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 그리고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바실리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을 공부하고 26살에 졸업한 후 법률고시시험에 통과했다.
1893년 모스크바 대학의 경제 통계학과에 조교로 근무했고 1895년에는 모스크바의 쿠쉬베레브 인쇄소의 예술담당 책임자로 일했다.
법학도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그는 1896년 에스토니아의 도르파르트 대학에서 제의한 강사직을 거절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회화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1896년 모스크바에서 처음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 가서 모네의 연작 ‘건초더미’를 보고서였다.
뮌헨에서 스위스 화가 안톤 아츠베와 후에 뮌헨 아카데미 교수이자 뮌헨 분리파의 창립회원이 된 독일 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폰 슈투크는 칸딘스키의 표현적 드로잉을 칭찬했지만 “지나치게 색을 남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한동안 검정색과 흰색으로 주로 작업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형태에 대해 연구하라”고 충고했다.

칸딘스키가 어렸을 적 처음 기억한 가장 오래된 색은 “싱싱하고 밝은 초록색, 흰색, 양홍빛 빨간색, 검정색, 황토색”이라고 했는데, 주관적인 색에 대한 직관 능력도 놀랍지만 최초로 받은 인상 깊은 그런 색은 평생 창조적 영감을 제공한 근원이 되었다.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

파울 클레는 7살 때부터 칼 요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그의 집에서 미술책을 보게 되었다.
바이올린 연주에 재능을 보여 11살 때 베른 뮤직 소사이어티의 특별 주자로 활동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음악가가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에 재학할 때 회화와 음악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소질을 나타냈고, 시를 즐겨 썼으며, 음악과 문학은 그의 회화 창작에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그는 회화를 위해 음악가와 문학가의 길을 포기했다.
189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0월에 뮌헨으로 가서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하인리히 크니르에게서 그리고 1900~01년 겨울 학기에는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클레가 칸딘스키를 처음 만난 건 폰 슈투크의 회화반에서였다.
칸딘스키는 클레보다 13살이 많았으며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절친한 사이가 된 것은 함께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면서부터였으며 평생 우정을 나눴다.

그는 소묘에 재능을 타고났으며 소묘는 평생 창작의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그가 평생 제작한 작품 1만 점 가운데 약 4,500점이 소묘작품임이 이를 입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즉흥’ ‘인상’ ‘구성’


칸딘스키는 1909년 여름부터 ‘즉흥 Improvisation’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
‘즉흥’ 연작에서 인물, 건물, 산 등의 형태가 불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것들은 재현적 형태가 아니라 기호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즉흥’이란 제목은 그가 가능한 한 자발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의식적 제어작용을 극소화한 상태에서 화면의 구성을 완성했음을 시사한다.
‘구성 Composition’ 연작은 ‘즉흥’에 기반을 두고 계획적으로 확장시킨 것들이다.
1913~14년에 제작한 다수의 작품에서 특정한 대상의 형태를 생략했음을 본다.
그것들은 기하적 추상과는 구분되며 추상에 이르는 또 다른 과정으로서 특기할 점은 기하적 추상과 칸딘스키의 비정형 추상을 적대적 양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13년 [폭풍]에 기고한 논문에서 칸딘스키는 ‘즉흥’ ‘인상’ ‘구성’을 규정했다.

1. ‘인상 Impression’은 외부 자연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느낌이다.

2. ‘즉흥’은 무의식적이며 자연 발생적이고 내재적이며 비물질적인 전체의 특성을 지닌 표현이다.

