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박물관


러시아와의 전쟁을 종결시킨 일본은 이토伊藤博文를 조선에 파견하여 식민지화작업을 추진했다.
이토는 1905년 11월 일본군을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을사5적 이완용(1858~1926),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형과 야합하여 을사조약을 체결시켰다.
통감부 설치와 조선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의 체결로 조선 정부는 대외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통감부의 통제를 받게 되어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민영환은 굴욕적인 조약에 항거하여 마침내 자결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잘 말해준다.


민영환이 자결한 이듬해 봄 그가 거처하던 사랑채 댓돌 밑에서 푸른 대나무 한 그루가 솟아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대나무가 만영환의 원통한 넋이 환생한 것이라고 떠들어댔고 마침내 그 대나무를 ‘혈죽血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소문을 들은 안중식이 현장으로 달려가 대나무를 그려서 민영환의 넋을 기렸다.
그러나 안중식의 <혈죽도>는 현존하지 않는다.
<혈죽도>를 그려 충신의 넋을 기린 안중식은 자신의 안일을 위해 나중에 친일파의 거두인 이완용에게 아부하면서 그에게 붕새를 그려 바치는 비열함을 보였다. 당대의 화단을 대표하는 그가 매국노와 손을 잡았으므로 훗날 젊은 김은호를 천거하여 궁중벽화와 어진을 그리게 할 수 있었다.


이왕가 박물관

190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이 이왕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박물관은 1915년 일제 총독부에 의해서 설립된 박물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박물관의 양대 축을 이루었다.
이왕가 박물관은 창경궁 일관에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설립되었으며 명정전 일대를 전시실로 삼아 1909년 11월 1일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공식 기록 『이왕가 박물관 소장풍 사진첩』에 의하면 순종이 명하여 박물관을 일반에게 관람하게 했다.


박물관 제도는 개항기에 일본을 통해 주로 소개되었는데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알려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박정양의 글에서 박물관 제도에 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박정양 일행이 파견된 그 해 일본에서는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박정양은 내무성과 농상무성을 둘러보고 쓴 보고서 『일본국 내무성 직장사무부 농상무성』에서 박물관 제도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박물국은 박물관 사무를 관리하며 천산天産, 인조人造, 고기금물古器今物을 수집하여 견문을 넓히므로 박물국이라 한다”고 전제한 후 “각국 소산을 진열하지 않는 것이 없어 이로써 인민을 가르치는 자료로 삼는다”고 하여 박물관의 사회적 기능을 지적했다.


박물관을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이해한 예를 1888년 박영효가 올린 ‘박영효 건백서建白書’에서 알 수 있다.
박영효는 자신과 함께 소위 급진개화파로 불리운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김윤식(1835~1922) 등과 함께 무장 정변을 준비하여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 축하연 대 자체 무장력과 일본군을 동원해 민씨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3일만에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중 1888년에 올린 개혁 상소에서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와 근대적인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가운데 교육 및 학술문화 정책의 하나로 박물관을 설립할 것을 들었다.


『승정원일기』 융희 2년(1908)에 의하면 1908년 3월 7일 시모고리야마 세이이치下郡山誠一를 주임대우로 박물관 조사사무를 맡긴 것이 박물관 사무의 시작이었다.
이어 5월 29일에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態彦를 주임대우로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서무 및 회계를 맡겼으며 6월 18일 유한용에게 판임대우로, 7월 15일에 야야베 시게루野野部茂에게 박물관 사무를 맡겼다.
『승정원일기』 융희 1년에 의하면 유한용은 1907년 9월 3일에 육군 부령으로서 무관직을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 직원의 고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 박물관 설립의 의의나 목적은 적혀 있지 않았다.


1912년에 발간된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 사진첩』에 당시 이왕직 차관이었던 고미야 사보마쯔小宮三保松가 쓴 서문에 박물관의 설립 의도가 기술되어 있다.

명치 40년의 겨울, 한국 황제 즉 현금 이왕 전하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별거하는 준비를 할 때 창덕궁 수선공사를 하면서 나는 그 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11월 4일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씨 및 궁내부대신 이윤용씨가 “황제께서 무료해하실 것을 달래 드릴 오락이 없겠는가” 하고 물어서, 동·식물원과 박물관 창설을 제의하고 계획의 대략을 설명하니 크게 기뻐하면서 찬성하여 건물의 설계, 물건의 수집에 착수해서 41년 9월 관장할 부국이 되는 어원사무국도 신설하였다.

