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월전미술관에서 '보이즈와 바젤리츠'란 제목으로 강의한 내용입니다.


보이즈와 바젤리츠

독일 미술

20세기에 들어서 독일 예술가들은 외부의 영향을 받았는데, 중세의 목판화, 유겐트슈틸Jugendstil로 알려진 아르누보, 프랑스의 상징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이었다.
아르누보는 19세기 말에 들어와 유겐트슈틸이란 명칭으로 뮌헨을 중심으로 성행했다.
아르누보Art Nouveau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불린 명칭이었으며, 영국, 미국, 러시아에서 모던 스타일Modern Style로 불렸고, 독일에서는 유겐트 양식,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로 플로레알레Stilo Floreale, 스페인에서는 모데르니스모Modernismo, 오스트리아에서는 분리파Sezessionsstil, 혹은 빈 양식으로 불리었다.
새로운 양식으로 등장한 아르누보는 자연주의, 자발성, 단순성 및 장인적 완전성을 추구했으며 꽃, 잎 따위의 식물을 곡선으로 추상, 장식하는 것으로 특색을 이루었다.
아르누보의 기본 개념은 총체예술이었다.
계단, 문틀, 발코니난간, 잔, 램프, 가구, 도자기, 접시, 숟가락, 벽지, 벽에 걸리는 그림, 서가에 꽂히는 책 등으로 새로운 디자인에서 제외될 건 하나도 없었다.
이는 아르누보가 전통 위계의 구별, 즉 미술을 고급과 저급, 다시 말해서 순수미술과 공예로 나누어 평가하는 태도와 완전히 절연했음을 의미했다.
아르누보는 공방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뮌헨, 다름슈타트, 베를린, 드레스덴, 바이마르 등지에서 예술가와 공예가들이 작업 집단을 결성했고, 이들이 결성한 단체는 독일공작연맹, 미술공예합동공방, 독일공방, 예술가마을 등이었다.
유겐트슈틸은 단명했지만 1890-1910년에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유행했다.

독일 회화에 기여한 개별적 화가로는 인상주의와 일본 무로마치室町 시대부터 에도江戶 시대 말기(14-19세기)에 서민생활을 기조로 제작된 회화 우키요에浮世繪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를 구사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90), 일찍이 1892년에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열고 물의를 일으킨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 “단순한 회화에 저항하는 사상가”로 자처하며 인상주의를 배척한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정치의 분열로 베를린은 파리와 같은 예술의 중심이 되지 못했으며, 독일 미술은 지역적 특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인상주의가 독일에 소개된 건 1900년경이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유행했다.
20세기에 들어와 가장 전형적인 독일 미술운동은 표현주의였다.
이 운동은 브뤼케Die Brücke 그룹(다리파)과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의 주도 하에 뮌헨 신미술가동맹(1909년에 결성)에서 이탈한 화가들로 1911년에 구성된 블라우에 라이터Der Blaue Reiter 그룹(청기사)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드레스덴에서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 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1884-1976), 에리히 헤켈Erich Heckel(1883-1970) 등이 중심이 되어 1905년에 결성된 브뤼케는 프랑스의 포비슴Fauvisme(야수주의)에 호응한 운동으로 반 고흐, 고갱, 뭉크 표현주의 회화에 열중했으며 흑인 조각에서 영감을 받았다.
야수주의가 순색과 조형을 다룬 데 비해 브뤼케는 내적 충동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프랑스 표현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차이이다.
표현주의는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1920년대에 사회적인 풍자와 캐리커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노이에 자흐리히카이트) 운동이 전면에 등장했으며 이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가 조지 그로스George Grosz(1893-1959)와 오토 딕스Otto Dix(1891-1969)였다.
두 사람은 베를린 다다에 가담한 적이 있다.
신즉물주의는 표현주의가 주관의 표출에만 전념하자 대상의 실재 파악을 등한시하고 비합리주의적 경향으로 흐르는 데 반발하여 즉물적인 대상 파악에 의한 실재감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로스는 1차 세계대전 후 좌익 입장에서 독일의 군국주의와 부르주아지에 대해 통렬한 비판자가 되었다.
한편 노동자의 아들 딕스는 사회의 그늘에서 사는 인간의 비참함과 추악함을 폭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크라나흐’란 별칭을 얻었다.
르네상스 양식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1472-1553)의 작품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고전주의 정신을 파악하지 못한 크라나흐는 누드화에 에로티시즘을 부여했다.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가 1919년 바이마르에 공예학교와 조형예술대학을 하나로 합쳐서 설립한 미술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집을 짓다’라는 뜻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킨 것이다)는 1925년 데사우, 1932년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기하학적 추상, 기능주의, 구성주의, 기계 미학의 중심지였다.
짧은 시기에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이며, 디자인과 산업기술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차별한 이전의 위계를 붕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바우하우스의 주요 목표는 세 가지로 첫째, 미래에 화가, 조각가, 공예가들이 그들의 모든 기술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협동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예술을 통합하고, 둘째, 공예의 지위를 순수미술이 누렸던 것만큼 상승시키며, 셋째, 공예와 산업을 이끌어가는 인물들 사이의 지속적인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목표는 1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나라에서 학교가 살아남기 위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모든 학생은 6개월의 기초과정을 통해 형상과 색채의 원리를 배우고, 다양한 매체에 정통하며, 각자의 창조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 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공방에서 기술을 습득하고 훈련했다.
목공예, 금속작업, 스테인드글라스, 직조, 타이포그래피 등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각각의 공방은 장인인 베르크마이스터Werkmeister와 미술가인 포름마이스터Formmeister라는 두 명의 교사가 이끌어나갔다.
포름마이스터로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를 비롯한 몇몇의 화가들이 참여했다.
평균적으로 바우하우스에는 늘 100여 명의 학생이 있었고, 14년의 역사에 등록한 학생의 수는 약 1,250명이었다.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1888-1976)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하고 교사가 되었다.

