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요제프 보이즈는 1965년 11월 26일 뒤셀도르프의 슈멜라 화랑에서 <어떻게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How to Explain Paintings to a Dead Hare>를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는 1974년 뉴욕에서 소개한 <늑대 Coyote>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관람자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화랑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밖에서 스크린을 통해 그의 연기를 관람할 수밖에 없었고, 더러는 창문을 통해 직접 본 사람도 있었다.
그는 머리에 꿀과 금색 잎사귀를 바르고,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다가는 벽에 걸린 칠판으로 가서 무엇인가를 쓰면서 아기처럼 가슴에 안은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에 관해 설명했다.
훗날 왜 산토끼에게 그림에 관해 설명했느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산토끼는 출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
내게 산토끼는 화신의 상징입니다.
산토끼는 사람만이 정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안으로 파고드는 것과 파서 건축하는 일입니다.
산토끼는 땅속에서 스스로를 구체화하며 이것이 중요합니다.
머리에 꿀을 바른 건 내가 생각을 갖고 명료하게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은 생각할 줄 알고, 꿀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지요.
꿀은 의심의 여지없는 생생한 물질이라서 이런 방법으로 나는 생각의 극적 본질에 다시 활력을 고취시켰던 것이랍니다.
사람의 생각은 생동하며, 비록 동일한 과정을 통해 죽음의 첨단까지 지적으로 만들지만 많은 것이 죽은 상태에 있으며, 정치학과 교육학 안에서 죽은 것과 다름없는 본질을 표현하고 있답니다.
금과 꿀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머리의 변형을 지적하며, 또 두뇌와 사고의 개념, 의식과 그림을 설명하는 데 필요로 하는 모든 수준의 것들을 지적합니다.
나는 뼈와 전자부품으로 만든 라디오를 펠트를 사용해 만든 걸상 아래에 설치했습니다.
나는 산토끼를 안은 채 이 그림에서 저 그림으로 옮겨가면서 절뚝거리는 걸음을 했는데 구두 바닥에 부착한 넓적한 자석 쇠붙이가 화랑의 돌바닥을 긁어 쇳소리가 나게 했습니다.”


쇳소리가 화랑을 진동했겠군요.


“나는 산토끼에게 무언으로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라디오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를 내며 파장을 내보냈기 때문에 쇳소리가 유일하게 화랑의 침묵을 깨뜨렸습니다.
이 장면이 아마 사람들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작용했을 줄 알아요.
이것은 사람들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설명하는 것에 대한 문제, 특히 예술과 창조적 작업에 관한 설명의 문제, 또는 신비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문제의 형상을 설명하는 문제를 아는 데 설명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무엇인가를 동물에게 설명하는 아이디어는 세계의 비밀에 관한 감각과 상상력을 일으키는 것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대로 죽은 동물조차도 사람의 고집스러운 이성적인 상황보다는 직관의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해한다’, 혹은 ‘납득한다’ 하는 말에 내재된 문제와 많은 표준들이 이성적 분석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이것은 이 같은 행위에 반응하는 것들의 뿌리가 되었으며, 왜 나의 기교가 특정한 지식이나, 대중 일부에 대한 특별한 반응대신 인간 힘의 영역 안에서 에너지의 극점을 찾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랍니다.
나는 창조적 영역의 복잡함이 밝게 드러나도록 시도했습니다.”


보이즈는 1966년 7월 7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위한 침투 동종, 가장 위대한 현대 작곡가는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아이입니다 Infiltration Homogen for Grand Piano, the Greatest Contemporary Composer is the Thalidomide Child>를 소개했다.
탈리도마이드는 수면제이다.
펠트로 씌운 그랜드 피아노는 현재 파리 퐁피두센터에 소장되어있다.
왜 피아노를 펠트로 씌웠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피아노 소리를 펠트 속에 가두기 위해서였어요.
우리가 알기로 피아노는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잠재력을 항상 가지고 있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경우 소리가 없는 것이 대신 가능한 일이며, 피아노의 운명은 침묵이 됩니다.
‘침투 동종’이라는 말은 펠트의 속성과 구조를 설명합니다.
펠트로 씌웠기 때문에 피아노는 소리를 걸러내는 능력과 더불어서 소리의 동종 저장이 되는 것이랍니다.
피아노는 사람의 운명과 한 쌍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 개의 적십자 마크를 피아노에 부착한 건 우리가 침묵하고 다음의 단계를 행동으로 취하지 않을 경우 긴급함과 진화 안에서 우리가 위협받게 된다는 걸 지적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이런 오브제는 토론을 위한 자극으로 이해해야지 미학의 물질로 받아들이면 곤란해요.”