3. ‘구성’은 장기간의 작업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며 현학적 면모마저 지니는 내재된 느낌의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성, 의식, 확실한 목표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 역시 계산이 아닌 느낌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상’ 연작 중 하나로 <인상 III - 콘서트>(1911)를 예로 들면 이 작품은 칸딘스키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회에 다녀온 후 그린 것으로 ‘인상’은 “외부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 a direct impression of external nature”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이다.
그가 말한 인상은 시각적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 인상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특히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형태와 색을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소리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노란색과 검은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흰색으로 보완했다.
그는 청각적 인상과 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검은색을 칠한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를 상징한 것이며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 앉아 있는 청중이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양편의 흰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가장 인상을 주는 요소는 노란색으로 상징되는 쇤베르크의 소리가 홀을 가득 매운 것이다.
노란색은 칸딘스키에게 소리를 상징하는 색으로 1909년 무대 구성에 관한 글에 {노란 소리}란 제목을 사용했다.
이 작품은 회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공감각synesthesia을 표현한 것으로 공감각은 20세기 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칸딘스키는 색과 각 악기의 소리를 연관시키면서도 회화와 음악에는 자체의 특정한 자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칸딘스키는 신지학theosophy과 강신술spiritualism에 심취해 있었으며, 인지학anthroposophy 사상가 루돌프 스타이너Rudolf Steiner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신지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소장한 시인 스테판 조지Stefan George를 중심으로 한 뮌헨 서클에 관련되어 있었다.
이런 배경 안에서 그는 내면의 경험 혹은 정신적 현상을 시각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즉흥 19>와 <즉흥 19a>(1911)는 이런 창작 환경에서 창안된 것들이다.
색이 분방하고 모호하게 칠해져 물체와 공간이 구별되지 않는다.
다양한 밝은 색들이 사용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어두우며 색과 색이 마찰을 일으킨다.
이 작품은 자연에 정신이 내재해 있다는 가정 하에 그것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전달한 것이다.
언덕을 가로지르는 뾰족한 산 정상은 자연의 형태를 떠나 칸딘스키의 직관에 의한 회화적 구성 요소로 변형되었다.


<즉흥 21a>(1911)는 1911년에 제작한 작은 유리그림 <태양과 함께>를 변형시킨 것이다.
그는 1913년에 <단순한 기쁨>이란 제목으로 다시 유화로 제작했다.
세 작품 모두 동일한 주제를 사용했지만 약간 다른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며 모두 유리그림의 회화적 언어를 사용했으므로 그의 추상 의지와 과정을 알게 해준다.
<태양과 함께>의 이중 언덕은 그의 다른 작품에도 종종 등장한 언덕으로 예외 없이 그곳에는 낯익은 러시아 건축물이 실루엣으로 세워져 있다.
왼편에 세 기사가 말을 몰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고, 상단 오른편에 검은색의 구름이 있으며, 그 아래 세 사람이 탄 보랏빛 배가 물결을 가르고 호수를 지나고 있다.
이 작품은 새로운 정신적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칸딘스키의 묵시론적 관념의 세계이다.
<태양과 함께>를 염두에 두고 <즉흥 21a>를 보면 이해가 수월해진다.
<즉흥 21a>를 그린 지 약 18개월 후인 1913년 여름에 그는 <단순한 기쁨>을 그렸다.
<태양과 함께>에서의 상단 왼편 빛을 발하는 대각선으로 흰색을 칠한 곳이 <즉흥 21a>에서는 붉은 태양이 삽입된 곳이다.
언덕 위에는 <태양과 함께>에서와 마찬가지로 둥근 지붕을 한 러시아 교회가 있다.
언덕 왼편의 말을 몰고 올라가는 세 기사는 여기에서 그리고 <단순한 기쁨>에서는 더욱 생략되었다.
노 젓는 세 사람의 모습도 역시 흐릿한 색으로 더욱 생략되었다.
특히 <즉흥 21a>에서는 색을 문질러 흐릿하게 한 부분들이 많으며 <태양과 함께>에서의 밝은 색상들이 회색으로 덮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혼의 진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내적 요소가 작품이다.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1881~1965)를 만난 후 칸딘스키는 더욱 추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보링거가 <추상과 감정이입 Abstraktion und Finf&uuml;hlung>(1908)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를 만났다.
[추상과 감정이입]은 하인리히 뵐플린에게 제출한 그의 학위 논문으로 그는 훗날 이 논문을 쓰게 된 동기로 “미적 가치 기준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정초함에 있어서 그 시대 전체 경향과 더불어 주어진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나 자신의 개인적 성향과 예기치 않게 마주치게” 되었음을 꼽았다.
보링거는 미술사에서 명백히 구분될 수 있는 두 가지 경향이 지각되는데, 하나는 추상에 경도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감정이입 혹은 자연주의적인 자연 묘사에 경도된 것이라고 했다.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전환되고 있던 1900년대의 경향이 그의 논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추상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화의 징조로 본 저자와 <추상과 감정이입>에 관해 대화하면서 칸딘스키는 보링거가 추상을 인간과 세계와의 단절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양자 사이의 조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을 알고 그가 새로운 회화의 정신적 선두자라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점은 <추상과 감정이입>이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전개된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의 취지와 일치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많은 미술사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다.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활동 무대인 뮌헨의 미술적 풍토에서 성장한 보링거는 표현에 대한 화가들의 문제에 정통했다.
그는 1909년 분리파 예술가들에 반대하는 글을 썼는데, 그들이 당시의 혁명적인 미술에 대한 칸딘스키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링거는 “순수한 추상은 복잡하고 어렴풋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휴식을 주는 유일한 가능성”으로까지 보았으며, 복잡한 이미지의 세계가 “필연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기하적 추상”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이는 바로 칸딘스키가 열망하던 추상이었다.