바우하우스가 폐교된 뒤 국가 사회주의 정권은 모든 혁신적 미술을 퇴폐미술로 규정하여 금지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데사우가 동독에 편입되면서 바우하우스 건물은 유기된 채 방치되었다가 1976 데사우에서의 개교 50주면을 기념하며 이전의 모습 그대로 복구되었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디자인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많은 미술 운동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정치적 성향의 띠거나 개념미술 경향으로 편중되었다.
전후 세대 화가들은 처음에는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특히 오토마티즘을 실험했다.

요제프 보이즈
요제프 보이즈(Joseph Beuys, 1921-86)를 가리켜 천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바위꾼, 병든 설교자, 무당, 또는 교활한 익살광대에 불과하다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상반되는 비평이 그에게 쏟아지는 것일까?
이는 그가 많은 사람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특별한 인생을 심포니를 연주하듯이 적나라하게 시위한 예술가들로 뒤샹과 보이즈 그리고 앤디 워홀이 있다.
이들 모두에게는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들에게는 신화로 보일만한 인생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작품보다는 사상이 두드러지며 그들의 회고전이 별로 열리지 않는 것도 작품보다 사상이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보이즈는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선구자로 알려지고 있다.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미술운동 아르테 포베라는 동시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상황미술, 개념미술 및 일부 미니멀아트와 유사하다.
1970년에 ‘아르테 포베라’ 전시회를 기획한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는 아르테 포베라가 전통 미술 형식이나 도상의 사용을 거부하고, 조직화되지 않은 해프닝을 표현방식으로 사용한 것을 특징으로 꼽았다.
첼란트가 꼽은 특징은 보이즈의 표현방식을 설명하기에 적절하고 그가 아르테 포베라에 관해 말한 다음의 내용 또한 보이즈의 작품을 설명하는 데 적절해 보인다.
“아르테 포베라는 주로 미술 매체의 물질적인 속성 및 미술 재료의 변하기 쉬운 성질과 관련이 있는, 근본적으로 반상업적이고, 불안정하며, 평범하고, 반형식적인 미술을 표방한다. 실제의 재료와 전체 현실에 대한 미술가의 참여를 중시하며, 또 그런 현실을 이해하기는 힘들더라도 민감하고 지적이며 교묘하고도 개인적인 강렬한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미술가의 시도를 강조한다.”