그러나 고미야의 회고와는 달리 어원사무국 관제는 1908년 8월 13일에 반포되었다.
고미야의 회고에 의하면 박물관은 순종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한 오락으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발의자는 바로 고미야 자신이었다.
순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여파로 강제 양위당한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등극했지만 일본 통감부의 의도대로 고종과 격리되도록 그 해 11월 13일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고미야의 글에서 확인되듯 동·식물원과 박물관의 설립은 창덕궁 수선공사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의되었다.
11월 4일에 논의를 받고 이틀 후 계획을 제의한 것이다.
일본이 근대 국가 체제 구축의 한 제도로 박물관을 설립한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실세를 잃은 황제의 위안거리로 설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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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제 중앙대학에서 특강한 내용입니다.


진실은 사실의 왜곡이다


자서전을 읽노라면, 그것이 간디의 자서전이든 누구의 자서전이든, 심지어 루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이더라도 사실이 다소나마 왜곡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은 사건의 발생이다.
사건에 동기가 있기 마련인데 자서전이나 참회록은 훗날 반성적인 태도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동기와 그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기술이라서 원래의 동기와 의미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긴다.
원래의 동기와 의미를 고스란히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자각으로 과거를 돌아보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사실로 왜곡하게 된다.
사실이란 그때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외에는 시사하는 바가 별로 없다.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그 늙은이와 함께 오래 살아온 사람이 옆에서 듣노라면 사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늙은이가 자신의 부끄러운 이야기는 대부분 생략하고 떳떳한 이야기는 부풀려서 미화시킨다는 걸 알게 된다.
늙은이는 살아온 이야기를 젊은이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반성적이면서도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그 늙은이와 함께 오래 살아온 사람은 안다.
그리고 늙은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과거의 사건들이 사실이라면 그것들을 회고하면서 반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실이다.
진실은 사실에서 얻은 교훈이다.
과거를 미화시킴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이는 간디의 자서전이나, 루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서도 발견된다.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날조와는 다르다. 날조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거짓으로 꾸밈’이란 뜻이다.
왜곡은 ‘사실과 다르게 곱새김’이라고 국어사전에 정의되어 있는데, ‘곱새기다’란 말은 ‘되풀이하여 곰곰이 생각하다’ 혹은 ‘남의 말이나 행동을 그 본의대로 생각하지 않고 좋지 않게 꼬아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달리 말하면 ‘곡해하다’라는 뜻이다.
왜곡은 영어로 distortion으로 ‘일그러뜨림’이며 동사로 사용할 경우 ‘찡그리다’, ‘비틀다’ 혹은 ‘곱새기다’라는 뜻이다.
1930년대에 많은 미술 평론가들 사이에서 왜곡에 대한 반감이 격렬하게 일어났지만 1950년대에는 거의 사라졌다.
반감은 재현적 미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외부세계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이라는 암묵적인 동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 이런 시각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왜곡이 순전히 환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될 경우 거부감은 거의 없다.


추상과 왜곡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추상은 불완전한 서술, 혹은 ‘불완전한’ 정보의 제공인 데 비해 왜곡은 ‘부정확한’ 정보의 제공을 의미한다.
왜곡은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사실에서 보면 곡해하고 곱새기는 것이지만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필히 사실에서 멀어져야만 한다.
왜곡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곧 예술을 즐기는 것이며 또한 진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곡으로 인해 예술이 복잡해졌다.
정직하지 못한 예술가들에 의해 진실인 양 날조하는 경우가 허다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날조와 왜곡을 구별하는 안목을 가져야만 한다.
날조와 왜곡을 가리는 것은 작품에 대한 분석으로 가능하다.
교활한 예술가의 수준 높은 속임수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서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날조인지 왜곡인지 가릴 수 있다.
서술적 의미란 어의적 의미semantic meaning를 말한다.
작품은 반드시 설명되어져야 하며 설명되지 않는 작품은 일단 작품의 가능성에서 유보되어야 한다.
그것은 아직은 작품이 아닌 것이다.

사실과는 다르지만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마네 146 마네,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1867~68), 유화 252-305cm.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의 대공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한 사건이 파리에 알려진 것은 1867년 7월 1일이었다.
<르 피가로>가 7월 8일자로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상세하게 보도했다.
공화주의자인 에두아르 마네는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폭로하겠다는 결심으로 황제의 처형 장면을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란 제목으로 그렸는데 고야의 영향이었다.(마네 145)
마네는 고야가 1814년에 그린 <1808년 5월 3일>과 마찬가지로 총구를 겨누며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을 오른편에 배치하고 상형당하는 사람들을 왼편에 구성했다.


