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낭만주의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의 낭만주의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산물이다.
전례 없는 정치적·사회적 대변혁의 시기에 출현한 낭만주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비극적 관점은 미술가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작가, 배우, 음악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가들이 취할 태도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종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설계를 갖고 민중의 선도자로 우뚝 서는 것이었다.
1800년 스탈 부인은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자기 운명의 불완전함에 대한 고통스러운 감정 덕분이다”라 하고 낭만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감정에 대해서 언급했다.


정신·감정·행위의 숭고함은 상상력을 제약하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서 그 힘을 얻는다.


화가들은 복잡한 인간의 존재와 미래가 불확실한 사회를 그리면서 극적 표현을 강조했는데, 이는 고전의 이상적 미를 추구하는 신고전주의 화가들과 대조가 되었다.
근대가 ‘우리시대의’ 혹은 ‘바로 지금’이란 의미에서 본다면 아이러니하고 반영웅주의가 낭만주의에 나타난 것은 아주 당연하다 하겠다.
특히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프랑스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향은 감정적으로 좀 더 조절된 사실주의가 출현하는 1840년대까지 존속되었다.


1800년부터 나폴레옹 집권 시의 업적을 기록하는 서사시적 그림들이 등장했다.
그로와 지로데의 전투장면들에는 신고전주의 화가들, 특히 다비드가 금기시한 폭력과 죽음 등이 있었다.
그로가 1804년에 그린 <자파의 역병 환자들의 집을 방문한 보나파르트>87가 그 한 예가 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화 외에도 북유럽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화와는 달리 밤의 분위기, 혼란스러운 감정의 표현, 몽환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었다.
이성적이기 이전의 감정적인 인간, 자연과 인간에 더욱 더 잘 접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감정에 대한 일관된 숭배, 전체적인 삶과 함께 그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점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하여 발생하는 존재의 행복에 대한 향수, 이 모든 것이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 이미 루소의 영향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여기에 화가들은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가 샤토브리앙(1768-1848)으로부터 비롯된 자아숭배를 서정적으로 표현하면서 전통 미학의 규제와 금기를 뒤흔들기 시작했는데, 낭만적 감정이 싹튼 것이다.
생말로에서 태어나 브르타뉴 지방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갔다가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근대 세계의 불안정성을 이론화한 『대혁명에 관한 논평』(1797)을 썼다.
이 책은 낭만주의의 모든 기본 주제들을 망라했다.
1792년부터 1800년까지 망명 생활을 한 그는 1800년 프랑스로 돌아와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문단 생활을 시작했다.
『아탈라』(1801)는 그가 쓴 최초의 위대한 문학 텍스트로서 샥타스와 아탈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룬 것이다.
이 이야기는 참신한 문체와 언어로 낭만주의자들의 이국 취향을 예고했다.
지로데는 이 이야기를 <아탈라의 매장>88이라는 제목으로 묘사했다.
샤토브리앙의 기념비적 낭만주의 작품인 『죽음 저편의 회상』이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는데, 이 작품에 그려진 것은 불연속적이거나 방황하는 자아로서 여행자·작가·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세 가지 성격을 되짚은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사원정과 황실의 주문은 화가들에게 동방(유럽의 시각에서 본 동방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말함)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동방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은 언론에 상세하게 보도되었으며 그로, 지로데 등의 화가들이 역사화에서 즐겨 다루었던 소재인 나폴레옹 원정을 계기로 또다시 현실성 있게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18세기 이래 화가들이 선호하던 여행지는 이탈리아에서 동방으로 바뀌었다.
동방에 대한 관심은 낯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다른 민족을 만나보기 위해 자국의 문화에서 벗어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1811년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을 발표한 샤토브리앙을 본받아 포르뱅(1818), 드캉(1827), 도자(1830), 들라크루아(1832), 마지막으로 샤세리오(1846)가 스페인, 아프리카, 근동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받은 인상은 그들의 화풍을 변화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주로 과거와 당대의 사건이나 문학에서 영감을 얻었고, 1832년 모로코를 방문한 뒤로는 좀 더 이국적인 주제도 다루게 되었다.
하렘(후궁)의 모습을 담은 <알제리의 여인들>89은 1832년에 6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받은 영감의 결과이다.
앵그르는 동방에서 영감을 얻어 관능적이면서도 차가운 하렘의 여인들을 그리게 되었으며 동방 여인의 신화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앵그르와는 반대로 들라크루아가 그린 동방의 여인들은 보다 야성적인 관능성이 배어나거나 하렘의 안일한 생활에 젖어 있어 그의 영감이 열정적이거나 향수에 젖어 있음을 나타냈다.
마리 클로드 쇼도느레 외 네 명의 공저 『프랑스 낭만주의』에는 프랑스 낭만주의에 끼친 동방의 오리엔탈리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지리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동방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동물적 관능성의 확인에 이르기까지, 나르시스적 내향성에서 자아의 충일한 표현에 이르기까지 낭만적 상상계의 모든 단면을 담고 있었다.
네르발과 고티에의 여행기 『콘스탄티노플』(1853)이 출간되기 이전에 이미 빅토르 위고의 『동방 시집』(1829) 서문은 동방이 낭만주의자들을 얼마나 강한 매력으로 사로잡았는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의 또 다른 바다인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중세시대처럼 위대하고 호화롭고 풍요롭다.”