요제프 보이즈의 신화
보이즈의 신화는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의 전투기가 러시아 군인들의 포격을 맞고 크리메아에 추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라디오 기술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1941년 코니그라츠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았다.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여한 그는 포격으로 추락한 후 의식을 잃고 눈 속에 며칠 묻히고 말았다.
독일 군인들이 그를 구출하려고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눈 속에 처박힌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구출작전을 포기했다.
보이즈는 냉동된 상태에서 거의 저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행운의 여신이 그를 살려주었다. 보이즈는 훗날 회상했다.

루크레지아 데 도미지오 두리니Lucrezia De Domizio Durini의 <The Felt Hat Joseph Beuys a Life Told>(1991), english edition in 1997를 참조할 것.
“그때가 1943년 겨울이었습니다. JU-87기를 타고 정찰 중이었는데 러시아 군인이 쏜 대공포를 맞고 폭풍 속에 추락했습니다. 전투기는 곧 화염에 싸였고 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눈 속 깊이 파묻혔고 온 몸이 언 상태였어요. 난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타타르족이 나를 발견했습니다.”

타타르족은 그를 자신들의 캠프로 데려다가 그의 몸에 지방을 덮고, 펠트로 몸을 말아서 체온이 회복되도록 했다.
타타르족은 크리메아의 유목민으로 러시아와 독일 국경 부근에 거주하는 부족이다.
그때의 체험은 보이즈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놓았다.
예술가가 되게 한 것이며, 지방 펠트를 조각의 재료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새로운 인생의 자원으로서의 창조성
보이즈에게 예술은 개념이라기보다는 신념에 가까웠고, 거의 종교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새로운 인생의 자원으로 창조성을 꼽았으며, 창조성으로부터 존재의 상황을 확대해나갔는데 창조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창조”라는 말은 그의 미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개념이다.

보이즈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했다.
그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미장이 이모 씨가 화가이고, 목수 서모 씨가 조각가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본 청소부가 웬만한 시인보다도 훌륭한 시인이었다고 말했는데 시를 한 줄도 쓰지 않은 청소부, 어쩜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청소부를 가리켜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한 데서 그가 시인을 시의 범주가 아닌 일반적 의미의 예술의 범주 안에서 이해했음을 본다.
일반적 의미의 예술이란 물론 창조가 가능한 모든 영역을 뜻하는 것이다.
보이즈는 예술을 기존의 관념을 넘어서 창조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미쟁이 이모 씨의 벽돌 쌓는 기술과 목수 서모 씨의 나무 다루는 솜씨는 예술가의 작품 만드는 기술과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보이즈는 창조성 여부에 따라서 예술가의 자격을 판단하려고 했다.
그는 예술가의 90% 가량이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했는데 기회주의자 예술가들에 비한다면 미장이, 목수, 또는 청소부의 창조성이 뛰어난 예술을 칭찬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될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그의 주장은 개인의 잠재적 창조성의 개발이 시급함을 의미한 것이지 말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서의 예술가라는 뜻은 아니다.
마드리드의 청소부가 시인이라고 말할 때, 감자를 재배하는 농부가 예술가라고 말할 때, 그는 청소부와 농부의 창의력을 지적한 것이며, 반면 대부분 기회주의자 예술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보이즈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것조차 의식 있는 행위라면 예술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만큼 창조성이 중요하다는 걸 역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창조성이 있다고 믿었으며, 문제는 창조성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교육시키느냐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예술가들이 주장하는 자신들의 특수계급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특수계급이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창조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술가이기 때문에 특수계급이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창조성과 자유는 동일한 의미였다.
자유는 그에게 첫째, 개인이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행동이었고, 둘째, 주변 사람들 행동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의미했다.
그는 조화로운 관계를 더욱 강조했다.
개인과 대중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가치 있는 사회적 관계로서 보이즈는 개인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대중에게 소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는 늘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유가 창조이고, 창조가 곧 자유였다.
그는 창조성을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생각, 느낌, 그리고 의지였다.
이 세 가지는 그의 조각이론이 되었다.
그에게 창조성이란 이 세 가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첨가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가 창조성을 사람에게 한정된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동물과 식물에게도 적용한 것인데 창조성을 에너지로 이해한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신비주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를 현대판 무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그의 폭넓은 창조성의 개념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에게 정신은 에너지였으며, 에너지 혹은 정신을 늘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논리적으로 유물론을 비난하게 된 것이다.

