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예술

이것은 오늘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백남준의 미망인은 “그분은 천국에서도 퍼포먼스를 할 거에요”라고 했다.
백남준의 예술에서 퍼포먼스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는 것을 새삼 상기시킨 말이다.
1996년 4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얼마 안 되어 소호의 거리에서 건장한 두 남자가 휠체어에서 백남준을 들어 차에 태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분의 활동은 종료되었구나 생각했지만 병세가 나아지자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퍼포먼스를 소개했으며 비디오아트 작품도 지속적으로 제작했다.


그의 예술에 관해 언급하려니 그가 한 말이 생각난다.

“예술가들은 욕심이 많아서 남이 쓰는 자신의 이야기에 관해 제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 관해 글을 써야 하는 나는 평론가는 의심이 많아서 예술가가 하는 자신의 이야기에 관해 제대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백남준은 미국 토양에 이식된 예술가로 케이지의 영향 하에 미국이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팝아트를 받아들였으며 이를 비디오아트로 재생산했다.
그의 비디오아트 작품 대부분은 팝아트의 정신을 따른 사변적이거나 진지함을 고의적으로 기피한 것들이지만 문명을 찬양하거나 비판한 것들도 소수 있다.
퍼포먼스에서 발견되는 나르시시즘이 비디오아트 작품에서도 발견되는데 자신의 작업에 흡족해 하는 태도이다.
미국이 대중영화, 대중음악, 대중미술을 생산하여 전 세계에 보급하며 맹위를 떨칠 때인 1960년대에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를 대중미술로 소개했으며 미국의 소비주의와 자본주의의 풍요 속에 이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수십 개 혹은 그 이상의 모니터가 등장하여 현란한 영상들이 복잡해보이지만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리듬으로 보고 음악적으로 분석하면 소나타, 론도 등의 단조로운 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백 개의 모니터를 사용하여 제작한 작품은 워홀의 백 개의 코카콜라병을 상기시킨다.
팝아트 이후 미술이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바람직하지만 1960년대 이후 예술의 질은 떨어졌다.


비디오아트에는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 퍼포먼스를 영구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이 포함되는데 백남준은 나중에 자신의 퍼포먼스를 비디오아트와 연결시켰다.
비디오아트의 또 다른 양상은 비디오카메라와 모니터를 조각적인 설치작업에 이용하는 것이며 그는 이런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초기의 작품은 아상블라주였다.
팝아트 전통에 속한 아상블라주는 버려진 물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정크 아트와 구별된다.
여러 재료로 구성된 작품들과 다양한 오브제가 상자 같은 것에 모아져서 동시에 전시되는 타블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아상블라주는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실적일 수도 있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아상블라주가 유행했고 백남준이 당시의 신경향을 비디오아트에 응용한 것이다.


1984년 고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귀국한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말했다.

“예술이 무엇인가를 관념적으로 규정하려드는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예술이 흡사 사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예술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대중에게 예술은 재미있고 유익하다.”

백남준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으며 이는 1960년대에 활약한 예술가들의 공통점이고 그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즈에게서도 발견되는 미학이기도 하다.
백남준의 작품이 대중에게 재미있고 유익하게 다가갔는지는 모르지만 골동품을 수집하여 모니터를 부착한 대부분의 작품은 값비싼 상품에 불과하여 예술이 사기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디오아트의 황제’라는 불변하는 명예를 얻게 된 것은 재치와 노력의 결과로 순전히 그의 몫이다.
그가 아니더라도 비디오아트는 하나의 장르로 성립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백남준과 동갑내기 볼프 포스텔이 1959년에 작동 중인 TV 수상기로 아상블라주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백남준의 민첩함이 포스텔을 능가하여 비디오아트 레이스에서 선두를 달리게 했다.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회 - 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아트가 시작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13대의 장치된 TV와 장치된 피아노를 선보였는데 이것들은 기존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반예술적 도전이면서 동시에 장치된 TV는 가해 대상인 TV가 지닌 다원성으로 인해 공격적 제스처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시각예술의 장르가 되는 미술사에 구두점을 찍는 전시회였다.
장치된 TV는 TV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묘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녔다.
백남준은 조작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얻어냈다.
무작위적으로 얻어진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비결정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3대의 TV 수상기들은 생방송 이미지를 왜곡시켜 일그러진 저명인사의 얼굴을 만들거나 흑백 이미지의 명암을 도치시키거나 혹은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화면에 추상적 주사선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청소년 때 하모니를 무시한 음악을 작곡하여 현대 음악에 새로운 기류를 형성한 위대한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에 심취했으며 동경대학 졸업논문으로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를 썼다.
관념적인 예술에 반항하며 전위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쇤베르크의 음악을 통해서였으며 이런 기질이 폭발적으로 나오게 된 것은 쇤베르크의 음악 교육을 받고 그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실천하던 존 케이지(1912-92)를 알고부터였다.
그가 20살 연상의 케이지를 만난 것은 1958년 26살 때였다.
케이지는 그때 다름슈타트의 하기강좌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다.
케이지는 1938년 <피아노를 위한 곡>을 작곡했는데 순수 음악에 전자 음악을 결합시킨 것으로 이 작품은 그를 아방가르드 작곡가들 가운데 선두를 달리게 했다.