1910년경 칸딘스키가 무르나우에서 쓴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Uuml;ber das Geistige in der Kunst>가 1911년 12월에 출간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추상 미술의 원리를 독창적으로 체계화했다.
이 책은 20세기 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자신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라고 말했다.
재현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미술의 표현적 구성적 측면을 무엇보다도 강조하면서 이를 논리적으로 주장했다.
본질적으로 표현적인 면을 ‘내적 의미’ 혹은 ‘내적 공명’이라고 칭했으며 미술작품의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를 구분했다.
그리고 이 요소들의 결합, 즉 미학적 구성을 통해서만 ‘정신적 울림’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물리적인 인상은 단지 정신적 울림을 향한 단계로서만 중요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예술가는 전달해야 할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 형태를 다루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형태를 통해 내적 표현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순수 미술로서의 회화 Painting as Pure Art>(1913)에서도 미술작품이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로 구성됨을 지적한 후 내적 요소는 예술가의 감정이라고 했다.
이 감정은 감상자의 영혼 안에 동일한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영혼이 육체와 결부되어 있는 한 영혼은 대부분 느낌만을 매개로 진동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느낌은 비물질적인 것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예술가와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관람자 사이의 징검다리라고 했다.
예술가의 영혼에 진동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영혼의 진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내적 요소가 작품의 내용이 된다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술은 미학적 원리를 따른다.


작품의 성격과 중요성을 감안하거나 저술을 통한 이론과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때 칸딘스키는 20세기 전반기의 비재현적 추상 미술의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는 사물의 특징을 재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며 실제 모습에 상관하지 않은 채 물감이 지닌 본래의 표현적 속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둔 선구자였다.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색채의 감정적 연상 작용에 민감했으며 그 공감적 효과를 심도 있게 발전시켰다.
자신을 깊이 감동시킨 색채를 회화로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논리적 사고가 아닌 갑자기 떠오르는 일종의 직관을 통해 미술과 자연은 각각의 원리와 목적이 다른 분리된 두 세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근거로 미술의 자율성에 관한 믿음, 즉 미술작품은 외적 세계와의 어떤 유사성이 아니라 본래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지속되거나 존재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칸딘스키가 1925년에 그린 <노랑 빨강 파랑>은 불균형한 두 개의 무게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푸른색은 대기로서 푸른 하늘의 가벼움을 표현한 것이며 노랑과 빨강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형태들로 배치되었다.
이런 형태와 색채의 교감에 대해 그는 7월 중순 최종적으로 정리한 <점 선 면: 회화의 기초적 요소들의 분석 Punkt und Linie zu Flache: Beitrag zur Analyse der malerischen Elemente>에서 상세하게 서술했다.
1914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이 책에서 그는 ‘순수한’ 예술가는 ‘내적이며 본질적인’ 느낌만을 표현해야 하며 피상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사고를 가진 예술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좀더 정제된 감정”을 표현하게 되며, “오직 미술만이 지닐 수 있고 미술만이 적절한 표현수단으로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본질”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고 했다.
이런 독특한 표현방식이 모든 시대의 미술을 통합할 수 있는 공통요소를 구축한다고 보았다.
예술가는 완전히 표현적인 구성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다루는 도구를 잘 알아야 한다는 신념을 근거로 점, 선, 면 등과 같은 회화적 요소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그는 새로운 유형의 회화 공간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더 이상 회화의 면으로 제한된 전통 원근법 공간에 기초하지 않으며 사방이 무제한적이고 심원한 우주 공간 속의 우주인처럼 관람자를 회화로 끌어들이는 완전한 공간이다.
그는 재현적 표현을 버리고 기하적 원근법을 없애며 색채와 형태의 한층 심오한 감각적 특성을 명확하게 다룸으로써 자신의 회화 공간을 창조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진실을 위해 왜곡하다.



