구둣발로 마룻바닥을 마구 두들겨 소리를 냈어요.”


이 퍼포먼스의 아이디어는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산토끼가 나와 함께 주연을 맡은 것이 아이디어였습니다.
내가 산토끼의 귀를 기다란 막대기로 세운 이유는 <지방 의자>와 <지방 코너>에 나타난 각도를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마지막으로 내가 칠판에 적은 건 두 개의 특별한 온도였는데 하나는 펠트의 온도 32도였고, 다른 하나는 지방의 온도 21도였어요.”


직관이 작품에서 중심적 구조를 이루었던 것 같군요.


“직관은 생각의 성격과 양을 정복하는 이성 최고의 형태로 지각적 감각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이성적 분석 그 이상으로 나아가도록 해줍니다.”


보이즈는 1966년 12월 15일 예술가들의 음악과 연기의 도움을 받아 <만레사 Manresa>를 발표했다.
이 작품의 테마는 직관이 이성 최고의 형태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무로 된 십자가 절반에 펠트를 씌우고, 전기장치, 로즈메리 페인트와 잡동사니를 넣은 나무상자를 사용했다.


“난 십자가 절반에 ‘엘리먼트 1 Element I’이라고 적고 나무상자에는 ‘엘리먼트 2’라고 적었습니다.
십자가를 절반만 사용한 건 현대인의 분열된 자아를 상징하기 위해서였는데 정신적인 존재가 아닌 이성적인 존재를 뜻하며, 나무상자는 직관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퍼포먼스 마지막에 그는 테엽을 감은 새를 공중에 날렸는데 자유를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만레사는 스페인 동네 이름으로 예수회의 창시자 로욜라의 성자 이그나시우스가 저서 <정신적 훈련 Spiritual Exercises>을 집필한 곳이다.
설치가 자서전적 기독교의 명상과 몸을 정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나는 개인이 고통으로부터 재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병든 사회도 치유되기를 바랐습니다.
직관이 이성의 최고 형태임을 말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
<만레사>는 <어떻게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와 같은 주제의 작품입니다.
관람자에게 직관과 함께 하는 지성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걸 말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사용한 지방과 꿀은 창조적 에너지에 비유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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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즈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





지금까지 보이즈의 사상에 관해 살펴보았으며 이제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 관해 알아보도록 한다.


루돌프 스타이너의 영향

보이즈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루돌프 스타이너Rudolf Steiner(1861-1925)이다.
그는 런던으로부터 신지학을 받아들여 독일 신지학 소사이어티Theosophical Society를 창설했는데 신지학자들과 의견충돌이 잦자 협회를 떠났으며, 1912년에 따로 인류학지혜 소사이어티Anthroposophical Society를 창설했다.
스타이너는 사람에게 물질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정신적 지각능력이 있는데 이 능력은 현대 서양문화에 의해 한정된 물리학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이즈에게 나타난 이런 사고는 스타이너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보이즈는 정신적 지각능력으로 농업, 예술, 경제, 의학, 그리고 교육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스타이너는 그리스도가 인간 창조성에 살아있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사고 또한 보이즈에게 영향을 끼쳤다.
보이즈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건 정신적 지각능력을 근거로 한 말이었다.


보이즈는 스타이너의 장미십자주의Rosicrucianism 사상에 심취했는데 장미십자주의란 1484년 크리스천 로젠크레우즈Rossenkreuz가 독일에서 창설했다고 전해지는 연금 마법의 기술을 말한다.
스타이너는 현대인에게 심원한 지식보다는 장미십자주의의 신지학 또는 신비주의가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와 과학 모두가 편협하게 체계화됨에 따라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데 실패한 것을 예술이 대신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사고는 그대로 보이즈에게서 전수되었다.
보이즈는 기독교 사상을 도입해서 변형시켜서 원래의 모습을 유지시키려고 했다.
그가 기독교 주제들 피에타, 십자가처형, 슬픔에 빠진 남자 등을 주제로 선택해 작품을 제작한 건 기독교 원형을 회복하려는 사고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십자가의 경우 예를 들면 그는 일반적 상징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표현했다.
그는 예술을 정신적, 사회적으로 재활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가 자신의 조각이론이 “예술의 개념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말한 건 예술이 정신적, 사회적으로 재활의 기능을 지녔음을 의미했다.
1960년대 독일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이해한다면 보이즈의 이러한 혁명적 예술 개념이 그의 시대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통행할 수 없도록 동독과 서독에 장벽이 세워진 건 1961년이었고, 동독과 서독은 철학, 종교, 경제, 그리고 정부가 각각 달랐다.
보이즈는 십자가를 상징물로 사용하여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어 보다 건강한 사회로 구성해야 함을 역설했다.


