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바르의 충고



요즘 클림트의 드로잉과 수채화에 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Thames & Hudson에서 2005년에 출간한 <Gustav Klimt>를 읽고 있는데, 이번에 뉴욕에서 운반해온 책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읽다보니 클림트의 후원자이며 그보다 한 살 어린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극작가 헤르만 바르Hermann Bahr(1863-1934)가 1897년 새로 창설된 비엔나 분리파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클림트는 1897년 4월 3일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요제프 호프만과 더불어 비엔나 분리파 the Viennese Secession를 창설하고 회장에 선출되었고, 그 해에 헤르만 바르가 분리파에서 한 말입니다.
그의 말은 마치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듯해서 그가 한 말을 번역하여 여기에 인용합니다.
그는 분리파 화가들 말한 것이지만, 그의 말에서 당시 비엔나 지식인들이 예술가들 혹은 지식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늠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쪼록 나와 같은 영감을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에게 미술을 제공하는 것은 가장 현대적인 그림들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전시회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마술사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비엔나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미묘한 기쁨,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섬세한 바램, 그리고 끊임없는 희망을 선과 색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것들을 창조해야만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도록 하게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들의 열망을 일깨워놓았습니다.
자 우리들에게 참다운 것들을 주십시오!
오스트리아인의 미술을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오래되고 감미로운 거리의 경관과 공원 난간에 쏟아지는 햇빛, 라일락의 향이 퍼지고 작은 비엔나 소녀들이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그리고 대문을 지날 때 안뜰에서 울려 퍼지는 왈츠를 들을 수 있는 것들이 영감을 주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왜 자신의 가슴이 행복으로 가득 찼는지 외치기를 바라지만 말로 할 수 없는 그래서 미소를 띠우면서 '그게 바로 진정한 비엔나야!'라고 말합니다.
이런 진정한 비엔나를 여러분이 반드시 그려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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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교수신문에 기고한 것입니다.
내주 월요일 혹은 화요일 교수신문에 들어가시면 로스코의 작품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리움 전시장에 대해서 혹평을 하려고 했는데, 지면이 부족하여 전시장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했습니다.
로스코 전시장은 그야말로 카페 분위기였고, 백남준 전시장은 식당 분위기였습니다.
뮤지엄에 대한 건축가의 안목도 문제이지만 그런 건축가를 고용한 삼성미술관 owner의 안목 또한 문제라고 봅니다.
암튼 로스코 작품을 감상하실 분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크 로스코: 숭고의 미학