예술은 혁명이다
보이즈에게 예술은 혁명으로 성취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는 “우리가 혁명입니다”라고 했는데 혁명의 목적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있었다.
그가 “우리가 혁명입니다”라고 말한 건 “모든 사람이 예술가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로 혁명은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일어나야 함을 강조한 것이며, 창조가 예술가라는 특수계급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했다.
그는 예술로서만 사회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예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제공하고, 내면에 있는 창조성을 개발시켜준다고 믿었다.

<우두머리 The Chief>
보이즈는 1964년 12월 1일에 <우두머리 The Chief>라는 제목으로 가로 세로 5미터 8미터 크기의 르네 블럭 화랑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는 이 퍼포먼스에 관해 말했다.
“내게 <우두머리>는 소리를 내는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화랑 바닥에 대각선으로 누워 펠트로 몸을 말고 마이크로폰을 장치했습니다.
확성기/스피커를 화랑 오른쪽 벽에 매달았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씩씩거리는 소리, 호흡하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 한숨 쉬는 소리,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소리, 우우, 쉬쉬 소리, 알파벳을 웅얼거리는 소리 등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들은 본래의 소리들로 원시인들이 낸 소리들입니다.”

<우두머리>의 상징주의에 관해 말했다.
“이 같은 연기 배경에는 늘 이론이 깔려있습니다.
음향적으로 반송파carrier wave를 말뜻에 관한 자료 없이 에너지의 운반 장치로 사용한 것입니다.
동물왕국에서 이따금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소리를 파동이 전달했습니다.
파동은 형상이 없고, 말뜻이 형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소리는 내가 의도적으로 동물들의 소리를 흉내 낸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이 만든 형상보다는 존재하는 다른 형상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에너지를 생산해내는 것들의 연속체, 각기 다른 에너지와 능력을 가진 다른 종족들과 협력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내 말은 펠트 안의 나의 존재는 반송파의 것, 나 자신이 속한 종족 의미론의 자주적 범위를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란 말이지요.
그건 옛날 입관의식을 가장한 죽음의 형상에 병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덟 시간 동안 죽은 사람처럼, 공허, 무감각, 밀실공포증과 아픔에 특히 무감각하게 행동하는 상황에서 생기는 당혹감을 피하려고 여러 차례 실습을 거친 끝에 발표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행위가 나로 하여금 훗날 더욱 과격한 행위를 하게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때의 행위는 죽음이며, 진정한 행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이즈의 조각이론은 불확정된 혼돈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혼돈은 그에게 가공하지 않은 물질의 상태, 또는 의지의 힘이었고, 상징적으로 말하면 열에 해당했다.
정돈은 물질의 상태가 과정 속에 있는 걸 뜻하며, 형상을 가지는 걸 뜻하고, 차가운 성격을 지니는 것을 뜻한다.
혼돈이 정돈으로 변하는 과정은 에너지가 필요한 운동을 생산하는 걸 뜻하며, 이 과정에서의 동력주의를 그는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에게 혼돈은 불확정한 상태이며, 유기적 상태이고, 열이며, 확산이고, 본성이며, 의지이고, 무의식이며, 그리고 직관이었다.
반면 정돈은 확정적인 상태이고, 투명한 상태이며, 차갑고, 모순되고, 정신이며, 지성이고, 의식이며, 그리고 사고였다.
현상학적으로 보면 혼돈과 정돈 사이에 끊임없는 흐름이 있다.
그가 사용한 조각 재료들은 혼돈에 속한 것들이고, 그것들을 정돈함으로써 감성, 의지, 그리고 사고를 나타냈다.
처음에 지방을 조각의 재료로 사용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지방은 혼돈을 상징하는 물질로 그것에 열을 가하면 형상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차가운 곳에서 지방은 단단해진다.
그가 선호한 물질 펠트 또한 혼돈의 물질로 열, 혹은 에너지가 축적된 그 자체 무형의 물질이다.