1950년대 말부터 그의 드로잉에서 우중충한 붉은 빛이 감도는 브라운색 십자가가 수 없이 나타났는데 이런 상징은 향후 예술가로서 그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는 이 십자가를 “브라운 십자가 Braunkreuz”로 불렀다.
1960년대 초부터 브라운 십자가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좀더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이즈 브라운”이라고 불렀는데 보이즈 브라운은 지방 그리고 펠트와 함께 인생과 예술이 연결된 보이즈의 자필적인 매체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적십자Red Cross는 상처가 났거나 병든 사람을 긴급하게 치료하는 국제적 기구의 상징인데 반해 보이즈의 브라운 십자가는 기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적십자를 창설한 사람은 헨리 두난트Henry Dunant로 그는 예술가였다.
그는 피아노를 불에 태우는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보이즈는 펠트로 피아노를 뒤집어씌워서 형태만 나타나도록 했는데 이 작품은 두난트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그는 두난트로부터 예술의 기능에 관해 영향을 받았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장미, 혹은 장미빛을 그리스도의 피로 상징했는데 보이즈는 장미빛을 브라운색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복잡한 변형으로 브라운색은 나치의 대량학살을 상기하게 했으며, 히틀러의 급습 군대를 사람들이 “브라운 셔츠 Braunhemd”라는 별명으로 불렀고, 참담했던 당시를 독일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브라운 과거 Braun Vergangenheit”라고 말한다.
브라운 십자가는 기독교 상징 외에도 나치주의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한 군국주의의 상징이 어울려진 요소였다.
그는 기독교가 변질되어 유물론과 같아졌다고 믿었으므로 기독교에 신지학을 보태 기독교의 본질을 복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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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의 영향





보이즈는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난 제나 그룹Jena Group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제나 그룹은 1798년부터 1803년까지 존속한 매우 단명한 그룹이지만 이 그룹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낭만주의 학파였다.
독일 새 문화를 창조한 이 그룹에는 프리드리흐 슐레겔Friedrich Schlegel과 그의 동생 아우구스트 빌헬름August Wilhelm 그리고 그의 아내 캐롤린Caroline이 있었고, 시인 루드빅 틱Ludwig Tieck이 있었으며 그들 모두 제나에 살고 있었다.
보이즈는 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철학자 셀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1775-1854)이 제나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역사학자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1759-1805)가 또한 이 대학에서 가르쳤고, 나중에 소설가 노발리스Novalis(본명은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Friedrich von Hardenberg, 1772-1801)가 이곳에서 가르쳤는데 보이즈는 그들 모두에게 관심이 많았다.
제나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 바이마르Weimar이며 그곳에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가 살고 있었다.
괴테와 쉴러는 낭만주의 그룹을 형성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들은 낭만주의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었으며, 보이즈가 존경한 사람들이었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워야 한다는 것은 보이즈가 낭만주의 작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이었으며 인간의 이상주의와 자연의 실재가 조화로워야 한다는 괴테의 주장을 그가 받아들였다.
괴테는 자연에서 삶의 형성과 동력주의를 발견했고 보이즈 또한 자연에서 발견하려고 했다.
보이즈는 과학의 기계주의와 수학적 개념이 유기적 힘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반되는 힘의 양극성을 통해서 발전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괴테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괴테는 예술이 작용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로서의 과학을 주장하였으며 이런 점을 보이즈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보이즈는 괴테와 노발리스의 작품을 탐독했다고 했는데 노발리스 또한 예술과 과학의 평행주의를 주장한 인물이다.
노발리스는 “평범한 것을 우수한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신비의 출현을 보며,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과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하라”고 했으며 노발리스의 말을 보이즈가 받아들였다.
노발리스는 시인의 영혼이 자연 또는 실재와의 균형 또는 조화로운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는데 예술가가 자연에서 정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고, 실재 오브제 안에서 혼을 발견하며, 일상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신비를 발견하는 걸 의미했다.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닌데 과학자는 자신을 지식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자신의 가정을 실험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알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가정이 유용하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그래서 괴테와 노발리스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예술과 과학의 평행주의를 주장한 것이며 이 평행주의가 보이즈에게 영향을 주었다.


보이즈가 스타이너의 저서를 읽을 때 순수 지식의 형상과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보이즈는 동양 철학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서양 사람들은 외면적으로 나타난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증명을 요구하지만 동양 사람들은 단순한 관망으로도 삶의 흐름을 안다고 생각했다.
동양 사람들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증명하는 걸 원치 않는다.
노발리스와 스타이너는 자연을 모든 수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형상들의 보물로 보았으며 이런 점을 보이즈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보이즈는 자연에 인간을 위한 은유가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상징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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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월전미술관에서 '보이즈와 바젤리츠'란 제목으로 강의한 내용입니다.


보이즈와 바젤리츠

독일 미술

20세기에 들어서 독일 예술가들은 외부의 영향을 받았는데, 중세의 목판화, 유겐트슈틸Jugendstil로 알려진 아르누보, 프랑스의 상징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이었다.
아르누보는 19세기 말에 들어와 유겐트슈틸이란 명칭으로 뮌헨을 중심으로 성행했다.
아르누보Art Nouveau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불린 명칭이었으며, 영국, 미국, 러시아에서 모던 스타일Modern Style로 불렸고, 독일에서는 유겐트 양식,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로 플로레알레Stilo Floreale, 스페인에서는 모데르니스모Modernismo, 오스트리아에서는 분리파Sezessionsstil, 혹은 빈 양식으로 불리었다.
새로운 양식으로 등장한 아르누보는 자연주의, 자발성, 단순성 및 장인적 완전성을 추구했으며 꽃, 잎 따위의 식물을 곡선으로 추상, 장식하는 것으로 특색을 이루었다.
아르누보의 기본 개념은 총체예술이었다.
계단, 문틀, 발코니난간, 잔, 램프, 가구, 도자기, 접시, 숟가락, 벽지, 벽에 걸리는 그림, 서가에 꽂히는 책 등으로 새로운 디자인에서 제외될 건 하나도 없었다.
이는 아르누보가 전통 위계의 구별, 즉 미술을 고급과 저급, 다시 말해서 순수미술과 공예로 나누어 평가하는 태도와 완전히 절연했음을 의미했다.
아르누보는 공방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뮌헨, 다름슈타트, 베를린, 드레스덴, 바이마르 등지에서 예술가와 공예가들이 작업 집단을 결성했고, 이들이 결성한 단체는 독일공작연맹, 미술공예합동공방, 독일공방, 예술가마을 등이었다.
유겐트슈틸은 단명했지만 1890-1910년에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유행했다.