백남준이 1959년 11월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발표한 피아노를 파괴한 퍼포먼스는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표함: 테이프 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이었다.
이듬해 10월 쾰른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서 발표한 퍼포먼스에서는 관람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자르고 머리를 감기를 과격한 행동을 했다.
백남준의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이 상대방의 넥타이를 자른 해프닝은 이런 그의 퍼포먼스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1961년 플럭서스 창립 멤버 중 하나가 되어 그룹으로 활동했는데 플럭서스의 멤버들 대부분은 케이지의 제자들이었다.


백남준의 기상천외한 해프닝은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과 선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다적 돌출행동이었다.
백남준은 말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다. 나의 스승은 내가 원하는 음이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했다.”

실험음악을 추구한 그에게 우연, 침묵, 비경정성 등의 새로운 음악 이론과 연극적 음악 혹은 음악적 연극이라는 새로운 복합매체 공연을 제시한 케이지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스승이었다.


백남준은 퍼포먼스로 예술 활동을 시작했고 타계하기 전까지 지속했다.
퍼포먼스의 전통은 자신들의 작품이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익살스럽거나 도발적인 이벤트를 무대에 올린 미래주의자, 다다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1960년대의 퍼포먼스는 연극, 음악, 그리고 시각예술을 결합시킨 미술 형태로 때때로 동의어로 사용되는 해프닝과 관련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다 철저하게 계획되며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다.
빌 클린턴 대통령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일부러 바지가 흘러내려지게 하여 속옷을 입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게 한 것은 철저하게 계획된 것으로 관람자 클린턴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은 퍼포먼스였다.


백남준은 1972년에 말했다.

“1950년대의 자유주의자들과 1960년대의 극단주의자들의 차이는 전자가 심각하고 염세주의적인 데 비해 후자는 낙관적이며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누가 사회변혁에 더 기여했는가? 극단주의자들이다. 심각한 대륙 미학을 거부하는 존 케이지와 해프닝, 팝아트, 플럭서스 운동의 출현은 1960년대를 예견했다. 1970년대를 무엇이 예견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비디오이다.”

비디오아트는 1970년대에 확장되어 미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고 오늘날 비디오아트가 아니더라도 조각에 모니터를 부착하거나 설치에 사용하는 등 비디오아트의 응용의 폭이 매우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비디오아트의 응용이 전시적이거나 장식적이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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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의 요청으로 다시 쓴 <백남준의 예술>


어제 교수신문에서 백남준에 관해 좀더 강한 톤의 비평을 해달라고 요청이 와서 평소에 생각했던 나의 생각을 신문보도에 맞게 다시 써서 보냈습니다.
백남준 찬양일색의 글만 난무하고 제대로 된 비평이 없는 데 대해 후기 팝아트의 단점과 아울러 몇 가지 지적했습니다. A4 용지 2페이지로 한정된 원고에서 글을 쓰려니 구체적으로 그의 작품을 설명하고 비판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다시 쓴 비평문입니다.






백남준은 청소년 때 하모니를 무시한 음악을 작곡하여 현대 음악에 새로운 기류를 형성한 위대한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에 심취했으며 동경대학 졸업논문으로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를 썼다.
관념적인 예술에 반항하며 전위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쇤베르크의 음악을 통해서였으며 이런 기질이 폭발적으로 나오게 된 것은 쇤베르크의 음악 교육을 받고 그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실천하던 존 케이지(1912-92)를 알고부터였다.
20살 연상의 케이지를 만난 것은 1958년 그의 나이 26살 때였다.