프랑스 낭만주의에 끼친 영향으로 독일과 영국의 문학을 꼽을 수 있다.
스탈 부인으로 불리는 안-루이즈-제르맹 네케르(1766-1817)를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외국 문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스탈 부인은 파리에서 스위스인 부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스위스 제네바의 은행가로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시대에 재무장관을 지낸 자크 네케르였고, 어머니 쉬잔 퀴르쇼는 프랑스계 스위스 목사의 딸로서 파리에 문인과 정객들이 모이는 화려한 살롱을 열어 남편의 출세를 도왔다.
일찍부터 미모뿐 아니라 발랄한 재치로 명성을 얻었던 스탈 부인의 사상에는 루소의 열정과 몽테스키외의 합리주의가 특이하고 대립적으로 뒤섞여 있었다.
몽테스키외의 숭배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기반을 둔 정치적 견해를 받아들였고, 프랑스 혁명을 지지해 자코뱅주의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국민이 선출한 기구인 국민공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를 다스리던 시기에, 온건한 지롱드 파는 그녀의 사상과 가장 잘 들어맞았다.
스탈 부인은 또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당시 유럽인들은 그녀를 나폴레옹과 앙숙으로 여겼다.
그녀는 자신의 코페 성을 유럽의 재능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의 장소로 만들었으며 『독일론』을 통해 독일 문학을 소개하는 일에 기여했다.
괴테는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위대한 미학적 원천이 되었고 네르발은 1828년부터 『파우스트』를 번역했다.
파우스트와 같은 인물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전환기를 그린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클로드 프롤로라는 인물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알프레드 드 뮈세는 1836년에 이렇게 적었다.

“새로운 문학의 가장인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자살로 이끄는 정열을 묘사한 이후 『파우스트』에서는 악과 불행을 가장 어두운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프랑스 낭만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영국 문학이다.
심리적·정치적 통찰의 작품으로 유명한 스탕달은 『라신과 셰익스피어』(1823-25)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에게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연구하는 방법”을 본받아야 한다고 적었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은 대단했는데 위고는 『동방 시집』(1829)에 실린 시 《하렘의 머리들》에서 “오 끔찍하도다! 오 끔찍하도다! 너무도 끔찍하도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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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제리코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낭만주의 화가들은 근대의 삶을 모티브로 다루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는 1819년 실재 사건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재현하는 가운데 고전주의 규범을 극렬히 부정했으며 당시 정부의 무능력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메두사 호의 뗏목>91으로 고전주의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시체의 색조, 표현적 사실주의, 격렬한 붓질, 헛된 영웅주의, 이런 것들을 통해 다비드식 규범과 영원한 고귀함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1816년 7월 망명귀족 출신인 위그 뒤루아 드 쇼마레가 지휘하던 왕실 해군 소속의 메두사 호가 서아프리카로 향하던 중 블랑 곶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침몰했다.
성급히 만든 뗏목에 몸을 실은 승객과 승무원 150명은 끔찍한 고통을 견디며 13일 동안 대서양을 표류하다가 열다섯 명만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코레아르와 사비니라는 두 명의 생존자가 난파 당시의 상황을 글로 발표했으며 제리코는 그들의 증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메두사 호의 뗏목>을 마치 실재를 보고 그린 듯 정교하게 묘사했다.
제리코는 생존자들과 인터뷰했으며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뗏목을 만들었고 시체보관소에 가서 시체들을 습작한 후 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본래의 생각은 불안과 공포로 거의 광란의 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바다의 위협에 저항하는 모습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현재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두 장의 밑그림을 포함해서 여러 장의 밑그림을 보면 그가 어떻게 구성을 달리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구성에는 삼각구도 속에 왼쪽으로부터 파도가 크게 일어나 부푼 돛을 덮치려고 하면서 대립적인 힘이 나타나 있다.
그는 들라크루아를 시체의 모델로 하여 왼쪽 하단에 두 구의 시체를 그려 넣으면서 그 중 한 구가 서서히 바다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했다.
바람은 뗏목을 왼쪽으로 밀어붙이는 반면 난파당한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절망 속에서 구조선이 오기를 기다리며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


