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토탈 미술관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에 관해 강의해달라는 청을 받고 응한 것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예술의 종말 이후After the End of Art by Arthur Danto(1997)

Danto: <The End of Art>(1984), <Approaching the End of Art>(1985)
Hans Belting: <The End of the History of Art?>(1983) 의문부호를 빼고 1995년에 다시 출간

1984년 10월부터 단토는 <Nation>지에 미술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고 미술비평을 쓴다는 것에 대해 주제의 결핍 때문에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미술의 제작이 중단될 것이란 주장을 한 적이 없다.
벨팅이 말한 대로 예술의 시대 이전에 무수한 예술이 만들어진 것처럼 예술의 종말 이후에도 예술은 무수히 만들어졌다.
계속해서 예술이 존재하는 한 비평가로서 쓸 수 있는 예술은 여전히 풍부하다.

단토가 예술철학에서 다룬 것이 무엇인가?
예술작품의 개념과 예술작품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결국 그가 말한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의 문제가 제기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 칸트가 지적 탐구의 영역을 진, 선, 미, 즉 과학적, 도덕적, 미학적 영역으로 세분하고부터였다.
18세기에는 철학적 관심이 예술작품의 '유일성‘을 밝히는 데 있었고, 19세기에는 예술작품을 통해 얻게 되는 ’미적 경험‘의 본질과 예술작품이 창작된 과정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생겼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는 예술작품에 대한 유일성에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예술에 관한 이론들에 대한 탐색이 진행되었다.
예술철학은 예술에 관한 담론을 전제로 하며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를 내포한다. 오늘날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는 네 가지로 분류된다.

1. 객관적 존재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담고 있는 언어로서의 인지주의적cognitivist 관점.
2.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매체로서의 표현주의적expression!ist 관점.
3.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제품으로서의 형식주의적formalist 관점.
4. 제도에 의해 감상의 대상으로 정해진 것으로서의 제도주의적institutionalist 관점.

그러나 이 네 가지 정의 모두 논리적으로 만족할 만하지 못하므로 철학적 문제가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단토는 우선 Modern art와 Contemporary art를 구분한다.
예술의 종말이란 철학적으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라는 플라톤 이후 서구의 지배적인 오래된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Modern art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는 Post-Modern이란 말이 적절하지 못함을 지적하며 ‘예술의 종말 이후’ 혹은 Contemporary란 말을 사용한다.


Post-Modern은 양식인가 시기인가?

우리가 ‘포스트모던 회화' ‘포스트모던 영화’라고 말할 때는 포스트모던이 양식을 가리키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할 때는 시기를 지칭한다.
현재 포스트모던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문제와 사용의 유무에 관해 많은 의견 대립이 있다.
영국계 미국 건축사가 찰스 젱크스Charles Jenks(1939~)는 저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What is Post-Modernism?>(1986)에서 “근본적으로 어떤 전통과 그 바로 이전 전통간의 절충주의적 혼합, 즉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라고 했다.
그는 After(Post) Modernism의 어의를 서술했을 뿐 Modernism을 규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더니즘의 무엇을 계승 초월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춘향전은 춘향이와 이몽룡이 결국 서로의 사람됨됨이를 이해하고 깨달은 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종료한다.
이런 자각이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남은 생애의 첫 번째 날이 되는 것이다.
Contemporary는 바로 이 자각의 시기이다.
현재가 어떤 위대한 이야기에 더 이상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활력 사이의 어디엔가 놓여 있는 우리의 의식 위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모던과 컨템퍼러리 미술의 차이이다.

컨템퍼러리 미술에는 과거 미술에 반대하는 지침이 없으며 모던하고 다르다는 의식도 없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은 과거 미술을 자신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에게 이용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미술이 제작되었던 바로 그 정신이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은 미술관을 죽은 미술품들로 채워진 장소로 여기지 않고 살아 있는 예술적 선택들이 가득 찬 장소로 여긴다.