독일 회화에 기여한 개별적 화가로는 인상주의와 일본 무로마치室町 시대부터 에도江戶 시대 말기(14-19세기)에 서민생활을 기조로 제작된 회화 우키요에浮世繪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를 구사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90), 일찍이 1892년에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열고 물의를 일으킨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 “단순한 회화에 저항하는 사상가”로 자처하며 인상주의를 배척한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정치의 분열로 베를린은 파리와 같은 예술의 중심이 되지 못했으며, 독일 미술은 지역적 특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인상주의가 독일에 소개된 건 1900년경이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유행했다.
20세기에 들어와 가장 전형적인 독일 미술운동은 표현주의였다.
이 운동은 브뤼케Die Br&uuml;cke 그룹(다리파)과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의 주도 하에 뮌헨 신미술가동맹(1909년에 결성)에서 이탈한 화가들로 1911년에 구성된 블라우에 라이터Der Blaue Reiter 그룹(청기사)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드레스덴에서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 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1884-1976), 에리히 헤켈Erich Heckel(1883-1970) 등이 중심이 되어 1905년에 결성된 브뤼케는 프랑스의 포비슴Fauvisme(야수주의)에 호응한 운동으로 반 고흐, 고갱, 뭉크 표현주의 회화에 열중했으며 흑인 조각에서 영감을 받았다.
야수주의가 순색과 조형을 다룬 데 비해 브뤼케는 내적 충동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프랑스 표현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차이이다.
표현주의는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1920년대에 사회적인 풍자와 캐리커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노이에 자흐리히카이트) 운동이 전면에 등장했으며 이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가 조지 그로스George Grosz(1893-1959)와 오토 딕스Otto Dix(1891-1969)였다.
두 사람은 베를린 다다에 가담한 적이 있다.
신즉물주의는 표현주의가 주관의 표출에만 전념하자 대상의 실재 파악을 등한시하고 비합리주의적 경향으로 흐르는 데 반발하여 즉물적인 대상 파악에 의한 실재감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로스는 1차 세계대전 후 좌익 입장에서 독일의 군국주의와 부르주아지에 대해 통렬한 비판자가 되었다.
한편 노동자의 아들 딕스는 사회의 그늘에서 사는 인간의 비참함과 추악함을 폭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크라나흐’란 별칭을 얻었다.
르네상스 양식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1472-1553)의 작품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고전주의 정신을 파악하지 못한 크라나흐는 누드화에 에로티시즘을 부여했다.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가 1919년 바이마르에 공예학교와 조형예술대학을 하나로 합쳐서 설립한 미술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집을 짓다’라는 뜻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킨 것이다)는 1925년 데사우, 1932년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기하학적 추상, 기능주의, 구성주의, 기계 미학의 중심지였다.
짧은 시기에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이며, 디자인과 산업기술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차별한 이전의 위계를 붕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바우하우스의 주요 목표는 세 가지로 첫째, 미래에 화가, 조각가, 공예가들이 그들의 모든 기술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협동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예술을 통합하고, 둘째, 공예의 지위를 순수미술이 누렸던 것만큼 상승시키며, 셋째, 공예와 산업을 이끌어가는 인물들 사이의 지속적인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목표는 1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나라에서 학교가 살아남기 위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모든 학생은 6개월의 기초과정을 통해 형상과 색채의 원리를 배우고, 다양한 매체에 정통하며, 각자의 창조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 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공방에서 기술을 습득하고 훈련했다.
목공예, 금속작업, 스테인드글라스, 직조, 타이포그래피 등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각각의 공방은 장인인 베르크마이스터Werkmeister와 미술가인 포름마이스터Formmeister라는 두 명의 교사가 이끌어나갔다.
포름마이스터로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를 비롯한 몇몇의 화가들이 참여했다.
평균적으로 바우하우스에는 늘 100여 명의 학생이 있었고, 14년의 역사에 등록한 학생의 수는 약 1,250명이었다.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1888-1976)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하고 교사가 되었다.

바우하우스가 폐교된 뒤 국가 사회주의 정권은 모든 혁신적 미술을 퇴폐미술로 규정하여 금지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데사우가 동독에 편입되면서 바우하우스 건물은 유기된 채 방치되었다가 1976 데사우에서의 개교 50주면을 기념하며 이전의 모습 그대로 복구되었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디자인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많은 미술 운동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정치적 성향의 띠거나 개념미술 경향으로 편중되었다.
전후 세대 화가들은 처음에는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특히 오토마티즘을 실험했다.