<메두사 호의 뗏목>은 1819년 살롱전에서 금메달을 받고 소개되었는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군주제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작품을 가차 없이 비난했지만 위대한 역사적 작품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정치적 현안이었던 이 배의 선장인 위그 뒤루아 드 쇼마레에 대한 재판은 군주제 전체에 대한 재판이 되어버렸다.
제리코는 동시대의 역사에서 착안한 극적인 사실을 가장하여 표류하는 인류의 이미지를 관람자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의 죽음은 영적인 모든 것이 배제된 채 냉혹한 현실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제리코가 1812년 <말을 탄 M.D. 씨의 초상>으로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2년 후에 <돌격명령을 하는 황제 근위대 장교>92라고 제목을 바꾼 이야기는 이 장르가 이미 낭만적 변모를 거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작품은 입상했지만 기마초상의 전통적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고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말이 관람자에게서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미완성의 작품이며 구성이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외형적인 형태의 완전성에는 관심이 없었고 극적인 색과 자유로운 제스처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제리코는 일찍이 석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8세기 말 독일에서 고안된 석판화 기법이 프랑스에 도입된 것은 1816년경부터였다.
그러나 런던에서는 1800년부터 석판화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국에 머물던 제리코는 1820년과 1825년 사이 이 기술을 익혀 낭만주의 미술의 잠재적 성공에 이용했다.93
제리코 외에도 낭만주의의 주요 예술가들이 이 기술을 익혀 삽화집을 내는 등 석판화를 널리 보급했다.
데생의 생생함과 명암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석판화는 예술적 표현의 한 방법으로 재빨리 자리 잡게 되었다.
들라크루아도 이 기술을 이용하여 <파우스트>와 <햄릿>을 포함한 여러 점의 삽화를 그렸다.
도미에와 같은 캐리커처 화가와 데생 화가들에 의해서 석판화의 품격은 한층 고양되었다.


멋쟁이 신사에 뛰어난 기수로서 극적 성격이 강한 제리코의 회화는 화려하고 정력적이며 다소 병적인 그의 개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카를 베르네의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아카데미 화가 괴랭의 문하에서 고전적 조형법과 구성법을 익혔다.
그는 루브르 뮤지엄에서 티치아노·루벤스·푸생, 그리고 고대 예술가들을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기교를 익혔으며 특히 루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816~17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바로크 작품에 매료되었다.
제리코는 1824년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서른세 살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 미술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괴랭의 또 다른 제자 들라크루아는 제리코로부터 영향을 받고 거기에서 자기 예술의 중요한 출발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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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취향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들라크루아는 어떤 의미에서 ‘세기병’을 앓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심한 우울증에 괴로워 했으며, 공허와 목표 상실의 감정을 가졌고, 생에 대한 권태와 싸웠다.
그는 우울증 환자였으며 늘 불만에 차 있었고 미완성의 사람이었다. 그가 삶의 태도로서의 낭만주의에는 반대했지만 회화 경향으로서의 낭만주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낭만주의의 광범위한 모티브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자신이 낭만주의의 대가라는 데 불쾌해 했다.
그는 제자를 교육하는 일에 흥미가 없었고 한 번도 일반인이 참관할 수 있게 아틀리에를 연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몇 사람의 조수를 썼을 뿐 제자로는 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영주 같은 취향이 그로 하여금 일체의 자기폭로주의나 현학주의를 싫어하게 했으며 대중을 경멸했다.


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취향은 1820년과 1830년 사이 수많은 책을 읽은 데서 이루어졌다.
그는 스탕달을 만났고, 1826년부터 노디에의 문학 동아리에 나가 빅토르 위고와 친분을 맺었다.
이런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그의 문학적 취향이 형성되었고 그의 일기와 편지들에 문학적 내용이 가득 차게 되었다.
그는 호라티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오비디우스·베르길리우스 등을 숭배했고 고전 외에도 근대와 당대 작가들 단테·셰익스피어·타소·몽테뉴·볼테르·디드로·괴테·월터 스콧·바이런 등의 작품을 읽었다.


1822년은 들라크루아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는데, 처음으로 살롱전에 출품한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96가 받아들여졌다.
왕립 살롱전은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받아들인 후 점차 대담해지는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최초의 걸작이었다.
그는 살롱전에 다음과 같은 긴 원제를 달았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플레기아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 도시 디스의 성벽을 둘러싼 호수를 건넌다.
죄인들은 배에 달라붙고, 또 그 위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쓴다.
단테는 그들 가운데 피렌체 사람이 몇 명 있음을 발견한다.”


낭만주의자들이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추종한 문학이 단테와 밀턴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크롬웰』 서문에 적었다.


현대 작가들 가운데 단테와 밀턴 둘만이 셰익스피어만큼 위대하다. …
그들은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우리의 문학이 극적인 색깔을 갖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작품에는 기괴한 것과 숭고한 것이 뒤섞여 있다.