지방을 오브제로 사용한 이유에 관해 말했다.
“지방을 처음 사용한 의도는 토론을 자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들유들하게 생긴 지방이 온도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 관심사였습니다.
유들유들하게 생긴 건 심리적으로 자극하는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유들유들한 것이 내면의 작용, 느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내가 토론하기를 바랐던 건 인간의 창조성과 생산에 의한 조각과 문화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조각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으므로 예술과 무관하지만 인생과는 근본적으로 관련 있는 것을 조각의 재료로 사용하려고 지방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
<지방 의자>는 <지방 코너 Far Corner>와는 달리 기하학적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혼돈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어요.
지방으로부터 잘라낸 것처럼 가장자리 끝이 자연적인 형태였습니다.
지방을 의자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나는 이 점을 강조하려고 했으며, 의자는 사람의 몸에 대한 상징물이었습니다.
<지방 의자>는 생식기와도 같으며, 화학적 변화, 심리적으로 힘과 의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보이즈는 존재하는 두 극단을 에너지가 중재하여 필요한 운동을 만든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예술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두 극단이란 혼돈과 질서, 불확정과 확정, 유기체와 결정체, 열과 냉각, 확장과 수축, 자연과 정신, 의지와 지성, 잠재의식과 의식, 직관과 사고 등이었다.
이러 두 극단 사이를 에너지 또는 창조성이 운동을 일으켜 화해시키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고 보았으며, 현상학적으로 두 극단 사이에는 끊임없는 흐름이 있고, 인간의 느낌, 의지와 생각이 이 흐름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보이즈는 열의 상징을 정신으로 이해했으며, 정신을 사회를 개혁하는, 혹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혁명의 원리로 삼았다.
그는 인간의 삶의 발전에 정신이 필요함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구리copper를 오브제로 종종 사용하였는데 그에게 구리는 전기와 열을 상징하는 물질이었다.
그는 구리를 에너지, 풍성함, 사고를 긴급하게 전하는 물질이로 사용했다.
반면 그에게 쇠는 저항하는 힘이 있는 수동적 물질이었다.
그래서 쇠로 연장을 만들고 커다란 구조물을 만들게 되는 것이라고 했으며, 쇠는 우리로 하여금 무기, 혹은 무력을 상기하게 한다고 했다.
그는 구리를 여성의 상징으로, 쇠를 남성의 상징으로 작품에 적용했다.
근본적으로 그는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를 동일하지 않다고 보았다.
남성적인 요소를 정신적 힘, 정적이고 완고한 것으로 이해한 반면 여성적인 요소를 정신적 풍부함, 부드럽고 긴급한 응답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 모두 역동적이고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보았다.
여성이 모든 분야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면서 가장 두드러진 능력으로 생명의 출산을 꼽았다.

보이즈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
존 케이지의 영향
보이즈는 플럭서스Fluxus 그룹을 통해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1912-1992)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 플럭서스라는 명칭은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이 명칭은 리투아니아 태생의 미국인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가 1962년 독일 헤센 주 비스바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플럭서스-국제 신음악 페스티벌’ 초청장 문구에서 처음 사용했다.
마키우나스는 1963년 뉴욕에 플럭서스 본부를 창설하고 이듬해에 딕 힉긴스Dick Higgins가 <섬싱 엘스 프레스 Something Else Press>를 설립해 1974년까지 플럭서스와 관련된 주요 서적들을 출간하는 등 이 시기를 전후해 플럭서스 운동이 전성기를 맞았다.

1950년대 말 케이지는 뉴욕의 뉴 스쿨New School에서 가르쳤는데 그로부터 수학한 제자들 중에 딕 힉긴스, 알랜 캐프로우Allan Kaprow가 있었다.
캐프로우가 1956년 뒤셀도르프에서 강연했는데 그때 보이즈는 그의 강연에 감동했다.
케이지는 음악을 변화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의 실재로 정의했으며,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은 음악적 문화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들보다 더 흥미롭다고 했다.
케이지의 이런 정의와 관념을 플럭서스 그룹 예술가들이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 그룹 예술가들은 일상생활의 오브제들을 악기로 사용했으며, 전통음악을 상징하는 악기 피아노 내부에 갖은 잡동사니를 삽입해 원래의 피아노 소리를 변형시켰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예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고자 했다.

