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백련에게 있어 자연은 항상
6·25동란이 발발한 후 허백련은 더욱 더 은둔생활을 했다.
김은호는 그를 가리켜서 “품도 있는 온화한 선비”라고 했다.
그의 투철한 민족사상은 민족 신앙으로 이어졌다.
단군시조신檀君始祖神 사상의 부활이야말로 민족사상·민족 신앙의 첩경이라고 판단한 그는 1969년 시인 이은상을 추진위원장으로 한 무등산 단군신전 건립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성사를 서둘렀다.
건축부지까지 마련하고 전람회 등을 통해 기금조성을 추진하는 등 건립단계에 들어갔지만 일부 기독교인의 우상숭배를 이유로 반대하여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그림 것들 중에 <백두농인 白頭農人>이 있다.
의도인毅道人이란 낙관으로 보아 만년의 작품이다. 원경의 삼각을 이루는 산세는 그리 우람하지 않고 그 아래 산재한 농가와 밭, 근경을 이루는 야산의 몇 그루 소나무와 작은 길에 송아지를 끌고 가는 농부가 보이는 아주 단조로운 농촌의 모습이다.
그는 만년에 농촌의 친밀한 풍경을 주로 그렸다.
담채에 치중하며 굵은 묵점을 많이 사용하던 이 시기의 전반적 특색은 화면을 정교하게 다듬기보다 심의를 거침없이 풀어놓는 정허靜虛한 품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상단 여백에 제찬題讚이 씌어져 있는데 이렇듯 화가의 사상이나 화관畵觀을 피력하는 화제를 삽입하는 풍조는 월말 4대가로부터 비롯되었다.
제찬은 다음의 내용이다.
“흰 수건을 쓴 농부의 모습은 옛 그림 같고
고삐에 끌린 누런 송아지는 강바람에 거슬린다.”
1971년 서울신문사가 주최한 동양화 6대가전에는 여든 살의 허백련을 포함하여 김은호, 이상범, 박승무, 노수현, 변관식이 참여했다.
1973년에는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의재 회고전’에 작품을 출품했고, 그 해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대되었으며, 이듬해 전남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7년 춘설헌에서 임종을 맞았다. 사회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을 신문이 보도하면서 “최후의 정통남화가의 죽음”이라고 했다.
홍용선은 1976년 『공간』 3월호에 ‘한국 현대 동양화의 방향과 위치’라는 제목의 글에서 허백련의 작품에 관해 적었다.
“그의 산수화에 나타나는 자연은 항상 포근한 남향적 수온과 맑은 양광, 자욱한 안개와 가득한 대지의 공기 등을 풍요롭게, 어느 그림에서나 넉넉하고 너글너글하고 여유 있고 충만하게 담아놓고 있다.
…
허백련에게 있어 자연은 항상 밝고 명쾌하고 온화하며, 겸손하고 따사로운 정감과 투명하고 담백한 감각으로 인간을 포용한다.
그것은 어쩌면 서양의 인상파 작가들의 풍경화가 그렇게 밝고 명랑하고 온화하고 평화로운 듯이 그런 분위기를 연상케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