클레는 재현적 이미지를 남긴 작품에서 왜곡distortion의 방법을 사용했다.
아내 릴리에게 보낸 편지에 “진실을 제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적었듯이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형태와 색채 모두를 왜곡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추상은 인식의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비해 왜곡은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실제에 있어 이 둘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왜곡은 사실성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관심을 끌며 표현적 특징을 부각시키므로 시각적 은유로 나타난다.
특히 환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의 왜곡은 관람자에게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클레는 색의 사용에 있어 뛰어난 대가들 중 하나로 성공하지만 피에르 보나르, 로베르 들로네, 앙리 마티스 등과 같은 천부적인 화가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색의 기본적 문제에 당면하여 1898년부터 15년 동안이나 고심하고 좌절했다.
색에 대한 개념이 생긴 것은 우연한 일로 1914년 튀니지를 비롯하여 북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발현하는 순색들을 보고나서였다.
아프리카의 투명한 빛과 원색의 풍요로움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색의 개념이 분명해졌으며 처음으로 자신이 화가라는 자각심이 생겼다.

"색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을 움켜쥐려고 허겁지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나를 영원히 지배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나도 안다.
이 순간만은 색과 내가 하나라는 행복한 느낌이다.
나는 화가이다."


그 후 그는 자신감을 갖고 5년 동안 좀더 진전된 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1914년 이전까지 그의 소묘작품은 훌륭하지만 색을 사용한 작품에는 걸작이 없고 튀니지를 다녀온 후부터 그의 화면은 표현적인 색채로 빛을 발한다.
그의 작품은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된 것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회화가 단지 자연의 재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와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914년을 기점으로 화가에 대한 자각심이 생기기 전까지는 견유주의 혹은 냉소주의의 태도를 취했음을 일련의 드로잉에서 알 수 있다.


1908년 3~4월 뮌헨의 두 화랑에서 열린 반 고흐를 기념하는 전시회를 통해 클레는 반 고흐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 선을 분석하여 선만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반 고흐의 작품이 “인상주의로부터 획득한 동시에 인상주의를 극복한” 선의 규범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았다.
반 고흐의 작품과 동생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세잔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회화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세잔을 최고의 스승으로 삼으면서 그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그가 세잔의 영향을 받은 것은 회화의 구성요소의 실체를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작업하는 데서 회화적 사실realite picturale에 대한 탐구였다.
이런 방식은 묘사 대상에는 늘 포착할 수 없는 부분, 변화하는 부분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잔은 세계의 광대함과 생명력,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기는 했지만 선, 면, 공간, 구성, 그리고 색을 통해 자연에 감추어진 많은 가능성들을 표현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대상에 대한 해석과 그 표현방식의 문제점도 제기했다.
후세대에게 끼친 세잔의 영향은 지대했는데 1906년 세잔이 타계하자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1870~1943)가 세잔에게 바친 헌사에서 알 수 있다.


"대다수가 예술가의 감수성을 미술작품의 유일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에, 그리고 즉흥적인 미술의 출현으로 아카데미즘과 필수적 방법론이라는 재래의 전통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