요제프 보이즈
요제프 보이즈(Joseph Beuys, 1921-86)를 가리켜 천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바위꾼, 병든 설교자, 무당, 또는 교활한 익살광대에 불과하다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상반되는 비평이 그에게 쏟아지는 것일까?
이는 그가 많은 사람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특별한 인생을 심포니를 연주하듯이 적나라하게 시위한 예술가들로 뒤샹과 보이즈 그리고 앤디 워홀이 있다.
이들 모두에게는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들에게는 신화로 보일만한 인생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작품보다는 사상이 두드러지며 그들의 회고전이 별로 열리지 않는 것도 작품보다 사상이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보이즈는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선구자로 알려지고 있다.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미술운동 아르테 포베라는 동시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상황미술, 개념미술 및 일부 미니멀아트와 유사하다.
1970년에 ‘아르테 포베라’ 전시회를 기획한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는 아르테 포베라가 전통 미술 형식이나 도상의 사용을 거부하고, 조직화되지 않은 해프닝을 표현방식으로 사용한 것을 특징으로 꼽았다.
첼란트가 꼽은 특징은 보이즈의 표현방식을 설명하기에 적절하고 그가 아르테 포베라에 관해 말한 다음의 내용 또한 보이즈의 작품을 설명하는 데 적절해 보인다.
“아르테 포베라는 주로 미술 매체의 물질적인 속성 및 미술 재료의 변하기 쉬운 성질과 관련이 있는, 근본적으로 반상업적이고, 불안정하며, 평범하고, 반형식적인 미술을 표방한다. 실제의 재료와 전체 현실에 대한 미술가의 참여를 중시하며, 또 그런 현실을 이해하기는 힘들더라도 민감하고 지적이며 교묘하고도 개인적인 강렬한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미술가의 시도를 강조한다.”

요제프 보이즈의 신화
보이즈의 신화는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의 전투기가 러시아 군인들의 포격을 맞고 크리메아에 추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라디오 기술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1941년 코니그라츠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았다.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한 그는 포격으로 추락한 후 의식을 잃고 눈 속에 며칠 묻히고 말았다.
독일 군인들이 그를 구출하려고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눈 속에 처박힌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구출작전을 포기했다.
보이즈는 냉동된 상태에서 거의 저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행운의 여신이 그를 살려주었다. 보이즈는 훗날 회상했다.

루크레지아 데 도미지오 두리니Lucrezia De Domizio Durini의 <The Felt Hat Joseph Beuys a Life Told>(1991), english edition in 1997를 참조할 것.
“그때가 1943년 겨울이었습니다. JU-87기를 타고 정찰 중이었는데 러시아 군인이 쏜 대공포를 맞고 폭풍 속에 추락했습니다. 전투기는 곧 화염에 싸였고 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눈 속 깊이 파묻혔고 온 몸이 언 상태였어요. 난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타타르족이 나를 발견했습니다.”

타타르족은 그를 자신들의 캠프로 데려다가 그의 몸에 지방을 덮고, 펠트로 몸을 말아서 체온이 회복되도록 했다.
타타르족은 크리메아의 유목민으로 러시아와 독일 국경 부근에 거주하는 부족이다.
그때의 체험은 보이즈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놓았다.
예술가가 되게 한 것이며, 지방 펠트를 조각의 재료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새로운 인생의 자원으로서의 창조성
보이즈에게 예술은 개념이라기보다는 신념에 가까웠고, 거의 종교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새로운 인생의 자원으로 창조성을 꼽았으며, 창조성으로부터 존재의 상황을 확대해나갔는데 창조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창조”라는 말은 그의 미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개념이다.

보이즈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했다.
그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미장이 이모 씨가 화가이고, 목수 서모 씨가 조각가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본 청소부가 웬만한 시인보다도 훌륭한 시인이었다고 말했는데 시를 한 줄도 쓰지 않은 청소부, 어쩜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청소부를 가리켜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한 데서 그가 시인을 시의 범주가 아닌 일반적 의미의 예술의 범주 안에서 이해했음을 본다.
일반적 의미의 예술이란 물론 창조가 가능한 모든 영역을 뜻하는 것이다.
보이즈는 예술을 기존의 관념을 넘어서 창조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미쟁이 이모 씨의 벽돌 쌓는 기술과 목수 서모 씨의 나무 다루는 솜씨는 예술가의 작품 만드는 기술과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보이즈는 창조성 여부에 따라서 예술가의 자격을 판단하려고 했다.
그는 예술가의 90% 가량이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했는데 기회주의자 예술가들에 비한다면 미장이, 목수, 또는 청소부의 창조성이 뛰어난 예술을 칭찬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될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그의 주장은 개인의 잠재적 창조성의 개발이 시급함을 의미한 것이지 말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서의 예술가라는 뜻은 아니다.
마드리드의 청소부가 시인이라고 말할 때, 감자를 재배하는 농부가 예술가라고 말할 때, 그는 청소부와 농부의 창의력을 지적한 것이며, 반면 대부분 기회주의자 예술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보이즈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것조차 의식 있는 행위라면 예술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만큼 창조성이 중요하다는 걸 역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창조성이 있다고 믿었으며, 문제는 창조성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교육시키느냐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예술가들이 주장하는 자신들의 특수계급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특수계급이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창조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술가이기 때문에 특수계급이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창조성과 자유는 동일한 의미였다.
자유는 그에게 첫째, 개인이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행동이었고, 둘째, 주변 사람들 행동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의미했다.
그는 조화로운 관계를 더욱 강조했다.
개인과 대중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가치 있는 사회적 관계로서 보이즈는 개인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대중에게 소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는 늘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유가 창조이고, 창조가 곧 자유였다.
그는 창조성을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생각, 느낌, 그리고 의지였다.
이 세 가지는 그의 조각이론이 되었다.
그에게 창조성이란 이 세 가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첨가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가 창조성을 사람에게 한정된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동물과 식물에게도 적용한 것인데 창조성을 에너지로 이해한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신비주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를 현대판 무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그의 폭넓은 창조성의 개념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에게 정신은 에너지였으며, 에너지 혹은 정신을 늘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논리적으로 유물론을 비난하게 된 것이다.

