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마리 트로켈Rosemarie Trockel(1952~)


슈베르테 태생의 독일 예술가 트로켈은 1978년 쾰른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1983년에 본과 쾰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88년에는 뉴욕 모마, 바젤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트로켈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녀가 선택하는 소재와 기법만큼이나 다양하고 다채롭다.
그녀는 인류학, 사회학, 신학, 수학 등을 공부하면서 자신을 사로잡는 주제들을 비디오, 조각, 설치, 드로잉, 사진작업 등으로 다룬다.
인체와의 관계,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동물을 다루는 인간의 태도 등은 그녀가 다루는 주제들 가운데 일부이다.
그녀는 동물을 드로잉이나 청동 주물로 재현하며 제10회 도큐멘타에 카르스텐 횔러와 함께 출품한 <돼지와 사람을 위한 집 Ein Haus fur Schweine und Menschen>에서는 살아 있는 동물을 설치에 직접 사용했다.
성과 문화, 예술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부인하는 그녀의 작품은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고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단일한 전체로 통합되지 않는다.


1980년대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작품은 편물 사진과 요리용 철판 작품 등이었으며 이는 트로켈이 단순히 페미니스트적 작품을 생산한 것으로만 해석되지 않고 대중적 오브제의 차용과 함께 미니멀 형식을 취했음을 보여준다.(아트 510, 511)
그녀는 편물에 플레이보이 토끼, 나치스 로고 등을 이용하여 그런 상징들의 기능과 의미를 새삼 짚어보려고 했다.
그녀가 성장하던 1970년대와 80년대에 독일에서는 요셉 보이스를 선두로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젤름 키퍼와 같은 신개념주의로 분류할 수 있는 예술가들이 활약하고 있었고 그들은 역사적 사회적 이슈들을 주제로 삼았는데, 이런 영향이 트로켈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자신이 만든 양모 손뜨개, 지나치게 긴 스타킹, 두 사람이 함께 입는 풀오버 등을 오브제로 사용하는 데서 레디메이드를 연상시키며 실제로 이미 만들어진 사물을 응용하는 데서 마르셀 뒤샹의 계보를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아트 512, 513)
<팬 Fan>은 150cm 정사각형 캔버스에 스캐너 프린트한 작품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와 배우들의 사진들로 벽을 장식한 여성 팬의 방 모습이다.
<삶은 팬티스타킹 짜기 Leben Heisst Strumpfhosen Stricken>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오리알 사진 혹은 엽서와 팬티스타킹의 오리알처럼 생긴 패턴이다.
생명을 담은 알의 상징적 의미와 팬티스타킹을 짜는 여성의 노동을 삶과 본질로 보는 시각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페미니즘 입장을 반영한 예술가로 알려졌다.


트로켈은 1985년부터 편물작업을 시작했으며 이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자 하위 미술로 취급되어온 편물이 고급 미술이 될 수 있음을 시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물그림이나 옷이 컴퓨터로 디자인된 패턴에 의해 기계로 대량생산되고 있어 여성 전용의 영역에서 여성성을 박탈하고 있다는 비판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편물작업은 그 공정을 통해 노동으로서의 여성의 개념을 제시하며 일상의 삶 속에서의 여성의 현실을 환기시킨다.
편물에 차용된 패턴은 그것이 통용되는 사회적 일반 관념에 대한 패러디이다.
그녀는 울마크, 플레이보이 토끼, 망치와 낫, 나치 로고 등 정치적 상징을 패턴으로 사용하여 반복적 문양으로 제작한 후 벽에 걸거나 옷으로 만든다.
여기서 정치적 상업적 기호들은 장식적 패턴이 되면서 그것들에 함축된 의미들은 매우 약화된다.
망치와 낫이 편물의 패턴이 되면 혁명과 건설의 이데올로기는 퇴색된다.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던 이데올로기적 상징도 대량생산을 통해 그 의미가 퇴색되는 데서 우리는 모조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트로켈은 패턴을 통해서 모든 기호의 의미가 사라지고 축소되며 극적으로 달라지기도 한다는 점을 관람자에게 부각시킨다.