마네의 작품의 특이한 점은 총살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시위한 것으로 마네는 황제의 처사에 매우 분노했다.
그는 작품에 황제가 처형된 날자 6월 19일을 적어 넣었다.


요제프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1832~67)

막시밀리안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이다.
나폴레옹 3세의 강요로 1864년 4월에 합스부르크 가(1276~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왕가)의 왕자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독립군에게 맞설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채 멕시코 황제에 즉위했다.
1867년 2월, 막시밀리안이 집권한 지 3년도 채 안 되어 나폴레옹 3세는 10년 이상 멕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군대를 멕시코에서 모두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과의 약속을 깨고 그를 구출하지 않았으므로 막시밀리안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베니토 후아레즈가 주도하는 과격한 멕시코 게릴라들이 막시밀리안과 휘하의 장군들 미구엘 미라몽, 토마스 메지아를 체포했다.
후아레즈는 1867년 6월 19일에 멕시코시티 북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쿠에레타로 근처에서 그들 모두를 처형했다.


인디언 고아 출신의 후아레즈는 동란 후 1861년부터 대통령의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1867년 3월 모든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에서 철수했다.
막시밀리안은 아내를 파리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며 5월 15일 쿠에레타로가 점령당하자 항복했다.
후아레즈는 집권 당시 법을 제정했는데 외국 군대를 멕시코로 끌어들이는 어떤 행위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총살형 집행장에서 여섯 명의 군인에 의해 처형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충분한 방어능력을 갖추지 못한 그를 멕시코로 추방한 결과 벌어진 사건이었다.


처녀의 개념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클레 59 클레, <나무 위에 있는 처녀>(1903)

파울 클레는 깡마르고 못생긴 여인이 죽은 나무의 앙상한 가지 위에 벌거벗은 몸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을 그린 후 아내 릴리에게 “진실을 제시하게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처녀성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에 반발한 작품이다.
처녀성은 왜 지켜져야 하며 왜 찬양받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처녀성을 찬양하지만 정작 처녀는 소외되고 몸이 말라비틀어진 모습이며 이것이 처녀의 참모습이라고 클레는 시각적으로 시위했다.
그는 진실을 제시하게 위해 왜곡할 수밖에 없었다.

다비드 205 다비드,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넘는 보나파르트>(1800~01), 유화, 271-232cm

나폴레옹이 2차 이탈리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그의 초상을 그리고 싶다며 포즈를 취해줄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거절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대 그리스 화가 아펠레스Apelles에게 포즈를 취해주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활동한 아펠레스의 현존하는 작품은 없지만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알려졌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화가였던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마렝고에서 사용한 부츠, 뿔 모양으로 생긴 모자, 장식이 달린 유니폼, 칼 등을 아들 또는 제자 프랑수아 제라르로 하여금 사용하게 해 나폴레옹을 대신한 모습으로 그렸다.
나폴레옹의 모자를 써 보니 그의 머리가 자신의 것보다 크다는 걸 알았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전투지에서 칼을 높이 쳐든 모습을 그리려고 했는데, 나폴레옹이 전쟁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면서 사나운 말 위에 침착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라고 주문했다.
다비드는 주문에 응해 그가 말을 타고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넘는 모습을 그리기로 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승리를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화면 왼쪽 하단 바위에 나폴레옹의 이름과 함께 한니발과 샤를마뉴의 이름을 적어 넣었는데 알프스 너머에 살던 두 사람은 나폴레옹에 앞서 이 험준한 알프스를 넘은 정복자들이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왕(768~814년 재위)으로 ‘유럽의 어버이 왕’으로 불리었다.
샤를마뉴는 로마제국 멸망 후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 및 브리튼 제도를 제외한 서유럽 대부분 지역을 통일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묘사한 것처럼 거창하게 알프스를 넘지 않았다.
부하들이 이미 알프스를 넘은 며칠 후 말이 아닌 노새를 타고 협소한 길을 따라 넘었다.(다비드 204)
훗날 1848년 폴 들라로셰가 그린 그림이 사실에 가깝다.
이탈리아에서의 위급한 상황으로 나폴레옹은 군대를 최대한 신속하게 전투지로 보내야 할 처지였다.
그는 지름길이지만 가장 험난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방법을 선택했다.
1800년 5월 14일부터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넘는 이 대담한 작전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방해를 피해 이탈리아로 갈 수 있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탄 것은 말이 아니라 노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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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특집_(1) ‘2005년 올해의 작가’ 서세옥의 그림세계
‘사람’ 강렬한 의지 돋보여…빈틈없는 짜임새 ‘교과서적’
2005년 10월 01일 김광우 미술평론가