예술은 혁명이다
보이즈에게 예술은 혁명으로 성취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는 “우리가 혁명입니다”라고 했는데 혁명의 목적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있었다.
그가 “우리가 혁명입니다”라고 말한 건 “모든 사람이 예술가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로 혁명은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일어나야 함을 강조한 것이며, 창조가 예술가라는 특수계급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했다.
그는 예술로서만 사회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예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제공하고, 내면에 있는 창조성을 개발시켜준다고 믿었다.

<우두머리 The Chief>
보이즈는 1964년 12월 1일에 <우두머리 The Chief>라는 제목으로 가로 세로 5미터 8미터 크기의 르네 블럭 화랑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는 이 퍼포먼스에 관해 말했다.
“내게 <우두머리>는 소리를 내는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화랑 바닥에 대각선으로 누워 펠트로 몸을 말고 마이크로폰을 장치했습니다.
확성기/스피커를 화랑 오른쪽 벽에 매달았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씩씩거리는 소리, 호흡하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 한숨 쉬는 소리,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소리, 우우, 쉬쉬 소리, 알파벳을 웅얼거리는 소리 등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들은 본래의 소리들로 원시인들이 낸 소리들입니다.”

<우두머리>의 상징주의에 관해 말했다.
“이 같은 연기 배경에는 늘 이론이 깔려있습니다.
음향적으로 반송파carrier wave를 말뜻에 관한 자료 없이 에너지의 운반 장치로 사용한 것입니다.
동물왕국에서 이따금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소리를 파동이 전달했습니다.
파동은 형상이 없고, 말뜻이 형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소리는 내가 의도적으로 동물들의 소리를 흉내 낸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이 만든 형상보다는 존재하는 다른 형상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에너지를 생산해내는 것들의 연속체, 각기 다른 에너지와 능력을 가진 다른 종족들과 협력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내 말은 펠트 안의 나의 존재는 반송파의 것, 나 자신이 속한 종족 의미론의 자주적 범위를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란 말이지요.
그건 옛날 입관의식을 가장한 죽음의 형상에 병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덟 시간 동안 죽은 사람처럼, 공허, 무감각, 밀실공포증과 아픔에 특히 무감각하게 행동하는 상황에서 생기는 당혹감을 피하려고 여러 차례 실습을 거친 끝에 발표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행위가 나로 하여금 훗날 더욱 과격한 행위를 하게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때의 행위는 죽음이며, 진정한 행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이즈의 조각이론은 불확정된 혼돈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혼돈은 그에게 가공하지 않은 물질의 상태, 또는 의지의 힘이었고, 상징적으로 말하면 열에 해당했다.
정돈은 물질의 상태가 과정 속에 있는 걸 뜻하며, 형상을 가지는 걸 뜻하고, 차가운 성격을 지니는 것을 뜻한다.
혼돈이 정돈으로 변하는 과정은 에너지가 필요한 운동을 생산하는 걸 뜻하며, 이 과정에서의 동력주의를 그는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에게 혼돈은 불확정한 상태이며, 유기적 상태이고, 열이며, 확산이고, 본성이며, 의지이고, 무의식이며, 그리고 직관이었다.
반면 정돈은 확정적인 상태이고, 투명한 상태이며, 차갑고, 모순되고, 정신이며, 지성이고, 의식이며, 그리고 사고였다.
현상학적으로 보면 혼돈과 정돈 사이에 끊임없는 흐름이 있다.
그가 사용한 조각 재료들은 혼돈에 속한 것들이고, 그것들을 정돈함으로써 감성, 의지, 그리고 사고를 나타냈다.
처음에 지방을 조각의 재료로 사용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지방은 혼돈을 상징하는 물질로 그것에 열을 가하면 형상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차가운 곳에서 지방은 단단해진다.
그가 선호한 물질 펠트 또한 혼돈의 물질로 열, 혹은 에너지가 축적된 그 자체 무형의 물질이다.