1938년 순수 음악에 전자 음악을 결합시킨 <피아노를 위한 곡>을 작곡하여 아방가르드 음악의 선두를 달린 케이지는 1952년에 최초의 해프닝으로 알려진 <4분 33초>를 발표했는데,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아서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었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 음악에 회의를 갖고 있던 백남준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남준은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행위 했는데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과 선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다적 돌출행동이었다.
백남준이 1959년 11월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발표한 피아노를 파괴한 퍼포먼스는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표함: 테이프 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이었다. 백남준은 말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다. 나의 스승은 내가 원하는 음이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했다.”
실험음악을 추구한 백남준에게 새로운 음악 이론과 연극적 음악 혹은 음악적 연극이라는 새로운 복합매체 공연을 제시한 케이지는 백남준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스승이었다.

백남준은 1961년 플럭서스 창립 멤버가 되어 그룹으로 활동했는데 플럭서스의 멤버들 대부분은 케이지의 제자들이었다.
플럭서스는 다다의 정신을 되살리면서 예술적 전통과 예술에 있어서 전문적인 경향을 띠는 모든 것과 격렬히 대립했다.
이들의 활동은 독일에서 흔히 ‘악티온스’라고 불리는 해프닝, 거리 미술 등과 연결되어 있었고 플럭서스와 연관된 가장 유명한 예술가는 요제프 보이스이다.


백남준은 1964년 뉴욕으로 갔는데 케이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보여준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과격했지만 한국인으로서 용맹한 모습을 보여준 것을 예외로 하면 당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경향이었다.
그리고 백남준이 아니더라도 비디오아트는 새로운 장르로 출범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백남준과 동갑내기 볼프 포스텔이 1959년 작동 중인 TV 수상기로 아상블라주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백남준의 민첩한 뉴욕행이 비디오아트 레이스에서 포스텔을 능가하고 선두를 달리게 했고 그를 비디오아트의 황제로 추켜세운 사람들은 뉴요커이다.


뉴요커는 왜 백남준의 예술에 찬사를 보냈을까?
자신의 예술적 뿌리가 없는 백남준이 모든 작업을 미국식으로 혹은 미국인의 입맛에 맞게 맞춤형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식 혹은 미국인의 입맛에 맛이란 복합매체의 공연, 팝아트, 아상블라주를 말한다.
대중영화와 대중음악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의 대중미술은 1960년대에 이런 세 가지 경향으로 두드러졌다.
이런 경향을 백남준이 비디오아트에 접목시켰기 때문에 뉴요커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상블라주Assemblage는 장 뒤비페(1901~85)가 1953년 종이로 콜라주한 판에서 찍어낸 자신의 일련의 석판화에 붙인 명칭이었지만 1960년대에 표현적인 목적을 위해 비미술적인 재료를 삼차원의 조각적인 구성물 안에 모으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아상블라주를 제작하는 많은 조각가들은 팝아트 정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팝아트 전통에 속한 아상블라주는 버려진 물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백남준의 초기 비디오아트 작품들은 대부분 아상블라주이다.
뉴욕에서 성공하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때였고 이런 기류는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는 식의 팝아트 정신에 입각한 현란하고 대중적인 이미지들의 합성이다.
따라서 문명을 비판하거나 찬양한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전혀 사변적이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퍼포먼스에서 발견되는 나르시시즘이 비디오아트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백남준의 작품은 수십 개 혹은 그 이상의 모니터가 등장하여 다양한 영상들이 복잡해보이지만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리듬으로 간주하고 음악적으로 분석하면 소나타, 론도 등의 단조로운 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백 개의 모니터를 사용하여 제작한 작품은 워홀의 백 개의 코카콜라병을 상기시킨다.
백남준의 작품은 조형적이어서 세련되어 보이고 시각적으로 어필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그 이상을 기대하거나 발견할 수 없다.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로 전시적이며 유희적이고 유쾌할 뿐 그 이상이 아니다.
그는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고 기계문명을 찬양했으며 예술을 흥을 돋우는 것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어록이나 언론과의 인터뷰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일반적으로 대가들이 주는 교훈이 없다.
예술철학의 빈곤은 매우 아쉬운 점이며 과연 그에게 주관적인 예술철학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예술을 흥을 돋우는 것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팝아트의 경향이 현재에도 만연하는데 이런 경향으로 인해 예술의 질이 떨어졌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백남준은 예술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앞장을 선 예술가였다.


