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어제 중앙대학에서 특강한 내용입니다.
진실은 사실의 왜곡이다
자서전을 읽노라면, 그것이 간디의 자서전이든 누구의 자서전이든, 심지어 루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이더라도 사실이 다소나마 왜곡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은 사건의 발생이다.
사건에 동기가 있기 마련인데 자서전이나 참회록은 훗날 반성적인 태도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동기와 그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기술이라서 원래의 동기와 의미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긴다.
원래의 동기와 의미를 고스란히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자각으로 과거를 돌아보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사실로 왜곡하게 된다.
사실이란 그때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외에는 시사하는 바가 별로 없다.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그 늙은이와 함께 오래 살아온 사람이 옆에서 듣노라면 사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늙은이가 자신의 부끄러운 이야기는 대부분 생략하고 떳떳한 이야기는 부풀려서 미화시킨다는 걸 알게 된다.
늙은이는 살아온 이야기를 젊은이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반성적이면서도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그 늙은이와 함께 오래 살아온 사람은 안다.
그리고 늙은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과거의 사건들이 사실이라면 그것들을 회고하면서 반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실이다.
진실은 사실에서 얻은 교훈이다.
과거를 미화시킴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이는 간디의 자서전이나, 루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서도 발견된다.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날조와는 다르다. 날조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거짓으로 꾸밈’이란 뜻이다.
왜곡은 ‘사실과 다르게 곱새김’이라고 국어사전에 정의되어 있는데, ‘곱새기다’란 말은 ‘되풀이하여 곰곰이 생각하다’ 혹은 ‘남의 말이나 행동을 그 본의대로 생각하지 않고 좋지 않게 꼬아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달리 말하면 ‘곡해하다’라는 뜻이다.
왜곡은 영어로 distortion으로 ‘일그러뜨림’이며 동사로 사용할 경우 ‘찡그리다’, ‘비틀다’ 혹은 ‘곱새기다’라는 뜻이다.
1930년대에 많은 미술 평론가들 사이에서 왜곡에 대한 반감이 격렬하게 일어났지만 1950년대에는 거의 사라졌다.
반감은 재현적 미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외부세계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이라는 암묵적인 동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 이런 시각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왜곡이 순전히 환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될 경우 거부감은 거의 없다.
추상과 왜곡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추상은 불완전한 서술, 혹은 ‘불완전한’ 정보의 제공인 데 비해 왜곡은 ‘부정확한’ 정보의 제공을 의미한다.
왜곡은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사실에서 보면 곡해하고 곱새기는 것이지만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필히 사실에서 멀어져야만 한다.
왜곡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곧 예술을 즐기는 것이며 또한 진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곡으로 인해 예술이 복잡해졌다.
정직하지 못한 예술가들에 의해 진실인 양 날조하는 경우가 허다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날조와 왜곡을 구별하는 안목을 가져야만 한다.
날조와 왜곡을 가리는 것은 작품에 대한 분석으로 가능하다.
교활한 예술가의 수준 높은 속임수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서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날조인지 왜곡인지 가릴 수 있다.
서술적 의미란 어의적 의미semantic meaning를 말한다.
작품은 반드시 설명되어져야 하며 설명되지 않는 작품은 일단 작품의 가능성에서 유보되어야 한다.
그것은 아직은 작품이 아닌 것이다.
사실과는 다르지만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마네 146 마네,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1867~68), 유화 252-305cm.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의 대공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한 사건이 파리에 알려진 것은 1867년 7월 1일이었다.
<르 피가로>가 7월 8일자로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상세하게 보도했다.
공화주의자인 에두아르 마네는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폭로하겠다는 결심으로 황제의 처형 장면을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란 제목으로 그렸는데 고야의 영향이었다.(마네 145)
마네는 고야가 1814년에 그린 <1808년 5월 3일>과 마찬가지로 총구를 겨누며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을 오른편에 배치하고 상형당하는 사람들을 왼편에 구성했다.
마네의 작품의 특이한 점은 총살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시위한 것으로 마네는 황제의 처사에 매우 분노했다.
그는 작품에 황제가 처형된 날자 6월 19일을 적어 넣었다.
요제프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1832~67)
막시밀리안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이다.