1990년의 작품 <그림 그리는 기계와 56개의 붓자국>(현대 199)은 56명의 화가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붓들을 기계장치로 움직여 그림을 그리게 한 작품이다.
트로켈은 이 작품을 통해 개인의 창조가 기계생산과 동일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고, 미술에서의 창작이 개인의 신성한 작업이라는 독창성의 신화를 부정하며, 동시에 남녀의 구분을 포함하여 예술가들 사이에서의 위계도 부정한다.
또한 남성으로 성별화된 기계와 여성적으로 성별화된 머리카락을 결합시켜 창작행위가 양성적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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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토탈 미술관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에 관해 강의해달라는 청을 받고 응한 것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예술의 종말 이후After the End of Art by Arthur Danto(1997)

Danto: <The End of Art>(1984), <Approaching the End of Art>(1985)
Hans Belting: <The End of the History of Art?>(1983) 의문부호를 빼고 1995년에 다시 출간

1984년 10월부터 단토는 <Nation>지에 미술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고 미술비평을 쓴다는 것에 대해 주제의 결핍 때문에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미술의 제작이 중단될 것이란 주장을 한 적이 없다.
벨팅이 말한 대로 예술의 시대 이전에 무수한 예술이 만들어진 것처럼 예술의 종말 이후에도 예술은 무수히 만들어졌다.
계속해서 예술이 존재하는 한 비평가로서 쓸 수 있는 예술은 여전히 풍부하다.

단토가 예술철학에서 다룬 것이 무엇인가?
예술작품의 개념과 예술작품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결국 그가 말한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의 문제가 제기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 칸트가 지적 탐구의 영역을 진, 선, 미, 즉 과학적, 도덕적, 미학적 영역으로 세분하고부터였다.
18세기에는 철학적 관심이 예술작품의 '유일성‘을 밝히는 데 있었고, 19세기에는 예술작품을 통해 얻게 되는 ’미적 경험‘의 본질과 예술작품이 창작된 과정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생겼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는 예술작품에 대한 유일성에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예술에 관한 이론들에 대한 탐색이 진행되었다.
예술철학은 예술에 관한 담론을 전제로 하며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를 내포한다. 오늘날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는 네 가지로 분류된다.

1. 객관적 존재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담고 있는 언어로서의 인지주의적cognitivist 관점.
2.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매체로서의 표현주의적expression!ist 관점.
3.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제품으로서의 형식주의적formalist 관점.
4. 제도에 의해 감상의 대상으로 정해진 것으로서의 제도주의적institutionalist 관점.

그러나 이 네 가지 정의 모두 논리적으로 만족할 만하지 못하므로 철학적 문제가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단토는 우선 Modern art와 Contemporary art를 구분한다.
예술의 종말이란 철학적으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라는 플라톤 이후 서구의 지배적인 오래된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Modern art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는 Post-Modern이란 말이 적절하지 못함을 지적하며 ‘예술의 종말 이후’ 혹은 Contemporary란 말을 사용한다.


Post-Modern은 양식인가 시기인가?

우리가 ‘포스트모던 회화' ‘포스트모던 영화’라고 말할 때는 포스트모던이 양식을 가리키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할 때는 시기를 지칭한다.
현재 포스트모던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문제와 사용의 유무에 관해 많은 의견 대립이 있다.
영국계 미국 건축사가 찰스 젱크스Charles Jenks(1939~)는 저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What is Post-Modernism?>(1986)에서 “근본적으로 어떤 전통과 그 바로 이전 전통간의 절충주의적 혼합, 즉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라고 했다.
그는 After(Post) Modernism의 어의를 서술했을 뿐 Modernism을 규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더니즘의 무엇을 계승 초월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춘향전은 춘향이와 이몽룡이 결국 서로의 사람됨됨이를 이해하고 깨달은 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종료한다.
이런 자각이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남은 생애의 첫 번째 날이 되는 것이다.
Contemporary는 바로 이 자각의 시기이다.
현재가 어떤 위대한 이야기에 더 이상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활력 사이의 어디엔가 놓여 있는 우리의 의식 위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모던과 컨템퍼러리 미술의 차이이다.

