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교수신문에 기고한 것입니다.
내주 월요일 혹은 화요일 교수신문에 들어가시면 로스코의 작품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리움 전시장에 대해서 혹평을 하려고 했는데, 지면이 부족하여 전시장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했습니다.
로스코 전시장은 그야말로 카페 분위기였고, 백남준 전시장은 식당 분위기였습니다.
뮤지엄에 대한 건축가의 안목도 문제이지만 그런 건축가를 고용한 삼성미술관 owner의 안목 또한 문제라고 봅니다.
암튼 로스코 작품을 감상하실 분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크 로스코: 숭고의 미학
삼성미술관 Leeum의 ‘마크 로스코: 숭고의 미학’ 전시회에는 불과 27점이 소개되고 있지만, 1930년대의 구상화, 1940년대의 신화화, 1950년대와 60년대의 색면 추상이 골고루 있어 그의 회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작품세계의 기반은 문학과 음악이었고, 재료는 내면의 삶, 내면의 체험이었다.
로스코의 숭고함, 한계, 천국과 지옥으로서의 형이상학적 고통이 그가 “비극적인” 것으로 부르기를 선호한, 그리고 색의 전통적 기능들을 부정한 대형 캔버스들 속에 내재해 있다.
열 살 때 러시아로부터 미국으로 온 로스코(본명 Marcus Rothkowitz, 1903-70)는 장학금을 받고 예일대학에 입학했지만 2학년 때 유태인배척주의에 의해 장학금이 중단되자 자퇴하고 뉴욕으로 갔다.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30년대에 뉴욕의 환경, 특히 젊은 예술가들이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에 나타나는 삶의 현장을 조명했는데, <지하철 판타지>가 그중 하나다.
일련의 지하철장면들은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 차있다.
구상화에 나타난 구성은 인물들이 무대에서처럼 그룹을 지은 것이다.
그는 지하철 기둥들로 강조한 침묵의 지하세계 속에 소외된 영혼들의 현격한 차이가 있는 영상을 보여주려고 했다.
특기할 점은 불분명하고 솜씨 없어 보이도록 인물을 표현적으로 일그러뜨리고 사변적으로 준원시적quasi-primitive 방법으로 그린 것으로 이는 맥스 웨버로부터 받은 원시주의 회화방법의 영향이다.
일부 작품에서 신화적 탐험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보는데, 인물들이 길어졌고, 보편화되었으며, 고대 그리스 양식에서 발견되는 얕은 릴리프로 구성되었다.
신화의 관심은 1930년대 초 동갑내기 애돌프 고틀리브를 만나고부터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만나 신화에 관해 논의했다.
로스코는 프로이트, 융, 마르크스, 프레이저 등의 이론들에 관해 토론했으며,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들의 영웅인 니체로 회귀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몰두하는 중 신화의 정의를 발견했다.
니체는 음악을 듣는 가운데 엄청난 감성적 흥분을 발견했으며, 로스코는 음악의 중요성에 관한 니체 방식의 비전에 집중했다.
음악에 민감한 로스코에게 니체의 저서는 갖가지 요소를 내포한 직관에 초점을 두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면의 섬세한 감수성의 본질로 말하면 그는 니체의 가까운 친족이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리스 드라마의 초기 양식들에 주의를 집중시켰고, 신화에서 “행위, 힘, 충돌하는 지배력들의 극적인 세계”를 발견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에 관한 책, 특히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최초의 인물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의 저서를 읽었다.
니체는 아이스킬로스의 양식에는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이 융합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로스코의 심리학적 진화에서 아이스킬로스의 중요성을 빠뜨릴 수 없다.
그의 노력은 주로 인간의 상황에 대한 우수적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에게 미술은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탐험할 수 있는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진입하는 모험이었다.
로스코는 숭고한 감정을 모노크롬에 가깝게 그린 바넷 뉴먼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로부터 테마 문제의 선택에서 영향 받았다.
온갖 종류의 이미지와 충동들이 전례 없는 방식들로 작품들에 나타났다.
뉴먼의 영향을 받아 로스코는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캔버스를 두 개 혹은 세 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채를 엷게 칠한 뒤 그 위에 좀 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직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구름과 같은 이런 형태는 점차 단순해졌고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 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그의 색채는 마치 내부의 빛으로 충만한 듯한 특별한 광휘를 지니는데, 그 효과의 대부분은 인접한 색조의 면들이 만나도록 되어 있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밀도와 표면 그리고 가장자리는 관람자의 명상에 순수한 대상을 이루는 두드러진 구성요소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이미지를 거부하는 정신성을 창출했으며 미술과 성스러움의 결합을 되살려냈다.
로스코는 자아표현으로부터 니체가 시사한 숭고한 비극으로, 프라 안젤리코로부터 초기 크리스천들로 나아갔다.
그는 이탈리아를 방문하던 중 라벤나의 대주교의 예배당 안에 있는 명각 “빛은 여기에서 태어났거나, 자유롭게 여기에 수감되었으며 지배한다”를 발견하고 그것이 곧 자신이 여태까지 추구해온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예배당은 로스코의 정신적 빛에 대한 비전에 자극제가 되었다.
그에게는 빛이 교회들의 덫에 잡힌 것처럼 보였다.
로버트 머더웰이 1967년 초 로스코의 작업실을 둘러본 후 “그것들은 진정으로 종교적인 것들이다”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업실에서 느낀 음울함, 로스코가 만년에 성스러운 것으로 지각될 수 있는 분위기를 위해 만든 일종의 침묵하는 공간, 이런 것들이 비잔틴 교회들과 같은 성스러운 장소들과 연합되었다.
로스코는 수년에 걸쳐 작업하면서 자신의 개념을 순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분위기 있는 그림들은 어두워졌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색채는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더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작용이 감소되었다.
로스코는 1968년 4월 갑자기 심각한 동맥류에 의해서 쓰러졌다.
충분히 건강을 회복하여 가족과 함께 프로빈스타운으로 갔을 때 그는 검은색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말한 대로 “어두운 색이 항상 위에 있는” 두 개의 직사각형 면들을 나누는 진기하고 확고한 선이 있는 보라색 바탕에 검은색, 갈색 바탕에 검은색이었다.
그는 1970년 2월 2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스코는 그림을 커다랗게 그리기 시작하면서 1951년에 그 이유를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매우 친밀하고 인간적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네 자신을 너의 체험 밖에 두는 것이며, 체험을 입체광학으로 바라보거나 축소렌즈로 바라보는 것과 같이 방관하는 것이다.”
그는 “느낌의 중량”에 관해 언급했으며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다른 중량을 갖고 있다는 식의 음악적 유추를 사용했다.
그는 “회화는 체험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체험이다”라고 했다.
그는 물질적인 효과, 그의 다양한 형상의 색면들이 단순히 표면에 놓여진 ‘사물들’임을 강조했다.
그는 말하기를 노란색이 커다란 면에 칠해지고 빛나는 빨간색이 있는 자신의 그림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낙천적으로 지각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오히려 비극”임을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햇빛과 관련된 노란색조차도 로스코에 의해서 그 의미가 변형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