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회




광풍회光風會는 백마회의 회원이었던 中澤弘光, 山本森之助, 三宅克己, 杉浦非水, 岡野榮, 小林鐘吉, 跡見泰 7명이 1912년 6월에 창립전을 우에노 竹之臺 진열관에서 개최했다.
창립회원 7명은 구로다 세이키의 제자들로 외광파풍의 온건한 작품이 주류였다.
야외 광선을 도입한 그들의 밝은 화면은 국내파, 즉 아사이 츄淺井 忠(1856~1907)를 비롯한 고부미술학교工部美術學校 출신들의 어두운 화면과 대조되어 외광파外光派로 불리우게 되었고 곧 일본 근대미술에서 주류로 떠올랐다.
이 양식은 조선에서도 정확한 미술사적 맥락의 이해 없이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광풍회는 회화부, 공예부가 있어 매년 봄에 공모전을 연다.


특기할 점은 이인성의 고향 대구가 당시 서양화가 발전된 선구적인 지역이었다는 사실이다.
대구에는 교남서화연구회가 1922년 1월 발족했는데 서병오가 주축이 되어 지역적 서화 진작과 신진 양성을 목표로 했다.
그때 서법과 문인화 범주의 화법을 지도한 서병오는 그 후 선전의 서와 사군자부의 심사위원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동양화의 터전이 있던 대구는 이인성이 활약하던 1930년대 이후에는 한국 서양화의 요람으로 부상했다.
대구는 지리적으로 일본 식민정책의 주요 내륙거점이었으며 일본 자본이 유입되면서 급속히 산업화되었다.
1920년대에 대구에는 많은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화가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국인은 일본 화가들로부터 서양화를 배울 수 있었다.
이런 점은 한국인의 그림에 나타난 일본 화풍에서 어느 정도 추정된다.
초기 선전에 한국인 출품자보다 일본인 출품자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에서도 국내에 체류하던 일본인 화가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대구는 1930년대에 서양화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대구 출신 작가로 처음 선전에 출품한 사람은 박명조(1906~69)로 1926년 제5회 때에 출품했다.
1931년 제10회 때는 10명이 입선했고, 이듬해 제11회 때는 14명이 입선했다.


1930년 대구에서 향토회鄕土會가 결성되었는데 대구 서양화의 주요 화가들 김용준, 서동진, 최화수, 박명조, 배명학, 서진달(1908~47), 서병기(1919~93), 이현택, 김성암, 최유조, 한성준 등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서진달은 여인의 누드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당시 누드모델을 구하기 어려운 때 그는 조선 여인의 누드를 1937년 <손을 허리에 댄 나부>란 제목 등으로 그렸다.
향토회는 창립전을 1930년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개최했는데 서동진, 이인성, 김성암, 박명조, 김용준, 최화수 등 16명이 48점을 출품했다.
특기할 점은 향토회에 평론가 김용준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것으로 그의 향토적 예술론이 향토회를 통해 발아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용준은 1930년 『동아일보』에 ‘동미전을 개최하면서’란 제목의 글에서 주장했다.


“오인이 취할 조선의 예술은 서구의 그것을 모방하는 데 그침이 아니요, 또는 정치적으로 구분하는 민족주의적 입장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요, 진실로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그 율조를 찾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런 한국화의 타당성에 대해 선전의 일본 심사위원들도 동감을 표시했다.
일본 심사위원은 1935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이번에는 다른 것보다 색채로의 경향이 보이는데, 이 점에서 좋은 작품도 있는 바 조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색채가 있어서 좋다”고 적었다.
그러나 김복진은 김용준의 향토적 예술론을 비판하면서 이는 이국적인 색채를 바라는 외국인의 취향에 부응하도록 하는 제국주의 문화정책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상황에서 타당한 발언이었다.
김용준이 논한 향토적 예술론이 구체적으로 회화에서 어떻게 나타났느냐 하는 것은 밝히는 것이 그가 추구한 한국화의 특성으로 매김이 될 것이다.


향토회 회원으로 제8회 선전에 출품한 이인성의 수채화 <음 陰>(1929)은 서동진으로부터 수채화를 배운 후 그린 것으로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기 2년 전에 그린 것이다.
이인성은 스승 서동진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더라도 스승으로부터 서양 양식의 특징에 관해서는 배워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빛의 역할을 알고 빛의 효과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점이다.
서동진은 1928년에 개인전을 열면서 카탈로그에 적었다.


“얼마나 동경하였습니까?
화면에 나타나는 새 예술의 기분!
묵시와 암로暗露의 음영과 색채!
신비한 미의 장숙莊肅한 느낌은
황홀한 도취의 저 고개를 넘어서
세례의 성수로 심령을 씻은 듯.”


서동진이 언급한 ‘음영과 색채’ 그리고 ‘미의 장숙한 느낌’을 이인성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동경으로 가서 공부하며 그린 <가을 어느 날>(1934)을 보면 인상주의 요소는 사라지고 후기인상주의 특히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이 영향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이 작품과 이듬해에 그린 <경주의 산곡에서>는 <음>을 그린 화가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그의 회화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화면 구성에서 그가 개성이 강한 화가임을 알 수 있어 고갱과 반 고흐의 과격한 표현주의가 그를 압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고갱과 반 고흐의 양식을 절묘하게 혼용하여 독특한 표현 양식을 창안해냈으며 원색을 사용하여 강렬한 이미지가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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