들라크루아의 1858년 9월 3일 일기는 위고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호메로스와 유사한 모든 이들을 숭배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숭배한다.
우리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프랑스 현대 작가들(내가 말하는 것은 라신이나 볼테르 같은 이들이다)은 위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종류의 숭고함, 그리고 천박한 세부들을 시적으로 만들어 상상력을 매혹하는 멋진 그림으로 만드는 그 놀라운 천진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포르뱅 백작은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뤽상부르 뮤지엄에 소장하기 위해 2천 프랑을 주고 구입했다.
들라크루아는 빚쟁이들에 쫓길 때 이 그림을 그렸는데, 속히 화가로 성공하는 길만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석 달도 채 안 걸려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표류하는 인류의 처절한 이미지를 구현한 이 그림은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참조하여 그린 것이다.
저주받은 인간들 몸 위의 순수한 색의 물방울은 루벤스에게서 받은 영향이다.
제리코의 그림에는 색들이 명암에 압도되어 있지만 들라크루아의 것에는 색 자체가 표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루벤스는 풍부한 색채와 양감, 관능적 형상으로 인간의 육체를 찬미한 반면, 들라크루아는 루벤스의 기법을 사용하여 고통 받는 지옥의 장면을 묘사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는 이 작품을 가리켜서 “벌 받는 루벤스”라고 했는데, 작품의 성격을 짧은 말로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루벤스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꼽고 그의 기법을 연구했지만, 그의 미학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루벤스를 존경하면서도 전체적 구성과 세부적 균형에서 미숙하다고 보았으며 약간 과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854년 7월 29일자 일기에 풍경화가로서 루벤스의 선천적인 자질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인물의 특질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인물과의 관계 설정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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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코로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 낭만주의 풍경화의 선구자 장-밥티스트 카미유 코로(1796-1875)는 19세기 전반의 가장 뛰어난 풍경화가로서 거의 모든 풍경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6살 때 상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풍경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코로는 젊은 풍경화가 아실 에트나 미샬롱(1796-1822) 밑에서 수학하다가 미샬롱이 타계한 해에 고전주의자 빅토르 베르탱(1755-1842)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수학했다.
1825년 가을에 로마로 가서 그곳에서 보낸 3년이 그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로마와 그 주변 시골의 풍경을 그리면서 1826년 8월에 한 친구에게 말했다.

“내 생애에 진실로 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 풍경을 그리는 것이네. 이 확고한 결심 때문에 다른 어떤 일에도 심취하지 못할 것 같네. 난 결혼도 하지 못할 것 같네.”

그는 실제로 독신으로 살면서 전 생애를 회화에 바쳤다.
1834년 5~10월에 두 번째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 볼테라·피렌체·피사·제노바·베네치아 및 이탈리아 호수 지방의 경치를 주로 그렸다.
1843년 여름 마지막으로 잠깐 동안 다시 이탈리아를 방문했지만, 두 번째 시기에 스케치를 많이 그려두었기 때문에 남은 생애에 그것들로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코로는 “네가 보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꼼꼼하게 그려라”라는 마샬롱의 말을 평생 지침으로 받아들였다.
야외에서 직접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화실에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하면서 코로는 그때까지 형성된 풍경화의 고전적 기법에 새로운 개인적인 시정을 불어넣었다.
그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지만 밀레와 쿠르베와 같은 방법으로 농부나 노동을 이상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 사이의 논쟁 밖에 있었다.


코로의 사실주의적 단순성과 효용성을 높이 평가한 들라크루아는 1847년 코로를 방문한 소감을 일기에 적었다.


코로는 진정한 예술가이다. 예술가의 장점을 알려면 그의 집을 방문해야 한다.
뮤지엄에서 본 그의 작품들은 하찮게 여겨졌지만 그의 집에 있는 작품들을 보고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세례>103는 순박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다.
그가 그린 나무들은 훌륭하다.
내가 오르페우스에 관해 말하자 그는 좀 더 진전시키라고 충고해주었다. …
그는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야 작품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데 동감하지 않았다.
티치아노, 라파엘로, 루벤스 등은 쉽게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
코로는 한 주제만 파고든다.
생각이 떠오르면 작업하며 덧붙이는데, 이는 좋은 방법이다.


