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낭만주의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의 낭만주의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산물이다.
전례 없는 정치적·사회적 대변혁의 시기에 출현한 낭만주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비극적 관점은 미술가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작가, 배우, 음악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가들이 취할 태도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종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설계를 갖고 민중의 선도자로 우뚝 서는 것이었다.
1800년 스탈 부인은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자기 운명의 불완전함에 대한 고통스러운 감정 덕분이다”라 하고 낭만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감정에 대해서 언급했다.
정신·감정·행위의 숭고함은 상상력을 제약하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서 그 힘을 얻는다.
화가들은 복잡한 인간의 존재와 미래가 불확실한 사회를 그리면서 극적 표현을 강조했는데, 이는 고전의 이상적 미를 추구하는 신고전주의 화가들과 대조가 되었다.
근대가 ‘우리시대의’ 혹은 ‘바로 지금’이란 의미에서 본다면 아이러니하고 반영웅주의가 낭만주의에 나타난 것은 아주 당연하다 하겠다.
특히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프랑스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향은 감정적으로 좀 더 조절된 사실주의가 출현하는 1840년대까지 존속되었다.
1800년부터 나폴레옹 집권 시의 업적을 기록하는 서사시적 그림들이 등장했다.
그로와 지로데의 전투장면들에는 신고전주의 화가들, 특히 다비드가 금기시한 폭력과 죽음 등이 있었다.
그로가 1804년에 그린 <자파의 역병 환자들의 집을 방문한 보나파르트>87가 그 한 예가 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화 외에도 북유럽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화와는 달리 밤의 분위기, 혼란스러운 감정의 표현, 몽환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었다.
이성적이기 이전의 감정적인 인간, 자연과 인간에 더욱 더 잘 접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감정에 대한 일관된 숭배, 전체적인 삶과 함께 그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점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하여 발생하는 존재의 행복에 대한 향수, 이 모든 것이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 이미 루소의 영향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여기에 화가들은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가 샤토브리앙(1768-1848)으로부터 비롯된 자아숭배를 서정적으로 표현하면서 전통 미학의 규제와 금기를 뒤흔들기 시작했는데, 낭만적 감정이 싹튼 것이다.
생말로에서 태어나 브르타뉴 지방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갔다가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근대 세계의 불안정성을 이론화한 『대혁명에 관한 논평』(1797)을 썼다.
이 책은 낭만주의의 모든 기본 주제들을 망라했다.
1792년부터 1800년까지 망명 생활을 한 그는 1800년 프랑스로 돌아와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문단 생활을 시작했다.
『아탈라』(1801)는 그가 쓴 최초의 위대한 문학 텍스트로서 샥타스와 아탈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룬 것이다.
이 이야기는 참신한 문체와 언어로 낭만주의자들의 이국 취향을 예고했다.
지로데는 이 이야기를 <아탈라의 매장>88이라는 제목으로 묘사했다.
샤토브리앙의 기념비적 낭만주의 작품인 『죽음 저편의 회상』이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는데, 이 작품에 그려진 것은 불연속적이거나 방황하는 자아로서 여행자·작가·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세 가지 성격을 되짚은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사원정과 황실의 주문은 화가들에게 동방(유럽의 시각에서 본 동방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말함)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동방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은 언론에 상세하게 보도되었으며 그로, 지로데 등의 화가들이 역사화에서 즐겨 다루었던 소재인 나폴레옹 원정을 계기로 또다시 현실성 있게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18세기 이래 화가들이 선호하던 여행지는 이탈리아에서 동방으로 바뀌었다.
동방에 대한 관심은 낯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다른 민족을 만나보기 위해 자국의 문화에서 벗어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1811년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을 발표한 샤토브리앙을 본받아 포르뱅(1818), 드캉(1827), 도자(1830), 들라크루아(1832), 마지막으로 샤세리오(1846)가 스페인, 아프리카, 근동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받은 인상은 그들의 화풍을 변화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주로 과거와 당대의 사건이나 문학에서 영감을 얻었고, 1832년 모로코를 방문한 뒤로는 좀 더 이국적인 주제도 다루게 되었다.
하렘(후궁)의 모습을 담은 <알제리의 여인들>89은 1832년에 6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받은 영감의 결과이다.
앵그르는 동방에서 영감을 얻어 관능적이면서도 차가운 하렘의 여인들을 그리게 되었으며 동방 여인의 신화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앵그르와는 반대로 들라크루아가 그린 동방의 여인들은 보다 야성적인 관능성이 배어나거나 하렘의 안일한 생활에 젖어 있어 그의 영감이 열정적이거나 향수에 젖어 있음을 나타냈다.
마리 클로드 쇼도느레 외 네 명의 공저 『프랑스 낭만주의』에는 프랑스 낭만주의에 끼친 동방의 오리엔탈리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지리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동방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동물적 관능성의 확인에 이르기까지, 나르시스적 내향성에서 자아의 충일한 표현에 이르기까지 낭만적 상상계의 모든 단면을 담고 있었다.
네르발과 고티에의 여행기 『콘스탄티노플』(1853)이 출간되기 이전에 이미 빅토르 위고의 『동방 시집』(1829) 서문은 동방이 낭만주의자들을 얼마나 강한 매력으로 사로잡았는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의 또 다른 바다인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중세시대처럼 위대하고 호화롭고 풍요롭다.”
프랑스 낭만주의에 끼친 영향으로 독일과 영국의 문학을 꼽을 수 있다.
스탈 부인으로 불리는 안-루이즈-제르맹 네케르(1766-1817)를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외국 문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스탈 부인은 파리에서 스위스인 부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스위스 제네바의 은행가로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시대에 재무장관을 지낸 자크 네케르였고, 어머니 쉬잔 퀴르쇼는 프랑스계 스위스 목사의 딸로서 파리에 문인과 정객들이 모이는 화려한 살롱을 열어 남편의 출세를 도왔다.
일찍부터 미모뿐 아니라 발랄한 재치로 명성을 얻었던 스탈 부인의 사상에는 루소의 열정과 몽테스키외의 합리주의가 특이하고 대립적으로 뒤섞여 있었다.
몽테스키외의 숭배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기반을 둔 정치적 견해를 받아들였고, 프랑스 혁명을 지지해 자코뱅주의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국민이 선출한 기구인 국민공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를 다스리던 시기에, 온건한 지롱드 파는 그녀의 사상과 가장 잘 들어맞았다.
스탈 부인은 또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당시 유럽인들은 그녀를 나폴레옹과 앙숙으로 여겼다.
그녀는 자신의 코페 성을 유럽의 재능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의 장소로 만들었으며 『독일론』을 통해 독일 문학을 소개하는 일에 기여했다.
괴테는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위대한 미학적 원천이 되었고 네르발은 1828년부터 『파우스트』를 번역했다.
파우스트와 같은 인물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전환기를 그린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클로드 프롤로라는 인물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알프레드 드 뮈세는 1836년에 이렇게 적었다.
“새로운 문학의 가장인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자살로 이끄는 정열을 묘사한 이후 『파우스트』에서는 악과 불행을 가장 어두운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프랑스 낭만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영국 문학이다.
심리적·정치적 통찰의 작품으로 유명한 스탕달은 『라신과 셰익스피어』(1823-25)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에게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연구하는 방법”을 본받아야 한다고 적었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은 대단했는데 위고는 『동방 시집』(1829)에 실린 시 《하렘의 머리들》에서 “오 끔찍하도다! 오 끔찍하도다! 너무도 끔찍하도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