서세옥의 작품을 처음 본 건 십수 년 전 뉴욕 소호SoHo의 한 화랑에서였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화랑에서 한국작가 4인의 그룹전이 열렸다.
그때 서세옥의 작품을 보고 앵포르멜 양식의 패턴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불과 몇점만 전시했으므로 그것들로만 작가를 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판단을 유보했다.
그러다 며칠 전 덕수궁미술관에서 1950년대 말부터 근래까지 제작한 일련의 작품을 본 후 그때의 느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세옥에 관한 책과 글을 읽다가 몇몇 평론가들의 글에서 문제점을 발견했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하나를 예로 들어 평론가의 글이 관람자에게 잘못된 인식을 주는 과오를 범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정병관이 1989년 서세옥에 관해 쓴 글을 보자.


“가장 간결한 형태를 빈틈없는 구도 속에 배치한 묵적들은 ‘기’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힘’이라는 말에 신비 또는 숭고와 같은 말들을 더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산정의 최근작 문기에서 나온 추상’ 中에서)


이 글을 간결하게 하면 “가장 간결한 형태를 조형적으로 배치한 묵적에서 느껴지는 기 혹은 힘은 신비 또는 숭고로 이해된다”가 될 것이다.
이는 “나는 서세옥의 작품에서 신비감 또는 숭고함을 느낀다”라는 뜻이다.
어떤 회화적인 요소가 그런 느낌을 갖게 해줬는지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은 채 정병관은 이어서 적었다.


“현대 회화가 재즈음악의 리듬감 같은 것에 은연중에 침투되어진 것과 비교하면 산정(서세옥)의 그림은 고전적인 인간의 작품이며, 칸딘스키가 생각한 숭고한 형이상학적인 회화에 속한다.”
(동일한 글 中에서)


다양하고 난해한 현대회화를 “재즈음악의 리듬감 같은 것에 은연중에 침투되어진 것”으로 규정하는 건 현대회화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런 가정을 전제로 사용하게 되면 오류가 생긴다.
그리고 산정의 그림이 고전적이라는 것인지 산정이 고전적이라는 것인지 불분명한데,
어느 것이든 ‘고전적’이란 말은 문맥상 시사하는 바가 없고 다만 ‘고전은 좋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독자를 오도할 소지가 있다.
더욱 놀라운 건 칸딘스키의 예술 이론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칸딘스키가 생각한 숭고한 형이상학적인 회화”라는 말을 삽입해 서세옥의 작품을 그런 부류에 포함시키는 건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혼돈을 유발시킨다.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를 통해 정신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했지만 형이상학적 회화에 관해 논한 적이 없으며, 그의 작품은 형이상학적 회화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山丁 徐世鈺(1929~ )은 20세에 국전에서 ‘꽃장수’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해 화단에 등단했으며, 1955년 불과 26세의 나이에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고, 32세에 국전 심사위원이 됐으며, 수십년간 서울대 강당을 지키면서 한국 화단에서 높은 명성과 권위를 누려왔다. 1960년대 墨林會로 대표되듯, 한국화의 현대적 변용을 이끌었던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며,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인간 시리즈 작업을 통해 이름을 남겼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화단에 강력한 파장과 폭넓은 진폭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서세옥의 작품이 앵포르멜 양식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앵포르멜(Informel)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앵포르멜은 ‘격식을 차리지 않는’이란 뜻의 프랑스어로 무정형 혹은 비기하적 양식을 일컫는다.
1950년 프랑스의 평론가 미셸 타피에가 창안해낸 명칭으로 1945년 경부터 10여년 동안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에 상응해 유럽에서 전개된 회화운동을 말한다.
입체주의에서 유래한 엄격한 추상과 몬드리안을 비롯한 조형주의자들의 기하적 추상에 대한 반발로 잠재의식의 환상을 직접 표현하는 ‘서정적 추상’ 작품에 일괄적으로 적용됐다.
이성으로 감지되지 않는 대상을 추상화해 불완전한 서술, 또는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앵포르멜과 동의어로 타시즘이 있다.
‘얼룩’이란 뜻의 프랑스어 Tache에서 파생된 영어로 1954년 프랑스 평론가 샤를 에티엔이 전후 유럽의 서정적 표현적 추상을 기하적 추상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타시즘과 앵포르멜은 정확히 구별되지 않은 채 혼용되는데, 타시즘이 예술가의 감정적 상태를 표현하는 ‘기호’와 ‘제스처’로서의 얼룩과 색면들의 자발적인 상호작용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 데 비해, 앵포르멜은 무의식적인 서예 형태로서의 추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앵포르멜과 타시즘을 염두에 두고 서세옥의 작품을 바라보면 이해가 쉽다.
서예형태와 비기하적 형태가 바로 그것이며 묵적의 얼룩이 그것이다.
잠재의식의 환상을 직접 표현하는 이런 형태들은 불완전한 서술로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
문제는 추상에 대한 작가의 의도이다.
인간을 기호화함에 있어 서세옥은 단순한 방법으로 상형문자화 했는데, 기발한 착상처럼 생각되지만 인간을 너무 안일하고 쉬운 방법으로 기호화 한 듯하다.
추상은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취약점 때문에 과정이 매우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서세옥의 인간기호를 보면 사람 인자를 변형시켜 패턴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의 인간 기호에는 인본주의에 대한 사고가 별로 묻어나지 않는다.