코로 작품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파악하기 힘든데, 이는 위작의 수가 수천 점에 이를 뿐 아니라 진작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53년 동안 유화, 데생, 판화를 3,221점 제작했고 10여 첩의 화첩과 자필 원고를 남겼다.
친구와 제자들이 그린 복제화도 100여 점이 된다.
코로의 특징이라면 훗날 모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대로 동일한 모티브, 동일한 장소, 동일한 주제를 수없이 그렸다는 점이다.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말년에는 몇몇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탐구했다.
그는 풍경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많은 작품이 인본주의적이고 철학적이며 서정적이고, 초상화의 경우 인물의 표현방식이 독특하며, 종교적·신화적 주제들로 구성된 풍경화에서 그의 재능이 발견된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는 자연에서 이끌어낸 미학적 성찰과 더불어 인간 중심의 시각과 이를 자연 속에 통합시킨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코로는 17세기 북유럽 유파와 영국의 근대 회화, 특히 컨스터블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835년부터 종교와 신화에서 주제를 구하여 역사적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삶에서 종교의 비중을 크게 둔 것은 1870년 이후였고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던 젊은 시절 1835년에만 해도 그는 고전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화가로서 종교적 테마를 풍경화에서 중요하게 다루었을 뿐이다.
그는 성서의 일화를 주제로 한 <황야의 하갈>104을 살롱전에 출품했는데, 아들 이스마엘을 구해낼 희망을 상실한 하갈의 고뇌를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루벤스, 게르치노, 로랭의 영향이 발견된다.
2년 후 그는 <황야의 하갈>과 단짝을 이룰 <황야의 성 히에로니무스>를 살롱전에 출품했는데, 이 작품 역시 대가들의 영향 아래 그린 것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티치아노, 푸생의 기법이 응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그의 최초의 역사적 풍경화들로 극적인 사건들의 의미와 사실주의로 사람들에게 놀라운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코로는 경관이 좋은 곳들을 찾아 프랑스를 두루 여행하면서 빛에 의한 나무와 바위의 변화를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오베르뉴, 프로방스, 리무쟁, 브르타뉴, 노르망디에 즐겨 갔으며, 퐁텐블로 숲을 정기적으로 가서 그렸는데, 이는 테오도르 루소보다 10년, 밀레보다는 25년이나 앞선 일이다.
활기가 넘치면서도 황량한 장소를 좋아한 그는 습작하기 적당한 브르타뉴의 풍경을 아주 좋아했다.


코로는 야외에서 동일한 모티브를 각도와 시각을 바꿔가며 연속적으로 그리면서 많은 작업을 했지만 진정한 창조는 그의 아틀리에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아틀리에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대형 풍경화를 다듬으며 전에 야외에서 보고 그린 습작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들을 이용했다.
기억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그는 추억 연작의 필요성을 느꼈다.
풍경을 마주하고 느꼈던 감정을 기억을 더듬어 표현해야 했으므로 그의 주제는 더 이상 문학적·역사적·종교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추억을 전달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가 진정 감동을 받았다면 그 감정의 진솔함은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다”고 했다.
1850년부터는 은빛 안개에 휩싸인 서정적인 풍경뿐 아니라 <아침, 요정들의 춤>105에서와 같이 상상의 인물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코로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파리에 있을 때는 정기적으로 음악회에 갔다.
그의 데생 수첩에는 관람 도중 신속하게 크로키한 가수와 오페라 무대 장식 습작으로 가득하다.
그는 로시니의 《오델로》, 구노의 《파우스트》, 앙브루아즈의 《햄릿》 등을 관람한 후 무대 뒤로 가서 배우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스케치하곤 했다.
그는 하이든, 베버, 모차르트, 베토벤, 클루크, 오베르 등을 좋아했으며 1847년에 작곡된 오베르의 오페라는 그로 하여금 <아이데>106를 그리게 했다.
오페라와 직접 관련된 그의 작품들로 1864년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와 이듬해 그린 <햄릿과 무덤 파는 사람>이 있고, 1860년 이후 그린 풍경화 대부분은 음악적 추상으로 넘친다.
보들레르가 그의 작품에서 신비로운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음악적 요소들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나타난 화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후기 작품에서 음악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현대적 세계를 결코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풍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시대를 초월하는 농부이거나 신화와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1845년까지만 해도 평론가와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에 그리 호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평론가들 특히 보들레르, 고티에, 샹플뢰리 등이 자연에 대한 그의 순수하고 진지한 태도와 사실주의에 기초하여 그림을 시처럼 그린다는 것을 알았다.
1850년대에 이르자 컬렉터와 화상들이 그의 작품을 다투어 수집하기 시작했다.
보들레르가 1845년의 살롱전에 관한 평론에서 “코로는 현대적 양식의 풍경화를 개척하고 있다”고 평했다. 코로는 1846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 시기에 쿠르베와 밀레는 주변의 일상적인 장면들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는데, 코로는 두 사람의 방법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살롱전에 계속 출품했으며 그의 작품은 고가에 팔렸다.
1855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회화 부문 1등상을 수상했으며 나폴레옹 3세가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1867년 레지옹 도뇌르의 임원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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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학의 정준영의 북 카페에 출연하여 한 이야기입니다.





1.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과학자였는가 하는 시각에 대해서?

