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예술

이것은 오늘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백남준의 미망인은 “그분은 천국에서도 퍼포먼스를 할 거에요”라고 했다.
백남준의 예술에서 퍼포먼스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는 것을 새삼 상기시킨 말이다.
1996년 4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얼마 안 되어 소호의 거리에서 건장한 두 남자가 휠체어에서 백남준을 들어 차에 태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분의 활동은 종료되었구나 생각했지만 병세가 나아지자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퍼포먼스를 소개했으며 비디오아트 작품도 지속적으로 제작했다.


그의 예술에 관해 언급하려니 그가 한 말이 생각난다.

“예술가들은 욕심이 많아서 남이 쓰는 자신의 이야기에 관해 제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 관해 글을 써야 하는 나는 평론가는 의심이 많아서 예술가가 하는 자신의 이야기에 관해 제대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백남준은 미국 토양에 이식된 예술가로 케이지의 영향 하에 미국이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팝아트를 받아들였으며 이를 비디오아트로 재생산했다.
그의 비디오아트 작품 대부분은 팝아트의 정신을 따른 사변적이거나 진지함을 고의적으로 기피한 것들이지만 문명을 찬양하거나 비판한 것들도 소수 있다.
퍼포먼스에서 발견되는 나르시시즘이 비디오아트 작품에서도 발견되는데 자신의 작업에 흡족해 하는 태도이다.
미국이 대중영화, 대중음악, 대중미술을 생산하여 전 세계에 보급하며 맹위를 떨칠 때인 1960년대에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를 대중미술로 소개했으며 미국의 소비주의와 자본주의의 풍요 속에 이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수십 개 혹은 그 이상의 모니터가 등장하여 현란한 영상들이 복잡해보이지만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리듬으로 보고 음악적으로 분석하면 소나타, 론도 등의 단조로운 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백 개의 모니터를 사용하여 제작한 작품은 워홀의 백 개의 코카콜라병을 상기시킨다.
팝아트 이후 미술이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바람직하지만 1960년대 이후 예술의 질은 떨어졌다.


비디오아트에는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 퍼포먼스를 영구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이 포함되는데 백남준은 나중에 자신의 퍼포먼스를 비디오아트와 연결시켰다.
비디오아트의 또 다른 양상은 비디오카메라와 모니터를 조각적인 설치작업에 이용하는 것이며 그는 이런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초기의 작품은 아상블라주였다.
팝아트 전통에 속한 아상블라주는 버려진 물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정크 아트와 구별된다.
여러 재료로 구성된 작품들과 다양한 오브제가 상자 같은 것에 모아져서 동시에 전시되는 타블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아상블라주는 추상적일 수 있지만 사실적일 수도 있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아상블라주가 유행했고 백남준이 당시의 신경향을 비디오아트에 응용한 것이다.


1984년 고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귀국한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말했다.

“예술이 무엇인가를 관념적으로 규정하려드는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예술이 흡사 사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예술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대중에게 예술은 재미있고 유익하다.”

백남준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으며 이는 1960년대에 활약한 예술가들의 공통점이고 그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즈에게서도 발견되는 미학이기도 하다.
백남준의 작품이 대중에게 재미있고 유익하게 다가갔는지는 모르지만 골동품을 수집하여 모니터를 부착한 대부분의 작품은 값비싼 상품에 불과하여 예술이 사기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디오아트의 황제’라는 불변하는 명예를 얻게 된 것은 재치와 노력의 결과로 순전히 그의 몫이다.
그가 아니더라도 비디오아트는 하나의 장르로 성립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백남준과 동갑내기 볼프 포스텔이 1959년에 작동 중인 TV 수상기로 아상블라주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백남준의 민첩함이 포스텔을 능가하여 비디오아트 레이스에서 선두를 달리게 했다.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회 - 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아트가 시작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13대의 장치된 TV와 장치된 피아노를 선보였는데 이것들은 기존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반예술적 도전이면서 동시에 장치된 TV는 가해 대상인 TV가 지닌 다원성으로 인해 공격적 제스처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시각예술의 장르가 되는 미술사에 구두점을 찍는 전시회였다.
장치된 TV는 TV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묘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녔다.
백남준은 조작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얻어냈다.
무작위적으로 얻어진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비결정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3대의 TV 수상기들은 생방송 이미지를 왜곡시켜 일그러진 저명인사의 얼굴을 만들거나 흑백 이미지의 명암을 도치시키거나 혹은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화면에 추상적 주사선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청소년 때 하모니를 무시한 음악을 작곡하여 현대 음악에 새로운 기류를 형성한 위대한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에 심취했으며 동경대학 졸업논문으로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를 썼다.
관념적인 예술에 반항하며 전위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쇤베르크의 음악을 통해서였으며 이런 기질이 폭발적으로 나오게 된 것은 쇤베르크의 음악 교육을 받고 그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실천하던 존 케이지(1912-92)를 알고부터였다.
그가 20살 연상의 케이지를 만난 것은 1958년 26살 때였다.
케이지는 그때 다름슈타트의 하기강좌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다.
케이지는 1938년 <피아노를 위한 곡>을 작곡했는데 순수 음악에 전자 음악을 결합시킨 것으로 이 작품은 그를 아방가르드 작곡가들 가운데 선두를 달리게 했다.


백남준이 1959년 11월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발표한 피아노를 파괴한 퍼포먼스는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표함: 테이프 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이었다.
이듬해 10월 쾰른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서 발표한 퍼포먼스에서는 관람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자르고 머리를 감기를 과격한 행동을 했다.
백남준의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이 상대방의 넥타이를 자른 해프닝은 이런 그의 퍼포먼스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1961년 플럭서스 창립 멤버 중 하나가 되어 그룹으로 활동했는데 플럭서스의 멤버들 대부분은 케이지의 제자들이었다.


백남준의 기상천외한 해프닝은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과 선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다적 돌출행동이었다.
백남준은 말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다. 나의 스승은 내가 원하는 음이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했다.”

실험음악을 추구한 그에게 우연, 침묵, 비경정성 등의 새로운 음악 이론과 연극적 음악 혹은 음악적 연극이라는 새로운 복합매체 공연을 제시한 케이지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스승이었다.


백남준은 퍼포먼스로 예술 활동을 시작했고 타계하기 전까지 지속했다.
퍼포먼스의 전통은 자신들의 작품이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익살스럽거나 도발적인 이벤트를 무대에 올린 미래주의자, 다다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1960년대의 퍼포먼스는 연극, 음악, 그리고 시각예술을 결합시킨 미술 형태로 때때로 동의어로 사용되는 해프닝과 관련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다 철저하게 계획되며 관람자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는다.
빌 클린턴 대통령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일부러 바지가 흘러내려지게 하여 속옷을 입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게 한 것은 철저하게 계획된 것으로 관람자 클린턴의 참여를 수반하지 않은 퍼포먼스였다.


백남준은 1972년에 말했다.

“1950년대의 자유주의자들과 1960년대의 극단주의자들의 차이는 전자가 심각하고 염세주의적인 데 비해 후자는 낙관적이며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누가 사회변혁에 더 기여했는가? 극단주의자들이다. 심각한 대륙 미학을 거부하는 존 케이지와 해프닝, 팝아트, 플럭서스 운동의 출현은 1960년대를 예견했다. 1970년대를 무엇이 예견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비디오이다.”

비디오아트는 1970년대에 확장되어 미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고 오늘날 비디오아트가 아니더라도 조각에 모니터를 부착하거나 설치에 사용하는 등 비디오아트의 응용의 폭이 매우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비디오아트의 응용이 전시적이거나 장식적이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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