작품의 기본적 테마가 선생의 작품에 의례 나타나는 집합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표현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선생의 말은 전쟁 중 부상당한 사실을 부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부정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관점과 정신적 바탕을 강조하기 위해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부상은 회복과 치유로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고통은 개인의 능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상황과도 같은 것이며, 완전한 실존을 더욱 광범위하고 절대적인 영역으로 운반하는 것이기도 하답니다.”


보이즈는 1966년 10월 14일과 15일에 코펜하겐의 화랑 101에서 <유라시아, 시베리안 심포니 34악장 Eurasia, 34th Movement of the Siberian Symphony>을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는 복잡하게 구성되었지만 개념적으로 사고의 중요한 요소들이 동원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처음에 소개한 테마 ‘십자가의 분할 Division of the Cross’이 그렇다.


“난 무릎을 꿇은 채 마룻바닥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십자가를 칠판이 있는 곳을 향해 밀고 가다가는 일어서서 칠판에 십자가를 그리고는 반쯤 지운 뒤 아래에 유라시아 말을 적었습니다.
뭐라고 썼는지 지금 기억나지 않는데 직관으로 쓴 글이었어요.
나는 책략적으로 길고 가는 검정색 막대기에 묶은 다리와 귀가 뻣뻣해진 죽은 산토끼를 밀고 갔습니다.
산토끼를 가슴에 안고 칠판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산토끼 다리에 하얀 가루를 뿌렸으며, 온도계를 입에 넣었고, 튜브를 불어 넘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칠판 옆에 선 채 산토끼의 귀를 흔들면서 쇳조각을 부착한 구둣발로 마룻바닥을 마구 두들겨 소리를 냈어요.”


이 퍼포먼스의 아이디어는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산토끼가 나와 함께 주연을 맡은 것이 아이디어였습니다.
내가 산토끼의 귀를 기다란 막대기로 세운 이유는 <지방 의자>와 <지방 코너>에 나타난 각도를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마지막으로 내가 칠판에 적은 건 두 개의 특별한 온도였는데 하나는 펠트의 온도 32도였고, 다른 하나는 지방의 온도 21도였어요.”


직관이 작품에서 중심적 구조를 이루었던 것 같군요.


“직관은 생각의 성격과 양을 정복하는 이성 최고의 형태로 지각적 감각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이성적 분석 그 이상으로 나아가도록 해줍니다.”


보이즈는 1966년 12월 15일 예술가들의 음악과 연기의 도움을 받아 <만레사 Manresa>를 발표했다.
이 작품의 테마는 직관이 이성 최고의 형태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무로 된 십자가 절반에 펠트를 씌우고, 전기장치, 로즈메리 페인트와 잡동사니를 넣은 나무상자를 사용했다.


“난 십자가 절반에 ‘엘리먼트 1 Element I’이라고 적고 나무상자에는 ‘엘리먼트 2’라고 적었습니다.
십자가를 절반만 사용한 건 현대인의 분열된 자아를 상징하기 위해서였는데 정신적인 존재가 아닌 이성적인 존재를 뜻하며, 나무상자는 직관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퍼포먼스 마지막에 그는 테엽을 감은 새를 공중에 날렸는데 자유를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만레사는 스페인 동네 이름으로 예수회의 창시자 로욜라의 성자 이그나시우스가 저서 <정신적 훈련 Spiritual Exercises>을 집필한 곳이다.
설치가 자서전적 기독교의 명상과 몸을 정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나는 개인이 고통으로부터 재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병든 사회도 치유되기를 바랐습니다.
직관이 이성의 최고 형태임을 말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
<만레사>는 <어떻게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와 같은 주제의 작품입니다.
관람자에게 직관과 함께 하는 지성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걸 말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사용한 지방과 꿀은 창조적 에너지에 비유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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