컨템퍼러리 미술에는 과거 미술에 반대하는 지침이 없으며 모던하고 다르다는 의식도 없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은 과거 미술을 자신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에게 이용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미술이 제작되었던 바로 그 정신이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은 미술관을 죽은 미술품들로 채워진 장소로 여기지 않고 살아 있는 예술적 선택들이 가득 찬 장소로 여긴다.

Modern이 단지 just now를 의미하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듯이 contemporary도 지금 이 순간에 발생하고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다.
모던은 1880년경부터 1960년대 어느 때까지 번성했던 하나의 양식에 불과하지만 contemporary는 예술제작의 한 양식이 아니라 양식들을 사용하는 하나의 양식을 말한다.
하나의 판단기준으로 승화되어 식별능력을 계발하는 토대로 이용될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양식적 통일성의 결여로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사실상 모더니즘의 종말 이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contemporary는 정보 혼란의 시대, 완전한 미적 정보 전달에 대한 효율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완전한 자유의 시대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어떠한 역사의 경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단토는 모더니즘의 종말 이후를 탈역사적post-historical 혹은 역사 이후의 미술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1960년대는 양식들의 발작기였으며 ‘한갓된 실재 사물’이라 부르는 것과는 대조되게 특별나게 보여야 하는 특별한 방식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신사실주의자들과 팝아트를 통해 점차적으로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것이 단토로 하여금 예술의 종말을 말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에 외적으로는 어떤 차이도 없으며, 개념미술은 시각예술품이 되기 위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시각적 대상이 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는 더 이상 실례를 들어서 예술의 의미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예술은 철학의 문제가 되었다.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작품은 “왜 나는 미술작품인가?” 하는 물음에 스스로 답해야 한다.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94)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시러큐스 대학에서 수학했고 전업 저술가가 되기 전에 미국 세관에 근무했다.
1942~49년 <네이션 Nation>지의 미술 비평가로 활약했으며 초기에는 마르쿠스주의에 심취하여 계급 의식과 목적 의식을 지니는 강한 역사 감각을 가졌으며 미술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관심을 두었으나 후에는 비평에 있어 형식주의를 취했다.
그는 각각의 예술에는 ‘순수’를 향한 충동, 즉 다른 장르로부터의 분리를 지향하는 충동이 있으며 회화에서의 이 충동은 표면의 평면성을 강조하고 환영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44년 4월 15일 <네이션>에 기고한 <추상 미술 Abstract Art>이란 제목의 글에서 “회화가 색채와 선이라는 순수하고 단순한 성질에만 국한되도록, 그리고 미술 이외의 다른 곳에서 더욱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들과 연계되어 우리의 호기심을 유발하지 않게 하라”고 주문했다.
그린버그의 영향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절정에 달했으며 그의 비평집은 미학 교과서로 간주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의 비평은 모더니즘 이론의 한 유형으로 오늘날에까지도 읽혀지고 있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을 순수하게 시각적 경험과 관련된 지속적이며 자기 비평적 전통으로 인식했다.
그는 마네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보았으며 사실상 파리와 뉴욕을 제외한 곳에서 제작된 미술작품을 무시했다.
그는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 Modernist Painting>(1960)에서 평편한 표면으로서의 회화의 물리적 성질을 인식한 마네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모더니스트 회화’란 말을 사용했다.
그린버그는 과거 화가들이 회화 매체를 구성하는 평면적 한계를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한 데 반해 모더니스트 회화에서는 이 같은 한계를 긍정적인 요소로 인식했으며 마네는 표면 아래의 평면을 솔직하게 선언했기 때문에 최초의 모더니스트라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관람자들은 옛 거장의 작품을 접할 때 작품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기 이전에 작품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려는 경향을 띠는 데 반해 모더니스트 회화는 우선 하나의 그림으로 본다.
물론 이것은 옛 거장의 그림과 모더니스트 회화에 상관없이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그것만이 유일하고 필요한 방법이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서 거둔 모더니즘의 성공은 자기비평의 성공이다.”