지방을 오브제로 사용한 이유에 관해 말했다.
“지방을 처음 사용한 의도는 토론을 자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들유들하게 생긴 지방이 온도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 관심사였습니다.
유들유들하게 생긴 건 심리적으로 자극하는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유들유들한 것이 내면의 작용, 느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내가 토론하기를 바랐던 건 인간의 창조성과 생산에 의한 조각과 문화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조각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으므로 예술과 무관하지만 인생과는 근본적으로 관련 있는 것을 조각의 재료로 사용하려고 지방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
<지방 의자>는 <지방 코너 Far Corner>와는 달리 기하학적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혼돈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어요.
지방으로부터 잘라낸 것처럼 가장자리 끝이 자연적인 형태였습니다.
지방을 의자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나는 이 점을 강조하려고 했으며, 의자는 사람의 몸에 대한 상징물이었습니다.
<지방 의자>는 생식기와도 같으며, 화학적 변화, 심리적으로 힘과 의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보이즈는 존재하는 두 극단을 에너지가 중재하여 필요한 운동을 만든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예술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두 극단이란 혼돈과 질서, 불확정과 확정, 유기체와 결정체, 열과 냉각, 확장과 수축, 자연과 정신, 의지와 지성, 잠재의식과 의식, 직관과 사고 등이었다.
이러 두 극단 사이를 에너지 또는 창조성이 운동을 일으켜 화해시키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고 보았으며, 현상학적으로 두 극단 사이에는 끊임없는 흐름이 있고, 인간의 느낌, 의지와 생각이 이 흐름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보이즈는 열의 상징을 정신으로 이해했으며, 정신을 사회를 개혁하는, 혹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혁명의 원리로 삼았다.
그는 인간의 삶의 발전에 정신이 필요함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구리copper를 오브제로 종종 사용하였는데 그에게 구리는 전기와 열을 상징하는 물질이었다.
그는 구리를 에너지, 풍성함, 사고를 긴급하게 전하는 물질이로 사용했다.
반면 그에게 쇠는 저항하는 힘이 있는 수동적 물질이었다.
그래서 쇠로 연장을 만들고 커다란 구조물을 만들게 되는 것이라고 했으며, 쇠는 우리로 하여금 무기, 혹은 무력을 상기하게 한다고 했다.
그는 구리를 여성의 상징으로, 쇠를 남성의 상징으로 작품에 적용했다.
근본적으로 그는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를 동일하지 않다고 보았다.
남성적인 요소를 정신적 힘, 정적이고 완고한 것으로 이해한 반면 여성적인 요소를 정신적 풍부함, 부드럽고 긴급한 응답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 모두 역동적이고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보았다.
여성이 모든 분야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면서 가장 두드러진 능력으로 생명의 출산을 꼽았다.

보이즈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
존 케이지의 영향
보이즈는 플럭서스Fluxus 그룹을 통해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1912-1992)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 플럭서스라는 명칭은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이 명칭은 리투아니아 태생의 미국인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가 1962년 독일 헤센 주 비스바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플럭서스-국제 신음악 페스티벌’ 초청장 문구에서 처음 사용했다.
마키우나스는 1963년 뉴욕에 플럭서스 본부를 창설하고 이듬해에 딕 힉긴스Dick Higgins가 <섬싱 엘스 프레스 Something Else Press>를 설립해 1974년까지 플럭서스와 관련된 주요 서적들을 출간하는 등 이 시기를 전후해 플럭서스 운동이 전성기를 맞았다.

1950년대 말 케이지는 뉴욕의 뉴 스쿨New School에서 가르쳤는데 그로부터 수학한 제자들 중에 딕 힉긴스, 알랜 캐프로우Allan Kaprow가 있었다.
캐프로우가 1956년 뒤셀도르프에서 강연했는데 그때 보이즈는 그의 강연에 감동했다.
케이지는 음악을 변화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의 실재로 정의했으며,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은 음악적 문화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들보다 더 흥미롭다고 했다.
케이지의 이런 정의와 관념을 플럭서스 그룹 예술가들이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 그룹 예술가들은 일상생활의 오브제들을 악기로 사용했으며, 전통음악을 상징하는 악기 피아노 내부에 갖은 잡동사니를 삽입해 원래의 피아노 소리를 변형시켰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예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고자 했다.

케이지는 1957년에 자신의 음악 연주의 목적을 “목적 없이 연주하는 것”이라고 했고, “혼란된 상태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며, 또 창조행위 안에서 무엇인가를 향상시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일깨워주는, 즉 삶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일단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게 되면 너무도 멋진 일인데, 사람들은 그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한다”고 했다.
케이지는 모든 작품에서 통제적 요소를 배제하고 온전히 우연의 법칙에 따라 음악을 구성했다.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취향, 상상력, 추억과 아이디어를 없애고 “본래의 고유한 음향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서구의 전통 사상이 조만간 소멸되고 동양의 전통 사상이 서구인의 삶 속에 더 많이 자리를 잡게 될 것으로 보았다.

1950년대 말 케이지의 작품은 서독에 널리 알려졌으며 보이즈도 알고 있었다.
보이즈는 케이지로부터 전통주의에 대항하는 자유로운 정신의 창작으로부터 감동을 받았으며, 백남준으로부터 연기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알게 되었다.
백남준은 1962년 뒤셀도르프 캄메르스필레에서 <음악의 네오다다 Neo-Dada in the Music>를 소개했는데 그날 보이즈는 객석에 앉아 그의 연기를 관람했고, 그 후 백남준과 20여 년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몇 차례 함께 공연을 한 적도 있다.
캐프로우와 백남준 그리고 플럭서스 그룹 예술가들을 통해서 케이지의 영향은 보이즈의 남은 인생에 계속 작용했는데 그가 1969년에 제작한 <혁명 피아노 Revolution Piano>는 케이지의 영향을 한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보이즈는 피아노 전체를 장미꽃으로 장식했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클랭, 케이지, 백남준은 선불교의 영향을 받았고, 보이즈는 기독교와 신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 모두 유물론을 초월할 수 있는 정신을 강조했다.