‘사람들’(1981)을 보자.
동일한 인간 기호가 반복되는데 형상을 약간 달리해 각 인간의 개별성이 존중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인간성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앵포르멜 화가들이 대체로 중시한 ‘서정성’의 결여이기도 한데, 추상이 서정적인 요소를 결여하고 도식적으로 사용될 때 디자인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갈겨쓴 듯한 서예적 추상의 ‘춤추는사람들’(1981)은 어떤가. ‘춤추는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주제로 많은 화가들이 다양한 양식으로 그려왔다.
일반적으로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표현한다든가 화합과 평화를 기원한다든가하는 인본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다.
서세옥의 ‘춤추는 사람들’은 갈겨쓴 글 그 이상의 무엇을 전달해주지 않아 휴머니즘을 엿보기 힘들다.
많은 작품에 ‘사람들’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인간기호의 상하좌우 연결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특기할 점은 이런 구성이 뛰어난 조형감각으로 배치된 것이며 먹의 농도를 조절해 매체가 지닌 속성을 시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한 것이다.
조형의 측면에서 보면 그에겐 기민함이 있으며 매우 세련된 취향을 갖고 있다.


1996년작 ‘사람’은 예외적으로 훌륭하다.
양다리를 벌리고 두 팔을 위로 뻗은 사람의 모습으로 머리를 한 점의 얼룩으로 처리하는 노련한 솜씨를 보인다.
여기에는 인간의 강렬한 힘과 의지가 나타나 있으며 몸체 가운데에 구멍을 남겨놓아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공간을 통한 입체를 성취했다.
훌륭한 회화는 관람자를 설레게 만든 후 안정시킨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어느 정도 성취된 작품이다.


완전추상만을 제작하는 작가는 자칫 내면세계를 반복해서 유사한 형상으로 양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자연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모사하는 화가는 절경을 찾아다닐 곳이 많기 때문에 주제에 고갈을 느끼지 못하지만 내면세계의 풍경 혹은 환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추상 화가는 오랫동안 동일한 작업을 반복하다보면 주제에 고갈을 느끼게 된다.
이는 대부분의 추상화가들이 경험하는 일반적 현상이다.
이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서세옥은 반추상 혹은 반재현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이런 작품들도 전시됐는데, 대부분 소품들이라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구성에 관해 특기할 점은 화면의 처리이다.
빈틈없는 짜임새는 미대 교수로 오래 재직한 작가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으로 이는 종종 아카데미즘이라 불린다.
비대칭적이지만 기하에 기반을 두는 면 나누기, 힘의 조절, 잡아당기고 미는 형상들 사이의 대립 등이 교과서적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이런 구성은 작가개성의 결여로 보일 수 있다.
서세옥의 ‘구름이 흩어지는 공간’(1977)과 ‘행인’(1978)이 그런 예다.
점으로 처리한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화면 중앙에 커다란 공간을 나타낸 ‘구름이 흩어지는 공간’은 커다란 여백이 관람자에게 주는 공허의 느낌이 어느 정도 성취됐지만 구름의 먹점을 화면 가장자리에 골고루 그리고 짜임새 있게 배치함으로 인위적인 구성이 자연스러움을 반감시킨다.
이런 식의 구성은 ‘행인’에서도 나타난다.
화면 네 모퉁이의 ㄱ자와 ㄴ자는 건물 혹은 우리가 약도를 그릴 때 흔히 사용하는 상징적 길모퉁이를 의미한다.
행인 한 사람이 교차로 중앙에서 왼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여기에서도 지나친 짜임새의 기하적 구성으로 인해 중앙의 텅 빈 공간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혁명적 구성이 아카데미 밖에서 이루어지는 이유는 미대 교수들이 교과서적인 혹은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체의 속성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매체의 속성상 한지에 먹으로 그리는 장점이 있고 캔버스에 유채나 아크릴로 그리는 장점이 있다.
화가의 적절한 매체선택은 칭찬할 일지만 매체의 속성과 작가의 정신을 과도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유채와 아크릴을 사용할 때도 붓에 힘을 주어 강약을 조절하고 색채의 톤을 조절한다.
이런 화가의 의도는 존중돼야 하지만 한지에 먹을 사용할 때 절로 생기는 농담이나 먹을 진하게 또는 엷게 사용하는 기교에 의한 시각적 민감함을 매체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지 않고 화가의 심오한 철학이 베어 나오는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마지막으로 미술에 대한 작가의 博識과 작품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작가가 평소에 노자를 말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에 반드시 무위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은 스스로 말한다.
따라서 평론가는 작품이 전하는 말만 전달해야지 그 무엇이 있다는 식으로 자신도 서술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억지논리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김광우 / 미술평론가