이를 두고 많은 미술사가들은 모더니즘의 비평적 입장을 전형화한 말이라고 동조한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모더니즘은 결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모더니즘 미술은 어떠한 단절이나 충돌 없이 과거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이 말에서 그가 미술사를 발전 또는 진보의 과정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단토는 그런 미술사관을 부정한다.
그린버그는 Kinetic art와 Pop art처럼 자신의 비평적 틀에 적당하지 않은 혹은 발전적이지 않은 미술 운동을 ‘진기한 미술 novelty art’로 제쳐두었다.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먼 필연적 엘리트주의로 보았다.
가장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엘리트 예술가들에 의해서 대중 미술보다 한층 격이 높은 미술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시각으로 이는 곧 모더니즘이 소수 지성인들의 미술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미술이 소수 지성인들의 지적 진지함에 머물자 절충적 방법으로 좀 더 대중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1960년대부터 시작된 광범위한 문화현상을 가리켜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지성인들을 위한 미술에서 대중을 위한 미술로의 전이를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의 전이로 보는 시각이다.
이들은 팝아트는 고급 미술과 대중문화 간의 구분을 흐리게 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그린버그는 팝아트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곰브리치와 그린버그의 추종자들은 팝아트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퇴행적 미술운동으로 보고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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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


단토는 팝아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으로 본다.
그는 팝아트가 1960년대 초에 부지불식간에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그가 부지불식간이라고 한 것은 추상 표현주의 회화에 나타난 물감 흘리기와 물감 떨어뜨리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면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팝아트가 이런 충동적 동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때를 그는 1964년으로 꼽는다.


단토는 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를 좀더 철학적 방식으로 생각해야 함을 주장한다.
단토의 내러티브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에 근거하면, 팝아트는 미술의 철학적 진리를 자의식으로 가져옴으로 해서 서양 미술의 위대한 내러티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팝아트에 대한 이런 고견을 갖고 있던 그가 파리의 유학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와 1964년 4월 스테이블 화랑에서 앤디 워홀Andy Warhol(1928~87)의 <브릴로 상자 Brillo Box>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 작품을 보고 미국 미술계를 규정하고 있던 논쟁의 구조가 적응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호퍼와 그 밖의 주류 사실주의, 추상이나 모더니즘 따위의 이론들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 요구된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당시 구상과 비구상 혹은 사실주의와 추상의 반목이 매우 심화되어 있었다.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화가들은 추상을 ‘딱딱한 표현 gobbledegood’이라고 부르면서 모마MoMA가 추상을 선호하는 데 대해 심히 반발했다.
그들은 1959~60년 휘트니 연감에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데 대해 경악해했다.
단토는 사실주의와 추상 사이의 구분에 대해 양측이 얼마만큼의 도덕적 에너지를 갖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당시의 상황은 거의 신학적 강도였으며 문명의 다른 단계였더라면 분명 화형감이 될 정도로 반목이 심했음을 지적한다.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거의 이단으로 보일 정도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미술계에는 그린버그의 영향이 컸으며 사실주의에 대한 추상의 우월주의가 반목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린버그는 1939년에 추상을 일종의 역사적 불가피성 혹은 진보 또는 진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논문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서 주장했듯이 그린버그에게 추상은 “역사로부터 나오는 명령”이었다.
1959년에 발표한 논문 <추상미술의 옹호>에서 그린버그는 재현이란 부적합하다며 “티치아노의 회화가 갖고 있는 추상적 형식적 통일성이 그 회화가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특질이다”라고 주장했다.
단토는 그린버그의 불공평한 특질 부여를 문제 삼았다.
단토는 그린버그가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회화를 역사적 진화의 낮은 단계로 자리매김하는 데 분통을 터뜨린다.
그린버그의 독선은 그 수위를 넘었는데, 1961년에는 추상마저도 역사적 운명의 분위기를 상실했다고 추상 표현주의의 조각적 분위기를 비판했으며, 추상 표현주의는 1962년 거의 종결되고 말았다.