Modern이 단지 just now를 의미하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듯이 contemporary도 지금 이 순간에 발생하고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다.
모던은 1880년경부터 1960년대 어느 때까지 번성했던 하나의 양식에 불과하지만 contemporary는 예술제작의 한 양식이 아니라 양식들을 사용하는 하나의 양식을 말한다.
하나의 판단기준으로 승화되어 식별능력을 계발하는 토대로 이용될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양식적 통일성의 결여로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사실상 모더니즘의 종말 이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contemporary는 정보 혼란의 시대, 완전한 미적 정보 전달에 대한 효율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완전한 자유의 시대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어떠한 역사의 경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단토는 모더니즘의 종말 이후를 탈역사적post-historical 혹은 역사 이후의 미술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1960년대는 양식들의 발작기였으며 ‘한갓된 실재 사물’이라 부르는 것과는 대조되게 특별나게 보여야 하는 특별한 방식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신사실주의자들과 팝아트를 통해 점차적으로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것이 단토로 하여금 예술의 종말을 말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에 외적으로는 어떤 차이도 없으며, 개념미술은 시각예술품이 되기 위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시각적 대상이 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는 더 이상 실례를 들어서 예술의 의미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예술은 철학의 문제가 되었다.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작품은 “왜 나는 미술작품인가?” 하는 물음에 스스로 답해야 한다.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94)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시러큐스 대학에서 수학했고 전업 저술가가 되기 전에 미국 세관에 근무했다.
1942~49년 <네이션 Nation>지의 미술 비평가로 활약했으며 초기에는 마르쿠스주의에 심취하여 계급 의식과 목적 의식을 지니는 강한 역사 감각을 가졌으며 미술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관심을 두었으나 후에는 비평에 있어 형식주의를 취했다.
그는 각각의 예술에는 ‘순수’를 향한 충동, 즉 다른 장르로부터의 분리를 지향하는 충동이 있으며 회화에서의 이 충동은 표면의 평면성을 강조하고 환영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44년 4월 15일 <네이션>에 기고한 <추상 미술 Abstract Art>이란 제목의 글에서 “회화가 색채와 선이라는 순수하고 단순한 성질에만 국한되도록, 그리고 미술 이외의 다른 곳에서 더욱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들과 연계되어 우리의 호기심을 유발하지 않게 하라”고 주문했다.
그린버그의 영향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절정에 달했으며 그의 비평집은 미학 교과서로 간주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의 비평은 모더니즘 이론의 한 유형으로 오늘날에까지도 읽혀지고 있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을 순수하게 시각적 경험과 관련된 지속적이며 자기 비평적 전통으로 인식했다.
그는 마네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보았으며 사실상 파리와 뉴욕을 제외한 곳에서 제작된 미술작품을 무시했다.
그는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 Modernist Painting>(1960)에서 평편한 표면으로서의 회화의 물리적 성질을 인식한 마네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모더니스트 회화’란 말을 사용했다.
그린버그는 과거 화가들이 회화 매체를 구성하는 평면적 한계를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한 데 반해 모더니스트 회화에서는 이 같은 한계를 긍정적인 요소로 인식했으며 마네는 표면 아래의 평면을 솔직하게 선언했기 때문에 최초의 모더니스트라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관람자들은 옛 거장의 작품을 접할 때 작품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기 이전에 작품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려는 경향을 띠는 데 반해 모더니스트 회화는 우선 하나의 그림으로 본다.
물론 이것은 옛 거장의 그림과 모더니스트 회화에 상관없이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그것만이 유일하고 필요한 방법이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서 거둔 모더니즘의 성공은 자기비평의 성공이다.”

이를 두고 많은 미술사가들은 모더니즘의 비평적 입장을 전형화한 말이라고 동조한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모더니즘은 결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모더니즘 미술은 어떠한 단절이나 충돌 없이 과거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이 말에서 그가 미술사를 발전 또는 진보의 과정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단토는 그런 미술사관을 부정한다.
그린버그는 Kinetic art와 Pop art처럼 자신의 비평적 틀에 적당하지 않은 혹은 발전적이지 않은 미술 운동을 ‘진기한 미술 novelty art’로 제쳐두었다.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먼 필연적 엘리트주의로 보았다.
가장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엘리트 예술가들에 의해서 대중 미술보다 한층 격이 높은 미술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시각으로 이는 곧 모더니즘이 소수 지성인들의 미술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미술이 소수 지성인들의 지적 진지함에 머물자 절충적 방법으로 좀 더 대중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1960년대부터 시작된 광범위한 문화현상을 가리켜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지성인들을 위한 미술에서 대중을 위한 미술로의 전이를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의 전이로 보는 시각이다.
이들은 팝아트는 고급 미술과 대중문화 간의 구분을 흐리게 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그린버그는 팝아트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곰브리치와 그린버그의 추종자들은 팝아트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퇴행적 미술운동으로 보고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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