<모나리자>의 미소에 대한 수수께끼만큼이나 레오나르도가 수수께끼의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 진상을 밝히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최후의 만찬>은 구설수에 오른 작품으로 그 작품의 이면에는 숨겨둔 진실이 있다는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많은 가설들은 가설들로만 존재할 뿐 레오나르도를 설명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고 그가 천재였다는 점만을 부각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로서 그가 발명한 것들이 너무 방대하고 엄청나서 혹시 가짜일 수도 있다는 의심에서 그 내용을 증명해 보이는 과정에서 그의 참모습이 밝혀진 것이라고 봅니다. 결과는 과연 그는 위대한 과학자였구나 하는 것입니다.


2.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동시대 인물과 비교하면?

레오나르도를 이해하기 위한 동시대 인물로는 미켈란젤로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레오나르도만큼 큰 인물을 그에 버금가는 큰 인물과 비교해야지 그보다 못한 많은 사람들을 언급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두 거봉입니다. 이 산에서 보면 저 산이 커 보이고 저 산에서 보면 이 산이 커 보이지만, 과학을 제외한 미술에서 보면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높이가 같은 두 산입니다. 다만 미켈란젤로가 더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그가 당대에 인기 있는 작가였던 반면 레오나르도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돌이켜보면 레오나르도가 미술가로서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이 그로 하여금 방향을 돌려 과학에 매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오늘 방송대학에서도 그를 과학자로 조명하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날의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손수 악기를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는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으며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겼는데, 이는 과학자의 태도에 합당하다고 봅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중세의 어두운 도덕관에 젖어 있었고, 명성이 레오나르도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아 많은 돈을 벌었지만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에 빠지는 것을 죄라고 여겨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던 던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했기 때문에 일찍이 자신이 속했던 상류사회를 벗어났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기독교관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는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스스로 염세주의의 짐을 졌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도 같았습니다.
두 사람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레오나르도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이었고, 미켈란젤로는 변혁을 두려워한 과거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해나갔습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발명가로서 분주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체를 기계에 비유해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많은 글로 남겼습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의 사상에 심취해서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업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업에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늘 작품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습니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 것은 어쩌면 당연해보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닫힌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생활상은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많은 편지와 시를 남겼어도 그것들이 철학적인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을 아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레오나르도가 미켈란젤로보다 나이가 23살이나 많다보니 레오나르도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 미켈란젤로는 아직 미술계에 발을 내딛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피렌체에서 인정받지 못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피렌체에 돌아와 잠시 머문 적은 있지만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그곳에 뼈를 묻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와 로마에서 주로 활약했으므로 두 사람의 삶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겹치는 때가 별로 없어 두 사람을 한 환경 안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공존하여 유럽 전역에 두 개의 산자락으로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독보적인 존재로 한 사람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두 거인이 함께 존재한 것은 역사에 유익합니다. 두 사람은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되어 500년을 존속했습니다. 과거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경외하는 미켈란젤로의 진지함이 레오나르도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과학에 근거해서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려 한 레오나르도의 행위가 미켈란젤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줍니다. 근대가 요구한 것은 둘 모두였습니다. 두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물질문명의 발전만이 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성찰하고 부덕한 행동을 금하는 데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오늘날의 미술에도 이런 보완이 필요합니다.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하는 유물론적 경향에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사변적인 점이 결여되어 있고, 반면 지나치게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에는 물질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르네상스 패러다임은 이제 와서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패러다임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활약을 통해서 르네상스의 교훈을 얻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입니다.


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공학자가 되 계기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레오나르도가 빈치의 작은 마을에서 번화한 도시 피렌체로 간 것은 18살 경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그가 받은 교육은 읽고 쓰기, 문법과 셈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교육은 동네 성당의 신부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철자가 불규칙해 읽기에 서툴렀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고전을 읽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마흔이 넘어서야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도나텔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도제생활을 시작했는데 큰 작업장을 갖고 있던 베로키오는 회화, 조각 외에도 싼 것 비싼 것 가리지 않고 모든 장식품의 주문을 받았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배우고 조수로 활동한 기간은 12년이나 됩니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수학한 미술가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보티첼리도 포함됩니다. 레오나르도는 서른 살에 도제생활을 마치고 마스터로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감이 없어 여전히 베로키오의 조수로 그를 도왔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를 통해 수도회의 주문을 받아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는데, 거의 2.5m의 정사각형 크기로 수십 명이 등장하는 스케일이 큰 그림이었다. 화가들이 성모 마리아를 그릴 때 다리를 벌린 자세로 옥좌에 앉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는 두 무릎을 모은 채 섬세하고도 여성적인 자세로 표현했으며 이는 후대 화가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제단화를 2-3년 사이에 그려주고 돈 대신에 땅을 받기로 했지만 미완성으로 남겼습니다. 전통 도상을 따르지 않은 미완성의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성모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주변의 공간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은 장면으로 보이며, 불필요한 상황의 세밀한 묘사를 생략했고 세 가지 예물 중 유황과 몰약을 바치는 것으로 제한했습니다. 이것 외에 성서가 언급한 내용에 관한 상징물이 이 작품에는 없습니다. 교회를 장식하는 종교화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서의 내용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레오나르도가 그런 목적으로 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 대한 그의 해석은 교회의 입장과 사뭇 달랐습니다. 화면 상단에 말 탄 사람들이 서로 살상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어 고대세계의 혼돈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기를란다요와 보티첼리가 감동을 받았고 특히 라파엘로가 영감을 받아 이런 요소를 프레스코화를 그릴 때 응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거의 완성단계에까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완성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 바사리는 그가 “변덕스럽고 불안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신학적으로 문제가 너무 난해하여 자신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레오나르도가 공학자 또는 우리가 아는 과학자의 길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은 서른한 살 때에 밀라노로 가면서 부터였습니다. 피렌체에서 화가로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만약을 가정해본다면, 그가 피렌체에서 회화에 대한 일감을 많이 받았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과학자로서의 그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밀라노는 터키족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침략을 받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무기를 개발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군수사업은 오랫동안 밀라노의 주력 산업이었으므로 그가 밀라노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한 것은 당연해보입니다. 밀라노 거리에는 수십 개의 무기판매점이 있었으나 이웃나라들과 터키에 비하면 무기사업은 열등한 편이었습니다.