오늘날 구상과 비구상 혹은 사실주의와 추상의 차이는 없다.
둘 다 양식의 문제이고, 그린버그가 말한 대로 좋고 나쁘고의 차이가 아니며, 역사적 진화와는 무관하다.
단토는 모든 양식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양식은 작품의 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단토가 제7장에서 말하는 ‘지나간 미래’는 호퍼를 비롯한 미국의 전통 미술이 그린버그에 의한 모더니즘론의 등장과 모마를 비롯한 뮤지엄들의 추상 전시회 선호로 인해 지나간 미래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회화의 미래는 모마에 의해 정의된 모더니즘의 초기에 추상이 자리를 차지했던 자리에다 온갖 회화를 죄다 쑤셔놓은 그런 꼴의 미래였다.
추상을 수많은 미술적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고 유일한 역사적 진보의 개념으로 본 것은 그린버그의 큰 오류였다.
게다가 조각 및 그 밖의 장르들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미술과 회화를 동의어로 취급한 것은 변명하기 어려운 과오였다.


단토는 이런 미국의 미술계에서 변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팝아트를 꼽는다.
마침 그때 단토는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 철학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그는 <미술계 The Art World>란 제목으로 발표했는데, 미술을 다룬 최초의 철학적 노력이었다.
그의 논문은 미술계와 철학계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서로 멀리 떨어져왔는가를 보여준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단토는 팝아트가 고대의 가르침, 즉 플라톤의 가르침을 뒤집어엎는 방식이었음을 지적했다.
예술을 모방으로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실재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 좌천시킨 플라톤의 사상이 서양 미술의 근간을 이루어왔는데, 이것이 워홀을 비롯한 팝아티스트들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었다.


그린버그는 컬러필드Color Field 이후부터 1992년 현재까지를 팝아트를 시작으로 30년 동안의 일련의 미술을 미술사에 있어 퇴행의 시기로 보고 “지난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데카당스의 시기로 간주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단토는 오히려 지난 30년이 미술사상 예술가들이 가장 자유를 구가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이 본연의 자리를 회복한 것으로 보고 매우 희망적임을 지적한다.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미술사의 개념 자체가 붕괴되었으며 제6장에서 언급한 대로 ‘역사의 경계’ 또는 ‘역사의 울타리’가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술사는 유럽을 중심으로 주류와 비주류로 분리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보면 시베리아나 아프리카의 미술은 ‘역사의 경계’ 또는 ‘역사의 울타리’ 밖에서 이루어진 비주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미술이 동등하게 인정받는 다원주의가 도래하자 경계는 자연히 붕괴되었다.
역사는 자유를 위해서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면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는 단토의 주장은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겔은 한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소수가 자유를 누리며,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될 터인데 그때는 역사의 울타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단토의 역사의 종말 혹은 탈역사는 역사 이후를 의미한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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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릴로 상자>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훌륭한 목공의 솜씨로 제작되었다.
슈퍼마켓에 있는 가장 대중적인 비누상자를 주문 생산한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미술작품과 실재 비누상자 사이의 차이를 더 이상 순수하게 시각적인 견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시각예술이 시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또한 미술작품의 의미를 실례를 보여주면서 가르친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준다.
워홀과 Pop artists은 철학자들이 미술에 관해 쓴 글 모두를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국지적인 중요성만을 갖는 것으로 만들었다.
단토는 팝아트를 통해 비로소 미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물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물음이란 다름 아닌 미술작품과 미술작품이 아닌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토는 <브릴로 상자>를 보고 미술에 관한 철학적 문제가 미술사 내부로부터 해명되었으며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단토가 말하는 종말이란 미술이 죽었다거나 화가들이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적으로 구성된 미술사가 종말을 맞았다는 것으로 이는 같은 시기에 독일인 한스 벨팅이 주장한 바와 일맥상통한다.
벨팅도 미술사의 종말을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내러티브적 혹은 이야기적이란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역사관 혹은 두 사람이 본 미술사를 말한다.


팝아트란 말은 단토에 앞서 미술 잡지 <네이션 Nation>의 미술비평을 담당했던 로렌스 앨러웨이가 만든 말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미 사용되고 있고, 앨러웨이가 그 말을 사용하게 된 동기를 이해한다.
다만 몇 가지를 첨가하고자 한다.