케이지는 1957년에 자신의 음악 연주의 목적을 “목적 없이 연주하는 것”이라고 했고, “혼란된 상태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며, 또 창조행위 안에서 무엇인가를 향상시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일깨워주는, 즉 삶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일단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게 되면 너무도 멋진 일인데, 사람들은 그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한다”고 했다.
케이지는 모든 작품에서 통제적 요소를 배제하고 온전히 우연의 법칙에 따라 음악을 구성했다.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취향, 상상력, 추억과 아이디어를 없애고 “본래의 고유한 음향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서구의 전통 사상이 조만간 소멸되고 동양의 전통 사상이 서구인의 삶 속에 더 많이 자리를 잡게 될 것으로 보았다.

1950년대 말 케이지의 작품은 서독에 널리 알려졌으며 보이즈도 알고 있었다.
보이즈는 케이지로부터 전통주의에 대항하는 자유로운 정신의 창작으로부터 감동을 받았으며, 백남준으로부터 연기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알게 되었다.
백남준은 1962년 뒤셀도르프 캄메르스필레에서 <음악의 네오다다 Neo-Dada in the Music>를 소개했는데 그날 보이즈는 객석에 앉아 그의 연기를 관람했고, 그 후 백남준과 20여 년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몇 차례 함께 공연을 한 적도 있다.
캐프로우와 백남준 그리고 플럭서스 그룹 예술가들을 통해서 케이지의 영향은 보이즈의 남은 인생에 계속 작용했는데 그가 1969년에 제작한 <혁명 피아노 Revolution Piano>는 케이지의 영향을 한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보이즈는 피아노 전체를 장미꽃으로 장식했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클랭, 케이지, 백남준은 선불교의 영향을 받았고, 보이즈는 기독교와 신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 모두 유물론을 초월할 수 있는 정신을 강조했다.

보이즈는 플럭서스에 관해 훗날 말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추구한 건 세 가지였는데 그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아이디어의 역사와 관련된 어떤 실질적인 것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였는데 이것은 세 가지 가운데 비중이 적게 다루어졌습니다.
플럭서스 운동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나 혼자 이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어요.
둘째, 다다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 것인데 백남준과 같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셋째, 초현실주의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 것인데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이 이 점을 특히 강조했지요.
정치적 중요성은 아주 미미했습니다. 비상한 재능을 가진 마키우나스가 유일하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그는 어떻게 변혁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지적하지 못했답니다.”

이브 클랭의 영향
보이즈가 브라운색으로 십자가를 만든 건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뒤셀도르프의 예술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이 시기에 제로 그룹Zero Group 예술가들이 활약했는데 그들은 프랑스 예술가 이브 클랭Yves Klein(1928-62)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이었다.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클랭의 전람회를 관람하고 감동한 예술가들이 1957년에 제로 그룹을 결성했는데 그들은 오토 피네Otto Piene, 하인cm 마크Heinz Mack, 그리고 군터 우엑케르Uecker였다.
제로 그룹 예술가들은 키네틱 아트와 루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그룹은 1960년대 초 다양한 구성주의 경향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신경향New Tendency 운동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공동으로 실험적 작업을 했다.
신경향 예술가들의 공통점은 작품의 비개성화,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과학기술의 사용, 그룹 활동과 익명성 예찬, 빛, 소리, 실제 움직임과 같은 직접적인 자극 이용, 전통적인 미학 기준에 대한 성상 파괴적 태도 등이었다.
그들은 앵포르멜, 타시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표현적 추상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클랭은 신경향의 위대한 선구자였다.

클랭과 마찬가지로 제로 그룹 예술가들은 정신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모노크롬 회화를 선호했다.
1957년 뒤셀도르프의 슈멜라 화랑에서 클랭의 커다란 캔버스 그림이 소개되었는데 명료도가 강한 파란색이 전체적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 파란색을 사람들은 “국제적인 클랭 블루 International Klein Blue”라고 불렀다.
보이즈는 클랭의 파란색 그림을 보았으며, 모노크롬의 효과를 그때 알았다.
클랭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제로 그룹 예술가들은 흰색을 선택했다.
그들은 흰색으로 물질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클랭의 파란색은 보이즈에게 브라운색의 아이디어를 갖게 했다.
클랭도 정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정신이 유물론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에서 수년 동안 유도를 배운 클랭은 그곳에서 선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클랭은 1958년에 ‘공허 전람회 Exhibition of the Void’를 선보였는데 텅 빈 화랑으로 관람자들이 오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허를 보고 알게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순수 공간의 실재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는데 물론 선불교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그의 파란색 그림도 마찬가지의 미학을 지녔다.
보이즈는 이런 미학을 클랭에게서 발견했으며, 파란색 모노크롬의 효과가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이즈는 브라운색의 개념을 확장하여 드로잉에서 뿐만 아니라 조각에도 브라운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브라운색은 흙, 마른 피색, 녹, 또는 비물질의 실재를 상징하는 똥을 환기시켰다.