필자는 197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종교철학을 공부했고, 이후 한국에서 미술관련 저술작업과 평론활동을 해왔다. ‘폴록과 친구들’,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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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신세계 백화점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입니다.

관능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드가와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1834~1917)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를 묶어서 말할 수 있는 공통점은 프랑스 전통회화를 유지 발전시킨 데 있다.
두 사람 이후 전통회화의 맥이 끊어진 것을 볼 때 두 사람은 전통회화의 마지막 보루였다.
프랑스 전통회화는 다비드와 앵그르로 이어지는 역사화와 인물화였으며 미적 강령은 일찍이 그리스 회화에서 성취된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한 이상주의였다.
프랑스의 소묘 전통을 최고의 수준으로 완성시킨 앵그르의 선묘는 관능적인 느낌을 주어 낭만주의에 가까운 표현력을 발휘했고 그는 아카데미에 방향성과 권위를 부여했다.
이상적인 미의 추구는 프랑스 회화의 특징이었으며 이를 추종한 화가가 바로 드가와 르누아르이다.

19세기 프랑스 회화를 주도한 것은 낭만주의였으며 일상적 현실의 단조로움에 반발한 낭만주의의 한 측면은 이국 취향이었다.
이국 취향은 고갱의 경우 타히티에서 삶을 마감하는 현실 도피로도 나타났다.
평범한 현실에 숭고함을 부여하려는 노력도 낭만주의의 태도였다.
19세기 초 프랑스 회화의 가장 취약한 분야는 풍경화였다.
프랑스 회화의 선구자들 푸생과 클로드 로랭이 일찍이 풍경화를 그렸지만 인물들을 묘사하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역사적 풍경화였고 풍경화를 고유한 장르로 발전시킨 것은 19세기 중반에 활약한 바르비종 화파였다.
바르비종 화파란 퐁텐블로 숲 외곽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 테오도르 루소를 비롯한 화가들이 풍경화를 주로 그린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풍경화는 19세기 말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서 독립된 장르가 되었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상주의의 세계적 명성은 프랑스 전통회화의 종말을 의미한다.
19세기 말 드가와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자로 불렸지만 다른 인상주의자들과는 달리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이상을 구현하면서 프랑스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드가가 7살 연하의 르누아르를 만난 것은 훗날 인상주의로 불리게 될 화가들의 모임에서였다.
1862년 르누아르, 모네, 바지유, 시슬레 등 훗날 인상주의의 주역이 될 화가들은 스위스 태생의 글레이르의 파리 아틀리에에서 수학하면서 친구가 되었으며, 이들은 살롱전을 통해 프랑스 화단에 이름을 날린 마네를 중심으로 카페에서 자주 만났다.
그들은 마네가 1864년 새로 이사한 바티뇰 불바드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주로 만났으며 이들은 ‘바티뇰 그룹’ 또는 ‘마네파’로 불리었다.
드가가 2살 연상의 마네를 처음 만난 것은 1863년 루브르 뮤지엄에서였고 마네가 그를 게르부아로 오게 해서 젊은 화가들에게 소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제1회 인상주의 그룹전이 1874년 4월 15일~5월 15일에 열렸을 때 드가는 1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드가는 모두 8차례에 걸쳐 열린 인상주의 그룹전에 7번이나 참가하여 ‘인상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독자적인 양식을 구사했고, 그들과는 달리 풍경화보다는 실내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묘사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특기할 점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대각선에서 바라본 장면이나 그림 가장자리에 인물이 잘리기도 하는 낯선 구도를 사용했다.
드가의 작품은 자발적인 장면과 분위기 그리고 솔직한 행위가 스냅사진처럼 포착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외관적인 관점이고 그가 매우 신중한 태도로 구성한 결과이다.
몰래 들여다보는 장면처럼 그리는 것이 바로 그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구성인 것이다.

