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릴로 상자>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훌륭한 목공의 솜씨로 제작되었다.
슈퍼마켓에 있는 가장 대중적인 비누상자를 주문 생산한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미술작품과 실재 비누상자 사이의 차이를 더 이상 순수하게 시각적인 견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시각예술이 시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또한 미술작품의 의미를 실례를 보여주면서 가르친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준다.
워홀과 Pop artists은 철학자들이 미술에 관해 쓴 글 모두를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국지적인 중요성만을 갖는 것으로 만들었다.
단토는 팝아트를 통해 비로소 미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물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물음이란 다름 아닌 미술작품과 미술작품이 아닌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토는 <브릴로 상자>를 보고 미술에 관한 철학적 문제가 미술사 내부로부터 해명되었으며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단토가 말하는 종말이란 미술이 죽었다거나 화가들이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적으로 구성된 미술사가 종말을 맞았다는 것으로 이는 같은 시기에 독일인 한스 벨팅이 주장한 바와 일맥상통한다.
벨팅도 미술사의 종말을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내러티브적 혹은 이야기적이란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역사관 혹은 두 사람이 본 미술사를 말한다.


팝아트란 말은 단토에 앞서 미술 잡지 <네이션 Nation>의 미술비평을 담당했던 로렌스 앨러웨이가 만든 말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미 사용되고 있고, 앨러웨이가 그 말을 사용하게 된 동기를 이해한다.
다만 몇 가지를 첨가하고자 한다.

“고급 미술 속의 팝, 즉 고급 미술로서의 팝과 팝 미술 자체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가 있다.
팝의 선구자들을 추적하고자 할 때는 특히 이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더웰이 자신의 몇몇 콜라주에 골와즈Gauloise 담배갑을 이용했을 때, 혹은 호퍼와 호크니가 팝과는 거리가 먼 그림들에다 광고계로부터 나온 요소들을 사용했을 때, 이런 것이 바로 고급 미술 속의 팝에 해당한다.
대중적인 미술을 진지한 미술로 취급하자는 것이 앨러웨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1980년대 초의 기이한 현상과 다원주의

예술의 종말이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에 갑자기 회화가 성행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줄리앙 슈나벨과 데이브드 살레를 선두로 한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이 유행한 것이다.
단토를 이를 “한몫 챙기기”의 현상으로 본다. 추상 표현주의 작품 값이 앙등하자 “돈 벌 기회를 놓친” 사람들 혹은 재산이 될 정도로 급등한 작품을 싼 값으로 살 수 있었을 때 미술시장의 언저리를 기웃거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때늦게 작품에 투자하기 시작하자 이를 노린 화가들이 마구 작품을 양산해낸 것이다.
슈나벨과 살레는 많은 돈을 벌었는데, 이는 예술의 종말 이후의 당연한 징조가 아니라 미술품 투자를 노린 지각생 구매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기회주의 화가들의 한탕주의로 보아야 한다.
지속될 내러티브가 없자 자기표현을 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 파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담론이 활발했으며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장 프랑수아 료타르, 자크 라캉, 그리고 엘렌 식수와 루스 이리가래 같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텍스트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료타르에 의하면 거대 내러티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로 본다.
해체론의 정신은 내러티브를 진리나 허위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견제에서 바라본다.
어떤 이론이 받아들여진다면 과연 누가 이득을 보게 되며, 그 이론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제기되는 표준적인 물음이 되게 됨에 따라 이런 물음이 모더니즘 자체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되었다.
단토는 해체론에 타당성은 있지만 문제의 핵심이 되는 컨템퍼러리 미술사의 심층구조에는 육박하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그가 말하는 심층구조란 다원주의를 말한다.
다원주의는 매체들의 열린 연접성에 의거해야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서 단토는 이 열린 연접성이 한때 예술적 동기들의 연접성에 상응했으며, 또한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내러티브에 의해 예증되는 종류의 진보 발전적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봉쇄했음을 지적한다. 단토는 말한다.

“이제 발전을 끌고 갈 선호되는 운반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회화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버렸으며 미술의 철학적 본성이 마침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예술가들이 해방되어 그들 마음대로 다양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술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연접성이 단토로 하여금 미술사의 종말을 감지하게 했다.
연접성이란 퍼포먼스와 설치, 사진, 대지미술, 공항작품, 섬유작품, 온갖 띠무늬와 질서의 개념적 구조물 등이 회화의 동료가 된 것을 의미한다.
탈역사적 미술에는 엄청난 메뉴가 있고 예술가들 자신들은 원하는 대로 이런 많은 선택을 골라내는 데 방해받지 않는다.
이런 호의적이고 신축성 있는 연접성 속에는 회화를 위한 추상화와 모노크롬 회화의 여지도 있다.
모더니즘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현재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단토가 말하는 수많은 양식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양식 자체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식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양식이 질적 가치 혹은 유일한 지고의 가치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단순히 수단 그 이상이 아니다.
20세기를 선언문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많은 선언문이 쏟아졌고 각 선언문은 자신들의 양식이 우월함을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컬러필드를 미술사의 필연적인 귀결로서 미술사의 과정으로 인식했지만 오늘날 컬러필드는 단순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화가는 바로크 양식으로 혹은 인상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으며 그런 것에 싫증이 나면 표현주의 양식으로 바꿀 수 있다.

1963년 한 인터뷰에서 워홀은 이런 놀라운 예견을 피력했다.

“어떻게 하나의 양식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다음 주면 추상표현주의자나 팝아티스트, 아니면 사실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엇인가를 포기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이는 선언문에 의해 추동되는 예술을 겨냥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는 선언문의 시대였으며 각 선언문은 자신들의 양식이 올바른 양식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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