밀라노로 갈 때 레오나르도는 최고 권력자에게 줄 편지를 소지했는데, 12개의 항목으로 된 편지에는
1. 공격뿐 아니라 화력에도 방어가 되는 운반 가능한 다리.
2.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물을 말리는 방법, 다리 외에도 도로포장, 사다리 올리기 등 다양한 기계.
3. 제방이 높고 장소나 지역이 험준해 기존의 방법으로 폭격이 가능하지 않을 때 폭격하는 새로운 방법.
4. 돌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박격포.
5. 전투가 바다에서 벌어질 경우에 대비해서 강한 대포, 발연, 화약을 물리칠 수 있는 배.
6. 소리를 내지 않고 통로와 비밀 지하터널을 파고, 강 밑으로도 터널을 파는 방법.
7. 약점이 없는 덮개가 있는 수송수단.
8. 대규모의 사석포, 박격포, 불덩이를 투사하는 기구.
9. 사석포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대형 투석기 외에도 공격, 방어용의 다양한 기구.
10. 평화로운 시기에 물을 이동하는 방법.
11. 대리석, 청동, 테라코타를 이용하여 어떤 인물이라도 조각으로 제작할 수 있다.
12. 군주의 부친을 기념하여 말탄 모습을 대규모의 청동 말로 제작할 수 있다.

그의 편지가 군주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과학에 근거하여 각종 무기와 공격과 방어를 겸하는 기구들을 무수히 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군부의 공학자처럼 이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동갑내기로 밀라노 군주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13년 혹은 14년 섬기게 됩니다. 레오나르도가 루도비코와 가까워진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한 여인 세실리아 갈레라니의 초상을 그린 뒤부터였습니다.


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학문적 관심에 관해 말씀해주십시오.

레오나르도에게는 유머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왜 아이들이 못생겼는데 네 그림에서는 아름답게 묘사되었느냐고 묻자 “그림은 낮에 그렸지만 아이들은 밤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는 그가 사고에 있어 매우 융통성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기타와 비슷한 14-17세기의 현악기 류트lute를 배웠는데, 파티를 좋아하고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류트와 비슷한 악기를 은으로 제작했는데, 말 머리의 형상이었고 강력한 하모니와 완전한 음을 냈습니다. 발명가 외에도 음악에 재능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류트를 노래 반주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악기는 후세 화가들에 의해서 천사가 사용하는 악기로 그림에 등장합니다. 그는 그 밖에도 아쿠스틱 악기들을 발명했으며, 비올라, 녹음기, 북과 키보드가 있는 종을 발명했고, 바이올린도 발명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악보를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악보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했습니다. 그가 쓴 악보는 현존하지 않지만 즉흥적 작곡가였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최초로 옵스쿠라를 이용하여 드로잉한 것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옵스쿠라는 어두운 방이나 상자의 벽에 작은 구멍을 내 빛을 통해 바깥 이미지를 벽에 거구로 투시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레오나르도가 이런 장치를 발명하여 드로잉에 이용했는데 이는 카메라의 원리로 훗날 카메라의 발명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과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베로키오의 문하에 있을 때부터였습니다. 당시에 도제들에게 손으로 하는 일과 병행해서 기하학, 원근법, 해부학의 초보적인 지식이 교수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이 명장이고 군인을 훈련시킨다”고 보았고 “훈련에만 집착하고 과학이 없으면 조종 장치나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선원과도 같아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결코 알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정밀한 자연과학으로 보고 또한 모든 학문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학문은 비인격적인 데 반해 회화는 개인 및 개인의 타고난 재능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화가에게는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시인의 천재성에 필적할 만한 재능까지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로 전해온 “회화는 말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회화”라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예술 사이의 서열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회화의 결점이라면 시 역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점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의 노트북을 보면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데,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가운데 의사이면서 철학자, 지리학자, 수학자인 파올로 델 포조 토스카넬 리가 적혀 있고, 피렌체에서 산수를 가르치는 베네데토의 이름도 있어 그가 그들의 강의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심이 다양했고, 과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강둑을 따라 정돈된 이상적인 도시로 구상했는데, 노트북에 의하면 도시를 5천 채의 집이 있는 마을 다섯 개로 구획하고 각 마을에 3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도시를 계획했습니다. 그는 수로에 의한 십자형의 도시로 구상하면서 수로가 운하 역할을 하고, 정원에 물을 대며, 풍차칸과 수문으로 거리의 먼지를 닦아내게 했습니다. 건물의 외관을 높이고 거리의 폭을 넓게 해서 가능한 한 많은 빛이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며 굴뚝을 지붕보다 높게 만들어서 연기가 위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로를 따라서 하수도를 만들어 사용한 물이 주거지역에서 흘러나가게 했습니다. 노트북에는 건물 내부에 화장실이 넉넉해야 하고, 걸터앉는 시트를 현대화하여 회전문처럼 360도 회전해야 하며, 천장에 많은 구멍을 내 환기가 잘 되게 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5.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체를 해부했다더군요.