게오르그 바젤리츠와 ‘러시아 페인팅’
작센의 도이치바젤리츠 태생으로 동베를린에서 학업을 시작했지만 1956년에 서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그때부터 본래의 성인 케른Kern 대신 태어난 곳의 지명을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휴스는 바젤리츠를 가리켜서 “평범한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높이 평가된 미술가의 전형적인 예”라고 평가했다.

1. 그림을 거꾸로 건 것은 익살일 뿐이다.
주요 일간지를 비롯하여 다양한 매체가 바젤리츠를 ‘거꾸로 된 그림의 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작품을 거꾸로 건 것이 사건이라도 되는 양 국립현대미술관의 보도 자료에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바젤리츠는 “거꾸로 된 이미지는 더 잘 보일 뿐 아니라 보는 이의 눈을 향하게 된다”면서 “거꾸로 그려진 대상은 오브제로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오히려 회화에 적합하다”는 역설적인 말을 했다.
거꾸로 된 이미지는 제대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회화에 적합하다는 건 억지주장이다.
작품을 90도 혹은 180도 돌려서 거는 건 주목받기 위한 수단이다.
비구상과 언어를 작품의 재료로 삼는 개념주의가 성행하던 시기인 1969년에 구상을 옹호하기 위해 이미지를 거꾸로 구성하는 것으로 구상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그건 새로운 방법이랄 수 없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는 거꾸로 보인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방문한 사람은 경험하겠지만 목을 뒤로 오래 제쳐야 하기 때문에 작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1940년대 후반 잭슨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주위를 돌아가면서 그렸다.
한지에 수묵화를 그리는 화가들도 유사한 경험을 할 것이다.
바젤리츠의 익살은 이런 경험에서 착안된 것이다.
회화에 적합하게 하기 위해 이미지의 좌우를 바꾸고 식물을 공중에 매단 것을 파울 클레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거꾸로 된 그림의 작가’로서의 바젤리츠의 명성은 미술관과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며 우리의 관심 밖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다시 거꾸로 돌려놓고 회화의 적합성을 따져보아야 한다.

2. 신표현주의의 실상
바젤리츠는 독일 신표현주의의 선두주자들 중 하나다.
1970년대 말에 등장한 신표현주의를 신야수주의 혹은 격렬하고 폭력적인 회화라고도 하는데, 재료 처리방식이 매우 거칠며 짧은 기간에 제작하여 격렬함을 작가의 주관성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회화다.
독일과 미국에서는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란 용어로, 프랑스에서는 자유구상Figuration Libre으로, 이탈리아에서는 트랜스아방가르드Transavantgarde로 성행했으며, 공통점은 추상에 대한 반발로 구상을 고집하며 폭력과 죽음을 테마로 한 것들이 많다.
갤러리스트와 미술품수집가들은 신표현주의를 반겼으나 일부 평론가들은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관습적 기법을 일부러 무시하여 형편없게 만드는 걸 두고 비난했다.
일부 신표현주의 작품을 ‘배드 페인팅 Bad Painting’, ‘어리석은 페인팅 Stupid Painting’이라고 불렀다.