드가는 파스텔로 그리기를 선호했으며 1880년대 시력이 나빠진 후에는 빠른 속도로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는 파스텔화를 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시력이 나빠지자 유화를 그리기 어려워져 밀랍으로 모델링을 하기 시작했으며 1890년대에 시력이 더욱 나빠지자 조각에 전념했다.
그가 회화에서 선호했던 모티프는 조각의 모티프이기도 했는데, 달리는 말, 목욕하거나 몸을 치장하는 누드 여인, 발레리나 등이었다.
이런 조각들은 그가 타계한 후에야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말년의 거의 20년 동안 드가는 거의 실명상태였으며 이 시기에 은둔생활을 했다.
피사로는 드가를 가리켜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칭찬했고 르누아르는 그가 “로댕보다 더 뛰어난 조각가”라고 극찬했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르누아르는 파리 시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그렸는데, 몽마르트르에는 상점 종업원, 식당 종업원, 잡부, 모델, 연예인들이 대거 거주했고 카페가 많아 밤이면 더욱 붐볐다.
르누아르는 귀엽게 생긴 어린이, 꽃, 자연의 경관, 여인의 초상 등을 특유의 따뜻한 느낌을 주며 화사한 색채로 그려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작품을 제작했고,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지만 1880년경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0년대에 관절염을 앓기 시작하고 1897년 자전거를 타다 팔이 부러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유명해진 후에는 고전적 주제, 특히 여인의 누드와 어린 소녀를 즐겨 그리면서 신화에서 주제를 얻기도 했다.
그는 더욱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면서 인체의 형태를 풍만하게 그리고 부드럽고 둥글게 표현했다.
1912년부터는 휠체어에 탈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으며 간병인의 도움으로 자유롭지 못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감동했으며 자신도 회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르누아르의 아들이며 유명한 영화감독인 장 르누아르는 1962년에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를 썼으며 이 책은 그 해 프랑스와 영어로 출간되었다. 

 

작품  

드가 36 <드가의 초상>, 사진, 드가의 동생이 1895~1900년에 찍은 것이다. 
드가 51 드가, <늘어진 옷을 걸친 서 있는 모습>, 1860~62년
26~28살 때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할 때 그린 드로잉이다.
선으로 정확하게 인체와 의상을 묘사하는 것은 아카데미가 추구한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프랑스 회화의 전통이 되었고, 드가는 앵그르의 제자로부터 이런 훈련을 받았다.
제자를 방문한 앵그르가 드로잉 훈련을 받는 드가를 보고 “젊은이, 선으로 그리게. 선은 회화의 생명일세”라고 격려해준 말을 드가는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드가 243 드가, <목욕 후>, 1883~84년
드가는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을 많이 그렸는데 마치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바라본 모습처럼 모델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는 모델로 하여금 목욕할 때 그리고 목욕 후 몸을 말릴 때 취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포즈를 취하게 했으므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당시 프랑스 여인들의 솔직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듯 그는 파스텔로 인체와 방의 내부를 매우 정교하게 묘사했으며 따라서 파스텔화를 고유한 장르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드가 62 드가, <댄스교실>, 1874년
이 작품은 댄스교실에서의 한 순간을 포착한 스냅사진처럼 보이지만 매우 사려 깊게 미리 준비한 인물들을 배열한 것이다.
드가는 인물 하나하나를 미리 습작을 통해 준비했다가 합성시키는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했는데 오른편의 댄스 교사는 이미 타계한 사람으로 사진에서의 모습을 실제로 그곳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다.
마네 114 바지유, <르누아르의 초상>, 1867년
마네 89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아내>, 1868년경
르누아르와 함께 수학한 시슬레는 파리에서 영국인 부자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영국으로 보내져 언어와 상업을 공부했는데 아버지가 사업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업보다는 회화에 더 관심이 많은 시슬레는 곧 파리로 돌아왔고,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르누아르의 말로 ‘유쾌한 사나이’인 그는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르누아르는 이 작품에서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내를 매달리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르누아르 96 르누아르,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위한 습작, 1886~87년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린 드로잉에서 르누아르의 뛰어난 소묘력을 볼 수 있다.
선을 중요시하는 것은 프랑스 회화의 전통으로 드가와 르누아르가 이어받았다.
인체의 가장자리를 흰색으로 칠한 것은 인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런 유연하고 아름다운 선은 채색에서 사라지게 되지만 사실적 형상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한다.
르누아르 124 르누아르, <일광욕하는 사람들>, 1918~19년
이 작품은 타계하기 얼마 전에 그린 것으로 화면에 두 여인이 나란히 누워있지만 동일한 여인으로 포즈를 달리 하게 해서 합성한 것이다.
모델은 러시아 여인으로 르누아르의 아들 장과 결혼했다.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화사한 색을 사용했으며 붓질을 짧게 하면서 여러 색을 섞어 사용하는 방법은 그의 독창적인 양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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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전래