레오나르도가 해부학적 드로잉을 처음 그린 것이 1490년경 그가 38살 때였습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건축에 관한 책을 읽고 나름대로 공부해온 그는 건축물을 유기체에 비유하여 잘못된 부분을 병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만의 표현이 아니라 비트루비우스가 건축물을 의인화한 이래 일부 건축가들이 건축물 기둥을 사람의 갈비뼈, 좌우익부를 팔에, 앱스(건물의 끝)를 머리에 비유했습니다. 그가 건축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에 해부학적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일찍이 해부학에 관심을 기울여 그가 남긴 드로잉들을 보면 남자누드를 그린 데서 인체의 모든 부분을 관찰했음을 알 수 있고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 구조를 상세하게 묘사했음을 봅니다. 그러나 해부학적 드로잉이 38살 때에 그려진 것으로 봐서 건축물에 대한 연구가 인체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인간이 세계의 모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체의 기하를 우주의 일체와 완전함에 적용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점차 대지 자체가 인간의 이미지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6.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science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철학, 종교, 예술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과학은 어떤 가정 하에서 일정한 인식목적과 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지식을 체계화하는 것 아닙니까? 지식이란 knowledge로서 knowing하는 것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란 호기심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에게는 호기심이 있었고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알려고 했으며 그런 것들을 노트북에 기록했습니다. 이는 과학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레오나르도에게 자연은 실험실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 바라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과학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는 퇴적작용으로 생긴 산에서 조개껍질과 해초화석을 발견하고 바다가 한때 대지를 덮은 적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작은 구멍을 낸 종이를 벽에 대고 광선의 경로를 시위했으며, 어둠 속에서 횃불을 빠르게 움직여 불의 선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류트의 줄이 진동할 때는 이중으로 보이는 것이나 탁상에 칼을 꽂아놓고 탁상에 진동이 생기게 하여 칼이 두 개로 보이는 환영을 보여주면서 눈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대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함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눈을 ‘영혼의 창문’으로 보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눈에서 발하는 미립자들에 의해 영상이 생긴다고 보았지만 레오나르도는 눈이 발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광선을 받아들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눈을 관찰한 그는 렌즈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눈이 이미지를 거꾸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입체영상의 원리, 즉 3차원 입체의 지각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한 순간에 빛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된다고 믿었지만 그는 빛이 지나간다고 보고 빛의 속도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으며 빛이 어떻게 발산하는가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진동을 떨림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보다 한 세기 이전에 이런 근본적인 법칙을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해 “모든 자연적 현상은 가장 짧은 가능한 수단에 의해 나타난다”고 적었습니다. 당시 레오나르도가 과학에서 거둔 결실은 컸습니다. 그는 과거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들에 호기심을 갖고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7.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레오나르도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이라면 현존하는 방대한 양의 그에 관한 책과 그에 대한 연구이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를 화제로 나누는 이야기가 바로 유산입니다. 왜 우리가 그의 생애를 기억하고 분석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인데, 한 마디로 실용주의 태도입니다. 앞서 언급한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기존의 교리에 동조하지 않음으로써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그 그림이 미완성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여 인류에게 유익한 환경에 되게 했습니다. 인체의 해부를 통해 질병을 알아내고 질병을 방지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 이 모든 것에는 실용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인류의 안녕과 번영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의 모든 과학적 업적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인물이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뼈를 묻고 오늘날 무덤조차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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