신표현주의가 부상한 배경을 둘로 꼽으면 하나는 개념주의 이후 회화의 위기를 맞아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몸부림이며, 다른 하나는 미술품을 소장하는 것이 삶을 향상시킨다는 것과 투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수요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미술품의 가격이 앙등하기 시작했다.
1979년의 미술품 가격과 1980년의 가격을 비교하면 서너 배는 보통이고 어느 화가의 경우는 다섯, 여섯 배까지도 상승했다.
오일과 다이아몬드에 쏠렸던 투자가들이 미술품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구입하지 못해 투자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의 구매수요가 급증한 것이 신표현주의가 성행하는 걸 용인했다.
신표현주의는 1980년대 들어서 회화가 위기를 맞았을 때, 다시 말하면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하고 모더니스트 회화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아서 단토의 말로 하면 예술이 종말에 이르렀을 때 약간의 지엽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신표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관적 표현의 한 수단으로 회화를 사용한 것이며 그것은 모더니즘의 종말 이후에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었더라도 그럴 수는 있었다고 이해되어진다.
1980년대에 신표현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잃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그려야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양식과 주제에 있어서 고갈되었다.
미술계의 심층구조에는 예술의 종말을 특징짓는 구조적 다원주의가 자리 잡았다.
미술활동 전 영역에 매체들의 연접성이 두드러졌다.
회화뿐 아니라 퍼포먼스, 설치, 사진, 대지미술, 개념적 구조물, 섬유작품, 온갖 장식적 패턴의 작품 등이 회화의 동료가 되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개인이나 그룹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미술가들은 모더니즘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다양한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건 한스 리히터가 반동이라고 말한 신표현주의들에 의해서 방대한 양의 대형화가 쏟아져 나왔으며, 그것들이 수요에 의해서 미술시장에서 소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젤리츠가 있었다.

3. ‘러시아 페인팅’(1998-2002)
바젤리츠의 명성은 1968년까지의 작품으로 족하다.
1957년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마르크스주의 예술과 미학을 공식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수용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반발하여 그린 그림들은 민속까지도 이데올로기의 이용되는 철저한 미술 말살에 반기를 든 것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1969년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고부터 그의 회화는 독창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의 얼굴을 거꾸로 그려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했으며, 그런 작품들이 1995년 미국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시작으로 하여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거꾸로 그려진 초상은 에밀 놀데를 상기하게 하는 감성적 표현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양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양식에 있어서 ‘러시안 페인팅’은 바젤리츠의 새로운 시도이지만 주제에 있어서는 과거 그가 집착했던 것들에 대한 변형일 뿐이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회화와 정치선전용 사진을 소재로 삼아 그것들을 매우 거칠게 신표현주의 특유의 배드 페인팅으로 만들면서 해학을 곁들였다.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선전했던 이미지들의 허구성을 새삼스럽게 드러내려고 한 것으로 개인적 향수가 벤 작품들이다.
또한 그의 창작의 한계를 보여주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69세로 그가 명성을 되찾기에는 너무 늙었다.

작품
<전쟁의 나날들 I>(1998):
화가가 빈 캔버스 앞에 앉아 있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사회에서 화가는 자신이 무엇을 그려야할지 알지 못한다. 과거에는 레닌이나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렸겠지만 이제는 그려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젤 앞에 앉아 있는 화가는 바젤리츠 자신이다.

<베를린의 승전일>(1998):
피아노를 치고 있는 군인의 모습이다. 소련군이 무식하고 좌변기도 쓸 줄 모르는 야만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선전용으로 그려진 이미지를 변형한 것이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가는 소련군이 피아노도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을 사랑하는 감성적인 남자라는 걸 선전하기 위해 그렸다. 그것을 바젤리츠가 기억 속의 희미한 이미지로 재생산했다.

<스몰니의 레닌>(1998):
레닌을 누드로 그리면서 평범한 노인으로 묘사한 것이다.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레닌은 편지를 쓰는지 연설문을 작성하는지 열심히 적고 있다.

<연단 위의 레닌>(1999):
이것은 연단 위에서 연설하는 유명한 사진을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시킨 것이다. 험상궂은 작은 얼굴에 몸집만 크게 부각시킨 작품이다.

<멕시코 혁명 II>(2001): 이것은 다섯 명의 공산주의자 초상이다.
왼편부터 ‘공산당선언’을 발표하여 각국에 혁명의 불을 지핀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적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엥겔스, 스탈린과 대립하여 국외로 추방된 뒤 멕시코에서 암살된 트로츠키,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 사상가 레닌, 레닌의 후계자로 소련공산당 서기장, 수상, 대원수를 지낸 스탈린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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