보이즈는 플럭서스에 관해 훗날 말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추구한 건 세 가지였는데 그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아이디어의 역사와 관련된 어떤 실질적인 것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였는데 이것은 세 가지 가운데 비중이 적게 다루어졌습니다.
플럭서스 운동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나 혼자 이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어요.
둘째, 다다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 것인데 백남준과 같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셋째, 초현실주의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 것인데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이 이 점을 특히 강조했지요.
정치적 중요성은 아주 미미했습니다. 비상한 재능을 가진 마키우나스가 유일하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그는 어떻게 변혁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지적하지 못했답니다.”

이브 클랭의 영향
보이즈가 브라운색으로 십자가를 만든 건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뒤셀도르프의 예술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이 시기에 제로 그룹Zero Group 예술가들이 활약했는데 그들은 프랑스 예술가 이브 클랭Yves Klein(1928-62)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이었다.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클랭의 전람회를 관람하고 감동한 예술가들이 1957년에 제로 그룹을 결성했는데 그들은 오토 피네Otto Piene, 하인cm 마크Heinz Mack, 그리고 군터 우엑케르Uecker였다.
제로 그룹 예술가들은 키네틱 아트와 루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그룹은 1960년대 초 다양한 구성주의 경향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신경향New Tendency 운동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공동으로 실험적 작업을 했다.
신경향 예술가들의 공통점은 작품의 비개성화,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과학기술의 사용, 그룹 활동과 익명성 예찬, 빛, 소리, 실제 움직임과 같은 직접적인 자극 이용, 전통적인 미학 기준에 대한 성상 파괴적 태도 등이었다.
그들은 앵포르멜, 타시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표현적 추상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클랭은 신경향의 위대한 선구자였다.

클랭과 마찬가지로 제로 그룹 예술가들은 정신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모노크롬 회화를 선호했다.
1957년 뒤셀도르프의 슈멜라 화랑에서 클랭의 커다란 캔버스 그림이 소개되었는데 명료도가 강한 파란색이 전체적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 파란색을 사람들은 “국제적인 클랭 블루 International Klein Blue”라고 불렀다.
보이즈는 클랭의 파란색 그림을 보았으며, 모노크롬의 효과를 그때 알았다.
클랭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제로 그룹 예술가들은 흰색을 선택했다.
그들은 흰색으로 물질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클랭의 파란색은 보이즈에게 브라운색의 아이디어를 갖게 했다.
클랭도 정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정신이 유물론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에서 수년 동안 유도를 배운 클랭은 그곳에서 선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클랭은 1958년에 ‘공허 전람회 Exhibition of the Void’를 선보였는데 텅 빈 화랑으로 관람자들이 오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허를 보고 알게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순수 공간의 실재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는데 물론 선불교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그의 파란색 그림도 마찬가지의 미학을 지녔다.
보이즈는 이런 미학을 클랭에게서 발견했으며, 파란색 모노크롬의 효과가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이즈는 브라운색의 개념을 확장하여 드로잉에서 뿐만 아니라 조각에도 브라운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브라운색은 흙, 마른 피색, 녹, 또는 비물질의 실재를 상징하는 똥을 환기시켰다.

게오르그 바젤리츠와 ‘러시아 페인팅’
작센의 도이치바젤리츠 태생으로 동베를린에서 학업을 시작했지만 1956년에 서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그때부터 본래의 성인 케른Kern 대신 태어난 곳의 지명을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휴스는 바젤리츠를 가리켜서 “평범한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높이 평가된 미술가의 전형적인 예”라고 평가했다.

1. 그림을 거꾸로 건 것은 익살일 뿐이다.
주요 일간지를 비롯하여 다양한 매체가 바젤리츠를 ‘거꾸로 된 그림의 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작품을 거꾸로 건 것이 사건이라도 되는 양 국립현대미술관의 보도 자료에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바젤리츠는 “거꾸로 된 이미지는 더 잘 보일 뿐 아니라 보는 이의 눈을 향하게 된다”면서 “거꾸로 그려진 대상은 오브제로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오히려 회화에 적합하다”는 역설적인 말을 했다.
거꾸로 된 이미지는 제대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회화에 적합하다는 건 억지주장이다.
작품을 90도 혹은 180도 돌려서 거는 건 주목받기 위한 수단이다.
비구상과 언어를 작품의 재료로 삼는 개념주의가 성행하던 시기인 1969년에 구상을 옹호하기 위해 이미지를 거꾸로 구성하는 것으로 구상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그건 새로운 방법이랄 수 없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는 거꾸로 보인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방문한 사람은 경험하겠지만 목을 뒤로 오래 제쳐야 하기 때문에 작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1940년대 후반 잭슨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주위를 돌아가면서 그렸다.
한지에 수묵화를 그리는 화가들도 유사한 경험을 할 것이다.
바젤리츠의 익살은 이런 경험에서 착안된 것이다.
회화에 적합하게 하기 위해 이미지의 좌우를 바꾸고 식물을 공중에 매단 것을 파울 클레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거꾸로 된 그림의 작가’로서의 바젤리츠의 명성은 미술관과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며 우리의 관심 밖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다시 거꾸로 돌려놓고 회화의 적합성을 따져보아야 한다.