1984년 고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귀국한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로 우리에게 유명해졌다.
그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관념적으로 규정하려드는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예술이 흡사 사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예술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대중에게 예술은 재미있고 유익하다”라는 말로 변명했지만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골동품에 모니터를 부착한 작품들은 값비싼 소비상품에 불과하므로 예술을 사기라고 한 말이 이해된다.
그는 과연 대중의 지지를 받는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며 대중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려고만 했다.
그의 작품이 대중에게 재미있고 유익하게 다가갔는지는 모르지만 예술의 기능이 단지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는 필자와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사기행위로서 성형수술로 아름다운 용모를 갖추었지만 지성을 갖추지 않아 멍청해 보이는 성형미인처럼 맹한 구석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은 매우 세련된 조형적 모습이지만 개성적이며 지성적인 사고의 결여로 성형미인처럼 보인다.


빌 비올라(1951~)에 의해 비디오아트는 현학적이며 진지해졌다.
비올라에게 예술은 사기가 아니다.
백남준과 달리 회화나 조각의 기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비올라의 작품을 비난하는 소수의 평론가들도 있지만 비디오를 순수하게 시각적 매체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논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디오가 단지 대중의 눈을 현혹시키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차세대 예술가 비올라에 의해서 비디오아트는 소비위주의 대중매체 이미지들과 격을 달리하게 되었으며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브제가 예술적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술가의 내적 사고와 충동이 권한으로 행사될 때이며 이런 기원은 고대로 올라간다.
백남준의 작품에 내적 사고와 충동은 나타나지 않고 애매한 주관만이 발견되는 것은 유감스럽다.


비디오아트는 시각적 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1970년대에 확장되기 시작하여 현재에는 미술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비디오아트가 아니더라도 모니터를 부착하는 조각 작품이 많아졌고 설치에도 널리 사용되는데 여전히 비디오의 응용이 전시적이거나 장식적이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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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활을 청산한 허백련은





허백련은 1911년 21살 때 공립 진도보통학교 졸업시기를 반 년 앞두고 자퇴한 후 서울로 갔는데 서울에 정만조가 있었다.
귀양에서 풀린 정만조는 1908년 상경했다. 허백련은 당시 규장각 부제학으로 있던 정만조의 집에 기거하며 현재 중앙학교의 전신 기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서화미술회에 드나들면서 서화가들의 작풍을 연구하면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등을 만났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생활을 1년 만에 마치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 허형의 운림산방에서 서화를 배웠으며 1915년 봄 일본으로 가서 경도의 리스메이칸立命館 대학 법과에 입학했고 1년 후에는 동경으로 가서 메이지明治 대학 법과에 청강생으로 다니다가 1년 만에 중단했다.
그는 스스로를 방아자半啞子라고 부를 정도로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이 시기에 그는 유학중인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를 만나 사상적으로 감화되었고 민족적 의식이 생겼다.
그는 두 사람의 하숙에 얹혀 지내면서 말더듬이 교정소에 다녀 상태가 좋아졌다.
그는 훗날 술회했다.

“그곳에서 김성수와 송진우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 전기를 마련해준 것이 분명했어.
아마 내가 그 때 김성수나 송진우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
어린 시절에 정만조를 만나 한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만큼 그 두 사람은 내게 중요한 인물들이야.”


대학생활을 청산한 허백련은 당시 일본 남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화실에 입문했다.
스이운과의 만남은 그에게 획기적인 전화점이 되었다.
그는 남화의 심오하고 초극적인 세계를 보는 눈이 떠졌다.
1918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둘러 귀국한 후 1910년과 1921년 두 차례에 걸쳐 목포와 광주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서울로 와서 김성수의 집에 기식하며 그림을 그렸고 1922년 선전 창립전에 출품한 두 점 중 한 점 <추경산수>가 수석상이 없는 가운데 2등상을 수상했다.
그는 제6회전까지 출품한 후 선전의 분위기가 흐려졌다며 더 이상 출품하지 않았다.
한동안 일본 화풍이 성행한 것인데 선전의 심사위원으로 일본의 유수한 화가들이 내왕하면서 그들의 화풍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생긴 것이다.
당시 언론이 이런 현상을 질타했고 허백련은 이런 현상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일본을 오가며 개인전을 열었고 금강산 등 명소를 찾아 방랑하다가 김은호와 함께 중국 북경으로 가서 그가 흠모하던 원말 4대가의 원작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허백련은 1938년 광주로 내려가서 서화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전주화회全州畵會를 개최하기로 했지만 변관식의 격려에 고무되어 연진회鍊眞會를 창설했다.
전주화회의 수익금으로 1938년에 창설된 연진회의 찬조회원은 김은호, 변관식 등이었고, 정회원은 허백련, 구철우, 정상호, 허행면, 김동곤, 이범재, 오우선 등이었다.
발기문은 “예술을 배움은 진경眞境에 드는 일이요, 양생養生의 진원眞元에 이르도록 하는 일이다”로 시작하여 “시·서·화 삼절은 고금인이 다 좋아하는 것이라서 이를 즐기기 위해 모였다”고 끝났다.
이 단체는 별도로 연 연진회전을 통해 기금을 만들어 연진회관을 건립했다.
허백련이 의재산인毅齋散人이라는 낙관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 1940년경부터였다.