삼성미술관 Leeum의 ‘마크 로스코: 숭고의 미학’ 전시회에는 불과 27점이 소개되고 있지만, 1930년대의 구상화, 1940년대의 신화화, 1950년대와 60년대의 색면 추상이 골고루 있어 그의 회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작품세계의 기반은 문학과 음악이었고, 재료는 내면의 삶, 내면의 체험이었다.
로스코의 숭고함, 한계, 천국과 지옥으로서의 형이상학적 고통이 그가 “비극적인” 것으로 부르기를 선호한, 그리고 색의 전통적 기능들을 부정한 대형 캔버스들 속에 내재해 있다.
열 살 때 러시아로부터 미국으로 온 로스코(본명 Marcus Rothkowitz, 1903-70)는 장학금을 받고 예일대학에 입학했지만 2학년 때 유태인배척주의에 의해 장학금이 중단되자 자퇴하고 뉴욕으로 갔다.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30년대에 뉴욕의 환경, 특히 젊은 예술가들이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에 나타나는 삶의 현장을 조명했는데, <지하철 판타지>가 그중 하나다.
일련의 지하철장면들은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 차있다.
구상화에 나타난 구성은 인물들이 무대에서처럼 그룹을 지은 것이다.
그는 지하철 기둥들로 강조한 침묵의 지하세계 속에 소외된 영혼들의 현격한 차이가 있는 영상을 보여주려고 했다.
특기할 점은 불분명하고 솜씨 없어 보이도록 인물을 표현적으로 일그러뜨리고 사변적으로 준원시적quasi-primitive 방법으로 그린 것으로 이는 맥스 웨버로부터 받은 원시주의 회화방법의 영향이다.
일부 작품에서 신화적 탐험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보는데, 인물들이 길어졌고, 보편화되었으며, 고대 그리스 양식에서 발견되는 얕은 릴리프로 구성되었다.
신화의 관심은 1930년대 초 동갑내기 애돌프 고틀리브를 만나고부터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만나 신화에 관해 논의했다.
로스코는 프로이트, 융, 마르크스, 프레이저 등의 이론들에 관해 토론했으며,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들의 영웅인 니체로 회귀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몰두하는 중 신화의 정의를 발견했다.
니체는 음악을 듣는 가운데 엄청난 감성적 흥분을 발견했으며, 로스코는 음악의 중요성에 관한 니체 방식의 비전에 집중했다.
음악에 민감한 로스코에게 니체의 저서는 갖가지 요소를 내포한 직관에 초점을 두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면의 섬세한 감수성의 본질로 말하면 그는 니체의 가까운 친족이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리스 드라마의 초기 양식들에 주의를 집중시켰고, 신화에서 “행위, 힘, 충돌하는 지배력들의 극적인 세계”를 발견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에 관한 책, 특히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최초의 인물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의 저서를 읽었다.
니체는 아이스킬로스의 양식에는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이 융합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로스코의 심리학적 진화에서 아이스킬로스의 중요성을 빠뜨릴 수 없다.
그의 노력은 주로 인간의 상황에 대한 우수적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에게 미술은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탐험할 수 있는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진입하는 모험이었다.
로스코는 숭고한 감정을 모노크롬에 가깝게 그린 바넷 뉴먼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로부터 테마 문제의 선택에서 영향 받았다.
온갖 종류의 이미지와 충동들이 전례 없는 방식들로 작품들에 나타났다.
뉴먼의 영향을 받아 로스코는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캔버스를 두 개 혹은 세 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채를 엷게 칠한 뒤 그 위에 좀 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직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구름과 같은 이런 형태는 점차 단순해졌고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 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그의 색채는 마치 내부의 빛으로 충만한 듯한 특별한 광휘를 지니는데, 그 효과의 대부분은 인접한 색조의 면들이 만나도록 되어 있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밀도와 표면 그리고 가장자리는 관람자의 명상에 순수한 대상을 이루는 두드러진 구성요소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이미지를 거부하는 정신성을 창출했으며 미술과 성스러움의 결합을 되살려냈다.
로스코는 자아표현으로부터 니체가 시사한 숭고한 비극으로, 프라 안젤리코로부터 초기 크리스천들로 나아갔다.
그는 이탈리아를 방문하던 중 라벤나의 대주교의 예배당 안에 있는 명각 “빛은 여기에서 태어났거나, 자유롭게 여기에 수감되었으며 지배한다”를 발견하고 그것이 곧 자신이 여태까지 추구해온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예배당은 로스코의 정신적 빛에 대한 비전에 자극제가 되었다.
그에게는 빛이 교회들의 덫에 잡힌 것처럼 보였다.
로버트 머더웰이 1967년 초 로스코의 작업실을 둘러본 후 “그것들은 진정으로 종교적인 것들이다”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업실에서 느낀 음울함, 로스코가 만년에 성스러운 것으로 지각될 수 있는 분위기를 위해 만든 일종의 침묵하는 공간, 이런 것들이 비잔틴 교회들과 같은 성스러운 장소들과 연합되었다.
로스코는 수년에 걸쳐 작업하면서 자신의 개념을 순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분위기 있는 그림들은 어두워졌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색채는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더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작용이 감소되었다.
로스코는 1968년 4월 갑자기 심각한 동맥류에 의해서 쓰러졌다.
충분히 건강을 회복하여 가족과 함께 프로빈스타운으로 갔을 때 그는 검은색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말한 대로 “어두운 색이 항상 위에 있는” 두 개의 직사각형 면들을 나누는 진기하고 확고한 선이 있는 보라색 바탕에 검은색, 갈색 바탕에 검은색이었다.
그는 1970년 2월 2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스코는 그림을 커다랗게 그리기 시작하면서 1951년에 그 이유를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매우 친밀하고 인간적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네 자신을 너의 체험 밖에 두는 것이며, 체험을 입체광학으로 바라보거나 축소렌즈로 바라보는 것과 같이 방관하는 것이다.”
그는 “느낌의 중량”에 관해 언급했으며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다른 중량을 갖고 있다는 식의 음악적 유추를 사용했다.
그는 “회화는 체험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체험이다”라고 했다.
그는 물질적인 효과, 그의 다양한 형상의 색면들이 단순히 표면에 놓여진 ‘사물들’임을 강조했다.
그는 말하기를 노란색이 커다란 면에 칠해지고 빛나는 빨간색이 있는 자신의 그림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낙천적으로 지각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오히려 비극”임을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햇빛과 관련된 노란색조차도 로스코에 의해서 그 의미가 변형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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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라는 말은 제발 ...



