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을 청산한 허백련은





허백련은 1911년 21살 때 공립 진도보통학교 졸업시기를 반 년 앞두고 자퇴한 후 서울로 갔는데 서울에 정만조가 있었다.
귀양에서 풀린 정만조는 1908년 상경했다. 허백련은 당시 규장각 부제학으로 있던 정만조의 집에 기거하며 현재 중앙학교의 전신 기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서화미술회에 드나들면서 서화가들의 작풍을 연구하면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등을 만났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생활을 1년 만에 마치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 허형의 운림산방에서 서화를 배웠으며 1915년 봄 일본으로 가서 경도의 리스메이칸立命館 대학 법과에 입학했고 1년 후에는 동경으로 가서 메이지明治 대학 법과에 청강생으로 다니다가 1년 만에 중단했다.
그는 스스로를 방아자半啞子라고 부를 정도로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이 시기에 그는 유학중인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를 만나 사상적으로 감화되었고 민족적 의식이 생겼다.
그는 두 사람의 하숙에 얹혀 지내면서 말더듬이 교정소에 다녀 상태가 좋아졌다.
그는 훗날 술회했다.

“그곳에서 김성수와 송진우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 전기를 마련해준 것이 분명했어.
아마 내가 그 때 김성수나 송진우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
어린 시절에 정만조를 만나 한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만큼 그 두 사람은 내게 중요한 인물들이야.”


대학생활을 청산한 허백련은 당시 일본 남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화실에 입문했다.
스이운과의 만남은 그에게 획기적인 전화점이 되었다.
그는 남화의 심오하고 초극적인 세계를 보는 눈이 떠졌다.
1918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둘러 귀국한 후 1910년과 1921년 두 차례에 걸쳐 목포와 광주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서울로 와서 김성수의 집에 기식하며 그림을 그렸고 1922년 선전 창립전에 출품한 두 점 중 한 점 <추경산수>가 수석상이 없는 가운데 2등상을 수상했다.
그는 제6회전까지 출품한 후 선전의 분위기가 흐려졌다며 더 이상 출품하지 않았다.
한동안 일본 화풍이 성행한 것인데 선전의 심사위원으로 일본의 유수한 화가들이 내왕하면서 그들의 화풍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생긴 것이다.
당시 언론이 이런 현상을 질타했고 허백련은 이런 현상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일본을 오가며 개인전을 열었고 금강산 등 명소를 찾아 방랑하다가 김은호와 함께 중국 북경으로 가서 그가 흠모하던 원말 4대가의 원작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허백련은 1938년 광주로 내려가서 서화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전주화회全州畵會를 개최하기로 했지만 변관식의 격려에 고무되어 연진회鍊眞會를 창설했다.
전주화회의 수익금으로 1938년에 창설된 연진회의 찬조회원은 김은호, 변관식 등이었고, 정회원은 허백련, 구철우, 정상호, 허행면, 김동곤, 이범재, 오우선 등이었다.
발기문은 “예술을 배움은 진경眞境에 드는 일이요, 양생養生의 진원眞元에 이르도록 하는 일이다”로 시작하여 “시·서·화 삼절은 고금인이 다 좋아하는 것이라서 이를 즐기기 위해 모였다”고 끝났다.
이 단체는 별도로 연 연진회전을 통해 기금을 만들어 연진회관을 건립했다.
허백련이 의재산인毅齋散人이라는 낙관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 1940년경부터였다.


그는 최흥종 목사의 도움을 받아 농업고등기술학교를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무등산 증심사證心寺 계곡의 오방정五放亭으로 불리어진 건물에서 1945년 삼애학원三愛學院을 설립했고, 1947년에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했으며, 1953년에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교는 그의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재정난으로 폐교의 위기를 맞았지만 전람회를 통해 작품을 팔아 운영자금을 충당하는 등 이 시기 농촌운동에 대한 집념은 거의 신앙적이었다.
오방정을 헐고 세운 춘설헌春雪軒은 허백련 예술의 맥락이 이어져 온 주요한 산실로서 그는 이곳에 다원을 가꾸며 다인茶人으로서의 탈속한 경지를 추구하며 잠시도 화필을 놓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작품을 “아직 한 장도 못 그렸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가 그린 그림은 2만 장 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춘설헌에서 제자들을 지도했고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번진 전통 산수화는 그의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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