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마리 트로켈Rosemarie Trockel(1952~)
슈베르테 태생의 독일 예술가 트로켈은 1978년 쾰른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1983년에 본과 쾰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88년에는 뉴욕 모마, 바젤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트로켈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녀가 선택하는 소재와 기법만큼이나 다양하고 다채롭다.
그녀는 인류학, 사회학, 신학, 수학 등을 공부하면서 자신을 사로잡는 주제들을 비디오, 조각, 설치, 드로잉, 사진작업 등으로 다룬다.
인체와의 관계,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동물을 다루는 인간의 태도 등은 그녀가 다루는 주제들 가운데 일부이다.
그녀는 동물을 드로잉이나 청동 주물로 재현하며 제10회 도큐멘타에 카르스텐 횔러와 함께 출품한 <돼지와 사람을 위한 집 Ein Haus fur Schweine und Menschen>에서는 살아 있는 동물을 설치에 직접 사용했다.
성과 문화, 예술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부인하는 그녀의 작품은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고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단일한 전체로 통합되지 않는다.
1980년대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작품은 편물 사진과 요리용 철판 작품 등이었으며 이는 트로켈이 단순히 페미니스트적 작품을 생산한 것으로만 해석되지 않고 대중적 오브제의 차용과 함께 미니멀 형식을 취했음을 보여준다.(아트 510, 511)
그녀는 편물에 플레이보이 토끼, 나치스 로고 등을 이용하여 그런 상징들의 기능과 의미를 새삼 짚어보려고 했다.
그녀가 성장하던 1970년대와 80년대에 독일에서는 요셉 보이스를 선두로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젤름 키퍼와 같은 신개념주의로 분류할 수 있는 예술가들이 활약하고 있었고 그들은 역사적 사회적 이슈들을 주제로 삼았는데, 이런 영향이 트로켈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자신이 만든 양모 손뜨개, 지나치게 긴 스타킹, 두 사람이 함께 입는 풀오버 등을 오브제로 사용하는 데서 레디메이드를 연상시키며 실제로 이미 만들어진 사물을 응용하는 데서 마르셀 뒤샹의 계보를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아트 512, 513)
<팬 Fan>은 150cm 정사각형 캔버스에 스캐너 프린트한 작품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와 배우들의 사진들로 벽을 장식한 여성 팬의 방 모습이다.
<삶은 팬티스타킹 짜기 Leben Heisst Strumpfhosen Stricken>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오리알 사진 혹은 엽서와 팬티스타킹의 오리알처럼 생긴 패턴이다.
생명을 담은 알의 상징적 의미와 팬티스타킹을 짜는 여성의 노동을 삶과 본질로 보는 시각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페미니즘 입장을 반영한 예술가로 알려졌다.
트로켈은 1985년부터 편물작업을 시작했으며 이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자 하위 미술로 취급되어온 편물이 고급 미술이 될 수 있음을 시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물그림이나 옷이 컴퓨터로 디자인된 패턴에 의해 기계로 대량생산되고 있어 여성 전용의 영역에서 여성성을 박탈하고 있다는 비판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편물작업은 그 공정을 통해 노동으로서의 여성의 개념을 제시하며 일상의 삶 속에서의 여성의 현실을 환기시킨다.
편물에 차용된 패턴은 그것이 통용되는 사회적 일반 관념에 대한 패러디이다.
그녀는 울마크, 플레이보이 토끼, 망치와 낫, 나치 로고 등 정치적 상징을 패턴으로 사용하여 반복적 문양으로 제작한 후 벽에 걸거나 옷으로 만든다.
여기서 정치적 상업적 기호들은 장식적 패턴이 되면서 그것들에 함축된 의미들은 매우 약화된다.
망치와 낫이 편물의 패턴이 되면 혁명과 건설의 이데올로기는 퇴색된다.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던 이데올로기적 상징도 대량생산을 통해 그 의미가 퇴색되는 데서 우리는 모조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트로켈은 패턴을 통해서 모든 기호의 의미가 사라지고 축소되며 극적으로 달라지기도 한다는 점을 관람자에게 부각시킨다.
1990년의 작품 <그림 그리는 기계와 56개의 붓자국>(현대 199)은 56명의 화가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붓들을 기계장치로 움직여 그림을 그리게 한 작품이다.
트로켈은 이 작품을 통해 개인의 창조가 기계생산과 동일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고, 미술에서의 창작이 개인의 신성한 작업이라는 독창성의 신화를 부정하며, 동시에 남녀의 구분을 포함하여 예술가들 사이에서의 위계도 부정한다.
또한 남성으로 성별화된 기계와 여성적으로 성별화된 머리카락을 결합시켜 창작행위가 양성적임을 주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