그는 최흥종 목사의 도움을 받아 농업고등기술학교를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무등산 증심사證心寺 계곡의 오방정五放亭으로 불리어진 건물에서 1945년 삼애학원三愛學院을 설립했고, 1947년에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했으며, 1953년에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교는 그의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재정난으로 폐교의 위기를 맞았지만 전람회를 통해 작품을 팔아 운영자금을 충당하는 등 이 시기 농촌운동에 대한 집념은 거의 신앙적이었다.
오방정을 헐고 세운 춘설헌春雪軒은 허백련 예술의 맥락이 이어져 온 주요한 산실로서 그는 이곳에 다원을 가꾸며 다인茶人으로서의 탈속한 경지를 추구하며 잠시도 화필을 놓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작품을 “아직 한 장도 못 그렸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가 그린 그림은 2만 장 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춘설헌에서 제자들을 지도했고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번진 전통 산수화는 그의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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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에게 있어 자연은 항상





6·25동란이 발발한 후 허백련은 더욱 더 은둔생활을 했다.
김은호는 그를 가리켜서 “품도 있는 온화한 선비”라고 했다.
그의 투철한 민족사상은 민족 신앙으로 이어졌다.
단군시조신檀君始祖神 사상의 부활이야말로 민족사상·민족 신앙의 첩경이라고 판단한 그는 1969년 시인 이은상을 추진위원장으로 한 무등산 단군신전 건립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성사를 서둘렀다.
건축부지까지 마련하고 전람회 등을 통해 기금조성을 추진하는 등 건립단계에 들어갔지만 일부 기독교인의 우상숭배를 이유로 반대하여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그림 것들 중에 <백두농인 白頭農人>이 있다.
의도인毅道人이란 낙관으로 보아 만년의 작품이다. 원경의 삼각을 이루는 산세는 그리 우람하지 않고 그 아래 산재한 농가와 밭, 근경을 이루는 야산의 몇 그루 소나무와 작은 길에 송아지를 끌고 가는 농부가 보이는 아주 단조로운 농촌의 모습이다.
그는 만년에 농촌의 친밀한 풍경을 주로 그렸다.
담채에 치중하며 굵은 묵점을 많이 사용하던 이 시기의 전반적 특색은 화면을 정교하게 다듬기보다 심의를 거침없이 풀어놓는 정허靜虛한 품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상단 여백에 제찬題讚이 씌어져 있는데 이렇듯 화가의 사상이나 화관畵觀을 피력하는 화제를 삽입하는 풍조는 월말 4대가로부터 비롯되었다.
제찬은 다음의 내용이다.


“흰 수건을 쓴 농부의 모습은 옛 그림 같고
고삐에 끌린 누런 송아지는 강바람에 거슬린다.”


1971년 서울신문사가 주최한 동양화 6대가전에는 여든 살의 허백련을 포함하여 김은호, 이상범, 박승무, 노수현, 변관식이 참여했다.
1973년에는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의재 회고전’에 작품을 출품했고, 그 해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대되었으며, 이듬해 전남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7년 춘설헌에서 임종을 맞았다. 사회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을 신문이 보도하면서 “최후의 정통남화가의 죽음”이라고 했다.


홍용선은 1976년 『공간』 3월호에 ‘한국 현대 동양화의 방향과 위치’라는 제목의 글에서 허백련의 작품에 관해 적었다.


“그의 산수화에 나타나는 자연은 항상 포근한 남향적 수온과 맑은 양광, 자욱한 안개와 가득한 대지의 공기 등을 풍요롭게, 어느 그림에서나 넉넉하고 너글너글하고 여유 있고 충만하게 담아놓고 있다.