요즘 교사들의 폭력이 자주 보도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사들의 자질 문제입니다.
교육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교사가 된 데에 그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보같은 교사들이 종종 '사랑의 매'라는 말을 쓰는 걸 듣는데,
그런 말은 삼가해야 합니다.
사랑과 매는 연결이 되지 않는 별개의 개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들어야 하다면 제발 사랑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매맞도록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매는 분노의 폭력적 행위일 뿐 거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자의 잘못을 사랑으로 고치겠다는 건 매우 고상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매로 고치겠다고 덤벼드는 건 교사의 자질의 문제가 있는 걸 말해줍니다.
아마 매를 맞고 교사가 되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매를 대물림하려고 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과거 교사들의 폭력은 두 편의 영화에서 극적으로 소개되었는데,
얼마나 끔찍합니까?
아직도 '사랑의 매'라는 말을 사용하는 교사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교단을 떠나 경호원의 직업을 찾도록 하십시요.
경호원은 사랑까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고용한 주인을 위해 맹견처럼 매를 들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니까요.

'사랑의 매'라는 말은 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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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회




광풍회光風會는 백마회의 회원이었던 中澤弘光, 山本森之助, 三宅克己, 杉浦非水, 岡野榮, 小林鐘吉, 跡見泰 7명이 1912년 6월에 창립전을 우에노 竹之臺 진열관에서 개최했다.
창립회원 7명은 구로다 세이키의 제자들로 외광파풍의 온건한 작품이 주류였다.
야외 광선을 도입한 그들의 밝은 화면은 국내파, 즉 아사이 츄淺井 忠(1856~1907)를 비롯한 고부미술학교工部美術學校 출신들의 어두운 화면과 대조되어 외광파外光派로 불리우게 되었고 곧 일본 근대미술에서 주류로 떠올랐다.
이 양식은 조선에서도 정확한 미술사적 맥락의 이해 없이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광풍회는 회화부, 공예부가 있어 매년 봄에 공모전을 연다.


특기할 점은 이인성의 고향 대구가 당시 서양화가 발전된 선구적인 지역이었다는 사실이다.
대구에는 교남서화연구회가 1922년 1월 발족했는데 서병오가 주축이 되어 지역적 서화 진작과 신진 양성을 목표로 했다.
그때 서법과 문인화 범주의 화법을 지도한 서병오는 그 후 선전의 서와 사군자부의 심사위원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동양화의 터전이 있던 대구는 이인성이 활약하던 1930년대 이후에는 한국 서양화의 요람으로 부상했다.
대구는 지리적으로 일본 식민정책의 주요 내륙거점이었으며 일본 자본이 유입되면서 급속히 산업화되었다.
1920년대에 대구에는 많은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화가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국인은 일본 화가들로부터 서양화를 배울 수 있었다.
이런 점은 한국인의 그림에 나타난 일본 화풍에서 어느 정도 추정된다.
초기 선전에 한국인 출품자보다 일본인 출품자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에서도 국내에 체류하던 일본인 화가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대구는 1930년대에 서양화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대구 출신 작가로 처음 선전에 출품한 사람은 박명조(1906~69)로 1926년 제5회 때에 출품했다.
1931년 제10회 때는 10명이 입선했고, 이듬해 제11회 때는 14명이 입선했다.


1930년 대구에서 향토회鄕土會가 결성되었는데 대구 서양화의 주요 화가들 김용준, 서동진, 최화수, 박명조, 배명학, 서진달(1908~47), 서병기(1919~93), 이현택, 김성암, 최유조, 한성준 등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서진달은 여인의 누드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당시 누드모델을 구하기 어려운 때 그는 조선 여인의 누드를 1937년 <손을 허리에 댄 나부>란 제목 등으로 그렸다.
향토회는 창립전을 1930년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개최했는데 서동진, 이인성, 김성암, 박명조, 김용준, 최화수 등 16명이 48점을 출품했다.
특기할 점은 향토회에 평론가 김용준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것으로 그의 향토적 예술론이 향토회를 통해 발아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용준은 1930년 『동아일보』에 ‘동미전을 개최하면서’란 제목의 글에서 주장했다.


“오인이 취할 조선의 예술은 서구의 그것을 모방하는 데 그침이 아니요, 또는 정치적으로 구분하는 민족주의적 입장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요, 진실로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그 율조를 찾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런 한국화의 타당성에 대해 선전의 일본 심사위원들도 동감을 표시했다.
일본 심사위원은 1935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이번에는 다른 것보다 색채로의 경향이 보이는데, 이 점에서 좋은 작품도 있는 바 조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색채가 있어서 좋다”고 적었다.
그러나 김복진은 김용준의 향토적 예술론을 비판하면서 이는 이국적인 색채를 바라는 외국인의 취향에 부응하도록 하는 제국주의 문화정책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상황에서 타당한 발언이었다.
김용준이 논한 향토적 예술론이 구체적으로 회화에서 어떻게 나타났느냐 하는 것은 밝히는 것이 그가 추구한 한국화의 특성으로 매김이 될 것이다.


향토회 회원으로 제8회 선전에 출품한 이인성의 수채화 <음 陰>(1929)은 서동진으로부터 수채화를 배운 후 그린 것으로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기 2년 전에 그린 것이다.
이인성은 스승 서동진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더라도 스승으로부터 서양 양식의 특징에 관해서는 배워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빛의 역할을 알고 빛의 효과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점이다.
서동진은 1928년에 개인전을 열면서 카탈로그에 적었다.