연경사신 이광정이 1603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 坤輿萬國全圖』(1602)를 들여오자 사람들은 천지의 중심이 중화中華가 아니라 지중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630년에는 정두원이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紅夷砲, 천리경千里鏡, 자명종自鳴鐘 등 서양 기계와 함께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한역된 『천문서 天文書』, 『직방외기 職方外紀』 등 서학 서적을 들여왔다.
『직방외기』는 한민족 외에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 민족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편술된 책이었다.


서양에 있어 민족, 즉 nation이란 현대어는 러틴어의 natio에서 유래하며 ‘태어나다 nascor’에서 파생했다.
Natio는 출생 조건이 비슷한 사람들의 집단이란 뜻이다.
보통 외국인 집단을 지칭했다.
로마인이라고 할 때 그들은 populus Romanus라고 칭했다.
그리스의 폴리스는 자유민으로 구성되고 비자유인은 ethnos라고 하여 이반 민족과 노예를 포함한 일반 민중을 가리켰다.
따라서 그리스어 ethnos와 라틴어 natio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제국에서 정복된 민족이나 국가는 처음부터 로마인이 되지 못했고 시민의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시민civitas으로 칭했다.
오늘 날의 의미로서의 민족국가가 태어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프랑스 혁명은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국가 구성원에게 불러 일으켰다.
루소는 국가가 독재 군주나 지배계급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국가는 국민과 일치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의 기본 이념을 제공했다.
루소 이전에는 군주 사이의 분규가 곧 국가의 전쟁이었고 일반 시민은 전쟁 당사자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서양 과학과 사상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 학자들은 종래와는 다른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정제두는 “오늘날에 와서 주자를 말하는 이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자에 가탁假託한 것이요, 주자에 가탁한 것이 아니라 주자에 부회附會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理보다는 기氣를 높이고 실천성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앞세웠다.
성리학은 성즉리性卽理, 곧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치라고 분 데 반해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 곧 마음이 바로 이치라는 입장이다.
이는 객관적 사물이 아니라 주관적 심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정제두는 『하곡집 霞谷集』에 적었다.

이른바 진지眞至의 의리, 천리天理의 정正이 과연 말, 소, 닭, 개에 있다고 하여 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천지만물은 인사人事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 개개의 사물에 따라 하나하나를 결정하고, 그때그때에 사물을 처리하는 것이 내 마음에 있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을 위시하여 북학파라고 불리우는 학자들은 양명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양명학은 실생활과 유리된 공리 공론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존중하는 실학에 영향을 미쳤다.
이익과 정약용은 양지良知 양능良能, 즉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간의 사유 능력과 실천 능력이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조요한의 말로 하나의 높은 님을 존경하게 된다고 보았다.
류승국은 『철학사상의 제문제 II - 한국 철학의 근원탐구』(1984)에서 정하상의 『상재상서 上宰相書』도 이 양지 양능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 도입된 서학과 전통 유학의 관계를 양명학이 매개한 것으로 보았다.
당시 서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권에서 배제된 기호畿湖 남인南人 학자들이었다.
이 시기는 권력의 독점과 부패 그리고 신분 차별의 심화와 대중의 궁핍으로 민심이 집권층을 떠난 때였으므로 현실 개혁을 의도한 선비들에게 서양의 평등사상이 개혁의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서학이 도입되면서 성호 이익과 그의 학풍을 이은 성호학파와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로 이어지는 북학파의 활동 속에서 서학연구가 정착되었다.
담헌 홍대용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개명을 괴한 청나라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연암 박지원은 담헌을 이어 지전설地轉設을 주장하며 오행에 대한 상생상극의 이론을 부정하고 그에 따르는 갖가지 미신적 사고에 젖어 있던 당시의 우주관과 인생관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생활방식을 지향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젊어서 『양반전』을 비롯한 9편의 소설을 통해 사회의 불합리한 측면을 풍자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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