허백련에게 있어 자연은 항상 밝고 명쾌하고 온화하며, 겸손하고 따사로운 정감과 투명하고 담백한 감각으로 인간을 포용한다.
그것은 어쩌면 서양의 인상파 작가들의 풍경화가 그렇게 밝고 명랑하고 온화하고 평화로운 듯이 그런 분위기를 연상케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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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관식





이상범이 평범하고 예사로운 풍경을 모티프로 삼은 것과 달리 변관식(1899~1976)은 특정한 지역을 선호했다.
1960년대 말까지 그는 화단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1929년부터 해방 이후까지 그의 작업을 별로 활발하지 못했고 1930년대와 1940년대 중반까지 그의 작품은 전통 남화풍이었다.
1937년 무렵 금강산에 입산하여 8년 동안 금강산 일대 명승지를 사생한 것이 그의 작업에 크게 작용했다.
훗날 금강산을 모티프로 한 그의 대표작들은 이 시기의 작업을 토대로 한 것들이다.
이 시기는 그가 일본에서 배운 일본 화풍을 버리고 자신의 양식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방황과 훈련의 기간이었다.


변관식은 1899년 황해도 옹진군 에미리 두무동에서 한의사 변정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7백석의 재산을 가진 마을의 부자였고 어머니는 조석진의 딸이었다.
그는 11살 때 외할아버지 조석진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현재의 혜화동인 송동 외가에 살면서 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는데 학과공부보다는 그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16살 때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관립 공업전습소 도기과에 입학했으며 2년 후 졸업하고 외할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1917년 서화미술회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할 때 2기생, 3기생으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이 수학하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수업은 화본을 익히고 스승의 필법을 모사하면서 산수, 인물, 화조, 어해, 기명절지 등의 전통 기법을 숙련하는 것이었다.


변관식은 1919년 21살 때 결혼했다. 그 해 스승 안중식이 타계했고, 이듬해 외할아버지이자 스승 조석진이 타계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결혼한 지 3년밖에 안 된 아내가 2살 된 딸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이듬해 재혼했지만 얼마 후 새 부인은 딸애를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버렸다.
그 또한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말술을 마시는 버릇이 생겼고 강인한 의지로 자신을 지키려는 외곬수 성격이 되었다.
그는 “나의 한평생은 영원한 여인과 절승을 찾아 헤매는 역정”이었다고 말년에 회고했다.
그는 김은호와 깊은 우정을 나눴는데 “세상이 두 쪽 나도 나는 이당을 믿을 수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청년시절 일본으로의 유학부터 시작하여 평생 지속되었다.
두 사람은 서화협회의 명예회원인 귀족 이용문의 경제적 도움으로 그림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선전 창립전 때부터 매년 출품했는데 창립전에 <촉산행려 蜀山行旅>와 <전촉화구 剪燭話舊>, 제2회에 <귀가 歸家>, 제3회에 <추 秋>, 제4회에 <추산모연 秋山暮煙>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 초기 작품들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선전도록』에만 남아 있다.
초기 작품 대부분은 비개성적인 화본풍의 것들로 안중식과 조석진에게서 전수받은 고답적이고 전통 산수화이며 더러 근대적 새로운 화풍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는 1923년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 등 동년배 화가들과 동연사라는 동인회를 조직했지만 한 차례의 전람회도 열지 못한 데서 이들의 역부족과 함께 1920년대 화단이 유아기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용문의 후원으로 김은호와 함께 192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동경으로 간 그는 제3회 선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화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문하생이 되었고 1927년부터 동경의 우에노上野 미술학교 동양화과에서 청강생으로 3년 동안 회화수업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오카쿠라 덴신의 신일본화와 도미오카 뎃사이의 신남화新南畵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이운은 뎃사이의 남화풍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인의 독특한 미감의 하나로 꼽히는 적요寂蓼의 미를 추구했다.
이것은 채색일본화는 달리 문인화풍의 일본적 수용과 세련을 의미했다.
변관식은 스이운으로부터 이런 화풍을 직접 영향 받았다.
그가 일본 체류중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제6회의 <옹울 胚鬱>과 <효청 曉晴>, 제7회의 <성북정협 城北靜峽>, 제8회의 <남촌청 南村晴>과 <소사문종 蕭寺聞鍾> 등을 보면 제목에서도 일본 취향일 뿐 아니라 그림도 전형적인 일본 남화풍이었다.
이 시기에 그가 익힌 화풍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뎃사이의 신남화풍, 청대 야일화파野逸畵派의 거장 석도石濤, 그리고 원대 남화의 거봉 황공망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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