나폴레옹 3세의 강요로 1864년 4월에 합스부르크 가(1276~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왕가)의 왕자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독립군에게 맞설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채 멕시코 황제에 즉위했다.
1867년 2월, 막시밀리안이 집권한 지 3년도 채 안 되어 나폴레옹 3세는 10년 이상 멕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군대를 멕시코에서 모두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과의 약속을 깨고 그를 구출하지 않았으므로 막시밀리안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베니토 후아레즈가 주도하는 과격한 멕시코 게릴라들이 막시밀리안과 휘하의 장군들 미구엘 미라몽, 토마스 메지아를 체포했다.
후아레즈는 1867년 6월 19일에 멕시코시티 북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쿠에레타로 근처에서 그들 모두를 처형했다.
인디언 고아 출신의 후아레즈는 동란 후 1861년부터 대통령의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1867년 3월 모든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에서 철수했다.
막시밀리안은 아내를 파리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며 5월 15일 쿠에레타로가 점령당하자 항복했다.
후아레즈는 집권 당시 법을 제정했는데 외국 군대를 멕시코로 끌어들이는 어떤 행위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총살형 집행장에서 여섯 명의 군인에 의해 처형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충분한 방어능력을 갖추지 못한 그를 멕시코로 추방한 결과 벌어진 사건이었다.
처녀의 개념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클레 59 클레, <나무 위에 있는 처녀>(1903)
파울 클레는 깡마르고 못생긴 여인이 죽은 나무의 앙상한 가지 위에 벌거벗은 몸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을 그린 후 아내 릴리에게 “진실을 제시하게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처녀성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에 반발한 작품이다.
처녀성은 왜 지켜져야 하며 왜 찬양받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처녀성을 찬양하지만 정작 처녀는 소외되고 몸이 말라비틀어진 모습이며 이것이 처녀의 참모습이라고 클레는 시각적으로 시위했다.
그는 진실을 제시하게 위해 왜곡할 수밖에 없었다.
다비드 205 다비드,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넘는 보나파르트>(1800~01), 유화, 271-232cm
나폴레옹이 2차 이탈리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그의 초상을 그리고 싶다며 포즈를 취해줄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거절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대 그리스 화가 아펠레스Apelles에게 포즈를 취해주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활동한 아펠레스의 현존하는 작품은 없지만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알려졌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화가였던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마렝고에서 사용한 부츠, 뿔 모양으로 생긴 모자, 장식이 달린 유니폼, 칼 등을 아들 또는 제자 프랑수아 제라르로 하여금 사용하게 해 나폴레옹을 대신한 모습으로 그렸다.
나폴레옹의 모자를 써 보니 그의 머리가 자신의 것보다 크다는 걸 알았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전투지에서 칼을 높이 쳐든 모습을 그리려고 했는데, 나폴레옹이 전쟁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면서 사나운 말 위에 침착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라고 주문했다.
다비드는 주문에 응해 그가 말을 타고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넘는 모습을 그리기로 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승리를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화면 왼쪽 하단 바위에 나폴레옹의 이름과 함께 한니발과 샤를마뉴의 이름을 적어 넣었는데 알프스 너머에 살던 두 사람은 나폴레옹에 앞서 이 험준한 알프스를 넘은 정복자들이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왕(768~814년 재위)으로 ‘유럽의 어버이 왕’으로 불리었다.
샤를마뉴는 로마제국 멸망 후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 및 브리튼 제도를 제외한 서유럽 대부분 지역을 통일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묘사한 것처럼 거창하게 알프스를 넘지 않았다.
부하들이 이미 알프스를 넘은 며칠 후 말이 아닌 노새를 타고 협소한 길을 따라 넘었다.(다비드 204)
훗날 1848년 폴 들라로셰가 그린 그림이 사실에 가깝다.
이탈리아에서의 위급한 상황으로 나폴레옹은 군대를 최대한 신속하게 전투지로 보내야 할 처지였다.
그는 지름길이지만 가장 험난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방법을 선택했다.
1800년 5월 14일부터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넘는 이 대담한 작전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방해를 피해 이탈리아로 갈 수 있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탄 것은 말이 아니라 노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