“고급 미술 속의 팝, 즉 고급 미술로서의 팝과 팝 미술 자체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가 있다.
팝의 선구자들을 추적하고자 할 때는 특히 이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더웰이 자신의 몇몇 콜라주에 골와즈Gauloise 담배갑을 이용했을 때, 혹은 호퍼와 호크니가 팝과는 거리가 먼 그림들에다 광고계로부터 나온 요소들을 사용했을 때, 이런 것이 바로 고급 미술 속의 팝에 해당한다.
대중적인 미술을 진지한 미술로 취급하자는 것이 앨러웨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1980년대 초의 기이한 현상과 다원주의

예술의 종말이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에 갑자기 회화가 성행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줄리앙 슈나벨과 데이브드 살레를 선두로 한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이 유행한 것이다.
단토를 이를 “한몫 챙기기”의 현상으로 본다. 추상 표현주의 작품 값이 앙등하자 “돈 벌 기회를 놓친” 사람들 혹은 재산이 될 정도로 급등한 작품을 싼 값으로 살 수 있었을 때 미술시장의 언저리를 기웃거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때늦게 작품에 투자하기 시작하자 이를 노린 화가들이 마구 작품을 양산해낸 것이다.
슈나벨과 살레는 많은 돈을 벌었는데, 이는 예술의 종말 이후의 당연한 징조가 아니라 미술품 투자를 노린 지각생 구매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기회주의 화가들의 한탕주의로 보아야 한다.
지속될 내러티브가 없자 자기표현을 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 파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담론이 활발했으며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장 프랑수아 료타르, 자크 라캉, 그리고 엘렌 식수와 루스 이리가래 같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텍스트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료타르에 의하면 거대 내러티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로 본다.
해체론의 정신은 내러티브를 진리나 허위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견제에서 바라본다.
어떤 이론이 받아들여진다면 과연 누가 이득을 보게 되며, 그 이론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제기되는 표준적인 물음이 되게 됨에 따라 이런 물음이 모더니즘 자체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되었다.
단토는 해체론에 타당성은 있지만 문제의 핵심이 되는 컨템퍼러리 미술사의 심층구조에는 육박하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그가 말하는 심층구조란 다원주의를 말한다.
다원주의는 매체들의 열린 연접성에 의거해야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서 단토는 이 열린 연접성이 한때 예술적 동기들의 연접성에 상응했으며, 또한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내러티브에 의해 예증되는 종류의 진보 발전적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봉쇄했음을 지적한다. 단토는 말한다.

“이제 발전을 끌고 갈 선호되는 운반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회화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버렸으며 미술의 철학적 본성이 마침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예술가들이 해방되어 그들 마음대로 다양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술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연접성이 단토로 하여금 미술사의 종말을 감지하게 했다.
연접성이란 퍼포먼스와 설치, 사진, 대지미술, 공항작품, 섬유작품, 온갖 띠무늬와 질서의 개념적 구조물 등이 회화의 동료가 된 것을 의미한다.
탈역사적 미술에는 엄청난 메뉴가 있고 예술가들 자신들은 원하는 대로 이런 많은 선택을 골라내는 데 방해받지 않는다.
이런 호의적이고 신축성 있는 연접성 속에는 회화를 위한 추상화와 모노크롬 회화의 여지도 있다.
모더니즘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현재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단토가 말하는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양식 자체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식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양식이 질적 가치 혹은 유일한 지고의 가치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단순히 수단 그 이상이 아니다.
20세기를 선언문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많은 선언문이 쏟아졌고 각 선언문은 자신들의 양식이 우월함을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컬러필드를 미술사의 필연적인 귀결로서 미술사의 과정으로 인식했지만 오늘날 컬러필드는 단순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화가는 바로크 양식으로 혹은 인상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으며 그런 것에 싫증이 나면 표현주의 양식으로 바꿀 수 있다.

1963년 한 인터뷰에서 워홀은 이런 놀라운 예견을 피력했다.

