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박물관
러시아와의 전쟁을 종결시킨 일본은 이토伊藤博文를 조선에 파견하여 식민지화작업을 추진했다.
이토는 1905년 11월 일본군을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을사5적 이완용(1858~1926),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형과 야합하여 을사조약을 체결시켰다.
통감부 설치와 조선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의 체결로 조선 정부는 대외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통감부의 통제를 받게 되어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민영환은 굴욕적인 조약에 항거하여 마침내 자결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잘 말해준다.
민영환이 자결한 이듬해 봄 그가 거처하던 사랑채 댓돌 밑에서 푸른 대나무 한 그루가 솟아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대나무가 만영환의 원통한 넋이 환생한 것이라고 떠들어댔고 마침내 그 대나무를 ‘혈죽血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소문을 들은 안중식이 현장으로 달려가 대나무를 그려서 민영환의 넋을 기렸다.
그러나 안중식의 <혈죽도>는 현존하지 않는다.
<혈죽도>를 그려 충신의 넋을 기린 안중식은 자신의 안일을 위해 나중에 친일파의 거두인 이완용에게 아부하면서 그에게 붕새를 그려 바치는 비열함을 보였다. 당대의 화단을 대표하는 그가 매국노와 손을 잡았으므로 훗날 젊은 김은호를 천거하여 궁중벽화와 어진을 그리게 할 수 있었다.
이왕가 박물관
190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이 이왕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박물관은 1915년 일제 총독부에 의해서 설립된 박물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박물관의 양대 축을 이루었다.
이왕가 박물관은 창경궁 일관에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설립되었으며 명정전 일대를 전시실로 삼아 1909년 11월 1일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공식 기록 『이왕가 박물관 소장풍 사진첩』에 의하면 순종이 명하여 박물관을 일반에게 관람하게 했다.
박물관 제도는 개항기에 일본을 통해 주로 소개되었는데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알려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박정양의 글에서 박물관 제도에 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박정양 일행이 파견된 그 해 일본에서는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박정양은 내무성과 농상무성을 둘러보고 쓴 보고서 『일본국 내무성 직장사무부 농상무성』에서 박물관 제도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박물국은 박물관 사무를 관리하며 천산天産, 인조人造, 고기금물古器今物을 수집하여 견문을 넓히므로 박물국이라 한다”고 전제한 후 “각국 소산을 진열하지 않는 것이 없어 이로써 인민을 가르치는 자료로 삼는다”고 하여 박물관의 사회적 기능을 지적했다.
박물관을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이해한 예를 1888년 박영효가 올린 ‘박영효 건백서建白書’에서 알 수 있다.
박영효는 자신과 함께 소위 급진개화파로 불리운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김윤식(1835~1922) 등과 함께 무장 정변을 준비하여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 축하연 대 자체 무장력과 일본군을 동원해 민씨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3일만에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중 1888년에 올린 개혁 상소에서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와 근대적인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가운데 교육 및 학술문화 정책의 하나로 박물관을 설립할 것을 들었다.
『승정원일기』 융희 2년(1908)에 의하면 1908년 3월 7일 시모고리야마 세이이치下郡山誠一를 주임대우로 박물관 조사사무를 맡긴 것이 박물관 사무의 시작이었다.
이어 5월 29일에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態彦를 주임대우로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서무 및 회계를 맡겼으며 6월 18일 유한용에게 판임대우로, 7월 15일에 야야베 시게루野野部茂에게 박물관 사무를 맡겼다.
『승정원일기』 융희 1년에 의하면 유한용은 1907년 9월 3일에 육군 부령으로서 무관직을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 직원의 고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 박물관 설립의 의의나 목적은 적혀 있지 않았다.
1912년에 발간된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 사진첩』에 당시 이왕직 차관이었던 고미야 사보마쯔小宮三保松가 쓴 서문에 박물관의 설립 의도가 기술되어 있다.
명치 40년의 겨울, 한국 황제 즉 현금 이왕 전하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별거하는 준비를 할 때 창덕궁 수선공사를 하면서 나는 그 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11월 4일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씨 및 궁내부대신 이윤용씨가 “황제께서 무료해하실 것을 달래 드릴 오락이 없겠는가” 하고 물어서, 동·식물원과 박물관 창설을 제의하고 계획의 대략을 설명하니 크게 기뻐하면서 찬성하여 건물의 설계, 물건의 수집에 착수해서 41년 9월 관장할 부국이 되는 어원사무국도 신설하였다.
그러나 고미야의 회고와는 달리 어원사무국 관제는 1908년 8월 13일에 반포되었다.
고미야의 회고에 의하면 박물관은 순종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한 오락으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발의자는 바로 고미야 자신이었다.
순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여파로 강제 양위당한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등극했지만 일본 통감부의 의도대로 고종과 격리되도록 그 해 11월 13일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고미야의 글에서 확인되듯 동·식물원과 박물관의 설립은 창덕궁 수선공사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의되었다.
11월 4일에 논의를 받고 이틀 후 계획을 제의한 것이다.
일본이 근대 국가 체제 구축의 한 제도로 박물관을 설립한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실세를 잃은 황제의 위안거리로 설됩되었다.