“얼마나 동경하였습니까?
화면에 나타나는 새 예술의 기분!
묵시와 암로暗露의 음영과 색채!
신비한 미의 장숙莊肅한 느낌은
황홀한 도취의 저 고개를 넘어서
세례의 성수로 심령을 씻은 듯.”


서동진이 언급한 ‘음영과 색채’ 그리고 ‘미의 장숙한 느낌’을 이인성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동경으로 가서 공부하며 그린 <가을 어느 날>(1934)을 보면 인상주의 요소는 사라지고 후기인상주의 특히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이 영향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이 작품과 이듬해에 그린 <경주의 산곡에서>는 <음>을 그린 화가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그의 회화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화면 구성에서 그가 개성이 강한 화가임을 알 수 있어 고갱과 반 고흐의 과격한 표현주의가 그를 압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고갱과 반 고흐의 양식을 절묘하게 혼용하여 독특한 표현 양식을 창안해냈으며 원색을 사용하여 강렬한 이미지가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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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의 수상경력은 화려하다.




선전 제8, 9회에 입선한 이후 제10, 11, 13, 14, 15회에서는 특선했고,
제12회에서는 입선, 제16, 17, 18, 19회에서는 추천작가였으며,
제14회에서는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이경성은 『이인성 작품집』(1972)에서 “한국미를 정리한 화가”라면서 『근대 한국 미술가론고』(1974)에서는 “날카로운 감각은 그의 인간적 반골정신의 미적 표현”이라고 극찬했다.
이와 달리 김윤수는 이인성을 가리켜 『한국 근대 회화선집』(1990)에서 “하나의 양식을 체계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추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으로 정립시키지도 못했다”고 했으며, 『한국 현대 회화사』(1975)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결코 위대한 작가가 아니었고 독자적인 세계와 양식을 이룩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에는 그가 태어나 산 시대의 민족적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의식이 미숙한 데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도 다만 서구의 회화양식을 이것저것 편력만 하면서 방황했던 사실은 그의 작가적인 역량을 감소시키는 주요인이다.”


이인성에 대한 비판은 일제시대에 관전인 선전의 공모전을 통해 활동한 것에 주로 모아진다. 총독부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창설한 선전은 한국인에게 부정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인성뿐만 아니라 선전에 참여한 화가들 대부분 출세지향을 위해 관전에만 주로 출품했으므로 이에 대한 반감이 화가들에 대한 비판에 크게 작용했다.


김윤수는 이인성이 민족미술 단체인 협전에는 참여하지 않고 주로 관전을 통해 명성을 얻었음을 지적하면서 『한국 근대 회화선집』 (1990)의 ‘근대 회화 정신의 수용과 좌절’에서 “이인성은 자신이 택한 자유주의적인 회화양식과는 달리 현실적으로는 지극히 관료주의자였고 또 그만큼 체제순응적이었다는 점이다”라고 기술했다.


일제시대의 관전 출신 작가라는 사실은 곧잘 친일작가로까지 매도하는 데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서양화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거의 유일한 선전에 출품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알릴 기회가 없었다.
민족의 순수 단체에 의한 협전이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전통 한국화가 주류였고 서양화는 대단히 미비했다.


가장 왕성했을 때인 1923년의 제3회전의 경우 유화는 3점밖에 출품되지 않았고 수묵채색화는 63점, 서예는 35점이었다.
이듬해 제4회 때는 유화와 수채화를 합해 11점이었고 수묵채색화는 54점, 서예는 58점이었다.
서양화가들이 협전을 기피한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선전에 주로 출품한 사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협전은 자주적이었고 선전은 일제가 주최하고 일제가 심사를 맡은 일본의 관전이었다.
선전으로 작가들이 쏠리자 협전은 15회전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선전으로 출품이 몰리고 협전이 약세를 면치 못하자 동아일보는 1930년 제10회 기념전 개막에 붙여 사설을 통해 “총 세력으로 협전을 지키라. 그것에 우리의 예술, 그대 자신들의 예술이 꽃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총독부전엔 일본에서 대가가 나와 심사하는 바람에 일가의 주관이 서지 못한, 너무나도 자존심이 박약한 신진들은 협전을 알기를 헌신짝처럼 구박했었다.
조선의 미술가들은 우연이 아닌 이 세력을 근거로 어디까지든지 협전을 지지하여 조선인 미술의 유일한 민간 합동단체로서의 권위를 빛내라.
조선의 미술가들 … 자존심을 지키기에는 부그럽지 않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후예들이다.
협전은 그대들의 전당이 아닌가.
어찌 다른 전람회에 눌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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