2. 신표현주의의 실상
바젤리츠는 독일 신표현주의의 선두주자들 중 하나다.
1970년대 말에 등장한 신표현주의를 신야수주의 혹은 격렬하고 폭력적인 회화라고도 하는데, 재료 처리방식이 매우 거칠며 짧은 기간에 제작하여 격렬함을 작가의 주관성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회화다.
독일과 미국에서는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란 용어로, 프랑스에서는 자유구상Figuration Libre으로, 이탈리아에서는 트랜스아방가르드Transavantgarde로 성행했으며, 공통점은 추상에 대한 반발로 구상을 고집하며 폭력과 죽음을 테마로 한 것들이 많다.
갤러리스트와 미술품수집가들은 신표현주의를 반겼으나 일부 평론가들은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관습적 기법을 일부러 무시하여 형편없게 만드는 걸 두고 비난했다.
일부 신표현주의 작품을 ‘배드 페인팅 Bad Painting’, ‘어리석은 페인팅 Stupid Painting’이라고 불렀다.

신표현주의가 부상한 배경을 둘로 꼽으면 하나는 개념주의 이후 회화의 위기를 맞아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몸부림이며, 다른 하나는 미술품을 소장하는 것이 삶을 향상시킨다는 것과 투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수요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미술품의 가격이 앙등하기 시작했다.
1979년의 미술품 가격과 1980년의 가격을 비교하면 서너 배는 보통이고 어느 화가의 경우는 다섯, 여섯 배까지도 상승했다.
오일과 다이아몬드에 쏠렸던 투자가들이 미술품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구입하지 못해 투자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의 구매수요가 급증한 것이 신표현주의가 성행하는 걸 용인했다.
신표현주의는 1980년대 들어서 회화가 위기를 맞았을 때, 다시 말하면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하고 모더니스트 회화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아서 단토의 말로 하면 예술이 종말에 이르렀을 때 약간의 지엽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신표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관적 표현의 한 수단으로 회화를 사용한 것이며 그것은 모더니즘의 종말 이후에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었더라도 그럴 수는 있었다고 이해되어진다.
1980년대에 신표현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잃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그려야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양식과 주제에 있어서 고갈되었다.
미술계의 심층구조에는 예술의 종말을 특징짓는 구조적 다원주의가 자리 잡았다.
미술활동 전 영역에 매체들의 연접성이 두드러졌다.
회화뿐 아니라 퍼포먼스, 설치, 사진, 대지미술, 개념적 구조물, 섬유작품, 온갖 장식적 패턴의 작품 등이 회화의 동료가 되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개인이나 그룹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미술가들은 모더니즘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다양한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건 한스 리히터가 반동이라고 말한 신표현주의들에 의해서 방대한 양의 대형화가 쏟아져 나왔으며, 그것들이 수요에 의해서 미술시장에서 소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젤리츠가 있었다.

3. ‘러시아 페인팅’(1998-2002)
바젤리츠의 명성은 1968년까지의 작품으로 족하다.
1957년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마르크스주의 예술과 미학을 공식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수용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반발하여 그린 그림들은 민속까지도 이데올로기의 이용되는 철저한 미술 말살에 반기를 든 것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1969년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고부터 그의 회화는 독창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의 얼굴을 거꾸로 그려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했으며, 그런 작품들이 1995년 미국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시작으로 하여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거꾸로 그려진 초상은 에밀 놀데를 상기하게 하는 감성적 표현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양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양식에 있어서 ‘러시안 페인팅’은 바젤리츠의 새로운 시도이지만 주제에 있어서는 과거 그가 집착했던 것들에 대한 변형일 뿐이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회화와 정치선전용 사진을 소재로 삼아 그것들을 매우 거칠게 신표현주의 특유의 배드 페인팅으로 만들면서 해학을 곁들였다.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선전했던 이미지들의 허구성을 새삼스럽게 드러내려고 한 것으로 개인적 향수가 벤 작품들이다.
또한 그의 창작의 한계를 보여주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69세로 그가 명성을 되찾기에는 너무 늙었다.

작품
<전쟁의 나날들 I>(1998):
화가가 빈 캔버스 앞에 앉아 있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사회에서 화가는 자신이 무엇을 그려야할지 알지 못한다. 과거에는 레닌이나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렸겠지만 이제는 그려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젤 앞에 앉아 있는 화가는 바젤리츠 자신이다.

<베를린의 승전일>(1998):
피아노를 치고 있는 군인의 모습이다. 소련군이 무식하고 좌변기도 쓸 줄 모르는 야만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선전용으로 그려진 이미지를 변형한 것이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가는 소련군이 피아노도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을 사랑하는 감성적인 남자라는 걸 선전하기 위해 그렸다. 그것을 바젤리츠가 기억 속의 희미한 이미지로 재생산했다.

<스몰니의 레닌>(1998):
레닌을 누드로 그리면서 평범한 노인으로 묘사한 것이다.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레닌은 편지를 쓰는지 연설문을 작성하는지 열심히 적고 있다.

<연단 위의 레닌>(1999):
이것은 연단 위에서 연설하는 유명한 사진을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시킨 것이다. 험상궂은 작은 얼굴에 몸집만 크게 부각시킨 작품이다.

<멕시코 혁명 II>(2001): 이것은 다섯 명의 공산주의자 초상이다.
왼편부터 ‘공산당선언’을 발표하여 각국에 혁명의 불을 지핀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적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엥겔스, 스탈린과 대립하여 국외로 추방된 뒤 멕시코에서 암살된 트로츠키,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 사상가 레닌, 레닌의 후계자로 소련공산당 서기장, 수상, 대원수를 지낸 스탈린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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