“어떻게 하나의 양식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다음 주면 추상표현주의자나 팝아티스트, 아니면 사실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엇인가를 포기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이는 선언문에 의해 추동되는 예술을 겨냥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는 선언문의 시대였으며 각 선언문은 자신들의 양식이 올바른 양식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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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용transfigiration


단토로 하여금 예술의 종말을 감지하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시각예술에서의 변용의 미학이다.
평범한 것을 변용을 통해 아이콘으로 만들고 대중적인 미술과 고급 미술과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 데 있다.
일차적으로는 변용을 통해 평범한 사물을 고급 미술의 미학적 사물로 격상시키고 결과적으로는 대중적인 미술과 고급 미술의 경계가 사라지게 했음에 주목했다.
변용은 기독교의 개념으로 소위 말하는 ‘변화산 정상의 사건’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7:1~3에 적혀 있는 사건이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변용은 대상 자체인 예수의 모습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인식에 변화가 생기는 사건이다.


팝아트는 관람자의 인식을 문제 삼은 미술이다.
동일한 사물을 다르게 인식하는 사유의 문제를 제기한 미술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그토록 자극적일 수 있었던 원인으로 변용은 지적한다.
단토는 말한다.

“팝아트 자체는 미국 고유의 업적이며, 그것에 도처에서 그토록 전복적이었던 것은 기본 입장이 변용되기 때문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평범한 것들인 일상적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을 미술로 변용시킨다고 보았다.
추상 표현주의는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에 숨겨진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전제에 기초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그는 추상 표현주의자들이 원초적인 힘과 접촉하는 무당 노릇을 하려고 했음을 지적했다.
팝아트가 추상 표현주의에 반발하여 생겨난 운동이었으므로 그는 팝아트와 추상 표현주의의 상이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두 가지 상이한 점을 지적한다.

“추상 표현주의가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이었다면 팝아트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평범한 것들, 즉 콘틀레이크, 수프통조림, 비누, 인기 영화배우, 만화 따위를 찬양했다.
그리고 변용의 과정을 거쳐 팝아트는 이런 것들에게 거의 선험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분석철학자인 단토는 철학이 종말에 이르게 된 것으로 1930년대에 성행한 분석철학을 꼽았다.
분석철학이 유지되어온 형이상학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음을 지적한 후 분석철학이 철학을 종말에 이르게 한 것처럼 팝아트가 예술의 종말을 재촉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둘 다 인식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해방적이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파리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파리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말한 적이 있음을 예로 들어 분석철학과 팝아트가 사람들로 하여금 정형화된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인식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미술은 이러저러하다든가 미술작품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던가 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것이 팝아티스트들의 성과임을 말한다.
그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우리를 억압한 과거의 인식 체계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과거의 철학과 미술을 총괄적으로 조망했음을 지적한다.
분석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철학 전체와 대립했으며 팝아트는 실제적 삶을 위해 미술 전체에 대립했다.


단토는 미래의 미술을 철학의 문제로 본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오래된 고정관념의 인식 체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며 둘 모두 인류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동반자라는 것이다.
그는 미학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원래 예술과 철학은 동반자의 관계였는데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플라톤이 예술을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해버렸으므로 철학과 거리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현재 철학과 예술의 관계가 회복 내지는 정상화되었다고 본 그는 말한다.

“1950년대 중반 철학과 예술 둘 다 당시의 인간의 심리 저 깊은 곳에 있던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그것들로 하여금 미국 장면 밖에서는 그토록 대단한 해방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팝아트에 대한 그의 희망적 청사진은 대단했는데, “팝아트가 의식 속으로 끌어올린 것은 우리 모두 세상에 홀로 남겨져 살아간다는 것으로서, 이는 누구라도 원할 수 있는 훌륭한 삶이었다”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팝아트가 심대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고 예술 개념에 있어 심원한 철학적 변화를 성취한 대격변의 모멘트였다고 말한다.


변용을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뒤샹은 평범한 것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레디메이드를 팝아트와 구별했다.
하지만 뒤샹이 미적인 것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고 미술의 경계선을 실험한 공로는 인정하면서 미술사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사람이 없었음을 지적했다.
뒤샹과 팝아트 사이에 외적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팝아트의 성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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