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위해 왜곡하다.
클레는 재현적 이미지를 남긴 작품에서 왜곡distortion의 방법을 사용했다.
아내 릴리에게 보낸 편지에 “진실을 제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적었듯이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형태와 색채 모두를 왜곡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추상은 인식의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비해 왜곡은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실제에 있어 이 둘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왜곡은 사실성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관심을 끌며 표현적 특징을 부각시키므로 시각적 은유로 나타난다.
특히 환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의 왜곡은 관람자에게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클레는 색의 사용에 있어 뛰어난 대가들 중 하나로 성공하지만 피에르 보나르, 로베르 들로네, 앙리 마티스 등과 같은 천부적인 화가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색의 기본적 문제에 당면하여 1898년부터 15년 동안이나 고심하고 좌절했다.
색에 대한 개념이 생긴 것은 우연한 일로 1914년 튀니지를 비롯하여 북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발현하는 순색들을 보고나서였다.
아프리카의 투명한 빛과 원색의 풍요로움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색의 개념이 분명해졌으며 처음으로 자신이 화가라는 자각심이 생겼다.
"색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을 움켜쥐려고 허겁지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나를 영원히 지배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나도 안다.
이 순간만은 색과 내가 하나라는 행복한 느낌이다.
나는 화가이다."
그 후 그는 자신감을 갖고 5년 동안 좀더 진전된 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1914년 이전까지 그의 소묘작품은 훌륭하지만 색을 사용한 작품에는 걸작이 없고 튀니지를 다녀온 후부터 그의 화면은 표현적인 색채로 빛을 발한다.
그의 작품은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된 것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회화가 단지 자연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와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914년을 기점으로 화가에 대한 자각심이 생기기 전까지는 견유주의 혹은 냉소주의의 태도를 취했음을 일련의 드로잉에서 알 수 있다.
1908년 3~4월 뮌헨의 두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를 기념하는 전시회를 통해 클레는 반 고흐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 선을 분석하여 선만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반 고흐의 작품이 “인상주의로부터 획득한 동시에 인상주의를 극복한” 선의 규범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았다.
반 고흐의 작품과 동생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세잔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회화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세잔을 최고의 스승으로 삼으면서 그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그가 세잔의 영향을 받은 것은 회화의 구성요소의 실체를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작업하는 데서 회화적 사실realite picturale에 대한 탐구였다.
이런 방식은 묘사 대상에는 늘 포착할 수 없는 부분, 변화하는 부분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잔은 세계의 광대함과 생명력,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기는 했지만 선, 면, 공간, 구성, 그리고 색을 통해 자연에 감추어진 많은 가능성들을 표현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대상에 대한 해석과 그 표현방식의 문제점도 제기했다.
후세대에게 끼친 세잔의 영향은 지대했는데 1906년 세잔이 타계하자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1870~1943)가 세잔에게 바친 헌사에서 알 수 있다.
"대다수가 예술가의 감수성을 미술작품의 유일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에, 그리고 즉흥적인 미술의 출현으로 아카데미즘과 필수적 방법론이라는 재래의 전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